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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맛>, 연약해서 아름다운 섹슈얼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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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맛>, 연약해서 아름다운 섹슈얼리티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탈근대인들의 등장 :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
I. 탈근대인들의 등장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로 데뷔하여 한국 탈근대 영화들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 있는 감독들 중의 하나로 굳게 자리를 잡은 임상수 감독이 <돈의 맛>에서 과거의 영화들과 다른 본격적인 탈근대인의 전형을 영화 스크린에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돈의 맛>에 등장하는 윤나미<김효진 분)와 주영작(김강우 분)이다.

▲ <돈의 맛> 포스터 ⓒ휠므빠말
근대적 영화들의 전형들과는 달리 <돈의 맛>에 등장하는 나미와 영작은 영웅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 속의 나미와 영작은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윤나미의 섹시한 자태와 지적이며 냉소적인 언술, 그리고 주영작의 근육질 남성미와 침착함이 어우러지면서도 자본주의의 권력 앞에서 하염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성,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그의 내재적 힘. 영화 속에서 그들은 영웅들이 갖출 모든 조건들을 갖추었음에도 영웅들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소시민의 관객들에게 더욱 가깝다. 물론 <돈의 맛>에서 윤나미와 주영작의 등장은 윤회장(백윤식 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윤 회장과 같은 근대적 영웅의 비극이 윤나미나 주영작과 같은 매력적인 탈근대인을 등장하게 하는 것이다.

임상수 감독의 모든 영화들은 1998년을 기점으로 하는 그 이전 대한민국 사회의 근대성과 그 이후 대한민국 사회의 탈근대성을 가로지른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1998년이라는 역사적 기점은 근대적 남성과 다른 탈근대적 여성의 등장이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에 등장하는 호정(강수연 분)이와 연(진희경 분)이와 순(김여진 분)이의 생기발랄함과 섹슈얼리티가 바로 탈근대성이다.

그러나 임상수 감독은 <처녀들의 저녁식사> 이후 그들의 탈근대적 생기발랄함과 섹슈얼리티가 <바람난 가족>(2003)에 등장하는 근대적 가족주의와 <그때 그 사람들>(2005)이 보여주는 근대 식민지 권력의 국가주의, 그리고 <오래된 정원>(2006)에서 드러나는 근대 식민지 권력에 저항하는 저항적 근대성에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으면서 근대적 식민지성의 가족주의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희생적 도구들이었음을 보여준다. 임상수 감독의 근대 식민지성에 대한 탐구는 <하녀>(2010)에서 은이(전도연 분)의 생기발랄함과 섹슈얼리티가 말기 근대의 신자유주의가 지니는 자본의 폭력 앞에서 그 아름다움이 무참하게 찢기는 사건으로 절정에 이른다.

대한민국 사회의 근대적 역사와 가족의 질곡들을 보여주던 임상수 감독이 <돈의 맛>에서 근대 식민지성 대한민국 사회의 질곡으로부터 온전하게 벗어나 윤나미나 주영작과 같은 매력적인 탈근대인들을 등장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식민지적 근대성과 저항적 근대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윤 회장의 죽음 때문이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에 등장하는 세 여성들의 생기발랄함과 섹슈얼리티는 오직 젊은 여성들만의 전용물이 아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생기발랄함이 지니는 생명성과 섹슈얼리티가 지니는 관계성은 가족과 사회, 그리고 국가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들이다.

<돈의 맛>에서 윤 회장이 식민지적 근대성에서 저항적 근대성으로 자신의 삶을 전환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인간이 지니는 생기발랄함의 생명성, 그리고 가족과 사회와 국가의 관계성이 마치 섹슈얼리티처럼 상호 생성적이어야만 한다는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그 깨달음은 그가 "돈의 맛"이 주는 순간의 달콤함이 아니라 에바(마우이 테일러 분)의 근원적인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II. 탈근대의 가족과 사회와 국가

▲ 배우 김효진이 윤나미 역을 맡았다. ⓒ휠므빠말

윤 회장이 에바의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에 매료되고 그의 생명성과 섹슈얼리티로 그녀를 매료시킨 것은 둘의 관계가 새로운 탈근대의 가족과 사회와 국가의 출발점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가족과 사회와 국가는 근원적으로 생명성을 토대로 서로가 서로에게 매료되고 서로가 서로를 매료시키는 관계의 산물이다. 서로가 서로를 매료시키고 매료되는 가족은 즐거움과 쾌락의 관계를 생산하고, 서로가 서로를 매료시키고 매료되는 사회는 즐거움과 쾌락의 윤리와 도덕을 만들며, 서로가 서로를 매료시키고 매료되는 국가는 즐거움과 쾌락을 재생산하는 생산적 지식을 생성시킨다. 서로가 서로를 매료시키고 매료되는 윤 회장과 에바의 관계는 필리핀에 있는 에바의 자식들과 함께 즐거움과 쾌락의 관계를 생산하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새로운 사회와 국의 토대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근대 식민지성의 자본주의적 사회와 식민지 권력의 국가가 개인의 일탈을 도저히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바의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에 매료된 윤 회장의 낭만주의적인 저항적 근대성은 근대 식민지성의 가족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국가주의의 폭력적 근친관계를 너무 얕본 것이 문제였다.

근대 식민지성의 가족주의에서 가족은 결코 서로가 서로를 매료시키고 매료되는 즐거움과 쾌락의 관계를 생산하는 가족이 아니다. 가족주의는 가족의 관계를 자본과 권력의 관계로 한정시킨다. 가족의 관계를 자본과 권력의 관계로 한정하는 것은 근대 가족주의의 가족을 근대 자본주의의 사회와 근대 식민지성 국가주의의 국가에 가족의 구성원들을 종속시키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자본과 권력의 관계에서 일탈한 윤 회장은 더 이상 근대 식민지 가족주의가 작동하는 윤 회장 가족의 자식이 아니며, 남편이 아니고, 아버지가 아니다. 따라서 윤 회장이 근대 식민지성의 가족주의로부터 탈주한다는 것은 근대 식민지성의 자본주의 사회와 근대 식민지성 국가주의의 국가로부터 탈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탈주는 치밀하고 서서히 준비하면서 순식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탈주는 결코 과거의 영토로 다시 돌아오면 안 된다. 마치 <그때 그 사람들>에 등장하는 김재규(백윤식 분)처럼 윤 회장은 치밀하지도 않았고, 또한 과거의 영토, 즉 자본주의의 사회와 근대 식민지성 국가주의의 국가로 되돌아오는 잘못을 범했다.

▲ 배우 김강우가 주영작 역을 맡았다. ⓒ휠므빠말

윤 회장의 생명성과 그의 섹슈얼리티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그를 보호하고 싶었던 주영작은 윤 회장의 영웅적 죽음을 보았다. 아마도 그것은 나미가 어렸을 때 보았던 <하녀>에 등장하는 은이의 영웅적 죽음일 수도 있고, 실제의 역사를 다루었던 <그때 그 사람들>에 등장하는 김재규의 영웅적 죽음을 본 관객들의 감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윤 회장(혹은 실제의 역사에서 나타난 탤런트 장자연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웅적 죽음은 영작이나 나미, 혹은 탈근대적 관객들에게 영웅적인 죽음이지 백금옥(윤여정 분) 여사나 그의 아들 윤철(온주완 분)이나, 혹은 노 회장(권병길 분)과 같은 다른 근대 식민지성의 가족주의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에 빠져 있는 돈과 권력의 노예들에게는 아니다.

그들에게 윤 회장의 죽음은 에바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은밀히 처리하고 비밀로 간직하는 근대 식민지성의 가족주의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자본과 권력의 맛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의 말로일 뿐이다. 이러한 근대 식민지성의 가족주의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본질을 알고 있는 주영작의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의 탈주는 서서히 준비되는 것이고 치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족주의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가 작동하는 근대적 인식의 세계 속에서 적과 싸우는 것은 적을 닮아가는 것이다. 깡패와 싸우는 것은 깡패를 닮아서 또 다른 깡패가 되는 것이고, 독재자와 싸우는 것은 독재자를 닮아서 또 다른 독재자가 되는 것이다. 가족과 가족주의는 다르고, 사회의 자본과 자본주의는 다르며, 문화 공동체의 국가는 국가주의와 다르다.

그러한 가족과 사회와 국가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아름다움은 강함이 아니다. <돈의 맛>에 등장하는 나미와 영작이 지니고 있는 생기발랄함의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의 관계성은 연약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적이 강한 것은 적과 싸우는 내가 있기 때문이다. 적과 깡패와 독재자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과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세력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순간적인 감정에서 윤철에게 덤벼들었던 영작이의 연약한 생기발랄함의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에 매료된 나미의 아름다움! 그러나 각각의 연약함으로 이루어져 있는 영작이와 나미의 생기발랄함과 섹슈얼리티는 둘이 함께 있을 때에 강력한 사회적 아름다움으로 발현된다.

그들의 강력한 아름다움은 생기발랄함의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의 관계성을 사회와 국가에 전염시키면서 지속적으로 생성시키는 것이지 연약한 생명성과 섹슈얼리티를 인위적이거나 근대의 영웅적 행동으로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다. 근대적인 서열관계에서 벗어나 탈근대적 수평적 관계의 주위를 돌아보라! 근대 식민지성의 세계 속에서 자본주의의 "돈의 맛"과 국가주의의 권력의 맛에서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는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수많은 연약한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의 관계성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미는 그러한 영작이의 연약한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의 관계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또 다른 연약한 생명성과 아직 자라나지 않은 섹슈얼리티의 관계성을 추구하는 사회 속으로 탈주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영작이와 나미는 서구 유럽과 미국 혹은 일본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던 근대 식민지성의 질곡에서 벗어났지만, 그 대가로 가난과 싸우고 있는 필리핀의 국가와 살해당한 에바의 어린 자식들의 사회 속으로 탈주한다. 가족주의의 가족에서 탈주한다는 것은 곧 "돈의 맛"에 사로잡힌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근대 식민지성 국가주의의 국가로부터 탈주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영작이와 나미는 이미 알고 있다.

III. 탈주의 미학

ⓒ휠므빠말

근대적 인식의 공간에는 탈주를 위한 또 다른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주의의 가족에서 벗어날 수 없고,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근대 식민지성의 국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근대적 인식의 공간이다.

그러나 <돈의 맛>에서 영작이와 나미가 보여주는 것처럼 가족주의의 가족에서 벗어나는 것은 가족주의가 아닌 사랑과 연민이 작동하는 또 다른 가족을 만드는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본주의적 권력으로 작동하지 않고 생성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며, 근대 식민지성 국가주의의 국가에서 벗어나는 것은 근대 서구 유럽이나 미국 혹은 일본에서 수입된 근대적 인식론의 지식으로 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역사적 시공간에서 생성되는 지식을 통하여 수평적으로 작동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등등의 지구촌 세계의 관계적 지식들을 습득하는 것이다.

"돈의 맛"으로 작동하는 대한민국 근대 가족주의의 가족에서 탈주해 필리핀에서 만드는 나미와 영작이의 탈근대적 가족은 에바의 자식들을 포용함으로 말미암아 생성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의 사회를 만들 것이고, 그렇게 생성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필리핀과 대한민국을 포함하는 상생적 즐거움과 쾌락의 지식을 생성시키는 동아시아의 국가들을 만들 것이다.

<돈의 맛>에서 근대 식민지성의 권력과 돈의 노예로 성장한 노 회장과 백금옥 여사의 자본과 권력을 계승하는 윤철이의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이 미국에 있는 말기 근대 자본주의의 자본과 제국주의의 권력을 대변하는 로버트(달시 파켓 분)와 권력적 연대를 맺고 있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근대 식민지성을 유지시키는 근대 식민지성의 가족주의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지식과 권력은 서구 유럽과 미국과 일본에 있는 근대 제국주의의 지식이나 권력에 식민지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서구 유럽이나 미국과 일본에는 대한민국의 근대 식민지성을 유지시키는 "돈의 맛"과 권력의 맛의 원천이 있지만, 필리핀과 베트남과 아프리카와 중남미에는 생기발랄함의 생명성과 섹슈얼리티의 관계성을 생성시키고 지속시키는 새로운 탈근대의 가족과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새로운 지식이 있다. 그들은 우리들보다 먼저 근대 식민지성의 "돈의 맛"과 권력의 맛에서 벗어나 새로운 탈근대의 가족과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탈근대의 지식을 생산하고 있다.

임상수 감독이 칸 영화제에서 "다음엔 백인들 공격하는 영화 찍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지난 500년 동안 서구 유럽이 만들었고, 오늘날 미국이 계승하고 있는 근대 식민지성의 지식과 권력을 영화 스크린으로 드러내겠다는 것이 아닐까? 벌써 그의 다음 영화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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