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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기후파국' 도래? '과업' 시작하기엔 차라리 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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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트럼프=기후파국' 도래? '과업' 시작하기엔 차라리 잘됐다

[장석준 칼럼] 애덤 그린필드, <생명의 집>을 읽고

요즘 가장 시끄러운 뉴스는 미국 대선 소식이다. 미국을 넘어 지구 전체가 떠들썩한 논란에 휩싸인 끝에 조 바이든 현 대통령이 민주당 대선 후보에서 물러났지만, 아직은 다들 도널드 트럼프의 우세를 점치는 분위기다. 제2기 트럼프 정부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트럼프 정부가 다시 들어선다면, 당장 한반도 정세를 놓고 생각이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니다. 기후위기 대응이 또 심각한 걱정거리다. 집권 중에 트럼프는 기후위기 자체를 부정하며 파리협약 탈퇴를 단행했고, 이로 인해 인류는 너무도 소중한 시간 4년을 허송세월했다. 지금도 트럼프는 유세 중에 '그린 뉴딜'을 '그린 뉴 스캠(Green New Scam, 새로운 녹색 사기)'이라 조롱하며 기후위기 대응을 뒤로 돌리겠다고 공언한다.

기후위기는 이미 과학자들의 예측을 훌쩍 뛰어넘는 속도로 악화하는 중인데, 인류는 다시 4년을 허비할 모양새다. 이렇게 되면, 탄소 배출량을 줄여가기만 하면 최악의 재앙은 피할 수 있다는, 마지막 남은 낙관적 시나리오마저 무참히 허물어질지 모른다. 불과 몇 년 뒤에 기후'위기'가 아니라 기후'파국'을 상수로 놓아야 하는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기후운동 내부의 논의와 실천도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기후운동에서 금기어였던 '기후위기 적응'이 이제는 보편적 의제로 받아들여진다. 기후위기를 부정하던 화석에너지 업체들이 뻔뻔스레 들이밀던 말이 어느덧 기후변화의 급진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우리 모두의 화두가 된 것이다. 기후재난에 적응해야만 한다니, 결국은 최종적 패배의 승인이 아닌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역설하는 이들이 있다. 기후위기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지구자본주의의 폐허를 넘어 더 나은 삶을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며, 더구나 권력자들의 각성이나 결단을 기다리지 않고도 보통사람들의 일상적 실천으로 이 과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달에 영어권에서 발간된 애덤 그린필드(Adam Greenfield)의 저작 <생명의 집: 불타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돌봄(Lifehouse: Taking Care of Ourselves in a World on Fire)>(Verso, 2024)은 이런 메시지를 아주 구체적인 실행 계획과 함께 전한다.

▲ 지난해 9월 5일 대전시 서구 만년동 한밭수목원에 기후위기시계가 설치돼 있다. 기후위기시계는 지구 평균 표면온도가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1.5도 높아지는 순간까지 남은 시간을 보여준다. 이 시간은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제6차 평가보고서를 토대로 산출된다. ⓒ연합뉴스

재난 속에 피어난 '상호 돌봄' 네트워크

저자 애덤 그린필드는 국내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저자인데, 이력이 특이하다. 본래 대학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했지만, 미 육군에서 5년간 정보 관련 업무를 맡은 뒤에 정보공학 전문가로 방향을 틀었다. 이후에는 미국과 영국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노키아 같은 대기업에서 사용자 인터페이스 설계를 책임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점차 정보통신기술과 도시 계획의 결합(나중에 '스마트 시티'로 알려지게 될)을 주된 관심 영역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린필드는 이런 주제로 영국의 일간 <가디언>에 칼럼을 쓰다 2017년에는 아예 단행본을 냈다. 당시만 해도 아직 많은 이에게 낯설었던 블록체인, 인공지능 등의 첨단 기술을 소개하고 더 나아가 이런 기술이 사회 진보에 기여하도록 만들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짚는 내용이었다. 제목은 "급진적 기술(Radical Technologies)"인데, 유명한 좌파 출판사 '버소(Verso)'에서 나왔다. 미 육군과 노키아에서 일한 정보공학 전문가가 급진좌파 저술가로 '급변'한 것이다.

그런 저자가 같은 출판사에서 두 번째로 낸 책 <생명의 집>은 처음부터 재난 이야기로 시작한다. 2012년 10월에 북미 대륙 동쪽 해안을 강타한 허리케인 샌디가 그 주인공이다. 카리브해 여러 국가를 덮친 뒤 미국에 상륙한 샌디는 미국에서만 총 158명의 사망자와 650억 달러의 피해를 초래했다. 뉴욕 등 대도시 곳곳이 물에 잠겼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며칠 간 계속된 단전 사태로 수백만 명이 고통 받았다. 이것은 느닷없는 참사만은 아니었다. 기후위기 탓에 카리브해 인근에서 점점 더 큰 규모로 발생하는 허리케인의 한 사례였다.

예상을 뛰어넘는 강풍과 폭우에 공식 재난 대응 기구들은 우왕좌왕했다. 연방정부, 주정부만이 아니라 적십자까지 힘에 부쳐 했다. 한데 이런 와중에도 발 빠르게 움직인 이들이 있었다. '오큐파이 샌디Occupy Sandy'라 불린 자발적 구호 조직이었다.

'샌디를 점거하라'니, 처음 봐서는 이 이름이 무슨 뜻일지 가늠이 안 된다. 하지만 1년 전 뉴욕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금융위기 원흉들에게 책임을 물으며 몇 개월 동안 계속된 점거시위 '오큐파이 월스트리트Occupy Wall Street'를 떠올려보면, 뭔가 연관관계가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실제로 '오큐파이 샌디'를 발의한 사람들은 '오큐파이 월스트리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들이다. 정부 조직과 적십자가 관료주의 탓에 허둥지둥 대자 이들은 점거시위 때 구축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신속히 사람들을 모았다. 처음에는 약 700명이 뉴욕에서 특히 피해가 큰 구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복구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뉴욕 전체에서 연인원 6만 명이 일손을 보탰다.

'오큐파이 샌디'가 주로 벌인 활동은 지역사회 안에 이재민 수용 시설을 확보하고 음식과 생활필수품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당국이 미처 손을 못 쓰던 30곳 이상의 대피소에서 하루 2만 명분의 식사를 준비했다. 또한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간 지 한 달쯤 지난 11월 말까지 70만 달러에 상당하는 물품을 이재민에게 배급했고, 이후에 배급한 구호품까지 다 합치면 총액이 130만 달러에 달했다. 이것은 '공식' 구호 단체인 적십자가 수행한 활동의 4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사실 '오큐파이 샌디'가 이렇게 발 빠르게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은 몇 년 전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2005년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루이지애나 주와 이 주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인 뉴올리언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기후변화로 인해 허리케인이 얼마나 무시무시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 거의 첫 사례였다. 그리고 이때도 당국의 대응은 굼뜨기만 했고, 어떤 이들은 이재민이 주로 흑인이라 그런 것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을 하기도 했다.

바로 이때 지역사회의 고참 사회운동가 세 사람이 자발적 구호 조직을 결성하자고 제안하고 나섰다. '커먼 그라운드 컬렉티브(Common Ground Collective)'라는 이름을 단 이 조직에 2만 8000명의 시민이 자원 활동가로 참여했다. 이들의 주된 활동 역시 이재민에게 대피소를 마련하고 생활필수품을 공급하는 일이었다. 이들은 이웃 텍사스 주에서 식수를 확보해 차로 날랐고, 대피소마다 자전거로 의약품을 전달했다. 허리케인 피해가 일정하게 복구될 때까지 몇 달 동안 이런 활동을 지속했다.

뉴올리언스 사례는 실은 리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정해영 옮김, 펜타그램, 2012)에도 소개돼 있다. 그린필드와 달리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저자인 솔닛은 이 책에서 대지진이나 9.11 테러 같은 재난이 뜻밖에도 그저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았음을 환기시킨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간 고립된 개인이기만 한 것 같았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결성해 재난에 대응했다는 것이다. 재난 경험 속에서 사람들은 기존 상식에 의문을 던지고 연대와 상호 부조를 통해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만들어나갔다.

그린필드는 "자선이 아니라 상호 부조"라는 '오큐파이 샌디'의 모토에서 솔닛이 말한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확인한다. '자선'은 권력과 부를 더 많이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게 선심을 쓴다는 수직적 관계를 전제하는 반면 '상호 부조'는 수평적 관계 속에서 서로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만큼 희망을 함께 열어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경험을 지닌 '오큐파이 샌디' 참여자들은 재난에 함께 맞서는 과정에서, 대개 국가 관료조직이나 대기업과 연관된 '자선'을 넘어선 '상호 부조'의 실체를 만들어냈다.

아니, 그린필드는 '상호 부조(mutual aid)'라는 말조차 뉴올리언스나 뉴욕의 경험을 온전히 전달하거나 앞으로 기후재난 속에서 다져가야 할 의미와 가치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그린필드가 내세우는 대안은 '상호 돌봄(mutual care)'이다. '상호 돌봄'은 표트르 크로포트킨 같은 고전 아나키스트 사상가가 썼던 '상호 부조'라는 말과 대립한다기보다는 이를 더 발전시킨 용어다. 기후위기에 적응하려는 전략이 지향해야 할 핵심 가치로, 저출생-초고령화 같은 인구구조 급변에 대응하는 노력을 관통하는 근본 가치로 떠오르는 '돌봄'이 재난에 맞선 시민들의 자발적 행동에서 꽃피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상호 <돌봄>'이라 한 것이다.

그린필드는 허리케인 카트리나보다 더 전에 이미 존재한 상호 돌봄 사례들을 찾아나가고 이런 경험들이 복합위기-다중재난의 시대에 어떤 대안이 될 수 있을지 탐색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친다. 그린필드가 찾아낸 상호 돌봄의 중요한 선례는 1960년대 블랙팬서당의 '생존(Survival)' 프로그램이다. 블랙팬서당은 흑인해방을 위해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선전하면서 동시에 흑인 지역사회의 생존을 위해 초등학생 아침 무료급식 프로그램, 무료민중의료센터 등을 운영했다. 실제로 '커먼 그라운드 컬렉티브'의 세 명의 발의자 중 한 사람은 과거 블랙팬서당 활동가였다.

미국 밖에서 등장한 보다 최근 사례도 있다. 2010년대 초 경제위기에 빠진 그리스에서 공식 의료제도 바깥으로 쫓겨난 이들을 위해 곳곳에 설립된, 블랙팬서당의 무료민중의료센터와 유사한 사회클리닉들이다.

그린필드는 이런 사례들을 흥미진진하게 훑다가 책 후반부에 가서는 이런 민중의 자발적 재난 대응 결사체가 사회 전체에 확산되면서 새로운 사회의 토대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을 타진한다. 이 작업에는 20세기 미국의 아나키스트이자 선구적 생태사상가 머레이 북친의 사상이 동원되고, 북친 사상을 실천하는 사례로 시리아 북동부에서 현재 진행 중인 쿠르드 노동자당의 로자바 혁명도 소개한다. 허리케인 피해 지역에서 시리아 내전의 전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재난의 현장에서 이렇게 그린필드는 '종말'만이 아닌 '새 출발'의 단서를 찾으려 한다.

'민중의 집'에서 '생명의 집'으로

그린필드는 대체로 중앙집권적 국가기구에 회의적이다. 그래서 민중 스스로 결성한 상호 돌봄 네트워크가 점차 현존 국가기구의 임무 중 상당 부분을 직접 해결해나가길 바란다. 또한 이런 상호 돌봄 네트워크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참여하여 결정하는 '총회(assembly)' 방식 민주주의가 작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친의 사상이 그랬듯이, 아나키즘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다.

이런 결론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현재의 국가 형태와 민주주의 방식이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에 아나키즘이나 리버테리언(자유를 강조하는) 사회주의가 주장하는 이상과 원칙이 담당해야 할 부분이 과거보다 훨씬 커졌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의 무시나 소거(消去)나 아니라, 민주적 국가와 시민사회 내 결사체들 사이의 새로운 균형이다.

이것은 팬데믹의 교훈이기도 하다. 팬데믹 와중에 우리는 시장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위기 대응력을 보여준 국가의 중요성도 확인했고, 국가와 시장이 비워놓은 광활한 영역을 채울 수 있는 자발적 시민 활동의 저력도 확인했다. 이 두 발견 중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고, 둘은 서로 꼭 대립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제로섬 관계도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제도배열을 대체할 민주적 국가-시민사회 내 결사체들의 새로운 결합체가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쟁점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집>의 결론은 필독의 값어치를 지닌다. 이 책 제목이기도 한 '생명의 집'이라는 구체적 제안 때문이다. 그린필드는 책 전체에 걸쳐 살펴본 재난 대응 결사체 사례들을 일반화하여 '생명의 집'이라는 실천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그 골자는, 도시의 각 구역마다(그린필드가 드는 미국식 도시 사례로는 세, 네 블록마다) 하나씩 시민들의 자발적 모금과 일상적 참여로 재난 대응 센터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린필드는 그곳에 태양광 발전 설비를 설치하면 어떤 상황에서든 지역 내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고 말한다. 혹은 농촌이나 도시 내 텃밭들과 자매결연을 맺고 먹을거리를 유통할 수도 있다. 혹은 개별 가구가 굳이 따로 사두지 않아도 좋도록 생활에 꼭 필요한 도구들을 비축해 생활용품 은행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또는 이웃끼리 쉽게 만나 토의하고 자녀 돌봄 같은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할 공간이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생명의 집'은 21세기판 '민중의 집'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 노동자들은 기존 제도가 채워주지 못하는 교육, 문화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곳곳에 '민중의 집'을 세웠고, 이것이 노동계급 공동체가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참고: 마거릿 콘, <래디컬 스페이스>[장문석 역, 삼천리, 2013]). 그러고 나서 100년 뒤 복합위기-다중재난 시대에 제도권이 채워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촘촘하고 사려 깊은 기후위기-돌봄위기 대응이다. '생명의 집'은 이 빈곳을 시민들 스스로 채워나간다는 기획이고,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낳은 고립되고 수동적인 삶의 형태까지 극복해나가겠다는 기획이다.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100년 전 유럽의 '민중의 집' 경험을 반복해보자는 여러 시도가 있었다(참고: 정경섭, <민중의 집>[레디앙, 2012]). 하지만 한 세기 전과는 너무도 달라진 문화 환경 탓에 이런 시도는 대개 실패하거나 정체 상태에 빠졌다.

그런데 이제는 기후재난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배경으로 '민중의 집'을 닮은 '생명의 집'과 같은 구상과 제안이 나오고 있다. 예사롭지 않은, 지구 위를 가로지르는 문제의식과 실천의 마주침이다. 방금 출간된, 영어로 쓰인 책을 이렇게 성급히 독자들께 소개하는 까닭이다.

▲ 애덤 그린필드 지음, <생명의 집>(2024) ⓒVer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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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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