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아이슬란드 여성파업을 두고 한국 언론은 환호했습니다. 차별과 폭력, 저임금과 착취에서 벗어나려 한 아이슬란드 여성들의 파업은 성별임금격차를 비롯한 성차별을 개선하는 힘이었습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말을 정책으로 구체화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는 여성노동자들의 자리마저 삭제하려 합니다. 여성노동자들이 싸워 쟁취한 성과마저 지우려합니다. 이에 한국에서도 2024년 3월 8일 여성의 날을 여성파업으로 돌파하고자 합니다. 29개의 단체와 노조가 모여 2024여성파업조직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연재 기고 '역행하는 시대, 우리가 멈춘다'는 2024여성파업의 의미와 현재에 대해 말합니다.
교내에서 집회를 연 청소·경비 노동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걸었던 연세대학교 재학생이 지난 2월 6일 패소했다. 제소 당시 학생의 정당한 권리 행사라는 입장과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문제 제기라는 입장 간의 논쟁이 학생 사회를 반으로 갈라놓은 이후 2년 만의 결과다. 본 소송에서 노동자 법률 대리를 맡은 공공운수노조 법률원 변호사는 "법원 판결은 공동체에 대한 연대 의식 없이 오로지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확인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 소송은 무려 학생이 교내 청소·경비 노동자의 정당한 집회를 까닭으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학생 사회의 우경화를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로 쓰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시가 아니더라도 캠퍼스 우경화가 심각한 사회 현상으로 부상한 지는 오래다. '요즘도 이런 걸 하네', '학생운동은 이제 망했지' 같은 표현은 오늘날 학교에 거점을 둔 학생 활동가라면 심심찮게 들어본 말일 것이다. 연세대 한복판에 놓인 이한열 열사의 기념비를 본다. 그렇다면 학생운동의 전성기였던 70~80년대를 지나 2024년에 이르기까지. 한국 학생 사회는 50년간 돌이킬 수 없게 급변한 것일까. 단순히 그때는 되었고 지금은 안 된다는 말만이 좁아져 가는 노학연대의 미래일까?'노동자보다 근로자가 좋아요' … 자본주의가 가르친 학생들
경남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및 창원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가 작년 12월에 발표한 '2023 경남 청소년 노동인권의식·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근로자보다 노동자라는 말에 불편을 느끼는 청소년은 전체 설문 응답자 455명 중 무려 45%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근로자라는 단어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노동자를 고용 관계의 단순 부품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꾸준히 문제가 제기되어온 표현이다. 이어 <서울신문>이 진행한 심층 면접에서 노동조합의 인식을 묻는 질문에 10대 면담자들은 "학생은 노동조합이라는 단어 자체를 얘기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사회가 금기시하고 있으니까요"라거나 "노조에 대해 잘 모르지만 갈등을 유발하고 싸우기만 하는 사람들이라는 어렴풋한 인상이 있다"라는 답을 내놓았다. 해당 매체가 전국 중·고교생과 학교 밖 청소년 등 57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청소년들은 노조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거나 싸우는(투쟁적) 이미지부터 떠오른다고 답했다. 학생 세대가 성장하는 동안 자본은 여러 도구를 사용해 이들에게 접근했다. 위와 같은 설문 결과 역시 노동자를 근로자로, 민주노조를 민노총으로 표기하는 등 자본의 언어를 학생들에게 전파해 온 언론의 성과다. 인터넷으로 상시 접근 가능해진 온라인 뉴스는 우리 사회의 객관을 가장하지만, 실은 지극히 자본 친화적인 관점에서만 사회 현상을 설명한다. 그 결과 이를 주기적으로 읽고 자신의 언어로 체화한 학생들은 결국 자본에 의해 선택된 이미지만을 받아들이게 되곤 한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효과 좋은 선전·선동이다. 중고등학교의 역사 교과서에서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과 87년 대투쟁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어쩌다 벌어진 일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노동운동의 승리와 성과가 희미해진 상황에서 자본은 학교라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국내 노동자 투쟁의 자취는 교과서에서 말끔히 사라지고, 러시아 혁명처럼 노동자 운동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해외 사례는 한두 줄로 축소되었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내용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고려하면, 학생 대중에게 '선택된 과학'의 제공은 치명적이다. 이들은 학창 시절 내내 교과서로는 한두 줄짜리 노동자 투쟁의 역사를, 뉴스로는 별다른 성과 없이 종료되는 파업이나 노조 간부 중 누가 연행되었다더라 하는 짧은 소식만을 접한다. 과거 노동자 계급의 훌륭한 동지였던 학생 대중은 오늘날 자기 자신이 노동자의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각종 학회나 동아리 활동으로 북적거리던 노학연대는 그 이름만 남아 날개뼈나 꼬리뼈와 같은 흔적 기관으로 전락했다. 그렇다면 앞선 질문을 다시 묻는다. 왜 그때는 되고 지금은 안 되는 것일까? 답은 명백하다. 책임은 요즘 학생이 아니라 지금 시대의 노동운동에 있다. 노동조합은 거리로 나온 노동자 대오를 통해 다른 세상을 향한 의지를 입증하지 못했고 날카로운 정치적 요구를 통해 보여주지 못했다. 노동조합은 일 년에 한 번 임금 협상을 위해서만 모이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강해진 요즘, 학생 대중은 노동자 계급을 선택해야 할 과학적 근거를 유실당했다.역행하는 시대, 돌파하는 투쟁 : 가자, 여성 파업
그러나 캠퍼스가 전에 없던 위기에 빠졌으니 포기하라는 쌀쌀맞은 진단 대신 다른 제안을 건네고자 한다. 아직 학생운동의 종말을 논하기엔 이르다. 노동자 운동의 실물이 사라졌다면 다시 건축하면 되고, 모든 노동자를 겨누는 정치적 요구가 부재했다면 기존의 요구가 조금 더 아래를 향하도록 다시 겨누면 될 일이다. 자본주의를 통해서는 모든 노동자가 억압받기 마련이지만 특히 여성 노동자는 일터에서의 노동과 가정에서의 노동 두 가지를 통해 이중으로 고난을 겪었다. 자본주의 안에서 새로운 몸을 얻은 가부장제는 가부장적 자본주의라는 합체로 대중 앞에 나섰다. 가사·돌봄 노동의 전가, 가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심화되는 비정규직화, 저임금화 등은 이제 여초 직군에서 거의 전통이 된 이야기다. 그러나 오히려 정부는 예산 삭감이나 임신 중지권 보장 축소처럼 더한 억압으로 여성 노동자를 억누르는 중이다. 이들은 노동 인구 재생산을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하고, 일터에서는 낮은 임금으로 장시간 일해야 하고, 집에서는 어디서도 카운트되지 않는 가사·돌봄 노동으로 허덕여야 하는 한국 여성 노동자의 근본적인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5년간 20대 여성 우울증 환자는 다른 집단보다 가장 높은 상승세를 보였다. '왜 그토록 우울한가' 같은 헤드라인으로 연일 뉴스를 뽑는 언론 역시 여성 노동자의 고통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다. 이들은 자본주의라는 핵심 원인에 기대어 연명하는 존재들인 탓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노동자 투쟁, 그중에서도 강력한 파업에서 찾아야 한다. 이미 아이슬란드, 스페인, 아르헨티나와 같은 여러 국가의 노동자들이 입증한 대답이다. 이들의 여성 파업은 세대와 젠더, 인종과 장애 여부를 초월하는 말 그대로의 계급 단결이었다. 물론 파업 대오에는 청년 학생층도 다수 섞여 있었다. 현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먼저 실물 대오를 조직하고, 남성 노동자들이 흔쾌히 이에 연대하자 청년 학생층까지 자연스레 파업의 깃발 아래 모인 것이다. 다가오는 2024 3.8 여성 파업의 5대 요구안은 △성별 임금 격차 해소 △돌봄 공공성 강화 △일하는 모두의 노동권 보장 △임신 중지에 건강보험 적용 유산 유도제 도입 △최저임금 인상 등이다. 물론 이번 파업만으로 실질적인 변화를 이루기엔 부족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해외 파업들처럼 단숨에 수많은 사람을 조직하지는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잦아든 캠퍼스 내 학생운동을 다시 일깨우기엔 충분한 목소리다. 모든 여성 노동자를 겨냥하는 뚜렷한 요구와 투쟁으로 우리가 여기 있음을 알리고, 학생들을 우리의 깃발 아래 모이게 만들자. 과거에 그랬듯 노동자 계급의 동맹을 찾아내는 첫걸음은 먼저 노동자의 강력한 파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감히 올해 3월 8일 펼쳐질 여성 파업이 바로 그러한 파업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