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형식을 바꾸는 정치, 정치의 주제를 바꾸는 정치
사실 겉만 보면, 대한민국만큼 정치적인 사회가 또 있을까 싶다. 대장동이나 대통령 영부인 관련 의혹을 둘러싼 공방은 사뭇 치열하기만 하며, 그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특별검사 임명에 대해 단호히 거부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의 모습 역시 참으로 거칠고 모난 정치의 별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겉으로 이렇게 치열하게 싸운다고 하여 한국 정치가 정말 '치열하다'는 말에 어울리는 내용을 담고 있을까? 2024년의 지구에서 2년 넘게 야당 대표나 대통령 영부인 의혹을 놓고 지루한 공방만 계속하는 정치를 '치열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작 치열하게 다뤄야 할 엄청난 쟁점들, 가령 기후위기, 불평등위기, 돌봄위기, 전쟁위기 등등(대통령 자신이 광복절 기념사에서 '복합위기'라며 언급한)은 전혀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는 정치에 '치열한'이라는 형용사는 과분하다. 지금 한국 정치는 양대 정당 간 권력 다툼이라는 회로 안에 갇혀 있다. 이 회로에 갇혀 복합위기나 다중재난이라는 현실과 대면하거나 접촉하지 못하고 있다. 극단적인 진영 대결은 이런 현실과는 아무 연관도 없으며, 단지 정치를 기존 회로에 계속 철저히 가두기 위한 구심력으로 작동한다. 더 큰 문제는 시민들 자신이 이렇게 기존 회로에 갇힌 정치를 '유일한' 정치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민들 역시 기존 회로를 넘어서지 못하는 선택에 머물거나 아니면 정치 자체를 포기, 회피하는 형편이다. 총선을 앞두고 '현 정부 탄핵' 아니면 '사수'가 다른 모든 쟁점을 가리는 선택지로 부상하는 상황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만이 정치의 '유일한' 형식이나 내용은 아니다. 이 대목에서, 정치의 두 가지 층위를 나누는 미국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다음 같은 논의는 우리에게 상당한 시사를 던져준다."자본주의가 우리를 위해 우리 등 뒤에서 결정해 온 것을 이제는 우리가 집단적인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해 결정해야 한다. 말하자면, 법률 이론가들이 '영역 재설정'이라 부르는 것, 즉 사회의 무대들을 구획하고 각 무대 안에 무엇을 포함시킬지 결정하는 경계선의 재설정에 우리 스스로 참여해야 한다. 이 과정은 '메타 정치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정치 공간(일차적 정치)을 민주적으로 구성하는, '영역 재설정'의 정치적 과정(이차적 정치)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어떤 사안을 정치적인 문제로 다룰 것인지, 어떤 정치적 무대에서 다룰 것인지를 스스로 정치적으로 결정할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 장석준 옮김,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서해문집, 280-281)
프레이저는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 말고도 또 다른 층위의 정치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정치가 다룰 내용과, 정치가 그런 내용을 다루는 형식을 정하는 정치다. 말하자면 정치의 중심과 경계를 설정하는 정치다. 프레이저는 이를 ('이차적 정치'라고도 하고) '메타 정치'라고 부른다. 프레이저가 강조하듯이, 신자유주의 시대가 저물면서도 이를 대체할 새 시대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지금 같은 시기에는 정치의 이런 숨겨진 층위야말로 중요해진다. 어느 나라든 현실 정치가 새 시대를 앞당길 쟁점보다는 이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쟁점에만 골몰하며, 새 시대를 열 결정을 내리기 힘든 지난 시대의 관성과 타성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은 그 중에서도 극단적인 사례다. 이런 시기일수록 메타 정치가 다시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해야 한다. 프레이저가 말하는 "어떤 사안을 정치적인 문제로 다룰 것인지, 어떤 정치적 무대에서 다룰 것인지를 … 결정"하는 정치가 작동해야 한다. 이것을 좀 더 풀어 말하면, '정치의 형식을 다시 정하는 정치', '정치의 주제를 새롭게 정하는 정치'다. 정치의 주제를 새롭게 정한다는 것은 신자유주의 시기에 '정치'를 통해 해결될 수 없는, 즉 '시장'의 독점적 지배 영역으로 치부됐던 문제들(가령 기후위기나 불평등위기의 해결과 관련된 문제들)을 정치 의제로 올린다는 뜻이다. 아니, 단순히 의제 목록 안에 올리는 수준이 아니라 중심 의제로까지 만든다는 것이다. 한국이라면, 국민 중 단 두 사람, 이재명, 김건희를 공격하거나 수호하는 일이 아니라 복합위기에 직면한 5000만 명의 실제 삶을 지키는 일을 핵심 의제로 부각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정치의 형식을 다시 정한다는 것은 새로운 의제가 제기되고 중심 쟁점이 될 수 있도록 정치의 틀 자체를 새로 짠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틀'이란 정치 제도일 수도 있고, 정당 지형일 수도 있으며, 더 큰 구조로서 정치사회-시민사회의 관계 양상(언론, 사회운동, 각종 결사체의 지형 등등)일 수도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무엇보다 양대 정당 독점 정치의 지반이 되는 제6공화국 헌정 체제의 각종 제도를 바꾸는 일이 여기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메타 정치야말로 어떻게 보면 21세기에 어울리게 변화된 '혁명' 개념일 수 있다. 19세기-20세기식 혁명이 이미 먼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린 현재, 그럼에도 신자유주의 질서를 넘어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힘겨운 과제를 수행해야만 하는 현재에 과거 '혁명'에 대응하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메타 정치의 생기 넘친 작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정치, 즉 메타 정치와 정치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일 것이다. 오늘날 '급진적'이라는 말에 값하는 정치란 바로 이런 정치다. 따라서 메타 정치의 부재를 바탕으로 닫힌 회로 안을 맴도는 현재 한국 정치는 '과격'한 정치일 수는 있어도 급진 정치일 수는 없다.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급진 정치는 위기와 퇴행 일로에 있는 한국 정치에 유일하게 남은 구원의 출구다개헌은 형식일 뿐, 진짜 중요한 것은 '메타 정치'
정의당은 새해 첫 일성으로 "제6공화국을 넘어 제7공화국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국회의 국무총리 추천, 대통령 결선투표, 각급 선거의 비례성 강화, 시민 직접 참여민주주의의 활성화 등등을 포함한 개헌을 제창했다. 현행 헌법의 대폭 개정을 주창하는 정치세력은 정의당만이 아니다. 제3지대를 자처하는 '새로운 선택'도 출범과 함께 개헌을 제기했고, 양대 정당 중 한 쪽인 더불어민주당 역시 내용은 달라도 줄곧 개헌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현 제6공화국 정치 질서의 심대한 변화를 위해 개헌은 꼭 필요하지만, 개헌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적 과제 중 한 계기이지 그 전부는 아니다. 앞에서 검토한 논의에 따르면, 진짜 필요한 것은 정치의 형식을 다시 정하는 정치, 정치의 주제를 새로 정하는 정치, 즉 메타 정치다. 개헌론-개헌운동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런 메타 정치를 표현하기 위한 한 방식이다. 제6공화국 극복과 제7공화국 건설을 주장하는 정치 세력은 스스로 이 점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제창하는 개헌론-개헌운동이 제6공화국 질서를 오히려 연장시키려는 편협한 개헌 논의에 포획되거나 그런 수준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다. 어찌 보면 요점은 진보정당운동이 그 동안 해야만 했지만 잘 못했던 바로 그 정치, 즉 정치를 바꾸는 정치에 다시 착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이는 현재의 좁은 정치 바깥에 있는 주체들을 정치 무대에 '난입'시키는, 즉 정치와 시민사회, 대중운동의 통로를 새로 열려는 노력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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