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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지셴린 선생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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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지셴린 선생을 기리며 [추모사] 한국에 있는 제자 정수일이 삼가
지난 11일 향년 98세로 타계한 지셴린 베이징대 명예교수는 12개 언어에 능통한 중국의 대학자로 중국언론에서는 그를 '인간 국보'로 불러왔다. 특히 베이징대 동방어문학부를 창설한 그는 우리나라 문명교류학의 대가인 정수일 선생의 스승이기도 하다. 1952년 베이징대 동방어문학부에 입학한 그는 지셴린 선생의 권유로 아랍어를 공부하게 됐으며 그 이후 문명교류학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현재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정수일 선생이 자신을 학문의 길로 이끈 옛 스승을 기리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백수(白壽)를 눈앞에 둔 노스승 지셴린(季羨林) 선생님이 타계하셨다는 비보를 접한 순간 슬픔과 애달픔을 금할 수 없다. '국학의 대사', '학계의 태두', '국보'로 높이 추앙 받아온 선생님의 타계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학계의 크나큰 손실이다. 옷을 여미고 머리 숙여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노스승과의 첫 인연은 5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2년 여름, 중국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국가통일시험에 합격되었다는 소식만 듣고 한달음으로 베이징대학에 찾아갔을 때, 대학은 시내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사하느라 개교를 미루고 한창 기숙사를 짓고 있었다. 신입생이 기거할 곳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아득히 먼 변방 옌벤에서 마차와 버스, 기차를 번갈아 타며 나흘이나 걸려 찾아온 곳에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동방어문학부 신입생으로서 의지할 곳은 학부 주임(학장)이신 지 선생님뿐이었다. 학자풍의 인자하신 선생님께서는 사연을 들으시고 나서 무턱대고 자택에 와 지내라는 것이다. 초면에 차마 그럴 수는 없어 사양하니, 친히 대학 관리부서로 이끌고 가 대책을 신신 당부한다. 결국 실내 체육관 2층에 매트리스를 깔고 임시 거처를 마련하게 되었다. 거기서 달포나 지내는 동안 선생님은 몇 번이고 찾아오셨다.

▲ 지셴린 베이징대 명예교수
학기가 시작되자 동방어학 중(당시는 9개 어학) 전공어학을 선정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물론 전공은 학교 당국으로부터 최종 배정하지만, 학생들의 지망은 참고하기 때문에 사색이 필요하다. 역시 상의를 드릴 분은 선생님이시었다. 12개 언어에 달통하신 선생님께서는 한국어와의 상관성을 들어 몽골어나, 아니면 전망성으로 미루어 아랍어를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주셨다. 사실 한국어와 몽골어와의 관련성은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고 있었지만, 아랍어의 '전망성'에 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었다. 결국 아랍어과로 배정되었다. 선생님의 뜻 깊은 배려였었을 것이다. 이렇게 아랍어와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그 후 지금까지 50여년간 내내 아랍-이슬람 세계와 씨름하면서 선생님의 그 탁월한 원경지명과 사려에 거듭거듭 감복하곤 한다.

선생님은 인문학의 모든 분야를 두루 통섭하신 학계의 태두이시며 동양학의 거장이시다. 선생님의 학문적 연구분야만 해도 인도 고대언어, 토카리스탄어, 인도 고대문학, 인도불교사, 중국불교사, 중앙아시아불교사, 당사(唐史), 중국-인도 문화교류사, 중국-외국 문화교류사, 중국-서구 문화의 비교, 미학과 중국 고대 문학예술론, 독일 및 서양 문학, 비교문학, 민간 문학, 산문창작 등 실로 다종다양하며 분야마다에서 발군의 업적을 남기셨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80년대에 이미 『지셴린문집』24권이 출간되었다. 그래서 선생님께는 고문자학자. 사학자. 동방학자. 사상가. 번역가. 불교학자. 산스크리트어학자. 작가 등 근 열 가지 학문적 전문가 칭호가 따라 다닌다.

특히 산스크리트어 고전 학문분야에서는 세계적 석학으로서 명성이 높다. 해박한 고전 지식으로 동양학의 원류를 밝히시는 선생님의 강의와 논저는 구지욕에 불타는 우리 젊은 학도들의 가슴속을 깊이 파고들었다. 40여년이 지나서 이순(耳順)을 훨씬 넘긴 나이에 이 제자가 감방에서 만학으로나마 산스크리트어를 익히려고 한 것은 바로 선생님이 일찍이 심어주신 학문인자(因子)의 싹 돋음이다. 이것이야말로 제자가 스승의 학문을 이어받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일진대, 학문은 그래야 이어지고 살찌는 법이다.

1955년 말, 카이로대학 유학을 앞두고 선생님 댁에 들렀다.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제자의 두 손을 꼭 잡고 축하를 보내주셨다. 한 말씀 부탁드리니, 잠시 사색에 잠기셨다가 '아랍은 고전의 보고'이니 고전부터 독파하라고 당부하시면서 아랍 고전에 관한 연구는 독일이 가장 앞섰다고 덧붙이신다. 학문에 달관한 스승의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하고는 그대로 하리라 마음먹었다. 유학기간 어렵지만 고전에로의 접근만은 끈을 놓지 않았다. 그 접근을 위해 스승이 예시한대로 독일어에도 손을 댔다. 고전은 학문의 샘이다. 샘물만이 참 물이다. 강물이나 냇물은 이미 참 물이 아니다. 뿌리 없이 휘젓기만 하는 얄팍한 학문적 세태를 탈피하는 첩경은 '고전벽(癖)'이다. '고전벽'에 미쳐야 학문의 경지에 미치게 된다. 이것은 스승의 가르침에서 터득한 제자의 학문적 신조다. 스승을 떠나보내는 이 순간, 이 신조가 새삼 되새겨진다.

세월은 어느새 10년을 훌쩍 뛰어넘어 환국을 앞둔 어느 날 인사차로 노스승을 찾아갔다. 그날도 선생님은 고적 속에 파묻혀 계셨다. 이제 머리에는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한다. 찾아온 사연을 말씀드리니, 처음엔 섬뜩 놀래시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으시면서 특유의 인자함과 소탈함으로 동정을 표시하신다. 앞에서도 보다시피, 선생님은 늘 제자를 중국 경내에 사는 한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일원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조선(한국)의 한 젊은이로 보셨기에 제자의 환국을 오히려 의젓하게 생각하시는 것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노스승과의 만남은 아쉬움을 감싸는 환담으로 이어졌다. 인생과 학문에 관해 또 한 차례 많은 귀중한 가르침과 당부를 주셨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위국효용'(爲國效用), 즉 '나라(조국)를 위해 배운 것을 효과 있게 쓰라'는 독려였다. 그러시면서 산스크리트어 번역시 한 권을 송별 선물로 주셨다. 노스승은 참으로 학문도 바닥 없이 깊거니와 도량도 한량없이 넓으신 분이다.

선생님은 높은 학덕만큼이나 인품 또한 고매하다. 늘 빛바랜 중산복 차림에 천으로 지은 책가방을 자전거 핸들에 걸쳐놓고 대학 캠퍼스를 누비던 그 수수하고 소탈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선생님은 부드러우면서도 결코 불의 앞에선 굽히지 않는 유약한 지식인이 아닌, 강인한 지성인의 표상이시다. 선생님의 삶의 좌우명은 도연명의 시 한 수에서 따온 "거칠고 변화 많은 세상에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 걱정할 것이 없으리"다. 얼마나 호방하고 떳떳한 인생관인가.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무지막지한 '문화대혁명' 때는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 맞받아 나가셨다고 한다.

당시를 회고한 책 『우붕잡억(牛棚雜憶)』(『외양간의 갖가지 기억』, 여기서 '외양간'은 '문화대혁명' 때 비판 대상자들이 갇혀있던 장소를 빗댄 말)에 의하면, 스승은 연금상태에서 낮에는 홍위병들로부터 '비판'을 받으면서도 밤에는 서양시를 중국어로 번역하셨다고 한다. 지성인의 참 모습이다. 그래서 국무총리 원자바오(溫家寶)는 병석에 누워계시는 선생님을 다섯 차례나 방문해 치국(治國)의 가르침을 구하면서 '정신적 스승'으로 높이 모셨다고 한다. 지금 학계의 거목이 쓰러졌으니 세상이 다시 방황하게 될 것이라고 중국인들이 우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학문이 중히 여겨지고, 학자가 대접 받는 사회만이 진정한 문명사회이고 바람직한 미래사회다.

▲ 정수일 소장 ⓒ프레시안
스승이란 자신의 삶을 일깨워주고 이끌어주는 사표이다. 스승의 가르침과 이끄심이 있기에 사람은 성숙하고 사회는 발전한다. 참 사표, 참 제자가 고갈된 사회는 병들고 썩은 사회, 무망(無望)의 사회다. '하루 스승 백년 어버이'(一日之師 百歲之父)라는 말은 스승의 가르침이 얼마나 소중하고 영원한가를 일러준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야말로 전세와 현세, 그리고 내세까지 이어지는 '사제삼세'(師弟三世)라고 하니, 인연치고는 가장 끈질긴 인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럴진대 스승이 남기고 간 유업은 제자가 맡아 수행해야 한다. 학문에 국경이 없듯이 사제 간에도 국경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노스승과 같이 덕재(德才)를 겸비한 세기의 '사건 창조적 인물'에겐 더더욱 그러하다.

스승이시여, 저승에서 이승의 학문개화(學問開花)를 지켜보시면서 고이 잠드시소서. 다시 한번 머리 숙여 명목을 비는 바이다.

2009년 7월 15일
불초제자 정 수 일 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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