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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 전쟁인가, 계급 갈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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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 전쟁인가, 계급 갈등인가? [이광수의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 <26>
인도 사회에서 카스트 체계에 큰 변화가 온 것은 단연 근대 사회의 도래로 인해서였다. 근대화 이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적 환경의 변화로 인해 인도의 하층 카스트들은 그 동안 자신들을 억압해 온 카스트의 위계 구조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잡았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다수 유권자로서 정치적 힘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는 새로운 직업의 선택과 그로 인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새로운 움직임은 하층 카스트들의 카스트 위계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불가촉천민에 의한 달리뜨(Dalit '짓밟힌 자') 운동이다. 달리뜨 운동은 1920년대부터 나중에 인도공화국의 초대 법무장관이 되는 암베드까르(B.R.Ambedkar)의 기치 아래 전개되었으나 보다 본격적인 운동은 독립 이후에 이루어졌다. 암베드까르는 불가촉민제 철폐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카스트 힌두의 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하고 결국 1956년에 불교로 집단 개종하고 만다. 그렇지만 이 흐름은 마하뜨마 간디의 지도하에 상당한 진전을 보였고, 결국 민족 정당을 표방하는 인도국민회의의 강령에 불가촉천민제 철폐를 포함시키고, 독립 후 헌법에 그들에 대한 '보호를 위한 차별' 정책이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독립 후 불가촉천민은 헌법에 의해 공공 부문에 유보된 일정한 비율의 범위 내에서 자신들끼리 경쟁하여 직업과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후로 보통 그들을 지정카스트(Scheduled Caste)라고 부른다. 이 정책 이후 그들은 주 의회 및 연방 의회, 주 행정부 및 중앙 행정부의 고위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지방 선거나 중앙 선거에서 인원 동원을 노리는 일부 주요 정당과도 제휴하였고 그 결과 절대적으로 투표수가 많은 그들의 정치 권력은 비록 제한적이지만 이전보다는 점차 커져간 것이 사실이다.

1957년, 불가촉천민들은 인도공화당을 결성하여 자신들과 다른 후진 계급과의 동맹을 꾀했다. 그러나 1970년 내부 분열로 당이 몰락하고, 그들의 다수가 회의당에 합류하고 만다. 그러자 인도공화당 내의 젊은 세대와 호전적인 지정카스트 집단은 새로운 결사체인 달리뜨팬더(Dalit Panther)를 결성하여 보다 혁명적인 성격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84년에는 대중사회당(Bahujan Samaj Party)을 창당하여 보다 큰 정치력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대중사회당은 1995년에 인도국민당과 연합하여 인도 최대의 주인 웃따르 쁘라데쉬의 주 수상직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불가촉천민에 대한 의석 유보 정책은 비불가촉천민 특히 카스트 체계에서 불가촉천민 바로 위에 위치한 슈드라의 불만을 유도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자 1978년 회의당을 누르고 새롭게 집권당이 된 사회주의 정당인 민중당(Janata Party)은 헌법 제 340조에 의거하여 역사적으로 불평등한 차별 대우를 받아 온 하층 집단의 상황을 개선하는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만달위원회(Mandal Commission)라는 이름의 위원회를 결성해 활동에 들어갔고, 그 2년 뒤인 1980년에 만달위원회의 보고서가 인도 정부의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주변에서 논란이 워낙에 심해 막상 그 정책을 시행하지는 못했으나 이 보고서는 나중에 태풍의 눈이 된다.

보고서의 본질은 '보상적 차별'이라는 것인데, 불가촉천민이 아니면서 여전히 사회적으로 낙후된 위치에 놓여 있는 여러 계급을 '여타후진계급'(Other Backward Classes)이라는 범주로 분류해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공공 기관과 교육 기관의 취업자 수의 일정 비율을 정해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보고서 이후 '여타후진계급'을 카스트를 기준으로 정할 것인지, 경제적으로 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증폭되면서 안은 시행되지 못한 채 10년 동안 방치되었다.

카스트를 기준으로 하면 전통적 분류의 슈드라가 주로 이 범주에 들어가지만 그 가운데는 이미 상당수가 경제적으로 부유층이 되어 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분류를 하여 그들보다 훨씬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는 상층 카스트도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를 기준으로 분류한다는 것 또한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90년에 들어 와 정권을 획득한 사회주의 정권인 싱(V. P. Singh)의 민족전선 연립 정권은 만달 보고서의 권고를 정부 정책으로 시행하려 했다. 그러자 상층 카스트와 하층 카스트 사이에 분쟁이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연립 정부를 구성하던 인도국민당은 정부 지지를 철회하였고, 결국 연립 정부는 붕괴되었다.
▲ 만달 정책이 시행되기로 하자 일부 상층 카스트는 극렬하게 저항하였다. 이 사진은 상층 카스트에 속하는 델리대학교의 한 대학생이 분신 자살을 하면서까지 저항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 정책은 1992년 인도 대법원에 의해 합법으로 판정이 났고, 이후 인도 정부는 그것을 실시하고 있다.

결국 카스트는 인도 정치의 핵으로 전면에 등장하였다. 의석 지정 정책의 도입으로 교육과 사회 그리고 경제적인 면에서 혜택을 입은 하층 카스트의 정계 진출이 늘어나고 변화된 환경으로 인하여 하층 카스트가 자기 카스트 출신 지도자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시켰다. 이미 전통적인 삶과 문화의 영역에서 기능을 수행해 오던 카스트 제도는 그 기능이 약화되어 있었던 터라, 카스트는 이제 정치적 세력의 확대라는 통로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특정 카스트에 속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지지해주는 것이 이제 일반적인 정치 행위로 자리 잡았다. 여러 카스트로 구성되어 있는 정당의 경우 입후보자를 정하는 과정에서 역시 카스트라는 요인이 부각되기 마련이며, 이러한 이유로 정당 내부에 카스트에 의한 파벌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비록 사회주의 정부에 의해 피압박 소외 카스트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시행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정부가 앞장서서 카스트 구조를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준으로 카스트를 범주화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탄생한 만달 정책으로 인한 카스트 구분을 두고 일부에서 카스트가 20세기에 들어 와 환생했다고 힐난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사실 오늘날 도시는 물론이고 인도의 농촌에서 카스트는 더 이상 직업이나 경제적 수준에서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다. 이제는 같은 카스트 구성원들 사이에도 토지소유 정도에 따라 부농, 중농, 빈농, 소작농, 농업 노동자 등 서로 다른 계급이 있고 토지 소유의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경제적 지위가 결정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토지를 소유한 부농, 중농 및 전문직 종사자들에서는 상층 카스트 비율이 높고, 불가촉천민을 포함한 하층 카스트와 부족, 무슬림, 기독교도 등의 소수 집단들은 여전히 빈곤 계층으로 남아 있다. 그들 대부분에게는 적절한 고용 기회도 주어지지 않고, 빈곤의 가장자리로 몰리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사실 인도 농촌에서 사회 경제적 관계는 오랫동안 높은 카스트의 지주와 낮은 카스트 노역자 사이에 존재하는 봉건적인 후원자-피후원자의 관계로 유지되어 왔다. 지주는 쌀이나 밀과 같은 식량을 주기적으로 대주고, 낮은 카스트의 노역자들은 높은 카스트의 지주가 하기를 꺼려하는 오염된 일 즉 청소, 이발, 빨래, 농기구 제작 등의 일을 해주었다. 그 사이에서 일어난 교환 행위에 대한 계산은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다만 두루뭉술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부문에서 지주가 노역자를 보호하는 후원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점차 활성화되면서 이 제도는 거의 사라졌고 이에 지주와 노역자 사이의 관계가 점점 더 상업화되고 계약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강화되면서 토지 소유자와 무토지 농민 사이의 관계가 노골적 착취 관계로 변화하였다. 이리하여 토지를 소유한 상층 카스트가 무토지의 하층 카스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전반적인 의무감은 옅어지고, 이제 양자는 서로 대립되는 이해 관계를 가진 사용자와 노동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농촌의 빈곤 계층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점차 깨닫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인도 농촌에서의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상황이 지주의 착취 일변도로 전개되자 이에 대해 대항하는 농민들의 투쟁도 점점 더 폭력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이 확고한 계급 의식에 기초를 둔 농민 운동으로 발전되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은 주로 빈농 계급을 구성하는 구성원 사이에 존재하는 카스트 의식 때문이다.

비하르와 같은 열악한 지역에서 일부 불가촉천민들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심한 착취에 시달리고, 심지어는 아직도 지주의 강제 노역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촌락 바깥에 별도의 우물을 사용해야 하고 인권의 차원에서 온갖 차별을 받으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주류와 분리되어 살고 있다. 반면에 그들 위에 속하는 카스트 농업 노동자들은 같은 카스트 출신의 부농들로부터 사회 문화적으로는 비교적 나은 대우를 받는다. 그들은 부농 카스트 구성원들과 이웃해서 상당한 사회 생활을 공유하면서 산다.

전통적으로 내려 온 카스트에 의한 차별 의식 때문이다. 이에 대해 불가촉천민은 달리뜨 즉 피착취 계급으로서의 강한 의식을 가지고 목숨을 건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상당한 자유와 인권을 쟁취하였지만, 그들보다 사회적으로 나은 위치에 있는 여타후진계급의 하층 카스트 농업 노동자들은 과거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더욱 떨어졌다. 이로 인해 하층 카스트들이 달리뜨에 대해 계급으로서의 동질 의식보다는 피해 의식 내지는 카스트 분류에 따른 적대적 의식이 더 커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농촌 사회에서 토지 소유 지배 계층이 무토지 빈곤층의 계급 연대를 막기 위해 카스트주의를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토지 소유 계급은 중농과 농업 노동자들 사이에 카스트 감정을 호소하고 다른 카스트들에 대한 편견을 부추긴다. 그 과정에서 선거를 이용해 자신이 속한 부유한 카스트 지도자를 지지하면 그들의 경제적 및 교육적 상황이 개선될 것이라는 식으로 부추기고 실제로 그러한 전략은 잘 맞아 떨어진다. 그렇지만 선거 뒤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그 전략의 속내를 깨달은 빈곤층도 거의 없다. 결국 농촌에서는 아직도 달리뜨와 그 위의 여타후진계급에 속하는 하층 카스트 사이를 가로지르는 카스트 장벽이 같은 경제적 지위를 공유하는 계급으로서의 이해관계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늘날 인도 농촌의 주된 갈등 및 대립의 축을 상층 카스트 지주 대 하층 카스트 농업 노동자로 두는 것은 적절치 않다. 실질적으로 그 대립의 축이 부농·중농 대 농업 노동자·빈농 사이에서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농촌 갈등의 기본은 토지 소유자와 무토지자들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토지 소유의 여부와 카스트의 높고 낮음이 항상 일치하지만은 않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카스트 위계상으로 볼 때 같은 하층에 속하면서 빈농 계급을 형성하고 있지만 불가촉천민과 그 위의 하층 카스트 사이에는 상당한 갈등이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인도 농촌 사회에서 터지는 갈등을 빈농과 부농 사이의 계급 갈등인 것과 상층 카스트와 달리뜨 사이의 카스트 갈등인 것을 정확하게 분리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대부분의 농촌 여론이나 언론은 두 경우를 모두 후자 즉 상층 카스트 대 달리뜨의 갈등으로 몰아가고 있다.

예컨대 1980-81년 마하라슈뜨라주의 아흐마드나가르(Ahmadnagar), 둘레(Dhule) 등에서 벌어진 사탕수수 노동자 투쟁이나 마디야 쁘라데쉬주의 보즈뿌르(Bhojpur)에서 수십 년간 계속된 달리뜨와 하층 카스트의 연대 노동자 투쟁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거나 소작권을 반납하지 않으려는 소작인들의 소작 쟁의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투쟁은 1950년에 이르러서 지주(자민다르)제가 철폐되었지만 그 자리를 새로운 소농들이 차지하여 부당한 노역과 소작료를 착취하는 일이 사라지지 않음으로써 격화되었다.

1967년에는 서벵갈 주의 낙살바리에서 무토지 농민과 빈농이 토지 점거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그것은 토지 개혁

후에도 토지 소유의 불평등 구조와 자신들에 대한 새로운 지주들의 착취가 과거와 달라진 것이 없는데다가 결국 그로 인해 자신들의 빈곤이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낙살바리 방식의 무장 투쟁의 영향력은 전국적으로 끼치면서 많은 곳에서 계급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 무토지 농업 노동자에 대한 지주들의 보복 행위는 불가촉천민에 대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인도 농촌에서 일어난 갈등을 모두 이러한 계급 갈등으로 간주하는 것도 현실을 도외시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 둘은 복잡하게 섞여 있어서 카스트 갈등이라고도 하기 어렵고 계급 갈등이라고도 단정 짓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계급 갈등의 성격이 강한 것조차 "계급 전쟁이라는 껍데기를 쓴 카스트 간의 갈등"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렇게 규정하는 사람들은 흔히 '계급'이라는 것을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는 범주로 본다. 하지만 '계급'이라는 것이 균질적이고 단일적인 집단이 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투쟁에 나서는 집단이라고도 할 수는 없다. 계급은 구성원의 의지로 인해 형성되는 것이 아닌 외부적 환경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런 시각이 팽배한 것은 계급 전쟁을 카스트 갈등으로 분류함으로써 그들 사이에 분열을 노리기 때문이다.
▲ 달리뜨에 대한 보복은 대부분 여성에 대한 강간과 가족 학살의 유형을 띠고 있다. 2006년 서부 인도의 한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토지를 놓고 분쟁이 일어난 후 네 명의 괴한이 피해자의 집에 침입해 18세 딸을 마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윤간하고, 가족끼리 성관계 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아버지와 아들의 성기를 절단하고 가족 모두를 살해했다.

통계를 보면, 1971년부터 1999년 3월까지의 기간 동안 비하르에서 그러한 종류의 갈등으로 달리뜨와 여타후진계급에 속하는 하층 카스트가 675명이나 학살당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해마다 50명 이상이 학살당하고 있다. 학살당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가난하고 헐벗고 못 배운 빈농 계급이다. 그럼에도 언론은 그들의 싸움과 학살을 카스트 간에 벌어지는 것으로 규정한다.

사실 그들에게 얼마나 투철한 계급 의식이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이 카스트 의식으로부터 얼마나 자유스러운지도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그들 안에 있는 계급적 성격을 카스트 성격의 충돌로 은폐하거나 유도하고 그를 통해 계급 분열을 노리려는 지배 계급과 일부 카스트 정치인들이 그 성격 규정에 주도적으로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도 농촌에서 존재하는 계급 갈등이 한국에도 있는가라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그럴 때 난, 어휘 선정에 조심스럽다는 전제를 달고서,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고 답을 해 왔다. 그것은 특히 20대 80의 시대가 한국 사회에 보편화되면서 더욱 그렇다. 한국인의 상위 1퍼센트가 전체 사유지의 51.5퍼센트를, 상위 5퍼센트가 82.7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2007년까지 50대 기업의 매출은 매년 1백 퍼센트 이상 상승했지만 고용은 도리어 감소했다. 비정규직이 이미 855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7.1%를 차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여파로 한국 사회는 바야흐로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계급과 자본가 계급이 확연하게 나뉜 것이다.
▲ 2008년 9월 1일 발표한 세제개편안은 강남의 부자에게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이를 보고 정부 지지를 철회한 노동자가 얼마나 있을까?

그럼에도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의 상당수는 자본가 계급을 위한 한나라당에 대해 무한 지지를 철회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에는 지역주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특히 영남 지역의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은 서울 강남의 유권자들과 동일한 투표 성향을 보인다. 인도에서 카스트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채 투표하는 농민 노동자 계급의 정치 성향과 전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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