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를 초토화시켰던 원자핵폭탄의 가공할 파괴력은 인류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안겨주었지만 그 만큼 많은 국가들이 핵무기에 집착하도록 했다. 최소한 히로시마, 나가사키 이후 역사는 핵경쟁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상 핵무기 사용은 단 한차례 있었지만, 2000회 이상의 핵실험이 있었고, 핵무기 보유 국가들은 북한을 포함해 9개 국가로 늘어났다. 핵의 평화적 이용 권리이라는 이름으로 핵에너지에 대한 의존은 전세계적으로 높아졌다. 드리마일과 체르노빌 핵사고 이후에도 '값싸고 안전한 에너지'를 생산해낸다는 핵발전소의 신화는 건재했다. 핵발전이 확대되는 만큼 핵무기의 원료가 될 수 있는 핵물질도 쌓여만 갔다. 그 결과 현재 전세계에는 일본에 투하되었던 핵폭탄 'little boy'를 12만개 이상 만들어낼 수 있는 1,600톤의 농축우라늄과 500톤의 플루토늄이 존재한다.
이처럼 핵에 의존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2009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핵무기 없는 세상"이라는 비전을 세상에 내놓았다. 오바마 행정부는 2010년 전략핵무기 감축 협상(New SATRT)을 러시아와 맺고, 핵억지력은 유지하면서 핵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겠다는 내용의 핵태세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를 발표했다. 그리고 워싱턴에 각국 정상들을 소집해 테러집단으로부터의 핵물질의 안전 방안을 논의하는 핵안보정상회의(Nuclear Security Summit)를 열었다. 그러다 2011년 3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본의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뒤늦게 일본도 유럽의 일부 국가들도 핵발전소의 점진적인 폐쇄를 약속하기 시작했다.
국제사회는 핵 없는 세상으로 가고 있는가
핵안보정상회의는 핵테러를 국제안보를 가장 위협하는 것으로 규정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제안으로 2010년 4월 47개 국가의 정상들과 UN, EU,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워싱턴에서 처음 열렸다. 미국이 핵안보를 제기하는 배경에는 9.11 테러의 경험과 핵물질 확산에 대한 보다 강력한 통제의 필요성에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집단들이 핵무기나 핵물질 획득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으며, 핵물질과 방사성 물질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효과적인 핵테러 대응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핵안보정상회의를 발의한 오바마 행정부에게 핵안보 조치의 이행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제사회가 핵테러 위협을 공동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워싱턴정상회의는 11개 분야의 50개 이행조치를 담은 작업계획(Work Plan)을 내놓았는데, 이것은 핵의 평화적 이용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강력한 핵안보 조치 이행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핵무기 원료가 될 수 있는 고농축우라늄(HEU)을 최대한 줄여 궁극적으로 사용을 금지하도록 하고, 핵물질 저장 장소를 최소한으로 줄이며, 동시에 핵테러억지와 핵물질 방호에 관한 협약 가입 및 비준과 유엔결의안에 대한 이행을 주문하고 있다. 세계핵테러방지구상(Global Initiative to Combat Nuclear Terrorism)의 제도화 등 각국이 핵 밀매 막기 위한 법적, 제도적 조치를 취할 것과 한국도 동참하고 있는 핵안보 훈련센터 설립, 관련 기술 제공과 파트너십 구축, 그리고 재원마련 방안이 모색되었다. '핵안보'에 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핵산업계의 역할도 강조하고 있다.
'핵안보' 논리의 한계
워싱턴 핵안보정상회의 이후 일부 국가들은 후속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몇몇 국가들은 HEU에서 저농축우라늄 시설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고, 멕시코 등은 HEU를 미국과 러시아에 반환하는 방식으로 제거했으며, 미국과 러시아도 각각 7t, 48t의 HEU를 폐기했다고 한국 정부 자료는 전하고 있다. 핵물질방호협약이나 핵테러억제협약에 13개국이 추가로 비준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선언적 의미에 그치고 있다.
지구적 차원에서 핵무기와 핵물질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핵안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시간이나 재정이 막대하게 소요되며, 국경을 넘어선 협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핵안보 논리는 여러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핵무기든 핵물질이든 테러범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최선의 방안은 핵의 존재를 최대한 줄이고 없애는 것이다. 수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핵억지력을 강화하며, 핵물질을 만들어내는 핵발전소를 늘리는 것은 '핵안보'를 더욱 어렵게 할 뿐이다. 핵군축을 등한시하고, 핵무기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 핵보유 국가들의 태도나, NPT에서 침해할 수 없는 주권 영역으로 두고 있는 핵의 평화적 이용 권리는 '핵안보'의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핵억지력이라는 이름으로 핵무기를 쌓아온 미국과 러시아는 핵무기를 줄이기 위한 협정을 맺어왔다. 군비증강에 열을 올렸던 미국의 레이건, 부시 행정부 시절에도 대륙간탄도미사일과 핵탄두를 줄여나갔다. 전세계 핵무기의 95%를 차지하고 있는 두 나라에게 수천기의 핵무기의 존재는 핵억지력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냉전 종식 이후 20년 동안 러시아를 억제하는 데 필요한 수준 이상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자체 평가를 하고 있다.
핵억지력에 집착할수록 멀어지는 '핵안보'
그러나 핵무기를 대폭 줄인다고 해도 핵무기의 필요성은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2012년 1월 5일에 발표한 국방전략에서 미국은 핵 없는 세상을 향한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고 핵무기 역할도 줄일 거라면서 동시에 핵무기가 존재하는 한 핵무기를 효과적으로 유지할 것이며, 핵위협에 대응하는 것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적을 억제하는 한편, 미국의 동맹국과 협력국들이 미국의 안보선언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핵무기를 전개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New START 협정도 실전배치되지 않은 전략핵과 모든 전술핵무기는 감축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 결과 현재 알려진 미국의 전략핵무기는 1790기에 달한다.
북한의 핵개발을 둘러싼 갈등에는 미국의 핵위협과 한국에 대한 핵우산 제공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부시 행정부 당시 전략핵 작전계획(OPLAN) 8044에서 북한을 공격대상에 포함한 이래 지금까지 그 작전계획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동아시아로의 복귀를 선언하면서 과거 냉전기간 대서양 연안에 배치했었던 대부분의 전략핵잠수함을 핵심적 이해지역으로 간주하고 있는 태평양 지역에 배치하고 있다. 핵무기나 핵물질 확산 차단을 위해서는 북한도 협력 대상에 포함되어야 하지만, 그 대신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과 같이 국제법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핵확산 차단 조치로 압박한다면, 핵 갈등은 더욱 격화될 수밖에 없다.
핵군축에는 무관심하고, 핵무기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 경향은 핵군축과 비확산 관련 유엔 총회 결의안에 대한 주요 국가들의 표결에서도 확인된다. 2009년 NWC(핵무기사용금지협약), CTBT(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 FMCT(핵분열성물질생산금지조약), NSA(비핵국가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 조약화 결의안을 비롯해 비핵지대 조약, 핵군축 의무, 방사성 물질 취득 방지 등에 관한 총 19건의 결의안 중 표결에 붙여진 13건에 대한 주요 국가들의 표결 결과는 다음과 같다.
2008년 부시 행정부 당시 표결에 부쳐진 결의안에 대해 100% 반대했던 미국은 오바마 취임 이후 일부 변화를 보이고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 핵보유 5개국들의 표결을 비교해보면 중국이 75% 이상의 찬성률을 보이고 있고, 조사대상 12개 국가 중 가장 낮은 찬성률을 보인 국가는 이스라엘이었다. 높은 찬성률을 보인 국가는 국제사회가 핵확산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이란(92%)과 북한(60%)이었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표결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표결에 따르면 미국은 핵무기사용금지협약에 반대표를 던졌고, 비핵국가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을 위한 협정체결에는 기권을 하고 있다. 핵분열성물질생산금지조약(FMCT) 체결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현존하는 핵분열성물질을 제외한 앞으로 생산될 핵분열성물질만을 조약의 대상으로 한정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입장 때문에 조약체결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있는 한국과 일본은 비핵국가로써 높은 찬성률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지만, 사실 절반 수준의 찬성률을 보이고 있다.(한국 54%, 일본 62%) 두 국가는 '1995년 및 2000년 NPT 검토회의에서 합의한 핵군축 의무이행' 결의안에도 반대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과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핵억지력을 제공받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후쿠시마 사태는 핵발전 중단의 이유가 될 수 없다"
핵발전은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유일한 피폭국가인 일본에서조차 핵무기는 용인할 수 없어도 핵의 평화적 이용은 선한 것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핵의 평화적 이용을 선전하기 위해 일본의 수많은 도시에서 핵박람회가 개최되었고, 피폭자(히바쿠샤)들까지 동원되었다. 일본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나라로서는 세계 유일하게 우라늄 농축시설과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재처리 시설을 갖추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핵을 군사용이 아닌 민간용으로 사용하겠다며 확장되어 온 일본의 핵발전은 40t 이상의 플루토늄 축적으로 이어졌다.
일본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핵발전이 확대된 결과 2000톤 이상의 핵물질이 쌓였고, 그 만큼 핵물질의 분실과 도난 가능성도 커졌다. 실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지난 20년 동안 핵물질이나 방사성 물질의 분실, 도난사례는 약 2천 건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례들이 테러나 범죄집단에 의한 것인지는 확인된 바 없다. 오히려 핵확산의 사례를 보면 테러집단이 아닌 정부 차원에서 비밀리에 추진되는 경우가 많다. NPT 밖에서 핵무기를 개발한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이 그랬고,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2000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일부 직원들이 우라늄 분리실험을 한 것이 2004년에 밝혀져 크게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시 파문을 통해 한국은 레이저를 이용한 우라늄 농축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해 9월 뉴욕에서 열렸던 유엔 고위급 회의에서 많은 국가의 정상들은 대체로 후쿠시마 재난이 핵발전소 중단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오스트리아, 독일, 아일랜드가 핵발전소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핵군축과 비확산차원에서 핵안전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 노르웨이나 비동맹 국가들을 제외하고, 핵무기 보유 국가들을 위시한 국가들은 핵발전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여기에 한국도 포함된다. 일본은 재생에너지 개발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놀랍게도 핵발전 수출은 지속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지금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후쿠시마 핵사고는 핵안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핵발전소의 안전 신화를 송두리째 붕괴시킨 이 사태는 외부의 침입이나 테러 공격이 아닌 대지진과 쓰나미라는 자연의 역습으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핵안보정상회의는 여전히 핵테러 방지와 핵시설 안전을 강조하고 있다.
핵테러가 전지구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최대 안보문제인지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대다수 국가에게는 핵군축이 더 중요한 국제적 의제이며, 핵의 평화적 이용 권리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NPT체제에 더 많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일부 국가들의 경우 핵의 평화적 이용 권리를 이용해 핵무기를 개발했고, NPT에 가입하지 않아도 미국을 위시한 국가들과 핵연료 협정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NPT 자체도 특정 국가가 자국의 주권행사나 이익 추구에 반할 경우 조약을 탈퇴할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어 평화적 핵 이용 권리가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 길을 열어두고 있다. 실질적인 핵군축 요구는 외면하면서 일부 국가들만 선별적으로 문제 삼고 있다는 미국 등 핵보유 국가들에 대한 불신은 '핵안보' 조치가 궁극적으로 이들 국가의 핵독점 강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낳고 있다.
더욱이 대다수 국가들은 자신들이 핵테러에 취약한 것으로 평가받길 원하지 않는다. 일부 국가들은 핵물질의 민감성 때문에 다른 국가나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거부하기도 한다. NPT 회원국들조차 강력한 핵사찰을 요구하는 IAEA 추가의정서 채택과 같은 핵물질 통제 메커니즘에 적극 동참하지 않고 있다. 가장 위험한 핵분열성 물질인 HEU의 경우, 유엔결의안 1887호는 HEU 사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어떤 국가들은 의료용 동위원소 생산이나 핵연구 실험을 위해, 또 일부 국가는 핵함정의 연료로 쓰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핵안보를 위해 강력한 기준을 세우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핵안보'보다 '핵 없는 세상'
현재 정부는 후쿠시마 재난 1년 즈음이 되는 3월 26일~27일, 안보분야 최대 정상회의 개최라며 서울핵안보정상회의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핵 없는 세상'을 말하면서 정작 폐기해야 할 '핵'의 안보를 대규모 정상회의까지 열어 논의하는 역설이다. 결국 무엇을 위협으로 보고, 어떻게 그 위협을 해소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핵안보 논리는 본말이 전도되어 있다. 핵테러 위협 이전에 인류가 당면한 실질적인 위협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선 핵무기와 평화적 핵 이용의 이름으로 핵물질을 만들어내는 핵발전소의 존재, 그리고 핵무기 사용 위협에 있다. 각종 핵확산방지 메커니즘이 있어도 핵확산을 막지 못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핵무기와 핵발전소의 감축과 폐기가 전제되지 않으면, 핵무기 사용을 선택지에서 내려놓지 않으면, 핵안보는 실현가능하지 않다. 도리어 핵보유 국가들의 핵독점 강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말 그대로 핵안보가 아니라 핵 폐기를 말해야 '핵 없는 세상'은 가능하다.
* 원제 : 핵안보정상회의, '핵 없는 세상'을 말하면서 '핵안보'를 논하는 역설
* 코리아연구원(연구기획위원장: 이정철)은 네트워크형 싱크탱크로 정치·외교, 경제·통상, 사회통합분야의 정책대안을 제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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