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공동체적 나눔이 충만하며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는 하나된 한반도를 열어가는 기독교 싱크탱크'를 표방하는 한반도평화연구원(KPI)의 칼럼을 전재·소개합니다. 한반도평화연구원(원장 윤영관 서울대 교수)은 '냉전시대 좌우의 이념대립을 지양하고 탈냉전 평화의 한반도를 분석한다'는 취지로 2007년 설립됐습니다. 연구원 홈페이지()에는 <프레시안>에 소개된 칼럼 외 각종 글과 자료가 게재되어 있습니다. <편집자> |
한반도 정세가 여전히 불안정하다. 북한의 대남 전면 대결 선언 이후 남북관계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로 위협하고 남측 역시 서해상의 경계태세를 강화하는 양상은 물러설 수 없는 치킨게임이 결국 정면충돌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려케 한다. 북미관계 역시 새로운 협상에 대한 기대보다는 또 다른 갈등과 대결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모두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2009 한반도 정세는 힘겨운 출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과 미국의 협상전략
특히 북미 직접협상을 공약했던 오바마 신정부 출범 이후에도 북미가 진지한 대화를 시작하지 못한 채 복잡한 힘겨루기에 매몰되고 있음은 한반도 정세의 호전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적지 않은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고 있다. 오랫동안 끌어 온 고질병처럼 북한과 미국의 신경전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바, 그 선두에는 힐러리 국무장관과 김정일 위원장이 맞서고 있다. 국무장관 인사 청문회를 즈음해서는 북미가 원칙적 입장을 교환하는 첫 번째 신경전을 벌였다. 힐러리 내정자는 핵폐기가 핵심 목표임을 분명히 하고 어길 경우 추가 제재도 가능하다는 최대치의 대북 요구를 북에 보냈다. 북한 역시 북미관계 정상화와 미국의 핵위협 제거 없이는 결코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최고조의 입장으로 맞받아쳤다.
두 번째 라운드는 북미 모두 온건한 메시지를 교환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건강이상설의 오랜 논란을 잠재우고 왕자루이 대외연락부장을 만나 비핵화를 위한 노력 강조와 함께 한반도 긴장고조를 원치 않는다는 유연한 신호를 보냈다. 미국 역시 북한의 비핵화 결단에는 다양한 당근으로 화답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두 차례 강온 입장을 교환한 북한과 미국은 급기야 힐러리 국무장관의 아시아 순방을 통해 보다 높은 수준의 전략적 계산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힐러리 장관은 북한이 손을 펴면 그 손에 북이 원하는 것들을 줄 수 있다며 적극적 대화 의지를 표명했다. 북미관계 정상화뿐 아니라 평화체제 문제와 대북 경제 에너지 지원 등의 적잖은 당근이 준비되어 있음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그러나 곧이어 북한의 후계 문제를 거론하면서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을 언급하는 과감한 전략을 구사했다. 미 국무부의 입장이라고 공식 확인된 이 발언은 과연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아무도 시원스럽게 설명하지 못한 클린턴 장관의 발언은 사실 차후에 있을 북미 협상의 구조를 전환시키려는 고차원의 전략적 고려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부시 행정부 시기 북핵문제는 협상이 지연될수록 실패하게 되는 쪽은 미국인 구조였다. 부시 행정부가 겉으로는 선 핵포기를 강조하고 악행에 대한 보상 불가와 북한과의 양자협상 불가를 외쳤지만 그로 인해 협상이 지연될 경우 미국은 오히려 북핵문제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떠안아야 했다. 협상이 중단되는 그 순간에도 북은 영변의 원자로를 돌리면서 핵물질을 늘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구조적으로 북핵문제는 협상이 지연될수록 시간이 북한 편이었던 역설이 존재했고 그 이유로 결국 미국은 북한과의 직접 협상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의 북핵문제는 구조가 조금 바뀌어 있다. 북한은 2.13 합의 이후 핵시설의 동결에 이어 불능화에 나섰고 이제는 협상이 지연되더라도 미국을 위협할 핵물질과 핵무기의 증대는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클린턴 장관의 대북 후계 발언은 변화된 이 협상 구조를 북에게 정확히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핵물질이 더 이상 늘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쪽은 미국이 아니라 북한임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2.13 합의 이후 뒤바뀐 북핵문제의 구조를 정확히 간파하고 오히려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을 북한의 협상 촉구용으로 활용하고 나선 것이다. 힐러리 장관이 이번 동아시아 순방길에 북이 그렇게 원하던 북미 양자협상 의사를 한반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뒤바뀐 협상의 구조를 내세워 공세에 나선 미국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 또한 호락호락 당할 리가 없었다. 수세에 몰린 김 위원장은 북미 협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서둘러 미사일 카드를 꺼내 들었다. 오히려 시간이 미국 편이 되어 버린 지금의 상황을 다시 한 번 반전시켜 미국을 압박할 수 있는 카드로 김 위원장은 미사일을 활용하고 나선 것이다. 핵물질은 증대되지 못하지만 진화된 미사일 기술이 과시된다면 그 자체로 핵문제는 다른 양상이 되기 때문이다. 인공위성이라 하더라도 핵탄두를 운반할 수 있는 발사체 기술은 동일하기 때문에 본격협상도 하기 전에 미국에게 책잡힐 미사일은 피해가기로 했다. 북한은 인공위성 발사를 통해 북미협상의 판을 한 번 더 복잡하게 만들 셈이다. 미사일 카드를 내세운 북한의 전략은 곧바로 보즈워스 대북 특사를 움직일 만큼 일단은 성공한 듯하다.
두뇌싸움이 아니라 긴장 해소가 중요
힐러리 장관과 김정일 위원장의 두뇌싸움이 볼만하긴 하지만 그 경쟁이 한반도 평화를 볼모로 진행되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다. 자신들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그 좋은 머리를 사용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로 인해 한반도 평화가 위협받고 남북관계마저 파탄난다면 그것은 머리만 좋을 뿐 마음이 좋은 사람은 결코 아니다. 북한과 미국 모두 지금의 위험한 머리싸움 대신, 복잡한 고차 방정식 대신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진지함을 보여줘야 한다.
우선 북한은 미사일 카드를 버리고 미국과의 첫 협상이 원만히 시작될 수 있도록 성의를 보여야 한다. 북한으로서는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그동안 적지 않은 양보를 얻어낸 경험을 갖고 있다. 금창리 의혹이 불거진 상황에서 북한은 1998년 대포동 1호를 발사했다. 결국 다음 해 미국으로부터 식량지원을 받고 의혹시설 방문을 허락함으로써 금창리 문제를 해결한 후 미사일 발사 모라토리엄에 합의했다. 2006년 7월엔 북미 간 최대 쟁점이었던 BDA 문제로 갈등을 계속하다가 결국 대포동 2호 미사일을 발사했다. 결국 미국의 관심을 집중시킨 후 핵실험까지 강행함으로써 부시 행정부의 양보를 이끌어냈다. 미사일 발사로 얻은 과거의 경험이 이번 오바마 행정부에 대해서도 섣부른 유혹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시기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북에게 결코 이롭지 않다. 막 취임한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관심을 환기하고 한반도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만에 하나 과거 미사일 발사로 얻은 몇 번의 이익에 눈이 멀어 발사까지 강행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북에게 치명적이 될 수 있다. 북미 협상의 기대는 사라지고 명맥을 유지하던 6자회담마저 난관에 부딪칠 수 있다. 선의를 가지고 북을 대하려던 협상파들도 대북 경계심과 강경론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게 된다. 남북관계의 악화에 더해 북미관계까지 경색되는 것은 북이 미사일을 통해 얻으려는 미국과의 통 큰 협상을 오히려 불가능하게 만든다.
미국 역시 시간끌기가 아니라 북한과의 신속한 양자협상에 나서야 한다. 북핵 해결의 실질적 단초가 되었던 2.13 합의가 도출될 수 있었던 원인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2007년 2.13 합의는 당시 핵실험과 대북 유엔제재로까지 대립했던 북한과 미국이 본격적인 양자협상을 통해 주고 받기 식 쟁점 타결에 나선 점이 당시 합의 도출의 주요 배경이었다. 북미 베를린 회담에서 대부분의 쟁점들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었고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상호 타협을 얻어낼 수 있었다. 신뢰에 기반을 둔 진지한 양자협상이 큰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지금 협상을 앞두고 있는 오바마 행정부 역시 양자협상의 의지를 적극 보여야 한다. 말을 앞세울 게 아니라 신뢰에 기반을 둔 양자협상을 서둘러 시작해야 한다. 힐러리 장관도 보즈워스 대북특사도 6자회담보다는 양자협상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한다.
남북관계 복원의 필요성
북미 협상에 동력을 불어넣기 위해선 오바마 행정부와 북한과의 첫 협상이 순조롭게 시작될 수 있도록 남북관계가 적극적 역할을 해야한다. 한국 정부는 남북관계 복원을 통해 북한이 현실과 동떨어진 과도한 대미 요구와 경직된 입장을 갖지 않도록 충분히 설득해야 한다. 미국이 민주당 정부라는 이유만으로 북한의 요구에 무조건 응할 것이라고 오판하지 않도록 남북관계의 채널을 통해 충분히 북을 설득하고 설명해줘야 한다. 지금의 미사일 사태와 같은 북미 갈등을 해소하고 북미 관계 진전을 이뤄내기 위해서라도 남북관계를 통한 한국 정부의 대북 영향력 확보는 최소한의 조건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림의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군사적 충돌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남북관계 악화를 개선하려는 노력과 의지보다는 북한책임론을 강조하는 데 급급하고 있다. 북한이 태도를 변하지 않는다면 먼저 손을 내밀지 않겠다는 남북관계중단 불사론의 연장선이다. 지난 연말 남북대화 복원에 나서겠다는 통일부의 업무보고를 질타했던 대통령의 인식은 여전히 그대로다. 관계 단절이 오히려 북한을 굴복시키고 나오게 할 것이라는 주관적 기대를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는 3.1절 경축사 발언은 북한의 반응을 얻어내기 힘든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말았다. 곧 이은 외교부 차관의 북한인권 강성 발언은 대화를 원한다는 남측 당국자의 발언을 원점으로 돌리기에 충분했다. 남북 간 합의사항을 존중한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북한인권 거론으로 인해 곧바로 상호 체제존중을 명시한 10.4 선언 위반으로 비판받았다.
남북관계라는 우리의 독자적 지렛대가 확보되어야만 북미관계의 진전과 갈등 상황을 한반도 평화라는 차원에서 관리할 수 있다. 남북관계의 유지는 북미관계가 갈등으로 치달을 때 한반도 긴장고조를 막는 완충장치 역할을 하는 한편, 북미 간 접점 찾기의 가능성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또한 남북관계의 유지는 북미관계가 진전될 경우 한반도 정세에 대한 우리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이제 남과 북, 북한과 미국 모두 머리싸움이나 강경발언이 아니라 문제해결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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