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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와의 싸움, '짝퉁 정의'가 아닌 '책임 경제'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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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좀비와의 싸움, '짝퉁 정의'가 아닌 '책임 경제'가 필요해! [경제학자 김영호 인터뷰] 위기의 세계 경제, 무엇을 할 것인가?
2010년, 세계 경제는 2008년 금융 위기의 여파로 여전히 휘청거리고 있고, 한국 경제는 청년 실업과 사회 양극화 속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런 와중에 우리 사회에서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자그마치 60만 부나 팔려나가면서 '정의'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와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도 십수만 부가 팔리면서 올해 우리 책동네를 뜨겁게 달구었다.

위기의 세계 경제와 양극화 고통 속의 한국 사회, 그리고 '정의'는 서로 관계가 있는 것일까? 정의와 도덕, 그리고 경제는 상관이 있을까 없을까?

"있다! 그것도 밀접하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의와 책임이야말로 최고의 돈벌이 수단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오랫동안 사회책임투자(SRI) 운동을 펼쳐오고 있는 경제학자 김영호 유한대학교 총장이다.

김영호 총장에 따르면,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는 "좀비"가 됐다. 사실상 죽었지만 아직도 현실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미에서. 김 총장은 신자유주의가 세계 경제의 한 요소로는 살아남겠지만 구조로서의 역할은 끝이 났다고 진단했다. 2008년 금융 위기로 신자유주의적 세계 경제는 파탄을 맞았지만 아직 새로운 세계 경제의 틀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앞으로 세계 경제에서 과도한 금융 부문에 대한 일정한 규제가 합의될 것으로 예상했다. 내년 프랑스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 회의에서 토빈세가 채택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앞으로 기업은 물론 정부, 소비자에게 사회와 지구 환경에 대해 책임을 지는 책임 자본주의의 시대가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세는 "도덕적인 경제, 즉 사회 책임 자본주의"다. 정의와 책임이 밥 먹여주는 시대가 와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와 책임이 어떻게 밥을 먹여주지? 너무 이상적인 것은 아닐까?

지난 3일 유한대학교에서 김영호 총장으로부터 올해 책동네의 화두였던 '정의'와 '도덕' 그리고 '경제'에 대해서 들었다. 인터뷰는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진행했다. <편집자>


▲ 김영호 유한대학교 총장(오른쪽). ⓒ프레시안(최형락)

"보수 정권의 부패가 정의 열풍 불렀다"

프레시안 :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60만 부 이상 팔렸다. 그의 다른 책 <왜 도덕인가>(안진환·이수경 옮김, 한국경제신문 펴냄)도 '정의' 열풍 덕택에 수만 부가 나갔다고 한다. 정의 관련 서적이 한국에서 이토록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나?

김영호 : 정의 관련 서적이 그 나라의 부패 정도에 반비례해 많이 나가는 것 아닌가 싶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일본에서는 20만 부가 팔렸다고 들었다. 샌델이 도쿄대학교에 와서 강의할 때 2000명이 모였다. 경희대학교에서는 4500명이 모였다. 일본보다 2배 이상 모인 셈이다. 그만큼 한국이 부패가 심하고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

정의 관련 서적이 열풍인 이유는 한국에 보수 정권이 들어선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보수 정권에는 체질적인 부패 문제가 있다. 부패에 대한 잠재적인 근심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 아닌가 싶다. 정의 열풍은 보수 정권이 공정 사회 담론을 들고 나오게 하는 전환점을 만들었다.

프레시안 : 보수 정권이 '공정 사회'라는 화두를 내건 배경에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 역할을 했으리라고 봤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특채 문제 등 이른 사회지도층의 특혜문제가 불거지면서 한국이 공정 사회가 아니라는 판명이 났다.

김영호 :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 사회를 들고 나올 때 다소 위화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보수 세력은 필요하고, 보수 세력이 뿌리 깊은 부패 체질을 극복하고자 공정 사회를 평하고 나온 것은 바람직하다. 그렇게 가도록 격려하고 장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는 공정하지 않더라도 공정 사회를 표방한 것만으로도 진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정의' 열풍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쩌면 우리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와도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6년부터 한국 사회에 '양극화'라는 문제가 본격 제기됐고, 청년 실업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정의, 도덕, 경제가 서로 관계있는 것 아닌가?

김영호 : '정의 열풍'은 신자유주의가 가진 일종의 정의의 결핍과도 관련이 있다. 한국 사회는 부패 고리가 존재한다. 재벌, 관료, 정치권력, 법조인 그리고 국제 투기 자본 간의 부패의 연결 고리는 우리 사회 전체를 휘감고 있다. 국민 세금 위에서 잠자는 관료, 군경, 국영기업체 임직원도 그 연결 고리의 일부이다. 전국의 도시 근교와 관광지에 독버섯처럼 무성한 러브호텔도 그 부패 구조의 또 다른 측면이다.

아일랜드 금융 위기 사태는 정치권력, 외국 투기 자본 세력, 금융 기업 간의 부패의 연결 고리가 곪아터진 것 아닌가.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가 광고 하나 안 싣고도 두어 달 만에 약 15만 부가 팔렸던 현상은 <정의란 무엇인가>가 많이 팔린 맥락과 같다. 그 책은 삼성이라는 대단한 기업의 지배 구조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커튼 속에 가려있던 문제점을 과감히 고친다면 삼성에게 정의 혁명이 될 것이다. 요즘 <위키리크스>가 보여준 국제 외교의 커튼 속 풍경은 정치지도자들이 아무리 덮으려 해도 스마트폰, 트위터와 같은 SNS에 의하여 덮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수습 과정의 제일 큰 문제가 금융 위기를 일으킨 주범인 월가의 금융 자본가에게 국민 세금을 왕창 줬다는 점이다. 범인들에게 벌을 준 것이 아니라 상을 줬다. 이것을 스티글리츠는 '짝퉁 정의'라고 했다. 이러한 아이러니 속에서 정의란 개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복지 국가'라는 대안 철학을 세운 롤스

프레시안 : 김 총장께서는 70년대 존 롤스의 정의론에 깊이 빠졌다고 했는데 샌델의 정의론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

ⓒ프레시안(최형락)
김영호 : 솔직히 샌델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시니컬한 마음으로 읽었다. 두 번째 다시 정독했지만 여전히 나는 롤스가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센델은 정의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샌델의 책이 롤스를 비롯한 정의론 전반에 대한 열풍을 부활시켰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본다. 센델이 일상적인 일들을 정의론의 철학과 접목시키는 훈련을 하도록 한 것은 좋은 일이다. 그는 "철학의 가장 좋은 학교는 저녁 식탁이다"라고 말했다.

샌델 덕택에 올해 정의론 관련 책이 많이 나와서 좋다. 한국에서는 김우창 씨가 <정의와 정의의 조건>이라는 책을 냈고, 지난 가을 낸시 프레이저가 <지구화 시대의 정의>라는 책도 나왔다(최근 국내 번역 됐음). 정의론은 대체로 공동체 문제를 논하다 보니 일국주의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 샌델도 그렇다. 하지만 낸시 프레이저는 '지구화 시대'를 말해서 새로웠다.

1970년대 존 롤스의 신화에 빠졌다. 롤스의 <정의론>은 깊이가 있어서 샌델의 책처럼 그때그때 붐을 타는 책이 아니었다. 롤스는 서서히 많은 관심을 끌었다. 당시 철학적 조류는 주로 유럽에서 이끌었고 미국은 철학적 기반이 없었다. 그런데 서양철학의 위대한 전통을 잇는 롤스가 미국에서 등장했다. 복지 개념이 등장한 케인스 이후의 자본주의에 걸맞은 철학이 나타난 것이다. 과거 정의론의 전통을 이으면서 현대 자본주의에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롤스의 정의론은 독보적이었다.

자본주의가 발현하면서 벤담의 공리주의적 정의론이 등장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시장 경제와 맞아 떨어지는 정의론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자본주의와 맞아 떨어진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개인의 인권이나 개성보다 부르주아 사회의 전체 행복이 더 중요하다. 이 논리가 신자유주의까지 뒷받침했다. 벤담의 철학이 나온 직후부터 칸트는 벤담을 비판했다. 칸트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양보할 수 없는 개인의 고귀함을 강조했다. 롤스는 이러한 칸트의 생각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롤스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이 존중돼야 한다고 봤다. 롤스는 자본주의가 성숙하면서 일어났던 피해를 수정하고 극복하자고 말했다. 복지 국가를 뒷받침하는 철학 체계를 세웠다는 점에서 롤스는 위대하다. 롤스는 현실에서의 인간의 실천적 문제, 현실 정치 사회의 개혁에 초점을 맞추는 구체적 원칙을 세우고자 했다.

프레시안 : 샌델은 롤스와 다르고 롤스를 극복했다고들 한다. 롤스와 샌델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롤스에 더 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김영호 : 롤스가 개인의 자유와 이성을 강조했다면 샌델은 역사와 문화를 가진 공동체의 정서를 살려야 한다고 했다. 개인의 존엄성을 최우선시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롤스는 "옳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샌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좋은 삶의 관점으로 회귀하여 "옳은 것보다 좋은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롤스는 좋지 않더라도 옳은 것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샌델은 공동체 정서와 질서에 맞는 좋은 삶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공동체의 도덕성과 시민의 공동선을 강조하는 점에서 벤담주의와 구별된다. 그래서 흔히 그를 공동체주의자로 분류하지만 그 자신은 "시민 참여 공화주의자"로 자칭한다.

롤스는 현실 속에서 실천 의지를 살려 나가는 철학 체계를 세우는 데 온몸을 투신했다. 샌델에게는 롤스와 같이 온몸을 던지는 처절한 몸부림이 안 보인다.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는 열린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정의로 가는 첫째 조건이라는 지적은 좋다. 하지만 샌델에게는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무엇이 정의인가에 대한 기준이 없다.

롤스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에는 세계화로 가는 길이 있다. 샌델은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의 이해가 부딪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샌델의 해법이 일국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샌델의 주장은 세계화 시대에는 한계가 있다.

MB의 공정 사회, "짝퉁 정의"일 수도…

프레시안 : 샌델의 <왜 도덕인가>라는 책도 나왔다. 시장과 도덕의 충돌에 대해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다. 이 책은 경제 생활이 사회·도덕적 생활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버느냐와 같은 논의만 한다. <왜 도덕인가>라는 책을 어떻게 봤나?

김영호 : 공동체를 구성하는 시민의 도덕성 고양, 그것에 의해서 규제되는 시장 경제를 염두에 뒀다는 점에는 충분히 동의한다. 하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만큼 빠지지는 못했다. 다소 관념적이라고 생각했다. 경제학자가 아닌 사람의 경제 이야기는 투철하지 못하다는 생각도 했다.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결합한 단어다. 신자유주의에서는 민주주의는 떼어지고 자유주의만 남았다. 건전한 시민사회가 시장 경제에 의해서 소외됐다.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가 충돌하면 이는 결국 시장 경제조차 어렵게 만든다. 양극화가 대표적인 사례다.

프레시안 : 샌델도 시장 경제가 커지면 민주주의는 무너질 수 있다고 했다.

김영호 : 공동선에 대한 강조는 롤스와 샌델이나 같다. 시민사회에 의해 통제되는 시장 경제, 적어도 조화되는 시장 경제 정도에는 동의할 수 있다. 미국에서 1980년대 이후에 신자유주의가 들어서면서 시장 경제가 시민사회를 무너트리고 파괴했다. 여기에 대한 통찰로 '공동체의 반성'이라는 샌델의 문제제기가 등장했다.

시민사회와 시장 경제는 서로 갈등을 못 풀고 있다. 시민사회는 금융을 통제하려 한다. 오바마도 금융 시장을 규제하려 한다. 그러나 시장 쪽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의한 금융 위기가 바로 시장 경제가 시민사회를 절단 낸 대표적인 경우다. 오바마가 이를 통제하려고 하니 시장의 반발에 의해 오바마 정권이 흔들린다. 시민사회와 시장 경제의 접점을 전 세계가 못 찾고 있다. 그걸 찾는 게 지금 세계 정치경제의 중요한 과제다.

프레시안 : 한국에서 경제라고 하면 어떻게 성장률을 늘릴 것인가, 분배를 개선할 것인가 등의 기술적인 문제에 집중한다. 경제에 정의나 도덕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잘 없는 것 같다. 한국에서 경제에 대한 인식이 지나치게 기술적인 부분에 치우치지는 않았나.

김영호 : 한국 경제는 지나치게 벤담주의에 갇혀있다. 성장, 효율, 경쟁력을 위해서 개인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위해 농민은 희생해도 좋다는 식이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서민경제와 중소기업을 중시하려는 정책에는 정의와 공정 개념을 부활하려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예단할 수 없다. 스티글리츠가 말하는 짝퉁 정의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2008년 금융 위기로 신자유주의의 파탄이 분명히 드러났다"면서 시장만능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지식 기반 경제는 환상이다. 금융은 덜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 금융을 규제하고 제조업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김영호 : 장하준의 제조업 옹호론을 반갑게 생각했다. 토플러는 제조업이라는 굴뚝 산업을 버리고 정보화라는 '제3의 물결'로 가라고 했지만, 나는 제조업과 지식 기반 경제가 별도가 아니라, 제조업과 정보화가 결합한 지식 경제 산업으로 재구성되고 있다고 주장했고 토플러를 만나서도 반박했다.

그러나 지식 경제와 분리한 제조업 옹호론은 이상하다. 한국에서는 이제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 삼성이나 LG의 휴대전화는 하드웨어는 훌륭하지만 콘텐츠가 부족하다. MS의 시대는 가고 구글과 애플로 가는 시대가 왔다. 한국 기업에는 소프트웨어에서 한계를 느끼고 분발해야 하는 실천적 과제가 놓여 있다. 장하준의 책에는 이러한 점에 대한 논의가 아쉬웠다.

ⓒ프레시안(최형락)

"신자유주의는 좀비다"

프레시안 :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장하준은 신자유주의가 파탄이 났다며 새로운 틀을 짜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나 유럽의 정치지도자들은 현 세계경제 체제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약간 규제만 제대로 한다면 이대로 갈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진보 쪽에서는 세계 경제의 룰이 바뀌어야 한다고 하고, 반대쪽에서는 약간만 고쳐서 쓰면 된다고 본다. 어느 쪽이 맞는 건가.

김영호 : 신자유주의의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몸통이 타격을 입어 죽은 듯한데도 벌떡 일어나 돌아다닌다. 그래서 제이미 펙은 '좀비 신자유주의'라고 했다. 이 좀비가 오바마도 박살내고 있다. 미국 월가가 좀비를 조정하고 있고, 이는 다시 공화당이라는 정치 영역으로 연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비가 역사를 주도하는 기력은 잃었다고 본다. 앞으로 올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기까지의 과도적인 현상이다.

덴마크는 '유연 안정성' 모델을 자랑한다. 미국적 신자유주의의 유연성과 북구적 안정성을 결합한 것이다. 스웨덴에서도 기업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 유연성 법인세 등의 분야에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요컨대 신자유주의의 세계경제의 구조가 아니라 한 요소로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요소를 안을 수 있는 큰 질서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 장하준은 금융이 지금보다 덜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면서 규제의 필요성도 제기하고 있는데.

김영호 : 금융 규제 가운데 핵심적인 것이 금융행위세(Financial Activities Tax : FAT)와 금융거래세(Financial Transactions Tax : FTT)다.

오바마도 금융행위세의 일종인 은행세를 도입하자고 주장했고, 이번에 서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 회의에서도 은행세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다. 독일의 메르켈과 프랑스의 사르코지는 금융거래세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영국은 보수당으로 바뀌기 전까지 금융거래세에 적극적이었다. 북유럽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일본 민주당 정권은 금융거래세라고 할 수 있는 토빈세를 실시하겠다는 정치 공약을 내걸고 정권을 잡았다.

오바마를 떠받드는 관료 중에는 토빈학파가 많다. IMF조차 토빈세 도입을 쭉 반대해 오다가 올해 3월 찬성으로 기울어졌다. 토빈세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단계를 지나서, NGO들이 운동하는 단계를 거쳐 지금은 세계 주요 국가들이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토빈이 내게 보낸 이메일에서 IMF가 주체가 되어 토빈세를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IMF 개혁은 여기까지 가야 한다.

이런 분위기를 염두에 두면, 2011년 프랑스 G20 회의 때 토빈세가 통과되리라고 본다. 유럽연합(EU) 정상 회담에서 사르코지가 이번 서울 회의에서 토빈세를 제기하기로 결의했다. 이번 G20이 이를 안 받았긴 하지만, 상황에 따라 토빈세 도입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금융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지금은 금융 시대다. 2008년 통계를 보면 하루에국제 금융시장에서 거래되는 규모가 3조2000억 달러다. 반면에 세계에서 제조업 상품이 무역으로 거래된 금액은 300억 달러를 약간 넘는다. 금융 대 실물상품 규모가 97:3이다. 몸통이 제조업이라면 꼬리가 금융인데,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시대가 왔다. 한국은 세계 경제를 주도하기보다는 따라가는 상황이다. 금융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경제와 환경을 분리한 스티글리츠의 분석은 60년대식"

ⓒ프레시안(최형락)
장하준과 스티글리츠가 비슷한데, 나는 스티글리츠에 불만이 있다. 그는 실물 경제와 금융 경제 두 부분만 본다. 그래서 실물에서 괴리한 금융 경제는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나는 경제를 실물 경제와 금융 경제 두 부분으로 나누지 않고 자연환경을 포함해 세 부분으로 봐야 하고 자연환경과 괴리된 실물 경제와 실물 경제와 괴리된 금융 경제를 구조적으로 연결시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티글리츠에게는 자연환경, 실물 경제, 금융 경제를 연결하는 고리가 없다. 스티글리츠는 환경을 중시하는 글을 쓰지만, 경제와 환경문제를 따로 나누어 본다. 실물, 금융, 환경 세 부분을 연결하는 통합 정책이 나와야 앞으로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를 만들 수 있다. 바로 그린자본주의다.

자연을 살리고 이용하고 순환하는 실물 경제를 만들려면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다. 금융에 대한 토빈세나 은행세를 걷지 않고는 자연과 실물 경제의 관계를 재구축할 수 있는 자금이 안 나온다. 0.05%의 토빈세를 매기면 금융 규제가 가능해지면서 1년에 약 2000억 달러가 모인다. 이 돈으로 자연을 살리는 실물 경제를 재구축할 수 있다.

지금은 기후변화협약이 잘 안 된다. 중국, 인도에서는 "이산화탄소 과다 배출은 기본적으로 선진국 책임"이라며 "이산화탄소 배출을 규제하기 위해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내놓으라"고 한다. 선진국은 코펜하겐회의에서 자금을 줄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지금 선진국도 재정에 허덕인다.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신교토협약이 이행되지 못하는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에 이산화탄소를 줄이는데 필요한 돈과 기술을 제공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2008년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적 경제 패러다임이 극적으로 바뀌지는 않았지만 변모하는 모습이 있다고 보시는 것같다. 나아가 금융과 실물 경제뿐 아니라 자연까지도 포함하는 새로운 경제질서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김영호 : 스티글리츠가 꿈꾸는 자본주의는 60년대 자본주의다.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케인스적 자본주의를 꿈꾼다.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제는 자연자본주의로 가야 한다. 자연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인권에 책임을 지고 안전에 책임을 지는 사회책임 자본주의로 가야 한다.

"대안은 큰 시장도 큰 정부도 아닌 '큰 사회'"

프레시안 : 세계경제에서 새로운 걸 모색하는 흐름은 분명하다고 보는 것인가?

김영호 : 그렇다. 사람들은 "큰 시장이냐, 작은 정부냐" 혹은 "큰 정부냐 작은 시장이냐" 하는 이분법만 생각한다. 영국에서는 '빅 소사이어티(Big society)'를 시도한다. 사회적 기업도 정부 정책으로 할 것을 시민사회가 사회적 기업 형태로 끌어안았다. 큰 사회 형태다. 고전적인 "큰 정부, 작은 정부" 혹은 "큰 시장, 작은 시장"이 아닌 다른 사회 형태가 얼마든지 나온다.

프레시안 : 김영호 총장은 오래전부터 사회 책임 투자(SRI) 운동을 해왔다.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사회 책임 투자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할 것 같나?

김영호 : 나는 수 년 전부터 세계가 '사회 책임 자본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취임사에서 새로운 책임의 시대를 표방하고 나왔다. 영국 수상도 "책임을 재건하자"고 말하고 나왔다. 세계적으로 압도적인 찬성을 얻어 '사회 책임의 국제 표준'인 ISO 26000 시대가 왔다.

기업뿐 아니라 정부, 시민사회 등 모든 조직이 책임 위주로 활동해야 한다고 국제 표준이 재정비됐다. 현재 금융자본 가운데 헤지펀드 규모가 2조 달러인데 사회 책임 투자(SRI) 규모는 5조 달러가 넘는다. 헤지펀드보다 훨씬 많은 사회 책임 투자 펀드가 번창한다. 세계 연기금이 자꾸 책임 투자 방향으로 간다.

소비자 운동도 소비자의 권리 보호라는 측면에서 전개됐지만 요즘은 소비자 책임 위주로 바뀌고 있다. 소비자는 환경에 유익한 제품만을 사야 하고 인권 유린하는 기업의 제품을 사지 않아야 하고 사회 공헌을 많이 하는 기업을 격려하는 소비를 해야 한다는 식이다. 노동운동도 이전에는 노동자의 권리 위주로 전개됐다면 이제는 노동의 책임 위주로 바뀌고 있다.

이제는 환경을 생각하는 소비 투자 환경으로 가야 한다. 자연환경은 상수가 아니라 하나의 변수가 됐다. 금융 위기를 일으킨 주범에게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오바마 금융규제법안의 핵심이라고 본다.

<정의란 무엇인가>도 책임을 강조한다. 사회 책임을 다하는 것이 돈벌이가 되는 사회가 와야 한다. 사회 책임이 돈벌이의 가장 좋은 수단이 되는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더 책임을 지게 되는 사회가 와야 한다. 자크 이탈리는 21세기는 이타적인 사람이 돈 버는 시대라고 했는데 제러미 러프킨의 <공감의 시대>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프레시안(최형락)

"정의와 책임이 밥 먹여주는 시대가 와야 한다"

프레시안 : 경제에서 정의와 도덕이 왜 중요한가. 정리해 달라.

김영호 :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인도 출신 아마르티아 센이 얼마 전 한국에 와서 "완전한 정의를 찾기보다 명백한 불의, 부패, 가난을 막아라"고 말했다. 그는 시민사회가 나서 공공 이성을 세워 명백한 불의를 척결하라고 역설한다.

샌델도 시민이 도덕심을 함양하는 것이 정의의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한다. 정의를 자기의 실천적 책임으로 연결하려면 "그 사람이 정의로웠더니 돈을 벌더라, 더 이익을 많이 얻더라"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정의나 사회적 책임이 바로 돈벌이 수단이 되게 해야 한다. 그 점을 잘 연결시키면 개인주의적 정의와 이성, 공동체가 부딪치지 않고 조화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정의가 이뤄질 때만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살면서 제일 우울한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한국 자살률이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것이다. 범죄나 자살률이 높아지는 것은 사회적 약자 책임이 아니라 한국의 폭탄 돌리기(bomb passing) 사회 구조의 문제다. 권력은 경제에 짐을 떠맡기고, 대기업은 1차 하청 기업에 떠넘기고, 제1차 하청 기업은 재하청 기업에, 하청기업은 다시 노동자에게, 정규직 노동자는 다시 비정규직이나 외국인 노동자에 떠넘긴다. 제일 약자는 떠넘길 대상이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 범죄나 자살밖에 없다. 이것은 경제 정의가 실종된 악순환 구조이다.

둘째, 세습 사회의 지속이다. 북의 3대 세습, 한국 재벌의 한결같은 3대 세습, 언론과 학원의 3대 세습…. 한국 시민 사회의 정의감이 참 약하다는 느낌이다.

셋째, 국제 사회 책임 투자 펀드가 전 세계적으로 5조 달러나 되는데 한국에는 별로 오지 않는다. 대신 헤지펀드가 들어온다. 한국은 투기 자본의 천국이다. 카지노 자본주의에 무슨 경제 정의가 있겠는가. 선진화보다 사회 정의의 확립이 중요하다.

프레시안 :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경제에 새로운 흐름이 필요하다는 움직임이 있는데 한국 정부는 둔감한 것 같다. 한국 정부가 경제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보는지, 정부에 주고 싶은 조언은 무엇인가?

김영호 : 한국 경제는 정의 구현에 실패한 경제다. 이 문제는 결국 정의의 문제라고 본다. 그래서 정부가 경제 정책에서 정의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사회 책임을 통해 성장하려는 질서를 확립하려는 것이 중요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에 "기부는 기업이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에서 배당받는 개인이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ISO 26000 이전의 사고방식이다. 미국 부자들이 하는 기부 형태다. 지금은 기업이 영업 활동의 일환으로 직접 기부한다. 기부는 하나의 투자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뿐 아니라 발바닥도 알게 하는 전략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 책임 이전 시대의 사고방식이다. 중세나 근대 초기의 기득권자들이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폭탄 돌리기 시스템을 정의로운 복지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노블레스 자체가 없어야 한다.

기업과 투자와 소비와 노동이 각각 사회 책임을 갖고 시장 활동을 하는 사회 책임 자본주의로 가야한다. 정의에서 책임으로 라는 말로 요약하고 싶다.

프레시안 : "정의롭지 않는 경제는 앞으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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