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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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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데인저러스 메소드>
I. 프로이트와 융의 위험한 방법론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데인저러스 메소드>에 등장하는 근대 정신분석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프로이트(비고 모르텐슨 분)와 그의 정신분석학이 강조하는 개인 무의식에서 벗어난 집단 무의식에 대한 연구의 선구자였던 융(마이클 패스밴더 분)의 관계는 근대적 개인의 관계나 사회적 관계의 한계를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서구적 근대의 인문학이 기독교 성서해석학과 과학적 문자해석학의 결합인 것처럼 신과 인간, 혹은 원본과 복사본의 이분법은 개인(무의식)과 사회(무의식)의 이분법이 모든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구성하는 근대적 분과학문 체계를 지배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은 신을 선택할 것인가 인간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인문학은 문학이나 역사학 혹은 철학에서 언급하는 저자의 원본을 선택할 것인가 분석자의 복사본(해석학)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사회과학은 개인(자본가나 지배자)의 이익이나 권력을 선택할 것인가 사회(노동자나 국민)의 이익이나 권력을 선택할 것인가가 근대 분과학문 체계의 근본적인 대립과 갈등의 구조를 만든다. 그러나 두 선택지 중에서 인간은 신에 의해서 규정된 인간이고, 복사본은 원본에 의해서 규정된 복사본이며, 노동자나 국민은 자본가나 지배자에 의해서 규정된 노동자나 국민이기 때문에 근대적인 지식은 근대적인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KT&G 상상마당 배급, 영화사폴 수입)
프로이트는 20세기 초반 정신분석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체계를 세운 사람이다. 19세기 말까지 서구 유럽의 인간학은 기독교 성서 해석학에 등장하지 않는 인간 무의식의 세계나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한 자연의 세계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 틈바구니에서 20세기 초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인간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이다. 그러나 그는 의식의 세계가 아닌 무의식의 세계, 즉 '리비도'라는 생명의 힘을 발견하자마자 곧 그것을 근대 가족주의의 감옥 안에 가두어버렸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단순히 정신의학의 한 분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의 의학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나 대학의 교육체계, 그리고 근대국가의 기업과 정부, 군대, 법원 등등의 모든 구조를 지배하였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근거한 근대국가의 국가장치들이 만드는 '아버지-엄마-나'라는 가족주의의 삼각형 속에서 '나와 너'라는 친구와 연인의 동맹관계나 동지관계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지배와 피지배의 서열구조만이 존재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프로이트의 지도를 받았던 융은 리비도나 무의식을 오직 오이디푸스의 성적 욕망으로 규정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의심하면서도 별다른 방법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제시하는 '대화치료(talking cure)'의 방식을 채택하여 정신이상 환자를 치료한다.

문제는 칼 융이 아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교육기관과 병원, 법원과 정부, 그리고 경찰과 군대, 언론과 정당 등등의 모든 국가장치들은 칼 융과 같은 의심도 없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제공하는 '아버지-엄마-나'라는 가족주의의 삼각형 모델을 자체의 핵심 구조로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 아버지의 힘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자본과 권력이다. 대한민국의 국가 장치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칼 융과 같은 의심도 없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문학과 역사학 그리고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학과 경제학 그리고 사회학 등등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이다. 이러한 근대 식민지성의 권력과 지식은 우파와 보수적 지식인들에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좌파와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데이저러스 메소드>는 서구 근대성의 지식, 그리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근대 식민지성의 지식이 탄생한 그 자리에서 신, 원본, 그리고 자본가와 지배자의 편에 있는 프로이트와 그것을 의심하고 회의하는 인간과 복사본, 그리고 노동자와 국민의 편에 있는 칼 융의 관계 속에서 오늘날의 근대성과 식민지성을 재생산하는 정신분석학의 이분법적 구조를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II. 프로이트의 리비도와 원효의 아라야식

근대 정신분석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프로이트보다 1300년 전 신라에서 한국 불교학의 새벽이라고 알려진 원효(元曉)의 <대승기신론소·별기>에는 프로이트의 '리비도'보다 더 뚜렷하게 무의식이나 욕망, 혹은 창조적 생명력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라야식(阿羅耶識)'에 대한 논의가 아주 뚜렷하게 등장한다. '리비도'나 무의식에 해당하는 '아라야식'만이 아니라 칼 융이 프로이트에게 반기를 들면서 제시한 역사(사회)적 무의식, 즉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후기에 제시한 '전의식(前意識, preconsciousness)'이나 '슈퍼에고(super-ego, 초자아)'에 해당하는 '말나식(末那識)'은 물론이고, 19세기의 헤겔이나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이데올로기의 의식과 18세기의 존 로크가 이야기하는 '인간 오성론(人間悟性論)'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원효의 글에는 '안이비설신'의 오성(제5식)과 의식(제6식)-말나식(제7식)-아라야식(제8식)이 세계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의 방법론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원효가 제시하는 무의식의 '아라야식'은 욕망이라는 창조적 생명력이고 깨달음의 힘이기 때문에 가족주의나 국가주의가 개입하는 그 어떤 서열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학에서 바라보는 모든 인간이나 사회 혹은 자연의 관계는 도반(道伴), 즉 깨달음의 길을 함께 가는 친구나 연인의 관계이지 지배와 피지배, 혹은 주인과 노에의 관계가 아니다.

▲ 사비나 슈필라인 역은 키이라 나이틀리가, 칼 융은 마이클 패스벤더가 맡아 열연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근대성과 식민지성을 구성하는 지식과 권력은 고대 신라의 한국 불교학을 원시적이거나 야만적으로 치부하면서, 오직 서구의 근대적 지식을 구성하는 프로이트나 헤겔, 혹은 융이나 데카르트만을 우러러보며 근대 식민지성의 지식과 권력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이 서구적 근대 정신분석학의 두 흐름을 창시한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학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원시적으로 구성되었는가를 역설적으로 제시하는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상당히 충격적이다. 그 충격은 프로이트와 융 때문이 아니다. 프로이트와 융 사이에서 융과 프로이트의 징신과 치료 환자이기도 하면서 연인인 동시에 동료 학자였던 아동심리학의 창시자였던 사비나 슈필라인(키이라 나이틀리 분)이 프로이트와 융을 넘어서서 '리비도'라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을 실천하고 논리화하였다는 것이 충격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주요한 연구방법론으로 채택되고 있는 정신분석학에서 사비나 슈필라인은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데인저러스 메소드>가 제시하는 것은 사비나 슈필라인이 융이나 프로이트보다 뛰어난 정신분석학자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만이 오직 진실한 사랑, 혹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비나 슈필라인이 어렸을 적의 폭력적인 아버지 때문에 만들어진 성도착에서 벗어나 뛰어난 아동심리학의 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마조히스트적인 욕망을 이해하고 그녀를 사랑한 융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의사와 환자였던 융과 슈필라인이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서 둘이 친구 관계와 연인 관계로 정신과 치료뿐만 아니라 욕망과 무의식을 사유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지니고 있는 오이디푸스 삼각형 구조의 가족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융이 환자였던 슈필라인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을 인식하고 있었던 동료 정신의학자 오토 그로스(벵상 카셀 분)의 "오아시스가 보일 때는 반드시 멈춰서 물을 마셔라"라는 욕망의 흐름을 스스로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슈필라인과 융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로가 서로에게 환자가 되고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융이 오토 그로스와 친구관계가 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슈필라인과 연인 관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부자 관계를 모델로 정신분석학과 지식을 이해했던 프로이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융은 근대적인 사회의 스캔들에 대한 비난, 경제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아내 엠마의 가족주의, 그리고 정신분석학자라는 학문적 권위와 명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융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슈필라인은 자신의 새로운 주치의로 프로이트를 선택하여 그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녀는 프로이트의 가족주의적 욕망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의 학문적 동료가 되기 위하여 그를 찾아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욕망이 지니고 있는 무의식의 창조적 생명력, 즉 가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자아에서 벗어나 그러한 자아를 파괴하는 힘이 "새로운 창조적 생명력"으로 작동한다는, 즉 욕망은 지속적인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에 있는 생명의 흐름이라는 들뢰즈의 탈근대적인 욕망의 인식, 혹은 사회적이거나 기족적인 현실의 업(業)으로부터 탈각해야만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원효의 '아라야식' 인식론과 유사한 자아상실의 충동이론을 프로이트에게 제시한다. 프로이트는 슈필라인 때문에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한 단계 더 진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융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 즉 부자 관계를 모델로 하는 학문적 사제 관계를 미끼로 슈필라인을 자신의 곁에 두려고 한다. 프로이트는 또한 슈필라인이 제시하는 자아상실의 충동이론을 '죽음충동(타나토스)'이라고 명명할 뿐,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이 지니는 '리비도'의 근원적 힘을 인정하지 않는다. 근대의 사회적 권위주의와 자본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III. 탈근대의 생명학

▲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의 한 장면

슈필라인과 융은 6년 만에 스위스에서 다시 재회한다. 융은 슈필라인과 다시 연인 관계와 친구 관계로 되돌아가서 슈필라인과 함께 환자의 치료를 중심으로 하는 정신분석학이 아닌 인간의 생명학에 대한 논문을 쓴다. 그리고 근대의 냉철한 이성만으로 근대적 삶에 안착하려고 했던 융은 자신이 아이를 임신한 채로 러시아로 떠나려 하는 슈필라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오열하며, 열정과 생명, 즉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이 인간이라는 생명체를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이성은 단지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을 가족주의나 국가주의의 감옥에 가두려는 덫일 뿐이다. 감각과 느낌, 즉 본능적으로 모든 사회적 이분법을 넘어서서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즐거움을 갈망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다. 융은 슈필라인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학문적인 진전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람의 가치, 즉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슈필라인에게 고백한다. 영화는 그곳에서 끝이 난다. 그러나 슈필라인과 융이 서로 함께 있었다면, 융과 슈필라인은 프로이트의 근대적 정신분석학에서 벗어나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을 근원적으로 밀고 들어가 마침내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탈근대의 생명학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문제는 수필라인이나 융, 혹은 프로이트가 아니다. 그들은 100년 전 근대 기독교주의가 팽배한 서구 유럽에서 무의식이나 '리비도'라는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서구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정신분석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구조를 탄생시킨 사람들이다.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지난 100년 동안의 근대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대학과 병원, 국가와 법원, 그리고 정부와 정당 등등의 구조 속에서 프로이트와 융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신처럼 작동한다. 근대적 이분법이 확대되어 프로이트와 융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근대 식민지성이 대한민국의 국가 속에 스며들어 국가와 사회와 가족과 개인의 몸을 지배하는 의식, 즉 근대의 냉철한 이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학적 '대화 치료법'이 슈필라인과 같은 뛰어나고 창조적인 여성을 서서히 죽이는 너무나도 '위험한 방법론'이라고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서구 유럽 스스로가 프로이트와 융에서 벗어나 슈필라인이 제시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생명력을 현실 속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우리는 1300년 전 원효의 <대승기론론소·별기>에 등장하는 '아라야식'을 다시 불러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슈필라인과 들뢰즈와 원효가 만나는 탈근대의 생명학으로 세계를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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