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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사고, 다음은 한국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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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원자력 사고, 다음은 한국 차례" [후쿠시마 1년, 핵 없는 세상을 꿈꾼다·①]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11일은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대형 참사가 난 지 정확히 일주년이 되는 날이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전 세계에 '탈(脫)원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독일은 2022년까지 자국 내 모든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기로 결정했고, 이탈리아는 원전 재가동 계획을 국민 투표로 전면 부결시켰다.

다른 국가들도 적어도 원전 확산을 자제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유독 한국만은 원전을 확대하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원전 확대 방침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최근 경남 밀양에서는 고리원전 5, 6호기에서 생산할 전기를 송신하는 송전탑을 세우는 데 반대해 농민 이치우(74) 씨가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목숨을 끊은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현실에서 "핵기술의 반대말은 민주주의이며, 원전은 약자를 희생하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다"는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의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녹색평론>, <평화네트워크>, <프레시안>은 지난 6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후쿠시마 1년, 핵 없는 세상을 꿈꾼다'는 제목으로 강연을 열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이날 '후쿠시마, 민주주의,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맡아 원전의 위험성과 역사, 원전과 민주주의의 관계 등에 대해 설명했다.

김 발행인은 "원자력 문제는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결국은 민주주의의의 문제"라며 "모든 정보를 진실하고 공정하게 제공하고 국민에게 판단을 맡겼다면 원자력발전소는 절대로 들어설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 발행인은 탈원전의 모델로 특히 1985년에 원전 도입을 반대했던 덴마크와 지난해 시민이 참여하는 '윤리위원회'를 만든 독일에 주목했다. 그는 "덴마크도 한국처럼 산업국가이고 석유 자원이 없으며 오일쇼크를 겪었지만, 시민합의회의를 연 끝에 시민들의 뜻에 따라 원전을 거부했다"고 강조했다. 독일에 대해서는 "원전 문제를 소위 말하는 '원자력 전문가'가 아닌, 전기를 쓰는 소비자 자신이 결정하도록 했다"는 점을 높이 샀다.

김 발행인은 "흔히 사람들은 원자력의 대안으로 재생가능 에너지를 꼽지만, 나는 원자력의 대안은 유기농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밝혔다. 재생가능 에너지를 개발해서 풍부한 전력을 쓰자고 주장하기 전에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물음인 "에너지가 풍부한 생활이 과연 좋은 삶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원전은 피폭노동자와 인근 지역에 사는 농민과 어민 등 약자들을 끊임없이 희생시키지 않고는 유지할 수 없는 시스템"이라며 "원전이라는 비인간적인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진정한 대안은 유기농으로 표상되는 자립, 자치, 분권적 삶의 광범한 회복 말고는 없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그의 강연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프레시안(최형락)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할 날이 후쿠시마 사고가 났던 3월 11일이다. 후쿠시마 사고의 영향은 앞으로 5년, 10년, 20년 후 우리나라에도 눈에 띄게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사고와 같이 대형 사고만을 따로 떼어내어 기억하지만, 이미 그 전부터 생태계는 방사능으로 심각하게 오염됐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2차 대전 이후 치열한 핵무기 개발 경쟁 과정에서 대기 중 핵실험이 무수히 행해졌다. 그리고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사고처럼 대형 사고가 나기 이전에도 알게 모르게 중요한 핵 사고들이 많았다. 우선 1957년 구소련에서 우랄 핵 참사가 일어났다. 고준위 핵폐기물처리장에서 쓰레기들이 핵반응을 일으켜 폭발한 사건이다. 당시 소련은 이 사고를 극비에 부쳤지만, 과학자들이 유출된 방사능을 인식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중국은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서쪽 위구르족자치구 사막지역에서 핵실험을 많이 했다. 심지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위구르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했다고 한다. 일부 전문가는 중국이 핵실험을 하면서 실크로드가 방사능에 상당히 오염됐다고 말한다.

바다도 방사능으로 오염됐다. 원자력잠수함에서 간혹 사고가 난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각 국가는 핵폐기물을 해양에 많이 버렸다. 나중에 핵폐기물 투기를 금지하는 국제협약이 맺어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바다 어디선가 핵폐기물이 버려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후쿠시마 사고로 지금도 태평양에는 방사능이 흘러들어오는 상황이다. 이러한 결과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원전과 암 발병률은 무관한가

평상시의 원전일지라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원자력발전소를 정상적으로 가동하는 동안에도 저선량 방사능이 끊임없이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고농도는 물론이고 저선량 방사능이라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 저선량 방사능을 장기적으로 쪼이는 것이 고농도 방사능을 단시간에 쪼이는 것보다 위험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원전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절대 안전하지 않다. 원전의 위험성을 연구하기 위해 일본의 이치카와 사다오 교수는 방사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주달개비'라는 꽃으로 실험을 했다. 이치카와 교수는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원전 주변에 자주달개비를 심은 결과 돌연변이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저선량 방사능이 생물체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다.

원자력발전소 주변이나 핵 실험장 부근에 이상할 정도로 유방암 발병률이 높다는 내용의 책도 있다. 1980년대 미국 보건부가 발표한 자료에 근거해 의료통계학자들이 역학적인 질병 발병률을 통계로 검토한 결과, 미국의 3000개 카운티에서 여성들의 유방암 발생률이 평균보다 2배가 넘었다. 공통점은 인근 50마일 내에 원자력발전소가 있었다는 점이다.

과학자들은 원자력발전소 주변에서 암이나 백혈병이 발병할 확률이 높다는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 왔다. 그때마다 정부나 업계 측의 과학자는 질병과 원자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부정했다. 세계보건기구(WHO)를 포함해 미국 정부가 강력한 입김을 행사하는 기관의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방사능 문제가 골치 아픈 이유는 '정설'이 없기 때문이다. 정설이 없는 것은 공적 기관이 방사능의 위험성을 인정하지 않는 데 연유한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서울대의 한 의학연구팀이 정부의 의뢰를 받아 원자력발전소 노동자들과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보건상태를 15년에 걸쳐서 추적해 그 결과를 지난해 12월에 발표한 적이 있다. 원자력발전소 인근 주민들의 갑상선암 발병률이 대조지역에 비해서 2.5배 높다는 데이터가 나왔다. 그런데도 결론은 "이러한 결과가 원자력의 영향 때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원전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정밀검사를 자주 받기 때문에 검사로 인한 통계상의 차이일 수 있다.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 측 연구는 늘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낸다. 원전 인근 주민들이 정밀검사를 자주 받아왔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이렇게 둘러대는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정부나 업계는 "자연에도 방사능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위험성을 축소한다. 그런데 자연방사선의 핵종(核種)은 인공방사선의 핵종과는 성격이 다르다.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신체는 장구한 진화과정에서 자연방사선에 일정한 정도로 적응력을 길러 왔다고 말하는 과학자도 있다. 그래서 자연방사선 중 일부는 우리 몸에 농축되지 않고 그대로 배출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원전에서 만들어지는 세슘이나 플루토늄과 같은 핵종은 몸속에 축적, 농축돼 내부피폭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정부나 업계에서는 왜 방사능의 위험성을 부정할까. 위험하다고 인정하면 원자력발전소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양심적인 과학자들도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앨리스 스튜어트(Alice Stewart)라는 과학자는 병원에서 찍는 엑스레이의 위험성을 발견한 결과를 발표했다가 주류 과학자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연구비 지급도 거부당했다. 그런데 현대 과학자들은 돈 없이는 제대로 연구를 못한다. 대다수 과학자들은 정부나 업계에 협조할 수밖에 없다. 독립적인 과학자도 드물게 있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는 길은 험난하다. 돈이 없으니 완벽한 연구를 할 만한 조건을 갖추기 어렵고, 그 때문에 그들의 연구결과에는 불가피하게 빈틈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어용학자들은 양심적인 과학자들이 내놓은 연구의 약점을 문제 삼아서 공격한다. "결함이 있는 연구라서 참고할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방사능이 무해하다는 신화를 퍼트린다.

체르노빌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원자력 마피아'들의 압력을 받는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공식적으로 체르노빌 피해자가 4000명이라고 발표했다. 구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보건담당 자문을 했던 과학자가 중심이 되어 구성된 연구팀이 2009년에 미국에서 발간한 보고서에 의하면, 체르노빌 사고로 희생된 사람은 98만5000명 이상이다.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게 오늘날의 방사능 과학의 현실이다.

독일은 어떻게 원전을 폐기했나

결국 최종적인 판단과 결정은 시민들이 해야 한다. 지난해 6월 독일은 자국 내 원자력발전소를 오는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고 결정했다. 결정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도 눈여겨 볼만 하다. 메르켈 총리는 17명으로 구성된 윤리위원회를 만들고 위원회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했다. 그래서 메르켈 총리는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민당정부 시절 환경부 장관 출신 인사를 윤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원전의 존폐를 가르는 중대한 문제에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는 '상식'에 입각한 결정이었다. 만약 한국의 정치 환경에서라면, 이렇게 엄정한 객관성을 지키면서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를 위원장에 임명할 수 있었을까?

중요한 지점은 또 있다. 윤리위원회 위원 17명 가운데 원자력 관계 전공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종교인, 생명윤리학자, 철학자, 시민 대표는 포함됐어도 소위 말하는 '원자력 전문가'는 한 명도 없었다. 어느 일본기자가 일본을 방문한 한 독일 윤리위원에게 "왜 전문가를 한 사람도 윤리위원회에 포함시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의 답변은 "전기 생산방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선택은 최종적으로 생활하는 시민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게 독일의 상식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결국은 누가 궁극적인 결정권을 갖느냐 하는 문제이다. 독일은 원전 문제의 최종 결정권이 관료나 업자나 전문가가 아니라 시민들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게 민주주의이다.

한국은 무슨 문제든지 관련 업계의 소위 전문가들이 결정한다. 교육 문제는 교육 전문가가 모여 토론하고 결정한다. 정작 아이를 키우는 당사자인 학부모들과 아이들 자신은 주체가 아니라 들러리다. 금융문제는 소위 경제전문가들이 모여서 결정한다. 빚을 지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요컨대 한국사회의 근본문제는 민주주의의 빈곤에 있는 것이다.

원자력 문제도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결국은 민주주의의 문제다. 모든 정보를 진실하고 공정하게 제공하고 국민에게 판단을 맡겼다면 원자력발전소는 절대로 들어설 수 없다. 민주주의 원칙을 무시하고 억지 논리를 펴면서, 원자력 발전을 시작하고 유지하며 강화하겠다는 것이 정치권, 업계, 관련 학자들의 논리다. 그들은 말한다. "전문가들이 당신들을 위해서 판단합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공공기관을 만들고 세금을 들여서까지 "원자력은 안전하고 깨끗하며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끊임없이 선전한다. 이들은 평소에는 원자력이 안전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다가 일단 사고가 나면 "방사능 그것 별 것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별 게 아니면 왜 평소에 원전이 안전하다고 그렇게 엄청난 비용을 들여 선전하고 강조하는가. 자가당착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원전'을 둘러싼 당국의 자가당착 사례는 또 있다. 한국 정부는 이미 수명이 다한 고리원전 1호기를 10년 동안 연장 가동할 것을 허가했다. 수명 연장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부산지방변호사회가 가동 중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재판부로 하여금 고리원전 1호기의 원자로 상태에 대한 자료를 제출하도록 명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한국수력원자력은 '국가기밀'이라는 이유로 재판이 끝날 때까지 끝내 자료를 내놓지 않았고, 재판부는 그 자료도 보지 않고 부산지방변호사회의 소를 기각했다. '국가기밀'이라는 말 한 마디에 국민의 안전이 뒤로 밀려난 것이다.

이처럼 업계나 정부는 핵심적인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다. 그들의 주장처럼 원전이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면 못 내놓을 이유가 있나? 원전 어딘가에 문제가 있고, 내놓으면 거북하고 비판받을 가능성이 있으니 국가 기밀이라는 핑계를 대고 자료를 안 내놓는 것이다. 그들의 논리대로 모든 게 국가 기밀이라면 어떻게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결국 원전 문제는 민주주의의 문제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반핵 시민운동이 활발했다면 이 지경까지는 안 왔을 것이다. 독일은 30년간 반핵운동을 통해서 탈(脫)원전을 이뤄냈다. 결국 원전의 미래는 시민들에게 달려있다.

원전이 프랑스에 많고 독일에 적은 이유

원자력발전소가 세계적으로 많은 나라를 보자. 사고 난 횟수로 따지면 원자력발전소 개수와 순번이 비슷하다. 프랑스(58기)에서 아직 중대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미국(104기), 프랑스(58기), 일본(54기), 러시아(33기) 순이고, 그 다음이 한국(21기)이다.

원전을 많이 보유한 나라는 대체로 2차 대전의 승전국이자 냉전 시대의 주역들이다. 원전의 뿌리가 핵무기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은 치열한 핵무기 경쟁을 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왜 끼었나? 대국주의 때문이다. 프랑스에는 미국, 소련에 못지않게 대국을 지향하는 국가주의적 정서가 뿌리 깊다. 2차 대전 이후 드골이 대통령을 하고 있던 때에 그런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그게 드골주의라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독일은 전체 전기 생산 방식 중에 원자력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 안 되는데, 프랑스는 원전 의존도가 근 80%에 달한다. 프랑스와 독일은 모두 지리적으로도 유럽의 중심에 있고 경제나 문화적으로도 비슷한 조건에 있다. 한쪽은 원자력에 덜 의존하고 다른 한쪽은 심한 근본이유는 대국주의 유무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은 히틀러의 존재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대국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였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로 독일 국민은 독일이 더는 군사적인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철저히 얻었다. 동독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였다가 에콜로지스트로 변신하여 1980년대 초 독일 녹색당 창당의 주역이 되었던 루돌프 바로는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나라든 소년들이 장난으로 흔히들 병정놀이를 하지만 독일 소년들은 전쟁 후에 병정놀이를 전혀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작대기만 가지고 놀아도 절대로 어른들이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독일에서는 전쟁에 대한 거부감이 철저했다는 것이다.

요즘도 독일에는 나치나 유태인 학살을 추모하는 박물관들에 학생들이 끊임없이 견학을 와서 교육을 받고 토론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냥 한번 둘러보고 가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진지한 시민교육, 정치학습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 때부터 독일시민들은 국민이 끊임없이 감시하지 않으면 국가는 언제라도 전쟁을 일으키고, 약자들을 희생시키는 괴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로부터 늘 생생하게 배우려고 하는 분위기가 독일에는 있다고 한다.

프랑스와 달리 독일이 상대적으로 원전을 덜 건설한 이유는 바로 그런 평화지향적인 정서 때문인 듯하다. 원전은 기본적으로 핵무기 원료를 생산하는 공장이다. 원자로를 가동하지 않으면 핵무기의 원료인 플루토늄이나 무기급 우라늄이 나오지 않는다. 원자력발전의 폐기물이 바로 핵무기 재료인 것이다.

한국에서도 인구에 비해서 원전이 이렇게 많은 까닭은 그동안 한국의 보수 우익계 권력자들이 은근히 핵무기 제조 가능성을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순전히 전력을 생산하고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미국은 어떻게 지진 많은 일본에 원전을 이식했나

일본도 마찬가지다. 뉴질랜드에는 지진의 위험이 있어서 아예 원자력발전소가 없다. 그런데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지진이 빈번히 발생하는 나라다. 지진학자들은 일본의 지진이 400년 주기로 활성화되고 둔화된다고 한다. 지난 400년간은 비교적 온건한 지진활동 시대였다면, 이제부터는 그 400년이 끝나고 지진활동이 강렬해지는 '대지동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지진학자들은 끊임없이 경고해왔다. 이러한 경고 때문에 일본의 대도시에서는 건물의 내진설계를 강화해왔다.

요즘에는 일본 정부도 조만간 도쿄 인근에 직하지진(도시의 바로 아래에서 일어나는 지진<편집자>)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강진이 일어난다면 도쿄 쪽은 아비규환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근 원전들은 물론, 지금 가까스로 안정화 작업이 진행 중인 후쿠시마 발전소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동아시아 지역은 아마 지옥이 될지도 모른다.

일본 사람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세계에서 가장 지진에 취약한 땅에 어떻게 54개나 되는 원자력발전소를 지었을까. 사실 이해가 안 된다. 왜 그랬을까. 간단히 말하면, 핵무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일본에서 쏟아지는 자료들 가운데는 그동안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은밀히 나누었던 발언들을 찾아서 공개한 것들이 꽤 있다. 그 기록을 보면, 일본 보수파 정치가들은 늘 "미국과의 원자력 협정 때문에 공개적으로 추진하지는 못하지만, 언제든 핵무기 제조가 가능하도록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게 분명히 드러난다. 일본에서는 원전 가동으로 플루토늄이 일 년에 몇 십 톤씩 나온다고 한다. 그게 모두 핵무기 원료이다.

원전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는 1953년 12월에 시작되었다. 당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유엔총회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제창했다. 그동안 원자력은 무기용으로만 인식됐는데, 그는 살상용 기술을 인류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전환하자고 제안했다. 정말 평화를 위해 원전을 도입하자고 했을까. 그렇지 않다. 냉전체제에서 미국이 소련과 경쟁하려면 핵무기 개발에 따른 엄청난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려면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의회는 국민의 지지 없이는 핵무기 개발에 드는 막대한 예산에 동의할 수 없다.

그래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 국민에게 원자력이 좋은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 국민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이후 핵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은 국민의 핵에 대한 거부감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원자력발전소라는 카드를 꺼낸 것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미국은 핵무기 제조용 원자로를 만들어 가동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핵무기 양산 시스템을 충족시키기에는 플루토늄 생산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핵무기 원료를 대량 확보하기 위해서도 원자력발전소의 확대가 필요했다.

아이젠하워는 2차 대전의 영웅이었다. 그 때문에 전쟁 후에 대통령이 됐다. 퇴임 시에 그는 "미국을 지배하는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군산복합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아직도 이 세계의 지배구조를 설명하는 중요한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자본이 군대와 산업을 매개로 확장해 나가는 세계적 지배구조가 구축됐음을 미국 대통령이 인정한 것이다.

그런 아이젠하워가 취임할 때 미국에는 핵무기가 2000개 있었다. 군산복합체에 의한 지배를 진심으로 걱정했다면 그는 핵무기를 통제했어야 했다. 인류의 장래를 위해서 핵무기 개발을 동결시킬 것을 고민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행동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핵무기는 써도 괜찮은 재래식 무기와 다를 바 없다"는 말을 자주했다. 영국 대사가 그의 발언을 본국에 보고하고 영국 수상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자제해달라고 말할 정도였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 핵무기를 쓰려고 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이젠하워는 심지어 일선 지휘관에게까지 '핵무기 발진 단추'를 누를 권한을 줬다. 아이젠하워가 재임 중에 미국 군인 수십 명이 '단추'를 누를 권한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베트남전쟁 관련 국방부 기밀문서를 폭로했던 다니엘 엘스버그는 "아이젠하워 시대에 핵전쟁이 안 일어난 것은 기적"이라고 했다. 아이젠하워에게는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소련을 무력화시킬 생각밖에 없었다. 참모들에게 핵폭탄으로 소련을 붕괴시킬 수 있는 시나리오를 쓰라고 계속 요구했다고 한다. 그가 퇴임할 때는 취임할 때보다 열배가 넘는 핵무기가 쌓였다.

아이젠하워의 '원자력의 평화 이용'이라는 논리는 원자력 기술을 동맹국에 팔아 이윤을 남기는 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동맹국이 무차별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통제하려고 만든 기구가 바로 '국제원자력기구(IAEA)'다). 그 일차적인 타깃은 일본이었다. 일본을 공략하면 원자력을 확산하기 쉬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일본은 유일한 피폭국이고 핵기술에 대한 저항감이 가장 큰 나라다. 아이젠하워는 피폭국 일본이 원자력 발전 시스템을 받아들이면 다른 국가들에서 원자력을 확대하는 것은 쉬울 것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미국은 대대적인 공작을 했다. 외교관, 홍보요원, 정보기관을 총동원하여 일본인의 '핵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려고 했다. 그 앞잡이가 된 사람이 일본 프로야구의 창설자이자 세계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요미우리> 신문의 사주, 쇼리키 마쓰타로였다. 쇼리키는 미국 측의 자금을 받아서 텔레비전 방송국도 세웠다. 그는 신문과 방송을 이용하여 대대적으로 원자력 홍보에 나섰다. 미국의 기술자들도 와서 일본 전역을 돌면서 원자력 박람회를 열었다. "원자력이라는 꿈의 에너지로 인류는 엄청난 안락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인식이 일본 국민들에게 광범하게 주입되었다.

그 결과 일본 사람들은 또다시 미국이 주도하는 원자력 체제의 앞잡이가 되는 운명이 됐다. 자발적인 기술 도입이라는 형식을 갖추기는 했지만, 원폭의 희생자인 일본 국민이 결국은 후쿠시마 사태에서 보는 것과 같이 원자력발전 시스템의 최대 희생자가 되는 비극이 이때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일본은 2차 대전 이후 외교적으로는 거의 미국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일본의 자주성 상실, 민주주의의 빈곤이 과다한 원전 도입의 원인이 됐다고 할 수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일본 국민은 일방적인 홍보에 속아서 원자력 기술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원폭 피해자들조차 원자력발전소는 좋은 것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내용을 어느 정도 아는 전문가들은 대세에 밀려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 결과로 '원자력 마피아'가 생기고, 정관계, 업계, 학계, 언론계로 구성되는 이들의 이해관계가 결합되면서 일본의 원자력 체제가 확고해진 것이다.

한국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조봉암 선생이 이끌었던 옛 진보당의 강령을 보면 원자력 예찬이 몇 페이지나 계속된다. 그렇게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1959년에 서울대학교에 원자력공학과가 생기자 전국의 수재들이 몰려들었다. 핵폐기물 처리 문제는 생각도 안 해봤거나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조만간 해결방법이 나올 것이라고 순진하게 낙관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다가 여기까지 왔다.

세계적으로 1970년대에 원전이 많이 확산됐는데, 오일 쇼크 때문이었다. 그러나 1979년의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 1986년의 체르노빌 사고 이후에 원전 건설은 주춤했고, 20년이 지나 다시 원자력 산업이 부흥하려는 기미를 보이다가 후쿠시마 사고가 터졌다.

원전의 역사는 2차 대전 이후 세계 산업국가들이 걸어온 민주주의 역사를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국가가 얼마나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인가는 원자력에 관한 대응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미국도 일본도 결코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없다. 원전을 확대해온 국가의 역사는 한 마디로 국민을 기만해온 역사였다. 체르노빌 사고 역시 소련이 비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과 직결된 문제였다. 지금 세계에서 핵 문제에 대해 크게 우려하며 발언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고르바초프이다. 그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최고 권력자이면서도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체르노빌 사고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소련이 망한 것도 체르노빌 사고의 여파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원자력은 모든 점에서 민주주의의 적이다.

덴마크는 어떻게 원전을 거부했나

이런 점에서 덴마크의 예는 주목할 만하다. 덴마크에는 원자력발전소가 없다. 덴마크도 산업국가이고 석유 자원이 없으며 오일쇼크를 겪었다. 당연히 원전을 건설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을 것이다. 덴마크에도 원전을 도입하자는 사람이 많았다. 덴마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덴마크에는 원자력이나 유전자조작식품과 같은 과학기술에 관련된 중요한 국가정책을 결정할 때, '시민합의회의'를 여는 전통이 있다. 평범한 시민들끼리 모여 양쪽 전문가를 초청하여 충분히 찬반 의견을 듣고 시민들이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구조다. 말하자면 직접 민주주의적 참여정치이다.

이렇게 되면 시민들의 식견이 높아지고, 성숙해진다. 그게 건강한 사회가 되는 기본 조건이다. 원자력 도입 여부를 놓고 치열한 토론을 벌이면서, 덴마크 시민들은 "전기를 풍부하게 쓰는 것이 인간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철학적인 문제까지 토론했다. 전국적 규모의 시민합의회의를 토론 끝에 그들은 "우리는 풍요로운 사회가 반드시 전력을 풍부하게 쓰는 사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원자력은 장점이 있으나 위험하고 폐기물 처리가 곤란하다는 단점이 있다. 다른 에너지원을 개발하자. 모자라면 우리가 검소하게 살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원자력 문제에 관한 한, 제일 바람직한 사회는 덴마크다. 시민들이 이렇기 때문에 국회의원이 업계와 유착돼도 함부로 원전을 도입하자고 못한다. 독일은 이미 원전을 지었으니까 그렇게 이상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단 저지른 과오를 반성한다는 것도 본받을 만한 태도이다. 결국 원자력 문제는 민주주의로 귀결된다.

한국은 어떤가. 형식적으로 여의도에 국회의사당 하나 만들어 놓고 4년 만에 투표한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자동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이런 식으로는 사실상의 권력 독과점 시스템을 면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정치는 소위 엘리트들의 전유물이다. 늘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현재 정치 시스템에서 양심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선거에 나와 선거 운동할 수 있나? 돈과 조직에 기대지 않으면 절대 못한다.

대의민주주의는 결함이 많다. 결함 많은 대의민주주의를 실질적인 민주주의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부수적인 보완장치가 필요하다. 첫째, 시민이 데모를 많이 해야 하며, 데모가 당국의 허가 사항이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국민투표나 주민투표, 그리고 임기 중에도 선출된 자를 그만두게 하는 소환제가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셋째, 시민들이 자기 의견을 자주적으로 표현하고 동료 시민들과 토론할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 즉, 숙의민주주의가 마련돼야 한다. 이처럼 여러 요소들이 상호작용함으로써 민주주의 사회는 건강하게 유지되고 성장할 수 있다.

원전 많은 프랑스보다 한국이 위험한 이유

'민주주의의 성숙'이라는 측면에서 원전 문제를 바라보자. 지금 한국보다 프랑스에 원전이 많지만 앞으로 언젠가 중대사고가 난다면 그것은 프랑스보다는 한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안전문제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고, 동시에 시민들이 원자력 안전문제에 감시, 관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는 현재 '환경리스크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제도가 있다. 정부, 관료, 기업, 과학자, 언론, 일반시민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정보를 공유하고, 상호이해를 깊게 하는 제도이다. 이익집단이나 전문가만의 참여로는 좁은 시야에 갇히기 때문에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는 일반시민들의 참여를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시스템이다. 정보의 공개와 투명성은 원자력 문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을 프랑스에서는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적인 원전관리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에서 사고가 날 확률이 한국보다는 낮다는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 비슷한 규모의 사고가 만일 한국에서 터진다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감당할 수 없다. 여러분들은 한국의 원자력발전소가 100% 안심할 만큼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일본은 지진 때문에 사고가 났다고 하지만, 스리마일섬과 체르노빌은 각각 다른 이유로 사고가 났다. 앞으로 어디서 사고가 난다면 전혀 다른 원인으로 사고가 날 것이다. 만일 한국의 원전에서 중대사고가 난다면 그날로 이 나라는 끝장날 것이다.

원전 폐쇄하면 에너지 대란 온다?

원전 추진론자들은 한국에서 원전 가동을 중단하면 에너지 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늘 위협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원전 가동을 중단하기로 결정한 독일은 유럽을 휩쓸고 있는 이번 겨울 한파에도 끄떡없이 지내는데, 원전 의존율이 80%에 달하는 프랑스가 오히려 독일에서 전기를 수입해서 쓰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은 현재 원자력발전소를 절반도 가동하고 있지 않은데도 오히려 전력이 남아돌아서 프랑스에 수출을 하고 있다. 프랑스가 이렇게 된 것은 전력 낭비가 구조화되고, 생활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가정의 난방에도 전기를 쓴다. 난방을 전기로 하는 것은 가장 비효율적인 시스템이다. 한국에도 최근 전기난방기가 너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도 이 현상을 개선해야 하겠다는 의지가 없다. 풍부한 전력 생산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절제된 전력 사용이다.

일본은 현재 전체 54기 원전 중에 2기만 가동하고 있다. 올 4월부터는 그 2기도 정기검사에 들어가면서 가동 정지된다. 일본 원전이 100% 멈춰지는 셈이다. 그런 상황인데도 일본에서 전력 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없다. 물론 기름과 천연가스는 예년보다 많이 사들이고 화력발전소도 예전보다 많이 돌리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정부 관계자들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것처럼 "원자력 없으면 금방 깜깜해질 세상"이 오지는 않았다.

지금은 일본 사람 중 70% 이상이 "원자력발전소 없이 살고 싶다"고 답한다고 한다. 지난해 3~6월까지만 해도 여론조사를 하면 "그래도 원자력발전소를 돌려야 한다"는 대답이 많았다. 그렇게 엄청난 사고가 난 뒤에도 한동안 여론이 그랬다. 정부와 업계 대변인 노릇을 해온 주류 미디어들이 늘 원자력에 관한 그릇된 정보를 제공해왔던 탓이다. 원전 가동이 중단된 지금은 일본에서도 원자력 없이 살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다.

ⓒ프레시안(최형락)

"원자력의 대안은 유기농"

후쿠시마 사고 직후 최초의 희생자는 인근에서 유기농 농사를 하던 70대 농부였다. 그 농부는 평생 애써 가꾸어온 농사기반이 하루아침에 파괴되어 버린 현실 앞에 절망하여 자살했다. 원자력 사고의 최초의 희생자가 다른 사람 아닌 농민이라는 사실은 극히 상징적이다. 농민은 인간 생존의 토대 중의 토대를 보살피는 사람이다. 원자력은 이 토대를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생명의 적이라는 사실을 후쿠시마의 그 늙은 농부가 자신의 죽음으로 증언한 것이다.

요즘 흔히 사람들은 원자력의 대안으로 재생가능 에너지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나는 원자력의 대안은 재생가능 에너지가 아니라 '유기농'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원자력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핵 없는 세상이 과연 어떤 세상일지 제대로 상상을 할 수가 없다.

재생가능 에너지가 틀렸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원자력 시스템의 대안이 바로 재생가능 에너지라고 말하면, 단지 전력 생산방식의 전환만 이루어지면 된다는 차원에서 생각이 머물기 쉽다. 그리고 재생가능 에너지라면 전기를 얼마든지 풍요롭게 써도 괜찮다는 얘기가 되기 쉽다. 중요한 것은 근원적인 물음이다. 다시 말해서 에너지가 풍부한 생활이 과연 좋은 삶인가 하는 것이다.

원자력의 문제는 안전성뿐만 아니라 더 심각한 문제, 즉 인간차별이라는 문제를 구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원전은 약자들을 끊임없이 희생시키지 않고는 유지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원전의 위험구역 내에 들어가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장 노동자가 대표적이다. 원전은 평상시에도 끊임없이 인간의 손이 필요한 수많은 기계장치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피폭을 각오하고 들어가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 노동자들은 대개 정규직도 아니고 하청, 재하청을 몇 단계나 거친 뜨내기 노동자들이다. 세상에 어느 누가 자진해서 그 위험지역에서 시시각각 공포를 느끼며 무거운 장구를 착용한 채 힘겨운 노동을 하려고 하겠는가. 먹고 살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그런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최약자 없이는 원자력발전소는 돌아가지 못한다.

후쿠시마 사고 현장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원전 노동자가 교체되고 있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출입과 피폭량을 체크하는 관리대장이 엉망이라는 얘기가 들린다. 아마도 고의적인지도 모른다. 법적 제한 수준 이상으로 방사능 피폭이 되지 않도록 노동자들의 신분과 피폭 상태를 철저히 점검한다면 대량으로 필요한 노동자 확보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야쿠자들이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이나 노숙인들을 반강제적으로 데려와서 원전 작업장에 투입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용납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일들이 원전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도 노동자지만, 원전 인근 주민들은 늘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지낸다. 사고가 나지 않아도 평상시에도 저선량 방사선이 누출되는 게 원자력발전소이다. 그 결과 토양도 물도 장기적으로는 오염되고, 그러면 그게 농작물이나 먹을거리에도 영향을 미치고, 결국 피해는 모든 사람에게 옮겨갈 것이다. 물론 당장 직접적인 피해를 받는 사람은 현지 주민-농민과 어민들이다.

문제는 약자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고, 사람들이 안심과 평화 속에 자식을 낳고 기를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재생가능 에너지를 통해서 풍부한 전력을 쓰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원전을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돼야 한다. 그래서 나는 원자력의 대안은 재생가능 에너지가 아니라 유기농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내가 존경하는 어떤 분의 영향 때문이다. 스치다 다카시라는 분인데 원래 교토대학 금속공학과 교수로 있던 학자였다. 스치다 선생은 1970년대 초 오일쇼크 현상을 겪으면서 "석유뿐만 아니라 지하자원들이 모두 결국은 재생 불가능한 물질들이다. 이런 것들을 기반으로 유지되는 산업사회는 조만간 붕괴할 수밖에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결과 그는 금속공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시내로 나와서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이라는 시민단체를 만든다. 산업사회란 결국 사람이든 물자든 일정하게 쓸모가 있는 동안은 사용하다가 버리며, 낭비를 강요하는 시스템이라는 데에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 얼마동안에는 실제로 넝마주이가 되어 시내를 걸어다니며 깡통, 비닐봉지, 휴지를 수집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회원을 모집하여 도농간 농산물 직거래 운동을 시작했다. 스치다 선생을 나는 서울에서 두어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자신은 학교에서 연구생활을 할 때보다도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들과 어울려서 텃밭을 가꾸고, 콩을 수확하여, 메주를 쑤고, 된장을 만들 때에 가장 재미있기도 하지만, 그런 생활에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원자력을 허용할 수 없는 제일 중요한 이유는 그 체제가 공생의 원리를 부정하는 산업사회의 정점에 있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스치다 선생의 이런 견해에 힌트를 받아서 나는 원자력의 대안이 유기농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기농은 땅을 돌보고 아끼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농민들이 농민공동체라는 기반 위에서 행하는 공생 농법이다. 그러므로 유기농을 제대로 하려면 자연의 이치를 존중하고,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배타적인 경쟁원리는 산업농의 원리이지 결코 유기농의 원리가 될 수 없다. 스치다 다카시 선생은 남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려면 무엇보다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검소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을 그는 공생공빈(共生共貧)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

'공생공빈'이란 따져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것은 공동체적 협동생활에 기반한 자립과 자치를 통해서 평화롭게 살아온 농민공동체의 오랜 지혜에 뿌리박고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배타적인 경쟁 논리인 '부국강병'의 반대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언제나 국익을 내세우고 부국강병을 말하면서 사회적 약자와 자연을 수탈, 착취해온 국가-자본의 논리와 농민생활의 원리는 근본적으로 상극일 수밖에 없다.

원자력 시스템은 국가와 결합된 자본가, 그리고 이에 충성하는 어용학자, 어용언론, 온갖 기득권으로 구성된 막강한 권력체제의 주요 구성부분이다. 이 체제는 원천적으로 민주주의를 부정하며, 사회적 약자와 자연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 비인간적인 체제이다. 여기에 대항하기 위한 힘은 물론 시민들에게 달려 있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이 비인간적인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진정한 대안은 유기농으로 표상되는 자립, 자치, 분권적 삶의 광범한 회복 말고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오는 13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2층 강당에서는 '핵무기를 통해 본 전쟁과 평화'라는 주제로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의 두 번째 강연이 이어집니다. (☞ '후쿠시마 1년, 핵 없는 세상을 꿈꾼다' 알림기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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