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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식민주의와 민족운동의 보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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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식민주의와 민족운동의 보편성 [이광수의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 <19> 한국은?
영국의 식민 통치가 시작된 지 약 100년 만인 1857년. 델리 부근의 메러뜨(Meerut)에서 큰 봉기가 터졌다. 영국군에 의해 고용된 인도인 즉 세포이(용병)에 의해 터진 반란이었다. 사건은 영국군이 탄환이 든 탄창 기름으로 돼지기름을 사용하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폭발하였다. 돼지는 무슬림이 매우 혐오하는 짐승으로 그 돼지로 자신들이 매일 만지는 기름을 만들었다는 소문은 무슬림으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끼게 하였다. 하지만 당시 영국군이 탄창 기름으로 정말 돼지기름을 사용하였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반영 감정을 불 지르기 위해 만든 이야기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1857년 5월 봉기군은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던 메러뜨를 출발하여 델리, 럭크나우, 깐뿌르, 바라나시 등 북부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으나 같은 해 9월 델리를 영국군에게 빼앗기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결국 약 2년 여 만에 막을 내린다.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봉기 세력이 이 투쟁을 민족적 거사나 혁명으로 성장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로 무갈의 황제를 중심으로 하였으나 모든 민족 구성원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 지배하에 있던 작은 토후 세력, 지식인, 대지주, 도시 상인 등이 이 봉기에 가담하지 않았고 지역적으로 볼 때도 남부의 대부분 지역과 벵갈, 신드, 라즈뿌따나 등과 같은 일부 북부 지역도 참여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끝났으나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낳았다. 사건은 그 동안의 식민 수탈에 대한 인도 인민들의 누적된 불만과 인도의 전통 문화와 사회 체제에 대한 무시와 그로 인한 모멸감 그리고 그에 대한 개혁에 대해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래서 영국은 이 사건 이후 인도 통치에 대해 대대적인 개편 작업을 단행하였다.

봉기가 터진 후 2년 만인 1859년 다시 부활한 제국주의 영국은 우선 무갈 제국의 황제 바하두르 샤(Bahadur Shah)를 폐위시켜 미얀마에 유배시킴으로써 무갈 제국을 완전히 종식시켰다. 그리고 동인도회사를 폐지하고 인도의 통치권을 동인도회사로부터 정부에 이양시켜 직접 통치에 들어갔다. 그리고 힌두로부터 불만의 원인으로 제기되면서 봉기가 일어나게 된 원인으로 작용한 여러 가지 악습 타파와 사회 개혁도 포기하였다.

토후국에 대한 병합과 영토 확장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이는 영국 제국 정부의 최고 통치권은 인정하면서 그 아래에서 정치, 경제, 법, 문화, 교육 등 모든 부문에서 독자 지배권을 인정받고 있던 각지의 작은 토후국들이 영국 제국에 협조하여 봉기 진압에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들 작은 토후국들로 방파제를 구축하여 언제 또 올지 모를 거대한 파도를 미연에 막겠다는 뜻에서였다. 이러한 이이제이 전략으로 영국은 본국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그리고 얼마 되지 않은 극소수의 인력으로 그 거대한 인도를 200년 동안이나 통치할 수 있었다. 이는 일차적으로 인도가 민족(혹은 국민 nation)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동인도회사가 수탈을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사회 각 부문에서 근대화를 추진하여 영국이 인도의 개혁과 선진화에 없어서는 안 될 주체라는 사실이 상당 부분 인정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857년 봉기는 형식적으로는 무갈의 황제를 정점으로 옹립하여 전개되기까지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전민족적인 규모로나 조직적인 거사로 발전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에 중국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은 재산 공유와 토지 평등 분배와 같은 사회주의적 성격의 혁명을 표방하였고, 조선의 갑오농민전쟁의 경우에도 반봉건·반외세를 목표로 한 혁명이었으나 인도의 1857년 봉기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혁명적인 성격을 갖추지 못하였다. 하지만 1857년 봉기는 비록 구태의연한 방식이었으나 반영 투쟁의 시발이 되었다. 특히 1857년 대반란은 이후의 독립 투쟁에 애국 애족심과 민족적 자긍심을 제공하는 민족 감정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1857년 봉기를 진압한 후 영국에서는 승리와 개선을 찬양하는 애국심의 물결이 대대적으로 일었다.

1857년 봉기 이후 인도에서는 모든 계급, 분파, 종교 등을 초월하는 민족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농민, 수공업자,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극심한 빈곤의 원인이 영국 제국주의에 있다고 인식하면서 영국 식민 통치의 압제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이제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에 대해 같은 피해자라는 '우리들' 의식을 실로 100여 년 만에 깨달은 것이니, 100년 가까운 제국주의의 수탈과 철저한 민족 차별 정책이 인도인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민족의식을 갖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인도인들이 민족 의식을 깨닫게 된 데에는 근대화의 역할도 있었다. 영국이 식민 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도입한 근대 행정 체계와 철도·전신·체신의 전국적 연망 확산 등도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여기에 자본주의가 도입되어 하나의 경제 체제가 만들어지면서 식민 수탈에 대해 같은 결과를 동시에 보았다는 사실 또한 하나의 민족 의식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 유럽 사상과 서구 교육이 소개되고 언론과 문학이 널리 퍼지면서 민족 의식이 빨리 고취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왜곡한 데에 대해 반발하여 과거를 재발견하는 움직임이 일고 그것이 문화적 자긍심 고취로 연결되면서 민족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이 무렵 1860년대와 1870년대에 전국에 걸쳐 수차례의 대규모 기근이 일어났고, 벵갈, 비하르, 데칸, 뭄바이 등지에서 대규모 농민 봉기가 터졌다. 그야말로 민심이 흉흉하였다. 영국 제국 정부는 1857년 봉기를 경험한 후 또 터질지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한 예방적 차원의 조치로서 뭔가를 준비해야만 했다. 이 때 리튼(Lord Litton) 총독이 1878년에 지역어신문법을 공포하였다. 지역어신문법은 치안 판사가 인도의 신문 편집인으로 하여금 발행 이전에 검열을 위한 교정본 제출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는 지역어 신문을 규제하는 법이다.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영어 신문은 대체로 정부에 협조적이었지만 지역어 신문은 비판적이었다고 판단을 해 제국 정부의 통치에 상당한 위협을 가하는 요소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취지였다. 이는 인도인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니, 특히 인도인 지식인층으로부터 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이것이 지식인 층으로부터 본격적으로 민족 운동을 구체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리튼 총독의 후임으로 온 리폰 총독 재임 때 터진 일버트(Ilbert) 법안 사건 또한 인도인의 민족 의식을 자극하였다. 일버트 법안은 인도 참사회 법률위원인 일버트가 인도인 판사가 인도 거주 유럽인을 재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려 1883년 제출한 법안이었다. 그렇지만 인도 거주 유럽인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사실상 폐기되고 만다. 그 과정에서 인도인과 인도 문화는 공개적으로 매도당하고 저주 받았다. 인도인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던 특권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여론이 규합되고 거족적 민족 운동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꿈틀거렸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에 영국 제국 정부는 상당한 위협감을 느꼈고, 그것은 1885년 인도 최초의 정당인 인도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영국인 퇴역 문관 흄(A.O.Hume)은 인도인의 심각한 불만이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영국 정부가 의회 정치를 위한 훈련장으로서의 국민 대표 기관을 조직하여 인도인들에게 합법적인 정치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고 판단하여 인도국민회의를 만들었다. 결국 인도국민회의는 영국 통치를 파괴시킬지도 모를 압력 세력에 대한 안전밸브 역할을 하는 것이었으니 영국의 식민 통치 정책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초기의 인도국민회의는 영국 제국 정부에 온건하고 충성스런 자세를 취하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영국의 점진적이고 합법적인 정치 전통을 찬양하고 영국의 지배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때문에 그들은 완전 자치나 독립을 주장하는 대신 대영국 제국의 신민(臣民)을 자처하고 대영국 제국의 일부로서 존재하고자 하였다. 인도국민회의의 초기 지도자들의 제국 정부에 대한 요구 사항이 군사비와 조세의 과다 책정에 대한 시정, 인도 직물 산업의 보호, 연방 의회와 지방 의회의 개혁, 인도인 장교 채용 시행, 인도 문관 시험 제도 개선, 영대(永代) 자민다리제의 확대 실시, 기술 전문 학교와 연구소 설립, 농업 은행 설립 등을 통한 농업의 발전, 인도인 유학생 파견 등이었던 것을 통해서 우리는 그러한 성격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주로 결의문 채택 등을 통해 정부에 건의하는 식의 소극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인도국민회의는 궁극적으로 기존의 정치 체제를 인정하고 그 안에 참여하여 권력을 분배해 갖는 의회 제도의 도입이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들의 소극적인 행동은 의회 제도와 관련된 정치 체제의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부문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도 전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 내지 못하고 한계만 드러내었다. 그러면서 그러한 활동에 환멸을 느끼면서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즈음 1905년에 커즌 총독은 벵갈 주를 동과 서로 분리한다는 정책을 발표하였다. 당시 벵갈 주는 오늘 날의 비하르, 오릿사, 자르칸드(Jarkhand), 찻띠스가르( Chhattisgarh), 서(西)벵갈 그리고 방글라데시를 포함하고 있는 실로 광대한 주였다. 따라서 이 벵갈 주는 한 사람의 지사가 다스리기에는 너무 넓어 분할의 필요성이 자주 제기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계획안에 따르면 벵갈 주는 비하르와 오릿사를 포함하는 서벵갈 주와 앗삼을 포함하는 동벵갈 주로 나뉘었다.

서벵갈을 힌두 중심 지역으로, 동벵갈을 무슬림 중심 구획으로 하는 안은 영국 제국주의 분리 통치 정책의 전형이었다. 따라서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종교로 인한 독립적인 공동체 의식이 전혀 없었고 전체적으로 하나의 벵갈인이라는 민족 의식을 가지고 있던 벵갈인들은 이 분리가 민족 운동의 약화를 노리면서 민족 분열을 획책한 것으로 해석하여 크게 반발하였다. 이를 계기로 인도국민회의에 급진파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급진파가 민족 운동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데에는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으로 인한 영향도 있었다. 벵갈 사람들은 일본이 영국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보다는 '우리' 아시아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더 강했기 때문이었다. 전형적인 서구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오리엔탈리즘에 함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그 후로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일부 민족 지도자들은 일본에 기대어 영국에 저항하는 민족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다. 따라서 일본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던 타고르가 식민 지배에 신음하고 있던 조선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을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우스울 수밖에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타고르가 써준 '동방의 등불'에 대한 의미 부여는 다시 되어야 한다.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의 오해가 아닌 왜곡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벵갈 분리 조치에 대한 저항으로 촉발된 인도인들의 저항은 스와데시(swadeshi 국산품) 운동 및 외국 상품 보이코트 운동, 국민 교육 운동, 자치 운동 등 이전보다 더 급진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스와데시 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어 국산품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반면에 영국 상품의 판매량은 크게 감소하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벵갈 지역으로 한정된 스와데시 운동은 곧 다른 여러 지역으로 번져나가 1905년에는 전인도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 스와데시 운동은 경제에서 식민 지배를 벗어나는 것이 가장 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은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급진파는 영국인 지배자들로부터 선심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인도인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양보할 수밖에 없도록 압력을 가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종교적 감정과 민족적 자긍심 등을 반영 감정으로 유도하는 방법을 동원했다. 이후 운동이 격화되면서 급진파와 온건파는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특히 스와라즈에 대한 둘 사이의 대립은 첨예하였으니, 온건파는 대영제국 안에서의 자치로 해석한 반면 급진파는 제국 밖에서의 완전 자치로 해석하였다.

인도국민회의 설립과 민족 운동 등은 한국사의 경우에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다른 성격의 운동이다. 특히 친영 입장의 인도국민회의 온건파가 추진한 제국 정부에 대해 여러 차원에서 건의문을 제출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기회 확대를 요구하고 여러 부문에서의 개선과 개량을 요구한 것 등은 한국의 경우에서라면 모두 친일 부역에 속한다. 이렇게 같은 식민 지배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피식민국 인민들의 반응이 달리 나타난 것은 영국 식민 지배와 일본 식민 지배의 성격이 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영국은 식민지로부터 미약하나마 일정 부분 통치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그 안에서 그들에게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면서 통치권을 형성한 식민주의의 성격을 띤 반면 일본은 다른 나라의 국권을 강탈한 후 식민지 사람과의 관계는 오로지 강제에 의해 유지될 뿐 설득과 인정의 토대를 전혀 마련하지 못한 전형적인 강제 점령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이 영국이 하였던 것과 같은 피식민 인민을 위한 정당을 조직한다거나 그 대표들과 협상을 통해 갈등을 조정 중재하는 일은 애초부터 일어날 수가 없었다.

피식민국 인도가 영국의 지배를 찬양하고 대영제국의 신민으로서의 관계를 계속 가지기를 희망하는 집단이 광범위한 민족적 지지를 받는 것과 같은 행위가 조선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마찬가지로 국권 회복을 위한 임시 정부 수립과 그 활동, 3·1 독립 운동, 독립 전쟁과 같은 일이나 강제 징용, 군 위안부, 납치, 고문, 학살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인권 유린 등은 인도에서는 일어나지도 않았고 일어날 일도 아니었다.

인도와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그 결과로 나타난 식민 종주국과의 관계 설정은 훗날 '역사 청산'의 문제에서 또 한 번 크게 다름을 보여준다. 인도사에서는 한국사에 나타난 '친일', '매국', '민족 반역'과 같은 용어는 학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국 지배에 협조하였다고 해서 매국노 민족 반역자가 되어 후세에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없고, 그들이 행한 역사적 행위를 '청산'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 혹시 조선총독부 건물을 파괴하여 없애버리는 것이 경복궁의 복원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반달리즘으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할까?

인도의 역사학자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파괴해 없애버린 행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나 한국의 역사학자가 인도에서 친영의 입장에서 민족 운동이 일어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두 나라에서 서로 다르게 전개된 역사적 행위가 '식민주의(colonialism)'라는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식민주의'라 하고 있지만 그 성격은 철저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도사에서는 친영이 존재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도록 식민 지배를 하였지만 한국에서는 친일이 존재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식민 지배를 한 적이 없다.

최근 일고 있는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들이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일제의 식민 지배도 영국이 인도에 대해 그랬듯 나름 정당성을 가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같은 용어를 쓴다고 의미도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학의 기본을 모르고 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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