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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환호 속에 잊혀진 분단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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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환호 속에 잊혀진 분단의 비극 [이광수의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 <23>
200년 가까이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인도는 1947년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였다. 비록 파키스탄과의 분리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안은 채 달성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줄기차고 끈질긴 투쟁의 산물이었다. 인도의 자유를 위한 기나긴 투쟁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곳에서 제국주의와 투쟁하던 많은 피식민 인민들에게 큰 감동과 용기를 주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많은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게 되는 기폭제 역할도 하였다.

독립국 인도의 초대 수상이던 자와하를랄 네루는 1947년 8월 15일 0시 제헌 의회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그 연설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중계되었다. "시계가 자정을 울리면 세계는 잠들어 있지만 인도는 생명과 자유를 깨울 것입니다. 한 시대가 끝나면서 이제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고, 그동안 억눌렸던 국가의 영혼이 목소리를 찾는, 역사에서 흔치 않는 그 순간이 다가옵니다." 그 목소리는 감격스럽게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 인도의 독립은 분단의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네루는 모르고 있었을까, 애써 무시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그 시각 전국은 환호를 지르며 독립을 축하하는 순간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도아대륙의 서북쪽 땅은 폭력이 난무하고 산하가 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총으로 쏘고, 칼로 찌르고 몽둥이로 패고, 돌로 찧고, 꼬챙이로 찌르고 ... 강간하고, 납치하고, 뺏고, 훔치고 ...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지옥과 아비규환이 바로 그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쌓였던 감정이 터지고, 억눌렸던 악귀의 기운이 고삐가 풀리면서 역사에서 있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순간이 다가 온 것이다.

인도-파키스탄 분단 계획은 1947년 6월 3일에 발표되었다. 이 결정이 나기 전 얼마나 오랫동안 지루한 협상이 진행되었는지, 그 안에서 각 집단의 이해득실이 얼마나 깊이 계산되고 논의가 이루어졌는지는 그 복잡하기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다. 두 개의 독립 정부를 세우는 데 최종 스케줄이 나오기까지 모두가 우왕좌왕하면서 그 모든 것에 지치고 질려 있는 상태였다. 결국 독립 예정일은 마지막 총독인 마운트바튼(Mountbatten)에 의해 쫓기듯 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두 나라 당사자 사이의 협상은 지루하게 진행되고 산 넘어 산, 난관에 부닥치면서 양 쪽의 모든 정치 지도자들은 쫒기면서 마련한 그 시간 단축 방안에 그냥 찬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 결정이 가져올 수 있는 비극의 후유증에 대해 심사숙고 하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해결책이라고 하는 것이 제시되었지만, 그 결정은 전혀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문제의 뿌리가 될 뿐이었다.

다수의 사람들 혹은 '큰 일'만을 고려한 정치 지도자들은 이제 드디어 결정이 났구나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인 수천만 명이나 되는 소수 사람들은 두려움과 당혹감에 빠져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사실 그러한 경향은 일찍부터 감지되었다. 독립 협상이 지루하게 진행되는 상황에 놓인 1940년, 네루는 독립을 연기하는 것보다는 분단을 선택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결국, '소수'에 해당하는 분단의 비극이 '다수'에 해당하는 독립의 환호에 철저하게 무시당했던 것이다. 네루를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은 애초에는 나라를 분할하는 것을 꺼려하였지만 그것을 독립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대가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른바 어떤 정치인이 말한 바 '병든 다리'를 절단하는 정도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거대 담론 차원에서 서로 다른 국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어떻게든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지만 막상 그 분단으로 인한 당사자가 해야 할 행동에 대한 지침은 아무 것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분단으로 이어지기 몇 개월 동안, 특히 1947년 6월 인-파 분단 계획을 발표한 이후 전인도국민회의위원회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에 대해 수도 없는 문의를 받았다.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분단된다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겁니까? 간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어떻게 가는 겁니까? 기차가 가는 겁니까? 배나 비행기도 가는 겁니까? 걸어서 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럼 우리 직업은요? 이주를 하면 새 나라에서도 우리 직업을 다시 가질 수 있는 겁니까? 이주를 한다면, 여기 우리 집과 땅, 내 재산은 어떻게 됩니까? 병든 부모는 움직일 수 없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분단 이전에 수많은 사전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걱정을 하였음에도 인도와 파키스탄의 새 정부를 구성하려는 정치인들 그리고 영국 정부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그렇게 거대한 규모의 인구 이동과 폭력이 있을 것에 대비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실망을 넘어 분노로 연결되었다. 공포가 하루하루 구체적으로 다가오고 있는데도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안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그냥 사는 곳에 눌러 있기만 한다면 일은 곧 좋아질 것이라는 장담만 줄기차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인도-파키스탄 분단 계획이 공표되었을 때, 뻔잡은 이미 큰 폭력 사태를 겪고 있었다. 1947년 3월에 터진 라왈삔디(Rawalpindi) 폭동은 약탈, 방화, 파괴 그리고 여성 폭력을 거치면서 수천 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리고 그러한 형태는 이후 분단 폭력의 표본이 되어 버렸다. 상대방 마을을 습격해 상대방을 학살하고 재산을 모두 약탈하는 일이 도처에서 터져 나왔다. 그 과정에서 수백 명의 여성이 끌려가거나 강간당하거나 납치당했다.

일부에서는 다른 종교로 강제적으로 개종을 당할 것을 두려워 해 여성 90 명이 집단적으로 우물 안으로 뛰어들어 자살을 한 도저히 믿기 어려운 비극이 일어난 경우도 있었다. 파악된 통계만 볼 때 약 7만 5천 명의 여성이 납치되거나 강간당했다. 그런데 여성에 대한 강간은 꼭 적이라고 간주되는 다른 종교의 남성에 의해서만 자행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종교의 남성에 의해 그것도 주로 같은 마을에서 사는 남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분단 직후 양국 정부는 피랍 여성 구출 작전을 추진하였다. 각 위원회에 의해 납치 사건이 발각되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에 피랍된 본인부터 드러나지 않기 위해 숨고 피했다. 이유는 새로 생긴 가족 그 때문이었다. 납치되어 잉태한 자식이지만 자식은 엄연한 자식이기 때문이었다. 드러난 경우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간 딸도 있었지만, 따라 가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돌아간 경우 남겨진 자식은 그 사회에서 처참하게 버림받았다. 돌아간 장본인도 아버지의 사회에서 다시 버림받은 것이 비일비재하였다. 두 정부 모두 가문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여성들이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 안에서 여성들의 주체적 결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분단이 일어나기 전 이미 폭력의 공포에 질린 주민 50만이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그리고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국경을 넘어 이주를 하였다. 그들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고향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게 할 정도일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국가 건설이라는 큰 일에만 매달릴 뿐 정작 국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인 국민의 안위에 대해서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이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 갈 것을 종용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는 것뿐이었다. 호소하는 성명서가 연이어 발표되었을 뿐 현장에서 죽어가고 강간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책은 전혀 마련하지 않았다. 그것이 200년 만에 되찾은 주권 국가의 모습이었다.

200년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인도가 맞이한 첫 공식적 사건인 이 분단은 인류가 거치고 온 역사에서 그 어떠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크고 잔인하고 야만적인 격변이었다. 인류의 역사 가운데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는 엄청난 규모의 인민 대탈출이 그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으니, 실로 몇 개월 만에 1,2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인도로 그리고 동과 서로 구성된 새 나라 파키스탄으로 이동하였다. 그 난민들 가운데 대부분인 약 1,000만 명은 서쪽 국경을 넘었다. 그들은 둘로 분단된 뻔잡 주를 넘었는데, 무슬림은 서쪽의 파키스탄을 찾아 갔고, 힌두와 시크는 동쪽의 인도로 왔다.

1947년 8월부터 11월 사이 즉 단 3개월 동안에 난민 열차는 673번에 걸쳐 약 280만이나 되는 난민을 국경을 넘어 인도 내로 이주시켰다. 그렇지만 기차는 돈이 있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가난한 사람들, 그 어떤 교통 수단도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규모 인간 행렬에 따라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행렬은 분단 선언 약 2주 후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3만에서 4만의 규모였던 것이 점차 규모가 커져 나중에는 40만에 이르는 거대한 대규모가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국경의 한 지점을 건너는 데만도 8일이나 걸릴 정도로 긴 것도 있었다.
▲ 죽음을 넘어 떠나는 피난 행렬에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1947년 9월 18일부터 10월 22일 사이에 힌두와 시크로 구성된 스물 네 개의 피난 행렬이 뻔잡의 서쪽에서 뻔잡의 동쪽 즉 인도 땅으로 이주를 했는데 이를 통해 옮긴 인원의 수가 84만 9천 명이나 되었다. 여기에 서에서 동으로 이주를 한 사람의 수를 합하면 1백만 명이나 되었다, 단 한 달의 기간 동안, 한 지역에서만.

사람들이 이동하는 모든 길에는, 그것이 걸어서 가는 길이든, 기차나 자동차로 가는 길이든 간에 어디든지 습격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또 피난 행렬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교차할 때에는 서로를 쳐다보면서 상대방에 대해 돌연 살의가 생기곤 했다. 돌발적인 충돌은 피할 수가 없게 되었고,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그 희생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단연 여성의 몫이었다. 여성들이 납치되고 강간되는 경우는 아무나 예상할 수 있는 쉬운 일이었다.

필사의 행렬 속에서 몸이 약한 자, 노인, 불구자, 아이, 여성 등은 낙오되기도 했다. 피난 행렬의 끝자락에서 뜯겨난 사람 특히 여자나 남자 아이들도 많았다. 여기에 9월에는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나고 통신이 두절되는 설상가상의 상황까지 겹쳤다. 열차는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고, 걸어서 피난 가는 것이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 피난 행렬 안에서 비로 인해 병이 든 사람이 많이 생겼고 그로 인해 희생자도 점점 많이 발생하였다.

이주하는 도중에 기아나 전염병으로 죽은 경우까지 포함하여 분단 과정에서 죽은 사람의 수는 가히 천문학적 규모였다. 당시 영국 측은 희생자의 수를 20만으로 보았고, 나중 인도 정부는 200만으로 보았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그렇게나 많은 수가 희생당할 동안 양 쪽 정부 그리고 영국 정부는 뭘 하고 있었을까?

분단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시간은 흘러 어언 60년이 지났다. 분단은 그 실체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제 지나간 것이고, 끝난 것이며, 과거의 한 사건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다. 분단으로 인해 발생한 이산가족의 슬픔과 회한도 진행형이고, 납치와 강간 그리고 폭력의 희생의 역사도 결코 끝나지 않는 진행형이다. 분단 과정에서 일어난 폭력의 기억은 오랜 시간 동안 트라우마가 되어 한 개인의 삶을 파괴해 오고 있다.

또 집단적으로는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 그로 인해 적대감이 확대되었다. 그래서 분단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분단 이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인-파 분단 때 무슬림이 힌두를 죽이고, 힌두 여자들을 강간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들을 죽여야 하고 그 여자들을 강간해야 한다는 주장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끊이지 않는 인도의 종교 공동체 사이의 갈등은 분단이라는 씨가 뿌린 열매다. 그리고 그 열매는 지금 인도에서 실제 상황의 시한폭탄이 되었다.

분단의 폭력으로 인해 찢겨진 어머니와 딸이 50년이 지나고 나서 상봉을 한 일이 있었다. 오라비와 누이가 50년 만에 국경에서 상봉을 하기도 했다. 열세 살 된 딸이 파키스탄으로부터 힌두 남자에 의해 납치된 아버지가 자기 딸을 찾기 위해 인도로 여러 차례 방문을 하기도 했다. 여러 차례의 방문 중에 그는 간첩으로 몰려 감옥살이를 한 적도 있었다. 그의 딸은 결코 아버지를 따라 돌아가지 않았다.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일어난 분단의 비극을 보면서 오랫동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 있었다. 인도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오랫동안 같은 마을에서 나름대로 조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마을 안에서 벌어진 갈등은 세상사 항상 그렇듯 무시로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것이 항상 종교를 따라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종교가 같은 사람과 한 편이 되기고 하고 종교가 다른 사람과 한 편이 되기도 한 정치 역학 관계는 여느 사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종교가 서로 다르다고 항상 떼를 지어 대립각을 세우면서 살아 온 것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하고 그렇게 잔인하게 편을 갈라 상대를 죽이고 납치하고 강간하고, 돌로, 칼로, 불로 죽이고 또 같은 방법으로 복수하는 일을 벌일 수 있었을까? 같은 마을에서 빤히 알아 온 사람들끼리. 한국 전쟁 당시 북에서 내려 온 사람보다 남에서 일어난 사람이 훨씬 잔인한 짓을 저질렀지 않느냐고 자답을 해보지만 그것은 그 사이에 계급이 끼어 있어 그랬을 테고. 결국 이에 대한 납득이 쉬 되지 않았다.

고민은 인간의 행위가 항상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지극히 단순한 인식론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사회 안에는 감정이 실타래처럼 뒤죽박죽 엉켜져 의식과 의미의 문맥을 이탈하여 떠다니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한 감정은 소위 보편적인 시각으로 볼 때 인위적이고, 계산된 조작이라고 평가받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 성격 규정 여부를 떠나서 어쨌든 개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사 결정의 판단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개인적 경험에 신비감이 더해지고 그것이 집단화 될 때 그것은 대개 광기로 나타난다. 히틀러가 바그너의 오페라를 들으며 가졌던 감정은 그가 유대인을 학살하며 들었음직한 천상의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그에게 열광하며 그를 지지했던 대중 또한 집단적으로 그 신비한 감정을 체험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집단 광기의 주체는 대중 자체일 수밖에 없다.

그 신비감과 집단 체험이 바로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단 비극에도 적용이 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분단에는 나찌 독일의 인종주의보다 더 강렬하고 자극적인 종교가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결국 그들은 그 종교라고 하는 조작된 집단 현상 안에서 개인이 체험한 신비한 감정의 경험에 따라 닥치는 대로 납치, 강간,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1950년을 전후로 한 해방과 분단 그리고 내전의 공간에서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그러한 집단 광기를 일으킨 주역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였다. 황해도 신천에서 미군을 등에 업고 자행한 기독교인의 공산주의자에 대한 피의 복수극은 그 좋은 예이다. 그 기독교인들이 남쪽으로 건너 와 한국 보수 기독교의 기틀을 잡은 사실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일부 후예가 벌인 광기가 21세기 초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전쟁 불사의 목소리를 타고 또 한 번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두려운 것은 그 역사를 통해서 보고 들은 그 광기의 역사가 현실이고 실제 상황이라는 사실이다.
▲ 1951년 황해도 신천에서의 양민학살은 미군과 기독교인에 의해 자행된 처참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피카소에게 충격을 주어 1951년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작품을 낳았다.

한국과 인도는 여러 면에서 닮아 있다. 그리고 그 닮은 것은 고통의 역사에서 더욱 그렇다. 식민주의는 분단을 낳고, 분단은 집단 광기를 낳았다. 그리고 그 이후 분단된 땅 양 쪽 사람들의 삶은 그 사건에 종속되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닮은 것은 그 사람들의 역사는 지워버려야 할,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위해 잊혀 져야 할 것으로 국가에 의해 강요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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