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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 왕조'와 인도 민주주의의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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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네루 왕조'와 인도 민주주의의의 한계 [이광수의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 <24>
마하뜨마 간디는 독립이 이루어진 이후 인도국민회의가 독립이라는 역할을 다 하였기 때문에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권력을 다 쥔 채 민족 운동을 이끌어 오면서도 한 번도 정치 권력을 행사해 본 적이 없는 간디다운 발상이었다. 하지만 네루는 달랐다. 그는 인도국민회의를 새로 건설되는 독립국 인도의 유력한 정당으로 발돋움시켜야 한다고 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연방제 국민국가의 건설이라는 막중한 사명을 눈앞에 둔 현실 정치인 네루다운 생각이었다.

초대 수상 네루와 그 정부는 1951년에 역사적 첫 총선거에 들어 가 2억의 유권자가 489개의 선거구에서 의원을 선출한 세계 최대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었다. 1885년 창립된 이후 오랫동안 민족 운동을 이끌어 온 인도국민회의는 이제 독립국의 주요 정당으로 - 우리는 이 정당을 독립 이후의 시기부터는 보통 간략하게 '회의당'(Congress Party)이라고 부른다 - 자리 잡으면서 40 여 년간 독재 아닌 일당 지배의 시대를 구가한다.

회의당은 독립 이전부터 탄탄하게 유지해 온 조직을 바탕으로 당의 중앙 조직에서부터 촌락 수준의 말단 조직에 이르기까지 밀도 있는 조직을 갖추었고 그 위에서 인도의 민주주의를 세속주의, 탈카스트주의, 탈지역주의로 유도하였다. 1951년 총선 이후 1964년 사망할 때까지 네루는 회의당과 정부 혹은 야당 어디에서도 심각한 도전을 받아본 적 없는 강력한 권위와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세속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국민 통합과 국가 건설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네루 집권기에 잘 정비된 인도의 민주주의는 1960년대 후반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네루가 사망한 후 샤스뜨리(Bahadur Shastri)가 수상직에 올랐으나 1966년 갑자기 사망하고 이어 회의당 내에서 권력 투쟁이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권력 다툼에서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가 승리하면서 내홍의 회의당을 장악하였다. 그 결과 회의당은 연방 정부 차원에서는 집권하는데 간신히 성공하였으나 여덟 개 주에서 야당의 연립 정부에 권력을 넘겨주고 말았다. 이후 회의당과 인디라 간디 수상은 농업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고,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두고 파키스탄과 벌인 전쟁을 승리로 이끈데 힘입어 1971년 총선거에서는 다시 압승하였다.
▲ 초대 수상 자와하를랄 네루 (윗줄 맨 왼 편), 그 아버지 모띨랄 네루 (아랫줄 가운데)는 민족 운동을 이끈 지도자였다. 인디라 간디 (윗 줄 오른 쪽 두 번 째)는 이 가문의 후광을 잘 활용하면서 '네루 왕조'를 형성한다.

인도에 민주주의의 위기가 다가 온 것은 이때부터였다. 1971년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으나 부정 선거 사건으로 인해 인디라 간디는 수상직에서 물러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자 인디라 간디는 1975년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독재 권력을 행사하였다. 인디라 간디는 비상사태 기간 동안 언론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등을 압살하고 정적들을 정치범으로 구속하였다.

인디라 간디의 독재에 야당은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드디어 1977년 총선에서는 의회 민주주의의 사수를 기치로 다섯 개의 야당이 합당하여 만든 국민당(Janata Party 자나따 당)이 승리하여 모라르지 데사이(Morarji Desai)가 수상이 되었다. 그리고 야당이 된 회의당은 1978년에 주요 당직자들이 인디라 간디의 권위적 통치에 반대하며 탈당하였고, 이에 인디라 간디는 남은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당을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회의당의 이름 뒤에 자신의 이름인 인디라(Indira)를 의미하는 '아이(I)'자를 추가하여 당을 회의당(I)로 명명하였다. 그러는 동안 여당이 된 국민당(자나따 당)은 농업 정책과 외환 정책에 실패하고 정파 간의 권력 다툼으로 1980년의 총선에서 인디라 간디의 회의당(I)에게 다시 권력을 내주고 만다.

인디라 간디는 다시 집권 하였으나 정치 불안은 끊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집권 기간 전반에 걸쳐 경제 성장이 멈추었고 이로 인해 노동자와 농민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띈 사례는 마우쩌둥적 공산 혁명을 실현하기 위한 무력 투쟁을 외친 낙살주의(Naxalite) 운동이었다. 1967년 서벵갈에 있는 낙살바리(Navalbari)라는 한 작은 마을에서 처음 시작한 이 마오쩌둥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공산 혁명 운동은 농촌의 빈곤층뿐만 아니라 진보적인 학생과 소외당한 부족들로부터도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정치 불안의 상황 속에서 인디라 간디는 원로 정치인과의 협력과 회의당(I)의 조직화를 포기하고 직접 인민들에게 호소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러한 전략은 1971년 선거에서 '가리비 하타오'(가난 추방)라는 기치로 나타났고 이것이 주효하여 이전의 어느 선거보다도 뛰어난 압승을 거두었다.

인디라 간디와 회의당은 몇 차례에 걸쳐 정권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선거를 통해 다시 집권을 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에 큰 문제를 보이지는 않았으나 내용적으로는 심각한 민주주의의 후퇴를 보여주었다. 1977~1979 기간 동안의 국민당(자나따 당) 집권기를 제외한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집권 기간 동안 민주적인 선거로 구성된 주 의회를 해산하고, 그 위에서 연방 정부가 주 정부에 대해 통치권을 직접 행사하는 대통령령이 부과된 횟수가 크게 늘어난 사실 하나만 봐도 이런 사실은 잘 알 수 있다.

또한 인디라 간디는 지역에 기반을 둔 지역의 군소 정당들을 정치적으로 분열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연방제를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국민국가 전체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예를 빤잡, 카시미르, 앗삼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결국 이는 연방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과 극심한 분리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 가운데 정치적 혼란이 가장 극심한 곳은 뻔잡이었다. 1967년부터 시작한 녹색혁명의 실시 이후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뻔잡의 시크교도들은 1970년대 후반 이래 정부에 대한 불만을 키워 왔고 급기야는 자신들만의 국가 칼리스탄(Khalistan)의 분리 독립을 기치로 내 거는 주장이 큰 지지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인디라 간디 정부는 지역민들의 여러 가지 불만을 오로지 종교와 연관시키는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그들을 전체 사회에서 소외시키고 나머지를 더욱 강고하게 묶는 효과를 노렸다.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역 정치의 문제를 국가 정체성과 관련되는 종교 공동체 그리고 분리주의의 문제로 비화시키는 공작 정치를 자행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네루 이후 인도가 견지해 온 세속 국가의 틀이 크게 흔들렸고, 급진파 시크교도들의 분리 독립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결국 인디라 간디는 1984년 뻔잡 주 분리 운동을 펼치는 급진주의자들을 일소하기 위하여 분리 운동의 본거지인 아므리뜨사르(Amritsar)의 황금사원을 무력으로 공격하였고 그 후 시크교도에 의해 암살당한다. 인디라 간디 암살 직후 델리에서는 회의당(I) 정치가들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에 의한 시크교도 학살이 자행되었는데 공화국의 수도에서 1000여명이 학살되었으나 재판에 회부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인디라 간디가 암살당한 후 1984년 12월 총선거에서 회의당(I)는 하원 의석수의 80%에 달하는 415석을 차지하여 집권을 유지하였고 인디라 간디의 아들 라지브 간디(Rajiv Gandhi)는 수상이 되었다. 라지브 간디는 뻔잡에서 분리주의를 주창한 정당인 아깔리 달(Akali Dal)과 협정을 맺어 평화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급진주의자들의 '칼리스탄' 분리 운동은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 정부의 주 비상계엄 선언과 무력 탄압의 악순환만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라지브 정권은 스웨덴의 무기 제조 회사인 보포르(Bofor)사의 뇌물 사건에 휘말리면서 분열되고 결국 정권을 야당에게 넘겨주었다.

보포르 뇌물 사건 와중에 재무장관을 사임하면서 야당의 길을 택한 싱(V.P.Singh)의 민족전선(National Front)은 라지브 간디(Rajiv Gandhi)가 이끄는 회의당(I) 정부를 1989년 총선거에서 패배시키고 인도 역사상 두 번째의 비회의당 정부를 구성했다. 선거에서 회의당(I)는 하원 의석의 4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얻었고, 다수당의 위치를 차지한 싱은 공산당과 신흥 힌두 우익의 인도국민당과의 불안정한 연립을 통해 정권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연립 정부 구성원들 간의 분파 싸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싱의 민족전선은 1991년 선거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렇지만 1989년의 총선거를 계기로 인도에서는 새로운 정치 상황이 전개되었다. 40 여 년 동안 유지되어 온 회의당의 일당 우위 정당 체제가 끝난 것이다. 라지브 야당의 입장에서 다시 선거를 지휘하면서 암살당한다. 그리고 그 후 몇 차례의 정권 교체가 일어났다. 그러면서 지난 40여 연 동안 집권 여당으로서 실질적으로 일당 지배를 해 온 회의당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루에서부터 인디라 간디 그리고 라지브 간디로 이어져 온 소위 네루 왕조가 그리 쉽게 끝나는 것은 아니다.

라지브 간디의 부인인 소냐 간디(Sonia Gandhi)는 현재 집권 여당의 대표로 있다. 비록 소냐 간디가 이탈리아 태생이고, 경쟁 상대 정당인 인도국민당 측이 그 점을 물고 늘어짐으로써 극우 민족주의를 부추길 가능성이 있어 수상직에 오르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네루 가문의 정치적 자산 위에서 정치인으로서의 입지가 강화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다 보니 혈통 정치는 라지브와 소니아 간디의 아들 라훌 간디(Rahul Gandhi)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 인디라 간디 장례식 장면. 당시 열 네 살이던 외손자 라훌은 가문의 후광 덕에 현재 어엿한 차기 수상감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라훌 간디는 아버지 라지브가 암살당했을 때는 스물 한 살의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당연히 당시부터 차기 재목으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17년이 지난 지금은 증조 할아버지 네루와 할머니 인디라 간디부터 터로 삼아 온 웃따르 쁘라데시의 아메티(Amethi)를 선거구로 하여 당선된 국회의원으로 이미 인도 정치에서 가장 유력한 수상감으로 떠올라 있는 것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탈리아 태생 어머니를 두고 있다지만, 인도에서 태어났고 민족주의의 한 상징인 힌디를 모어로 구사하는 전적인 힌두 인도인이라 네루 혈통의 후예로서 완벽한 셈이다. 결국 혈통에 기반을 둔 '네루 왕조'는 죽지도 않고, 여전히 살아 있는 인도 정치의 진행형이다.

비록 인도가 아시아의 다른 많은 나라가 겪은 바 있는 군사 쿠데타를 단 한 차례도 경험해 본 적이 없고, 인디라 간디가 집권하던 1975-77년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철권 통치를 하였다고는 하나,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 나타나듯 그로 인한 대규모의 충돌이나 인명 살상 등의 일이 없었다지만, '네루 왕조'에 담겨져 있는 그 명백한 한계에 대한 평가는 피할 수 없다. 결국 네루 이후 인디라 간디에 이어 라지브 간디까지 수상 직에 오르게 되면서 '네루 왕조'라는 비아냥거림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네루 왕조'가 끝났다고 말하였다. 물론 '네루 왕조'라 하는 것은 북한에서 일어난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독재 권력의 세습 체제와는 전혀 다르다.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는 그 아버지 네루로부터 권력을 세습 받지 않고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 권력을 획득했다. 그리고 라지브 간디 또한 마찬가지로 세계 최대의 의회 민주주의 총선거를 통해 권력을 획득하였다.

다만, 인디라 간디는 네루의 카리스마를 자신에게 투사하는 전략을 구사하면서 혈통주의에 기반을 둔 환상의 메커니즘 속에서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를 더욱 굳힌 것이 내용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환상의 메커니즘이 인디라 간디가 죽은 뒤 더욱 강화되면서 그 문제가 악화되었다. 인디라 간디가 암살당한 뒤 마땅한 지도자가 없는 상태에서 회의당(I) 지도자들은 그때까지 정치라고는 손도 대본 적이 없는 인디라 간디의 큰 아들 즉 네루의 큰 외손자인 라지브 간디를 급거 선거에 투입하였고 그 연이은 환상의 혈통주의 전략은 그대로 적중하였다.

혈통에 의존하는 투표 행위는 아시아 사회가 식민 지배 이후 사회의 근대화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해 만들어진 결과다. 1970년대의 한국의 박정희, 북한의 김일성, 필리핀의 마르코스와 같은 독재자들은 국민 국가 건설의 과정에서 국가주의를 최대한 활용하였고 그를 기반으로 하여 강력한 카리스마를 쌓았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뿌리내려야 할 자리에 봉건적 집단주의가 자리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안에서 여전히 좋은 가문의 혈통은 정치 판단의 주요 근거로 작동하였고 그로 인해 아버지의 딸, 남편의 아내, 어머니의 며느리 등 가족을 중심으로 한 관계가 선거판에서 제1의 판단 기준으로 작동하였다.

인도의 인디라 간디-라지브 간디-소니아 간디, 스리랑카의 시리마보 반다르나이케-꾸마르 퉁가,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 인도네시아의 메가와티, 버마의 아웅산 수치 등과 같은 여성 통치자의 예를 보면 아시아 사회가 얼마나 가족 가치관에 중심을 둔 혈통 중심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를 알 수 있다.

여기에 포함되는 정치인이 정치를 잘 했든, 못 했든 그것은 또 다른 문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쌓은 정치의 후광이 철저히 가족과 혈통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있게 한 것은 여성주의도 아니고, 선진 정치 의식도 아니며 다만 봉건 의식의 잔재일 뿐이다. 최근 파키스탄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또한, 비록 남성이지만, 이 범주에 속한다. 그는 베나지르 부토의 남편이고, 베나지르 부토는 아버지인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수상의 딸이다. 결국 모두 봉건주의의 소산이다.

한국 정치에서의 박근혜 열풍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박근혜는 분명히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정치인이지만 여성을 대표하는 정치인은 아니다. 몇 년 전 당시 잘 나간다던 몇몇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인사들이 "여성이란 마이너를 지지하는 것이 진보"라면서 박근혜 지지를 표명한 적이 있었다. 특별히 여성을 위한 정책을 편 적도 없고, 앞으로 그런 뜻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냥 여러 보수 정치인 중의 하나인 사람으로 우연히 여성이 된 그를 여성 대표로 지지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일 뿐이다. 그들이 가장 혐오한다는 남근 숭배의 극치라고, 난 보았다.
▲ 박근혜는 이제 박정희의 딸을 넘어서 독립 영역을 구축한 어엿한 보수 정치인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지지는 여성으로서가 아닌 가문과 혈통이 정치 판단에 주요 근거라고 하는 보수적 믿음에 굳건하게 뿌리박고 있다.

여성 정치인이라 해서 반드시 여성의 이해관계에 관해 특별히 다루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의 딸이라 해서 그가 반드시 그 굴레를 안고 가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를 지지하는 것은 그가 혼탁한 정치를 바로 잡고, 나라를 반듯하게 세우는데 적임자일 것이고 그렇게 믿기에는 그가 그의 부모로부터 어려서부터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아 왔고, 상상을 초월한 어려움을 꿋꿋이 극복해내는 것을 보니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는 적임자라는 믿음이 가서 그렇다고 주장하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진보 진영의 정치인이 집회에 나가 사회 변혁을 꿈꾸는 계급의 깃발 아래 단결을 호소하는 거나 보수 정치인이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 모임에 나가 손을 어루만지며 지지를 호소하는 거나 다를 게 무엇인가? 진보 정치인이 변화를 부르짖고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거나 보수 정치인이 안정을 부르짖으며 가족과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는 것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훌륭한 정치적 구호이다. 따라서 후자가 걷는 과정에서 가족과 가문 그리고 나아가 지역이 그 구호를 완성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름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가치관이나 세계관은 뒤로 숨겨 놓고 여성주의니, 여성의 세력화니 뭐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은 참으로 비겁하기 짝이 없다.

제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하고 담론화 하여도 한국 사회가 여전히 남근 숭배와 지역주의에 휩싸여 있고, 그 상태가 앞으로 한참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믿는 상황에서 여기에 기생하는 정치인과 정치 지망 지식인이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허망한 담론은 갈수록 교묘해질 거라는 것에 대해서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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