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9년 8월 8일 강남역 네거리 삼성해고노동자 김용희&이재용 농성장에서 진행한 강연에 기초한 글입니다. 그날 강연은 유튜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화이트리스트의 본질은 무엇인가?
9월 17일. 삼성 해고노동자인 김용희 선생이 교통CCTV 철탑 위에 올라간 지 100일째가 되었습니다. 김용희 선생은 1990년 삼성그룹 경남지역 노조 설립위원장이 된 이래, 부당전근과 직장 내 따돌림, 가족 괴롭힘, 납치, 폭행 등을 당하였고, 심지어 간첩 누명과 성추행 누명까지 쓰고 1991년에 해고되었습니다. 후에 삼성물산에 복직되었지만, 러시아에서 1년 근무 뒤 원직복직시켜주기로 한 약속을 삼성이 지키지 않아 95년에 다시 해고되었습니다. 김용희 선생은 그 후 24년째 복직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언론에는 한 달째 '조국' 법무부장관 얘기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직전에는 일본 아베 정부의 한국 '화이트리스트'(white list) 제외 사태가 있었습니다.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한 것에 대해서, 일본의 침체된 경기부양을 위한 조치라느니, 경제적으로 격차를 좁혀오는 한국에 대한 견제라느니, 자유무역 원칙을 훼손하는 부당한 조치라느니 식의 논평들이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징용공 판결을 빌미로 한 일본과 한국의 경제적 충돌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사태를 교묘하게 호도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가 무엇인지 조금만 살펴보면 그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화이트리스트는 '일본 첨단제품 수출 허가신청 면제국가'의 명단을 말하는데, 이 리스트에 포함된 국가에 대해서는 1100여 개 첨단제품의 수출 심사를 3년간 면제해 주어, 통상 90일 (혹은 그 이상)이 걸리는 수출 선적 절차를 1주일 내로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즉 개별 제품에 대해서 심사하지 않고 포괄적인 허가를 하여 우대해준다는 것입니다. 왜 우대해 주는 것일까요?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 들어있던 27개국의 명단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유럽이 21개국이고, 북미의 미국, 캐나다 2개국, 오세아니아의 호주, 뉴질랜드 2개국, 그리고 남미의 아르헨티나 1개국, 아시아에 한국 1개국입니다. 나라들을 일별해 보면 느낌이 딱 올 것입니다. 유럽과 북미, 오세아니아의 나라들, 모두 미국의 정치군사적 동맹국들입니다. 남미에 아르헨티나, 아시아에 한국, 각각 1개국이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일본의 입장에서 그 나라와의 무역이 중요한 나라의 리스트가 아닙니다. 아르헨티나의 집권 마크리 정부는 1916년 이래 쿠데타가 아닌 합법적 선거로 집권한 최초의 친미 우익 정권입니다. 차베스 이후 남미 전역에 퍼져있던 이른바 pink tide('좌파선회')를 역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라죠. 한국이 동아시아에서 갖는 정치군사적 지위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결국 화이트리스트는 ‘정치군사적’ 리스트인 것입니다.
일본의 표현으로 하면 화이트리스트는 '안전보장무역관리'(安全保障貿易管理)의 영역에 속합니다. 즉 화이트리스트는 그 나라에 전략적 물자를 수출해도 일본의 안보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정치군사적 우방국에 대해 무역상의 특혜를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꾸로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고 해서 한국과 무역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군사동맹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정해진 절차(90일)에 따라 개별 품목에 대해 수출 심사를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일본 경제산업성은 8월 8일 수출규제 품목으로 지정한 반도체 소재인 포토레지스트 수출 1건을 전날 승인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신청 내용을 심사한 결과, 군사 전용의 우려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승인 배경을 설명하였습니다. 최장 90일까지 걸릴 것이라는 예상을 뒤집고 빠른 허가가 나온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문제는 단지 징용공 판결, 무역 분쟁에 그치지 않는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일본 국내적으로는 소위 '보통국가'로의 전환, 일본헌법 9조의 폐기 등과 관련되어 있지만, 결국은 근본적으로는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미국은 동아시아의 전략적 방위계획에서 일본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맡던 역할을 궁극적으로는 일본이 대신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사드 사태를 겪었던 한국 정부는 미중 사이에서 약간은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하고 있고, 일본이 미국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은 경계합니다. 그래서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죠.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2016년 체결된 지소미아(GSOMIA, 한일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 폐기 등은 그 줄다리기의 한 자락입니다.
따라서 화이트리스트 제외는 쉽게 끝날 일도 아니지만, 바로 파국이 오는 일도 아닙니다.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현재의 국제정세와 역관계에서 볼 때 이 문제는 어떤 식으로건 '봉합'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미일 군사동맹의 ‘현실성’이 엄존하기 때문이죠. 부당한 흐름에 맞서 싸우면서도, 긴 호흡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도록 자세를 가다듬어야겠습니다. NO JAPAN 깃발 내걸고, 일본 가면 KOPINANDA라고 써 붙인 티셔츠 입고 인증샷 찍고, 멀쩡히 잘 쓰던 일본 문구류 갖다 버리고, 일본차 긁고 다니면서, 아베만 없어지면 한일 관계가 ‘정상화’될 것이라고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과장된 민족주의 선동에 장단을 맞추어서도 안 됩니다.
화이트리스트 제외로 한국 재벌은 웃는다.
제가 김용희 선생의 철탑 시위를 얘기하다가 길게 화이트리스트 얘기를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일본과 한국 간의 기술 경쟁력을 둘러싼 분쟁으로 축소해서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반일감정'을 부추겨서 일본과 한국의 국가적 대결로 이 문제를 몰아가면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의 '기술자급률'을 높이지 못하면 한국이 '후진국'으로 전락할 것처럼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재벌 편을 드는 언론과 경제신문들은, 이번에 문제가 된 불화수소 등 반도체 핵심 소재를 만들어낼 수 있었는데 정부의 규제 때문에 못한 것처럼 떠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은 반도체 소재 개발을 안 하고 싶어서 안 한 게 아니다... 노력도 해봤다. 업계는 불화수소 국산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2010년대 초반 불화수소 공장에서 인명 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관련 규제가 강화됐고 불화수소 국산화 시도는 사실상 멈췄다." (조선일보, 2019.7.11.)
"기업들이 국내 공장에 투자할 동기가 없다. 지난 2011년 경북 구미공단 불산 누출 사고를 계기로 개정된 화관법은 유해물질 취급 공장이 충족해야 할 안전기준을 기존 79개에서 413개로 늘렸다. 준수해야 할 가짓수만 5배 이상 늘어난 이 기준을 맞추려면 공장마다 최소 수십억 원씩 시설 개선비용이 든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국내 회사는 아예 국산화를 포기하고 수입하는 실정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규제 천지라 수입해 쓰는 게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토로했다."(한국경제, 2019.7.12.)
재벌이 갑자기 애국자라도 된 것인가요? 언제부터 대기업이 소재, 장비 국산화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까? 소재, 장비를 생산하는 하청 중소기업을 한 방울까지 쥐어짜서 수익을 극대화해 온 것이 누구인가요? 비용 절감, 수익 극대화를 모토로 하는 자본주의 대기업이, 그것도 지금처럼 국제 분업이 발전한 상황에서 국산 제품을 써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있을까요? 그들이 국산 자재를 쓰는 경우란, 오직 단가를 더 후려쳐서 그것이 외국 것보다 더 저렴해졌을 때뿐이라는 것은 상식 아닌가요? '안전기준'을 맞추기 위해서 '개선비용'이 더 든다고 할 때, 재벌 대기업이 그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애국적' 결단을 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없습니다. 그들은 조금의 이익도 양보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국산화율'을 높이기 위한 해법은 단 하나에 불과합니다. 규제를 싹 풀어서 안전기준을 위한 비용을 줄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안전기준을 위한 비용'이란 무엇입니까? 우리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생명줄 아닙니까? 지금의 규제 수준에서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공장과 작업장에서 죽어나가고 있는데, 이 규제를 더 완화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얼마나 더 죽어야 하는 것입니까?
8월 2일 국회에서는 '기업활력제고를 위한 특별법'(일명 '원샷법') 개정안이 일사천리로 통과되었습니다. 이 법은 2016년 박근혜 정부 때 제정된 법으로, 기업들이 인수합병(M&A)을 손쉽게 할 수 있도록 상법, 세법, 공정거래법 등 관련법에 퍼져있는 여러 규제를 특별법으로 싹 한번에(원샷!) 다 풀어주는 법입니다. 2016년에 큰 논란 끝에 3년 한시법으로 통과되었던 이 법이, 이번에는 너무 쉽게 통과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2024년까지 5년이나 연장되었습니다. 또한 원안의 적용대상은 ‘과잉공급’ 업종의 기업에만 해당되었는데, 이번 개정안에는 정상적 기업의 신산업 진출까지 대폭 적용범위가 확대되었습니다. 2016년에 찬성 15, 반대 21, 기권 25를 표했던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이번에는 열렬히 이 법을 찬성하였습니다. "일본과 경제 전쟁이다 -> 경제 전쟁을 할 기업을 지원해야 한다 -> 기업에 대한 규제를 풀어야 한다." 결국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외는 재벌의 숙원 사업을 손쉽게 해결해준 셈입니다.
정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8월 5일 정부는 '소재, 부품, 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을 세우고, 일본으로부터 수입이 막힌 대기업이 계열사로부터 소재, 부품 등을 구입할 때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한시적으로 적용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혔습니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는 총수일가 지분이 30% 이상인 상장회사와, 20% 이상인 비상장회사의 내부거래 금액이 200억 원 이상이거나 매출의 12%를 넘으면 적용되게 되어있는데요, 이걸 풀어준다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화이트리스트 제외를 주도한 일본 극우파와 한국의 재벌은 '절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덕분에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를 맘대로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현 정부는 취임 초기에 '새정부 경제정책 방향'으로 소득주도성장, 일자리경제, 공정경제, 혁신경제의 4가지 방향을 제창했습니다. 이미 형해화된 앞의 세 가지 방향의 목줄을 끊어버린 것은 바로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치였네요. 이제 재벌을 동반자라고 하는 '혁신경제'만이 유력한 경제방향으로 추진될 것 같습니다. 이 혁신경제는 박근혜 정부 때 '창조경제'라고 불렀던 것과 그 내용이 토씨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부는 더 나아가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화평법),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등을 개정할 방침까지 세웠습니다. 이 법은 참혹했던 가습기 살균제 참사 때문에 생긴 법입니다. 민주당 내에서는 재계의 요구를 수용해서 화학물질 취급시설 인허가 기간을 단축하고 연구개발용 물질의 등록절차를 간소화 하는 등 규제를 싹 푸는 법 개정을 하자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소재, 부품 국산화'를 위해서라고 하는데요. 아니, 법이 제정된 지 1~4년밖에 안 된 법률들 때문에 20년 이상 반도체 소재 국산화를 못했다는 말입니까?
국회에서는 한 술 더 떠서 '52시간 근무제'를 개악해 '재량근로제'를 확대하자는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52시간 근무제를 벗어나는 편법으로 이미 '탄력근로제'가 있는데도, 재량근로제를 확대하여 일은 더 시키고 '연장근로수당'을 안 주려고 머리를 쓰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습니다. 실제 노동시간을 기록하지 말고 노사가 합의한 노동시간을 근무시간으로 간주하자, 재량근로제 업종 제한을 두지 말고 노사자율로 하자,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정산기간을 현행 1개월에서 3개월로 늘리자 등등, 주 52시간 근무제를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각종 방안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한국의 재계와 정치계가 일본의 수출 우대 중지 조치를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마저 들지 않습니까? 경제위기를 핑계로 저들은 항상 노동자, 서민을 어떻게 더 쥐어짤 것인가 궁리를 합니다.
21세기판 물산장려운동이나 하고 있어야 하겠는가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사태 이후에 일본을 욕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어릴 때 저는 '일본은 나라는 부자지만 일본인은 가난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본을 욕할 처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국민총소득 중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2017년 기준으로 한국은 43.1%이고 일본은 17.7%입니다. 수출주도경제라는 것은 해외 구매자에게 물건을 팔아야 돌아가는 경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국의 국민들은 상대적으로 가난해서 구매력이 없다는 얘기죠. 그것이 한국 경제입니다. GDP 대비 사회복지지출이 일본이 21.9%(2015), 한국은 11.1%(2018)입니다. 한국은 OECD 36개 국 중 34위입니다. GDP 대비 장애인 관련 공공지출은 일본이 1.0%(2015), 한국은 0.6%(2017)로 OECD 35개 국 중 33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국산품 애용 운동이나 하고 있어야겠습니까? 일본 제품은 쓰지 말고 국산품을 쓰자는 주장을 보고 있으면, 꼭 일제강점기 때의 '물산장려운동'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소위 '민족자본가'를 육성하자는 최소한의 의미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삼성과 한국 재벌이 민족자본가입니까? 1997년 외환위기 때도 우리 국민은 금붙이를 모아 나라를 구하는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995년에 대한민국의 상위 10%의 소득은 전체의 29%를 차지했었는데, 불과 18년만인 2013년에 그 비율은 45%가 되어 아시아 1위에 올라섰습니다. 한국노동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2017년에 그 비율은 50.6%에 달합니다. 우리가 나라를 구하자는 운동에 뛰어들 때, 그들은 전리품을 챙겼습니다.
위기 혹은 가상의 위기는 자산/소득 불평등의 신호탄입니다. 그들은 외국과의 대립구도를 과장, 과대 선전하여 한국 기업이 외국에 넘어갈 것처럼, 혹은 외국에 질 것처럼 불안감을 조성하고, 재벌이 없으면 우리가 어떤 후진국 경제의 걸인들처럼 전락할 것이라고 협박을 하여, 재벌들에게 유리한 법률, 시행령, 시행규칙, 정부 정책 등을 만들어 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비대해지고 우리는 여위어갑니다.
지금의 상황을 '한일 무역 전쟁'이라고 해봅시다. 그런데 그렇다고 서민의 삶이 환수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고자 하는 노동자의 싸움이 중단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수출은 왜 하는 것입니까? 경제성장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입니까? 일은 왜 열심히 하는 것입니까? 다 국민 모두가 행복하게 살자는 마음에서 하는 것 아닙니까? 대한민국은 작년에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1인당 소득이 연간 3600만 원이라는 얘긴데, 그렇다면 3인 가구의 소득은 1억이 넘어야 하고, 4인 가구의 소득은 1억4000만을 넘어야 합니다. 수출 많이 해서 GDP가 올라가면 모두 잘 살게 될 것이라 들었는데, 왜 우리 대부분은 '평균 이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수출과 경제성장은 누구의 '이데올로기'인 것입니까?
인터넷을 보니까, 삼성전자서비스 지회 조합원들이 김용희 선생이 싸우고 있는 여기 강남역에서 2019 단협 투쟁 승리 결의대회를 열었다고 노동자들을 욕하는 글들이 숱하게 많더군요. 저기 철탑 위에 있는 김용희 선생이 땅을 밟을 수 있도록 삼성에게 성실한 교섭에 응하라는 '삼성재벌 규탄 문화제'를 열었다고, 민주노총을 욕하는 글들이 숱하게 많더군요. 나라 전체가 일본에 맞서 전쟁을 하고 있는데, '귀족노조'가 자기 이익만 추구한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태극기' 세력인 줄 알았습니다. '일베' 애들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자칭 민주주의자요 민족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우리 노동자들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과 '무역 전쟁'이 벌어지면,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재벌에게 우리 모두 무릎 꿇어야 하는 것입니까? 일본 자본의 종이 아니라 한국 자본의 종이 되면, 우리 삶이 나아지는 것입니까? 저는 이런 말을 들으면 일제 식민지 강점기 때의 독립운동이 생각납니다. 그때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독립운동'에 집중해야지 노동자·농민의 싸움은 뒤로 미루라고. 노동자·농민의 싸움을 하는 것은 반일전선에 혼선을 준다고. 노동자·농민 운동을 하는 자들은 '순수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일제 치안 경찰 당국의 생각은 이 '민족주의자'들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1925년 치안유지법을 만들어서 일본 섬과 조선 반도의 모든 노동자·농민 운동가를 극악하게 탄압했습니다. 일제의 경찰은 노동자·농민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일본제국주의와 맞서 싸우는 세력을 가장 위험시하여 고문과 학살로 답했습니다. 노동자·농민을 배제하며 독립이 되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일제가 통치하나, 친일파가 통치하나, 뭐가 달랐겠습니까?
일본 극우 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누구일까요? 한국의 재벌일까요? 일본국 헌법 9조를 개정하여 '보통국가'로 발돋움하려는 일본에게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국과 일본의 노동자, 서민, 양심적 시민들입니다. 아베 정권과 싸웁시다. 일본 극우파하고 싸웁시다. 동시에 일본의 도발을 계기로 해서 노동자, 서민을 더욱 얽어매려는 세력과도 맞서 싸웁시다. 우리는 누구의 종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이 일본인 국적을 가졌건 한국인 국적을 가졌건 말입니다. 우리의 이런 생각에 일본 노동자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도로치바(국철지바동력차노동조합) 국제연대위원회의 성명서를 읽어보세요.
(//doro-chiba.org/korean/dc_ko_19/ko_8_1.htm)
삼성은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다.
인터넷에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막 쏟아지고 있습니다. "롯데는 안 쓸 거예요. 삼성과 LG, SK를 쓸 거예요." 바야흐로 한국의 최대 수출기업 삼성이 한국인의 구세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세 가지 이유에서 저는 NO라고 말합니다.
첫째, 삼성의 3대 세습 족벌 체제는 국민의 희생 위에서 성장했습니다. 또한 삼성은 일본제국주의 및 일본재벌과의 공모 하에 성장한 대표적 기업입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경남의 천석꾼 지주의 아들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경영의 주축의 하나였던 조선식산은행의 대출을 받아 김해평야 200만평을 사들였습니다. 이병철의 회고록 <호암자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렇게 손쉬운 돈벌이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토지 투자 사업은 순조로웠다. 식산은행의 금고가 마치 나의 금고로 착각될 정도가 되었다. 1년이 지나자 나는 연수 1만석거리, 2백만 평의 대지주가 되어 있었다."
이병철은 이렇게 대출로 매입한 평야에서 소작인이 경작한 쌀을, 전쟁 통제경제에 들어가기 전에 일본에 수출하여 폭리를 취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회고록을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하루 밤에 마산의 모든 기생을 한꺼번에 다 예약하는 풍류를 즐겼다." 이병철은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의 주요 파트너가 되었던 것입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38년 대구에 삼성상회를 열고 청과물, 건어물, 군량미 등을 만주의 일본군에 수출해서 엄청난 수익을 올리게 됩니다. 요정정치를 통해 다져진 일본 고위 관리들과의 끈끈한 유대 관계는 그의 사업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일본의 대륙 침략은 '군납업체'로서 돈을 쓸어 모을 기회였던 것입니다.
해방이 되었지만 그는 승승장구했습니다. 이승만 정권과 결탁하여, 일본인이 버리고 간 기업인 ‘적산기업’을 인수하여 이승만 정권 시기 최대재벌에 등극하게 됩니다. 미츠코시백화점 경성점은 동화백화점이 되었다가 이병철이 인수하여 신세계백화점이 됩니다. 조선신탁주식회사는 해방 이후 흥업은행으로 바뀌었는데 이병철이 인수하여 한일은행(현 우리은행)이 되었고, 조흥은행(현 신한은행)도 이병철이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두산, SK, 한화, 쌍용, 해태, 동양, 삼호 등 한국의 재벌들이 대부분 적산을 불하받아 성장했는데, 삼성은 그 정점이었습니다.
이병철에게 또다시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병철은 이승만의 3.15부정선거에 큰돈(당시 기준으로 4억2,500만 환)을 댔는데, 4.19 혁명이 일어났죠. 하지만 1년도 안 되어 5.16쿠데타가 발생하여 기사회생하게 됩니다. 쿠데타가 나자마자 이병철은 61년에 '한국경제인협회'(지금의 전경련)를 만들어 박정희 정권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박정희는 공장을 건설해 그 주식으로 벌과금을 납부하는 ‘부정축재환수절차법’을 만들어 이병철을 면책해 주었습니다.
박정희 정권 때의 얘기는 너무나 많기에, 한 가지만 얘기하려 합니다. 삼성이 가장 자랑하는 기업 삼성전자, 이것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삼성전자는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66년에 삼성그룹의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한비’)이 일본 미쓰이 그룹과 공모하여 사카린 55톤을 건설자재로 위장해서 들여와 판매하다 들통이 난 밀수사건입니다. 사카린 밀수는 중앙정보부 비호 하에 박정희 독재정권의 비자금 마련을 위해 기획한 것입니다. 이 사건이 물의를 빚자 이병철은 한국비료공업과 대구대(지금의 영남대)를 국가에 헌납하고 은퇴를 선언합니다. 이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삼성은 철저히 일본의 지원, 군사독재정권과의 결탁에 의해 성장하였습니다.
은퇴를 선언했지만 이병철은 2년 만에 복귀합니다. 국가를 뒤흔드는 밀수 범죄를 일으킨 중범죄자가 감옥도 안 가고 복귀하려니 뭔가 거창한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1968년 이병철은 그래서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합니다. 이때 또 일본이 도와줍니다. 1969년 설립된 전자회사의 이름은 '삼성-산요 전기' 미쓰이, 미쓰비시와 함께 전전 3대 재벌로 꼽히던 스미토모와 산요전기의 도움을 받아 삼성전자를 출범시킨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삼성을 엄청나게 키워주었습니다. 삼성은 밝혀진 것으로만 전두환 정권에 220억 원, 노태우 정권에 250억 원을 헌납하여 은혜에 보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삼성이 검찰 및 정치권 대부분을 매수했다는 안기부 도청 내용이 들어있는 소위 '삼성X파일' 사건에서, 뇌물 관련자들은 하나도 처벌받지 않고 도청 내용을 공개한 기자들과 뇌물 검사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의원만 유죄 선고를 받는 일까지 있었죠. 97년 외환위기도 삼성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삼성이 정치권에 대한 전 방위적 로비로 기아차 인수에 관여했고, 그 결과 기아차가 급격한 부채상환 요구를 받고 파산한 결과, 한국 기업에 대한 신뢰가 급속도로 저하되는 대표적 이유가 됩니다.
삼성의 3세 승계, 즉 이재용이 삼성 재벌 전체를 거머쥐는 과정도 온갖 편법과 불법이 판치는 과정이었습니다. 삼성의 2세 이건희가 이재용에게 증여한 돈은 96년의 단돈 61억 원, 그 중 증여세로 16억을 내고 이재용은 45억으로 승계 작전을 시작합니다. 일단 상장 직전의 삼성에스원 주식 23억, 삼성엔지니어링 주식 19억을 사서, 바로 상장하여 605억을 만들었습니다. 563억을 눈 깜짝할 새에 번 것이죠. 96년에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주당 7700원(장외 시가 8만5000원)으로 48억에 매입한 다음, 2014년에 에버랜드와 제일모직을 합병하여 상장한 결과 주가는 1만6000원이 되었습니다. 48억은 18년 만에 4조 원이 되었습니다. 이재용은 이런 일을 한 번 더 벌입니다. 1999년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를 주당 7150원(장외 시가 5만5000원)으로 620억에 매입하여 2014년에 상장한 결과 주가는 38만 원이 되어 2조8000억 원으로 변신했습니다. 이 정도면 가히 이재용의 손은 '마이다스'의 손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요?
21세기를 넘어가면서 정치권력 위에 군림하게 된 글로벌(Global) 초국적기업 삼성은 이재용 승계를 위한 마지막 카드로 '분식회계' 카드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재용을 삼성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삼성물산의 대주주로 만들기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시도합니다. 삼성물산의 주식은 거의 없지만 제일모직의 대주주인 이재용 씨. 이재용에게 유리한 합병을 위해서는 제일모직의 기업가치가 '뻥튀기'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제일모직의 자회사인 삼성바이오로직스는 5년 연속 계속 적자를 냈는데도, 4800억 원 정도 투자한 제일모직의 삼성바이오로직스 지분가치가 하루아침에 6조6000억 원으로 평가됩니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투자한 삼성바이오에피스를 '종속회사'에서 '관계회사'로 바꾸고, 자산가치를 하루아침에 '장부가치'에서 '시장가치'로 바꾸는 분식회계를 통해서였습니다. 삼성바이오에피스의 자산가치를 5.3조 원으로 뻥튀기하고, 그를 통해 삼성바이오로직스가 4.5조 원의 이익을 낸 것으로 뻥튀기하고, 최종적으로 그렇게 이익을 많이 내는 자회사를 소유한 제일모직의 기업가치를 뻥튀기하는, ‘3단계 뻥튀기’ 방법을 통하여 이재용은 삼성 재벌의 황제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그리고 소위 ‘삼성증권 유령주식 사태’ 등 삼성과 관련된 불법, 탈법, 편법은 다 쓰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국민의 돈과 재산을 갈취하고 독재정권과 권력자들에게 뇌물을 뿌려댄 기업이 어떻게 우리 국민의 구세주가 된다는 말입니까?
둘째, 삼성 재벌은 노동자를 짓밟고 성장한 기업입니다.
삼성의 노조 탄압사는 김용희 선생의 투쟁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 바 그대로입니다. 여기서는 최근에 드러난 몇 가지 사실만 열거하겠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실소유자로 알려져 있는 다스가 BBK에 투자한 140억 원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미국 내 소송비용 40억+20억 원을 삼성그룹이 대신 내주었다는 사실이 2018년에 드러났죠. 검찰이 수사를 위해 삼성전자를 압수 수색하는 과정에서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를 위한 '마스터플랜' 문서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내용 중 정말로 천인공노할 내용은 소위 '그린화' 작업이란 것인데, '노조활동은 곧 실업'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협력사 4곳을 ‘기획 폐업’시켰다는 것입니다. '기획 폐업'의 대가로 협력사 사장에게는 수억 원의 금품까지 제공하였습니다. 이런 짓까지 하는 기업이 말로는 항상 '국가 경제'를 부르짖는다니 가증스럽지 않습니까?
2014년 삼성전자 수리기사 고 염호석 씨의 시신을 탈취하기 위해 300여명의 경찰까지 투입시켰던 삼성. 공적 기관인 경찰을 사조직처럼 부리는 것은 그때만이 아니었습니다. 2018년 12월에 드러난 삼성 에버랜드 노조대응팀 ‘일일보고서’에 따르면, 삼성 에버랜드 전무가 용인 동부경찰서 정보과장을 만나 '협조'를 요청한 결과, 경찰은 삼성의 사주를 받고 노조 부지회장 조장희 씨를 미행하고 함정 음주단속을 실시하고 보닛을 강제로 여는 등 표적 단속을 시도한 정황이 파악되었습니다. 심지어 경찰의 보고에는 "조 씨가 맥주를 한 캔밖에 안 마셔 음주 적발이 안 될 것 같아 철수한다" "조 씨가 대리기사를 불러 체포에 실패했다"는 등의 내용도 들어있습니다. 도대체 대한민국의 경찰은 국민의 경찰입니까, 삼성의 사설 경찰입니까?
국내에서 하던 짓은 해외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삼성전자 해외법인에서 2012년 만들어진 노조는, 설립된 지 40일 만에 파괴되었다는 것이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노조파괴에는 한국에서와 똑같은 수법이 동원되었습니다. 어용노조, 용역깡패, 매수와 회유.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단어들입니다. 삼성은 해외에서 노조파괴 뿐이 아니라 협력업체에서의 아동노동 착취, 열악한 노동환경 등으로 계속적인 비판을 받았습니다.
혹시 외국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은 한국 기업에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안 계시겠죠?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한국 속에 있는 파시스트요 제국주의 침략자일 것입니다. JAPAN의 '아베'가 아니라 KOREA의 '아베'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셋째, 삼성 재벌은 이미 '국민기업'이 아닙니다. 초국적 글로벌 기업입니다.
이번 화이트리스트 사태가 나자 삼성전자는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하여 그동안 일본에서 수입해왔던 반도체 소재 220여 가지를 "국산화 혹은 제3국 도입"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적어도 6개월, 길게는 1년 안에 반도체 소재 도입처를 '탈일본화'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나옵니다. 1년 안에 할 수 있는 것을 왜 이제까지 하지 않았을까요?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 사전에 '국산화'라는 단어는 애초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사실 기업 입장에서는 좋은 제품을 싸게 가져오면 그만이지, 그것이 어느 나라에서 생산된 것인지는 전혀 고려할 사항이 아니겠죠. 특히 국제분업화가 체계화되어 있는 21세기 글로벌 생산 체계에서 ‘국산화’라는 것은 신화에 불과합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의 2017년 기준 한국 반도체 소재 국산화율은 50.3%에 불과합니다. 소재는 그나마 높은 것이고 장비는 18% 정도에 불과합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공장에는 일본과 미국의 장비들이 즐비합니다. 지금은 국내 여론 때문에 '국산화' 운운을 할 뿐, 그들에게 그런 계획은 애초에 없을 것입니다. '일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수입 다변화 대책' 정도를 세우고 있을 것입니다. 솔직히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일본 업체 입장에서도 세계 반도체 생산의 엄청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소재와 장비를 팔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한일 대립은 업체 입장에서 보면 거대한 '쇼'에 불과합니다. 민족주의적 열기가 가라앉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거래를 재개할 것입니다.
삼성 갤럭시 핸드폰은 2018년에 이미 베트남과 인도 생산량이 67%를 넘어섰습니다. 베트남에서 생산된 갤럭시 핸드폰은 한국 휴대전화인가요 베트남 휴대전화인가요? 일본의 소프트뱅크는 쿠팡에 지금까지 3조를 투자했습니다. 쿠팡은 한국 기업인가요, 일본 기업인가요?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율은 2019년 5월 현재 57.33%로 18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삼성전자가 수익을 배당하면 배당액의 절반 이상은 해외로 빠져나갑니다. 2018년 12월 기준으로 개인 최대주주는 이건희지만(4.18%), 한국 국민연금공단은 무려 10.02%의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삼성전자가 국민이 지배하고 있는 기업이 되지는 않습니다. 자본은 국적을 따지지 않습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주주 소유자의 국적과 무관하게 자본에 고용되어있다는 면에서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도 대한민국 국적자가 소유한 기업은 국내에서 고용을 창출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외국 기업은 맘대로 철수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거꾸로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 기업도 국내에서 고용을 창출합니다. 한국 기업도 외국 생산이 더 이익이 된다면 삼성전자처럼 애국심과 전혀 관계없이 외국으로 나갑니다. 외국으로 나간 기업은 국내에 고용 유발 효과가 전혀 없습니다. 그와 반대로 쌍용자동차는 인도 마힌드라 그룹이 기업을 인수한 이후 생산을 정상화했을 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해고노동자 119명의 원직 복직에 합의했습니다. 쌍용자동차는 한국 자동차인가요, 인도 자동차인가요?
특히 삼성전자의 생산·고용유발 효과는 동종업계 최저입니다. 삼성은 2018년 8월에 정부시책에 발맞추어 앞으로 180조를 투자해서 70만 명의 고용효과를 가져오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과장된 것입니다. 2015년에 나온 '대기업 성장의 국민경제 파급효과'라는 논문은 삼성전자, 엘지전자, 에스케이하이닉스 등 전자 3사의 고용유발 효과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3사가 투자를 확대해 최종산출액이 10억 원이 증가할 때마다 본사와 협력업체의 고용이 얼마 증가하는가를 조사한 '총고용유발계수'는 삼성전자 1.33, 엘지전자 1.80, 하이닉스 2.00이었습니다. 삼성전자의 투자 대비 고용효과가 가장 적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삼성전자가 해외 생산과 기계화된 생산의 비중이 가장 높다는 의미가 됩니다.
협력사 고용유발계수에 초점을 맞추어 볼 때, 삼성전자는 그룹 내부 계열사의 고용유발계수는 제일 크지만 (삼성, LG, SK 순으로 0.216 – 0.185 – 0.064), 외부 비계열사 고용유발계수는 가장 작았습니다. (0.278 – 0.358 – 0.490) 이것은 삼성전자의 매출이 늘어도 유발되는 고용효과는 주로 삼성그룹 내부에서 일어날 뿐 외부 업체에 미치는 효과는 미미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외부 협력사 중 중소기업 협력사 고용유발계수도 삼성전자가 가장 낮았습니다. (0.148 – 0.229 – 0.292) 외부 중소기업과의 상생 지수도 삼성전자가 가장 낮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이 잘 되어야 국민경제가 잘 되고 국민의 삶이 풍족해질 것이라는 주장이 과연 사실일까요? 삼성이 대한민국의 여건과 상황에서 가장 큰 이익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사업의 주축을 한국에 두고 있지만, 계속 그러리라는 보장이 있을까요? 이미 삼성 핸드폰의 67%가 해외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더욱 가속화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이런 경향을 막기 위해 삼성에게 모든 혜택을 주고 모든 규제를 풀며 삼성의 말을 잘 듣겠다며 모든 국민이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인가요? 대한민국에 남아달라고 읍소하면서요.
우리는 우리 머리 속에 있는 '이데올로기'를 때려 부수어야 합니다. 재벌 없이는 한국 경제는 성장할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를, 삼성전자 덕분에 우리가 잘 살게 되었다는 이데올로기를. 누군가는 재벌 덕택에, 삼성전자 덕택에 더 잘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아닙니다. 이 이데올로기를 깨부수는 일은 사실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도 강남역 철탑 위에서 시위를 계속하고 있는 김용희 선생을 바라보세요. 그가 처한 현실이, 그가 앉아 있는 자리가 바로 ‘삼성제국’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의 민낯 그 자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성이 우리 삶에 갖는 의미 그 자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남역 고공과 지상에서 함께 싸우고 계신 김용희 선생님과 이재용 선생님, 절대 굴하지 말고, 끝까지 건강히 살아서,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이 올 때까지 함께 싸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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