"병원은 가봤어? 약 먹고 한숨 자."
가벼운 안부인사지만 역류성식도염을 달고 사는 친구에겐 괜히 조심스럽다. 밤에는 물도 조심해서 마신다는데 알약을 삼키려면 물을 마셔야 한다. 괜한 소리를 했나 싶어 검색어를 조합해 보아도 명쾌한 답을 찾기 어렵다. 되려 감기약에도 졸음을 유발하는 성분이 따로 있고, 눕는 방향에 따라 약물을 흡수하는 속도가 다르다는 정보만 조각조각 쌓인다. 졸음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나 느리게 흡수된 약이 위출혈을 일으킨다는 경고성 기사는 머릿속을 더욱 어지럽힌다. 감기약이 이렇게 위험한 약물이라니. 하지만 친구는 기댈 곳만 있으면 숙면이 가능한 뚜벅이니까 괜찮겠지 싶다. 흔히 약물의 부작용이라고 하면 먼저 성, 연령, 체중, 호르몬을 떠올리기 쉽다. 기존 연구들도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살아서, 체지방률이 높아서, 월경이나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 변동이 심해서 부작용을 경험할 확률이 높다고 설명해 왔다. 하지만 우리가 약물부작용을 경험하기까지 과정은 훨씬 사회적이다. 일단 약을 구해서 먹어야 한다. 앓고 있는 증상을 의사와 약사에게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곤혹스러운 누군가에겐 가장 큰 진입장벽이다. 처방을 받아도 지역에 따라, 질병에 따라 재고가 없거나 배송을 받아야 한다. 기껏 약봉투를 받더라도 식탁 위에 던져둔 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졸음이나 미열 같은 부작용쯤이야 온열장판과 극세사이불이 있다면 두려울 게 없다. 치료가 필요한 심각한 부작용도 병원을 찾아가는 것 외에 다른 대응은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한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의약품이상사례보고체계가 생소한 이유다. 오늘 소개할 연구에서는 약물부작용의 성차가 여성과 남성 간 젠더적 경로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국제학술지 <사회과학과 의학>에 실린 이 연구에서 정체성, 사회구조, 권력관계를 포괄하는 젠더 개념이 자료를 해석하는 데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살펴보자.(☞ 바로 가기 : ) 앞서 설명한 대로 국가에서 운영하는 이상사례보고체계까지 정보가 수집되려면 적어도 네 가지 단계를 모두 거쳐야 한다. 첫째, 약이 필요할 만큼 아픔을 느낀다. 둘째, 의사의 처방을 받거나 약국에서 약을 산다. 셋째,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경험했음을 인지한다. 넷째, 본인이 직접 신고하거나 의료인 혹은 제약회사가 보고한다. 그래서 의약품 이상사례에 관한 자료는 여성과 남성이 의료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편견과 차별에 마주치고, 주관적으로 인식하여, 취약성에 반응하는 경로를 따라 성별에 따른 차이를 내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연구자들이 설명하고자 하는 젠더 가설이다. 이 가설을 검증하고자 미국 식품의약국(U.S. Food and Drug Administration, 이하 FDA)의 의약품이상사례보고시스템(FAERS)에서 수집한 2014년부터 2022년까지 자료를 분석했다. 분석대상은 약 11조 명의 사람들에게서 보고된 33조 건이 넘는 이상사례였다. 의료를 이용하는 과정의 젠더적 경로 차이는 여성과 남성 각자에게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과 그에 따른 태도에 출발한다. 미국에서도 여성들에겐 자기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돌볼 책임이 있다. 입술에 혈색이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미열로 조퇴한 아이를 데리러 가고, 부모님의 건강검진 결과를 챙긴다. 나와 가족을 돌보는 일은 긴장의 연속이다. 매일 매 순간 질병과 약물에 의한 신체적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게 자연스러워진다. 이러한 여성들의 적극적인 태도는 전체의 60%를 차지하는 높은 부작용 보고 비율과 평균 2개 이상의 부작용을 보고하는 경향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여성들은 곧 뿌리 깊은 의료체계의 장벽에 부딪힌다. 진통제 처방, ADHD 진단, 심장혈관계 질환의 치사율을 다룬 임상 연구들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드러냈다. 여성의 통증은 정신적 문제로 취급받거나, 남성과 증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훨씬 대수롭지 않고 별것 아니게 여겨져 왔다. 전체의 4%에 해당하는 의료인에 의한 보고 중에서 여성의 사례는 57%였다. 누가 보고하느냐에 따라 성별 격차가 줄어든 것이다. 나아가 의료인이 보고한 사례별 평균 부작용의 개수에서는 성별 격차(여성: 1.81개, 남: 1.83개)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남성들에게도 고충은 있다. 남성성을 탐구한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진짜 사나이'라는 규범 탓에 남성들은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길 피한다. 아파도 안 아픈 척 '괜찮아', '나중에', '이쯤이야'라며 병원 방문을 지체하거나 의사의 질문을 회피할수록 처방과 치료는 미뤄지기 마련이다. 소극적이다 못해 참을 만큼 참아보겠다고 버티는 건 위험하다. 남성의 비율이 더 높은 단 하나의 부작용이 바로 사망이기 때문이다. 가장 흔하다는 20가지 부작용 중에서 남성이 더 많이 보고된 부작용이 사망뿐이라니. '이 정도론 안 죽어'라고 웃어넘길 때가 아니다. 부작용이라고 다 똑같진 않을 테니 심각한 수준의 부작용만 추려보면 어떨까. 심각한 부작용을 모두 합치면, 전체에서 남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71%로 높아진다. 하지만 상위 20개의 심각한 부작용 중에서도 남성의 비율이 높은 유형은 약물의존(59%)과 사망(53%)뿐이었다. 반면 심각한 부작용을 직접 보고한 환자 중 여성의 비율은 60%, 의료인이 보고한 여성의 비율은 52%였다. 이처럼 개인의 주관적 의식과 의료인의 편견과 차별은 젠더적 경로를 따라 충돌하기도 한다. 여성적, 남성적 매력과 관련된 부작용의 성별 격차는 더욱 극명하다. 피부에 여드름이 올라오거나 체중이 늘어날 수 있는 부작용은 여성적인 매력을 반감시킨다. 그래서 만 건 이상 보고된 부작용 중에서 머리카락, 피부, 체중처럼 외적 매력에 관련된 부작용은 여성의 비율이 높았다. 특이한 점이라면, '체중증가'와 구분되는 소수의 '비정상적 체중증가'만 남성의 보고 비율이 87%로 높았다는 것이다. 남성들도 이성에게 매력적인 모습은 중요하다. 다만 외형보다 중요한 것이 따로 있을 뿐. 발기부전은 만 건 이상 보고된 유일한 성기능 관련 부작용으로, 남성의 보고 비율이 99.6%를 차지한다. 그 외에도 남성들은 성기능부전(77.2%), 성욕감소(65.7%), 성욕상실(52.8%) 등 성기능에 관한 부작용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여성들이 비뇨생식기관의 분비물, 작열감, 통증처럼 일상생활 중에 느낄 수 있는 불편함을 보고한 것과 대조적이다. 연구진은 진정한 남성이 되기 위한 관문이자, 여성에겐 수치심을 유발하는 성에 대한 사회의 이중적 태도가 개개인이 부작용을 인식하고 대응하는데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동안 약물부작용은 임상적 영역에서, 유전체와 세포와 호르몬의 영역에서 다뤄졌다. 하지만 유전학적 비밀을 풀고, 의학 기술이 발전하는 시간만큼 사회적 관계와 의료체계도 변화해 왔다. 어떤 화학물질은 공장에서 보호장구 하나 없이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혈액암으로 이어졌고, 어떤 신약은 너무 비싸 구매할 돈이 없는 부모를 좌절하게 했다. 의도하지 않은 약물의 효과로 막대한 부를 창출한 제약회사도, 노골적인 차별에 맞서는 의료인과 환자 단체도 있다. 이 때문에 의약품을 포함한 모든 의료체계의 구성요소와 그것들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실험실 안에서 평가될 수 없다. 생리학과 약리학이 답해줄 수 없는 성별 차이에 대한 해석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젠더화된 경로를 따라 새겨진 성별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서지 정보 - Lee, K. M., Rushovich, T., Gompers, A., Boulicault, M., Worthington, S., Lockhart, J. W., & Richardson, S. S. (2023). A gender hypothesis of sex disparities in adverse drug events. Social Science & Medicine, 116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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