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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갈등이 아니라 젠더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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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갈등이 아니라 젠더 폭력이다 [인권으로 읽는 세상] 디지털성범죄를 넘어, 젠더 폭력에 맞서는 평등과 연대로
9월 26일 국회는 딥페이크 성범죄물을 구매, 소지, 저장, 시청하거나 유포 목적이 입증되지 않은 제작 행위도 처벌하는 내용의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피해자들의 제보와 언론의 보도로 학교, 지역, 직종별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 문제가 알려진 지 한 달여만이다. 발빠르게 대처한 것처럼 보이지만 국회는 2020년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 제정 당시, 불법촬영물 외에도 허위영상물(딥페이크)을 성범죄물로 규정하고서도 '유포 목적이 입증된 제작행위'만 처벌하도록 했다. 오히려 지난 4년간 딥페이크 성범죄를 방치한 것이다. 뒤늦은 대응, 반복되는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땜질 처방식 대응이 갖는 한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소라넷 폐지부터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까지, 여성 대중운동이 만들어낸 변화

1999년 개설 이후 국내 최대 성착취물 사이트였던 소라넷에 맞선 여성들의 싸움이 2015년 시작되었다. '해외 서버라 수사가 어렵다'며 16년 동안 수사하지 않았던 경찰은 심상치 않은 여론에 전담팀을 꾸린지 6개월만에 소라넷 사이트를 폐쇄한다. 이는 여성 대중운동이 거둔 승리이면서 불법촬영 수사를 못한 게 아니라 안한 거라는 불신이 확인된 사건이기도 했다. 2018년 '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불편한 용기' 시위가 조직된다. 홍대 남성누드모델 사진을 유출한 여성이 12일만에 구속되자 분노한 여성들은 서울 혜화역으로 모여 '소라넷 폐쇄 17년, 홍대 검거 7일'을 외쳤다. '불편한 용기' 시위가 지속되던 2018년, 불법촬영물을 올려 돈을 버는 웹하드업체가 이를 삭제해준다며 다시 돈을 버는 '웹하드카르텔'의 존재를 폭로하고 싸움을 시작한 것도 여성들이었다. 디지털성착취-성범죄를 통해 이윤을 쌓는 성산업 구조가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웹사이트, 웹하드에 이어 가장 최신의 온라인 성착취-성범죄 플랫폼이 된 텔레그램 n번방까지. 여성들은 대중을 조직하고 여론을 움직였으며 정부와 사회의 변화를 추동했다. 구체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정부와 국회는 2017년 디지털성범죄 피해방지 정부종합대책, 2019년 웹하드 카르텔 방지대책, 2020년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까지, 뒷북일지언정 부지런히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폭력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성폭력‧성범죄에 대해 기존 법률에 조항을 추가하는 방식의 한계를 확인하게 된다. 온라인의 빠른 변화를 감안한다면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법의 사각지대는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디지털 성폭력은 온라인 내 모든 피해유형과 기술을 열거하는 방식으로는 대응할 수 없다. 이는 기존 법률이 온라인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젠더에 기반한 폭력'이 발생하는 구조와 관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기존 성폭력 범죄 개념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조각난 피해 경험과 권리

'n번방 방지법'이라고 알려진 2020년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은 제13조, 14조를 개정, 추가하여 통신매체, 카메라를 이용한 행위, 허위영상물 유포, 불법촬영물을 이용한 협박 등을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이때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제작되는 영상물은 '성적욕망과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촬영하거나 편집, 합성, 가공한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 문제는 '성적욕망과 수치심 유발'이라는 피해 구성요건이 온라인에서 여성들이 경험하는 젠더 폭력의 수많은 피해경험들을 누락시킨다는 것이다. 먼저 법률에 명시된 '성적욕망과 성적 수치심'은 남성의 위치에서 규정되어 여성에게 강요된다. 여성의 권리와 주체성은 삭제되기 때문에 여성이 겪는 젠더 폭력은 남성의 '성적욕망과 성적 수치심'에서는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피해자가 사회경험이 풍부한 60대 여성이기에 성적 수치심이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한 판결문의 구절이 정확히 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성적욕망과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라는 특정한 이미지에 결박된 법률은 이번 텔레그램 딥페이크와 같은 '젠더 폭력'의 맥락을 파악할 수 없다. 텔레그램에서 '지인 능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젠더 폭력은 피해자의 일상 사진과 신상정보를 정교하게 성관계 영상과 합성하는 딥페이크물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성관계 영상을 단순 나열하는 편집, 피해자의 이름이 제목으로 유포되는 성관계 영상, 피해자를 성적으로 낙인찍는 언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성적욕망과 수치심을 유발하는 신체'의 합성이 아니라, 이미지 배치를 통해 성적으로 '지인을 능욕'하는 맥락이다. 이러한 허위영상물, '지인 능욕'은 성적 만족이 아니라, 영상에 합성된 이들에 대한 모욕과 폭력을 통해 지배력을 확인하려는 욕구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 회사, 가족 등 '지인'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별이분법 아래 차별적으로 형성되는 성역할과 권력관계가 만들어 낸 '젠더에 기반한 폭력'의 문제라는 인식과 맥락의 확장이 필요하다.

디지털성범죄, 젠더 폭력의 결과

2020년 3월 'n번방 방지법'이라며 처음 통과된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에 불법촬영물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을 처벌하는 조항이 없었던 것 역시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젠더 폭력의 맥락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텔레그램 n번방을 통해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진 여성, 아동, 청소년에 대한 성착취물 제작과 유포가 드러났고, 한국 사회는 경악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착취가 가능했던 핵심 기제인 성착취 영상물 유포 협박에 대해서는 실제 유포되어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며 처벌하지 않은 것이다. 해당 개정안에 대한 비판 이후, 유포 협박에 대한 처벌조항이 추가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당시 제정된 허위영상물(딥페이크)처벌 조항 역시 유포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렇듯 불법촬영물, 합성물이 제작된다는 사실 자체, 이러한 영상물의 존재가 유포 협박의 도구가 되어 성착취와 성적모욕이 지속된다. 비록 여성들의 투쟁으로 처벌의 목록과 범위는 늘어났지만, 온오프라인에 걸쳐 여성들의 일상과 삶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스스로 찍었든, 합성된 영상물이든 여성의 이미지가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작동하는 사회에서 '어차피 가짜'라는 것은 위안이 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과 맥락이 여성에 대한 '온라인 젠더 폭력'을 구성한다. 디지털성범죄는 그 중 몇가지 장면과 사건, 행위를 '성범죄'로 지목하고 처벌하는 것이다. 디지털성범죄는 법제도를 넘어, '젠더 폭력'에 맞선 사회적 변화와 실천이 이어질 때 근절될 수 있다.

젠더 갈등이 아니라 젠더 폭력이다

소라넷, 웹하드카르텔, 텔레그램 n번방에 맞서 싸우며, 여성들은 이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남성들간의 일상적 온라인 놀이문화, 사소한 일탈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이자 범죄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는 성폭력처벌법 개정을 비롯해 디지털성범죄 대응과 관련한 구체적인 변화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만큼 '온라인 남성문화'는 달라졌을까?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폭력은 '온라인 남성문화'는 굳건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온라인에서 남성들은 불법촬영물에 대한 처벌과 단속이 강화되자 딥페이크로, 인터넷 방송으로 옮겨가며 '여성혐오' 행위를 독려하며 함께 '남성성'을 학습하고 생산하고 있다. 과거 사회적 관계망을 따라 제한적으로 형성되던 '폭력적 남성성'은 온라인을 통해 대규모로 극단적으로 증폭되며 확산되고 있다. 이는 특정 행위를 중심으로 디지털 성범죄를 단속처벌하는 대응이 갖는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젠더 폭력' 문제를 '젠더 갈등' 프레임으로 왜곡하면서 혐오와 폭력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사회적 흐름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교육부는 이번 딥페이크 허위영상물 예방 및 대응을 위한 교육자료를 배포하며, 첫번째 '교육시 당부사항'으로 특정 성별을 지정하여 피해자/가해자로 구분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디지털성범죄 처벌강화에 대해 남성일반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한다는 '여론'에 교육부가 적극 호응한 것이다. 오히려 교육부는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남성문화와 남성성에 대해서 정확히 비판하고 이 문제가 '젠더 갈등'이 아닌 '젠더 폭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페미니즘과 성평등으로 젠더 폭력에 맞서자

텔레그램 n번방이 던진 충격은 여성혐오와 성착취가 운영자 개인을 넘어 n번방 남성들의 적극적 '참여' 속에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많은 여성들에게, '여성'을 철저히 성적대상이자 착취대상으로 여기는 텔레그램 '남성들'의 인식과 태도는 '동등하고 평등한 시민'이라는 공동의 세계가 근본적으로 부정당하는 경험이었다. 그런 점에서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폭력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학교, 회사, 거주지역 등 일상을 함께 하는 남성지인의 딥페이크 성폭력은 'n번방'과는 또 다른 충격과 고통이다. '딥페이크 성폭력'은 평등하고 동등한 동료시민이자 친구, 동료, 가족의 자리에 '여성'이 없기 때문에 벌어진다. 그렇기에 '딥페이크 영상물'은 개별 행위의 문제를 넘어, 함께 이 세계를 살아가는 평등하고 존엄한 인간이라는 공통 감각을 부정하는 '폭력'이다. 그래서 '온라인 남성문화'와 '온라인 젠더 폭력'이 온라인에 그칠 문제인 것도, 온라인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디지털성범죄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규정되고, 이에 맞선 거대한 여성대중운동의 역사가 이미 이를 보여준다. 온라인을 바꾸기 위한 우리의 싸움은 동시에 '젠더 폭력'을 양산하는 사회를 바꾸기 위한 싸움이기도 해야 한다. 페미니즘과 성평등은 바로 이 싸움에서 우리가 함께 세워내야 하는 기치이다. 페미니즘은 '젠더 갈등'을 조장하는 주장이 아니다. 보편적 권리와 정의, 성평등을 향한 우리 모두의 싸움과 운동의 역사가 바로 페미니즘의 역사이다. '젠더 갈등'이라는 허구적 대립이 아닌, 평등과 존엄이라는 공동의 가치와 세계를 파괴하는 '젠더 폭력'에 페미니즘과 성평등으로 함께 맞서자.
▲여성혐오폭력규탄공동행동은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앞 도로에서 '딥페이크 성착취물 엄벌 촉구' 시위 벌이고 있다. 이날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5천여명이 참가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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