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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나의 문학 인생을 뿌리째 흔들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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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황석영 "나의 문학 인생을 뿌리째 흔들려 하는가" [기고] <신동아> 의혹 제기에 답한다
지난 11월 소설가 황석영 씨의 <강남몽>의 표절 의혹을 제기했던 <신동아>가 최근호(12월호)에서 다시 '황석영 때리기'에 나섰다.

<신동아>는 <강남몽>뿐만 아니라 <어둠의 자식들>(1980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1985년), 황석영 씨가 옮긴 <삼국지>(2003년) 등의 표절 의혹을 제기했다. 우선 이 잡지는 '황 씨의 <강남몽> 표절 의혹에 대한 해명이 미흡하다'며 "<강남몽>의 4장 '개와 늑대의 시간'은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의 디테일을 가져다 쓴 부분이 숱하다"고 주장했다.

이 잡지는 이어서 "황석영 씨가 1980년 자신의 이름으로 펴낸 <어둠의 자식들>은 이철용 전 국회의원이 쓴 초고를 황 씨가 윤문한 것"이라며 이 전 의원이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당연히 내 이름으로 (책이) 나가는 줄 알았는데, 황석영 이름으로 나왔다"고 언급한 내용을 보도했다.

이 잡지는 황석영 씨가 옥중에서 번역해 지난 2003년 내놓은 <삼국지>(전10권)를 놓고도 "이 <삼국지>의 오역 및 베끼기 의혹이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며 지난 2004년 <국민일보> 지면을 통해서 삼국지 전문가 정원기 씨가 거론한 의혹을 한 번 더 제기했다. 당시 정 씨는 황 씨가 옌벤인민출판사의 <삼국연의>를 베꼈을 가능성을 제기했었다.

이 잡지는 마지막으로 황석영 씨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도 '광주 시민 전체가 저자인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주요 저자도 (당시 광주에 없었던 황 씨가 아니라) 광주에 있었던 다른 이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잡지는 이런 의혹을 뒷받침하고자 당시 언론 기사, 북한의 관련 기록 등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비슷한 부분을 부각했다.

이런 <신동아>의 의혹 제기를 놓고 황석영 씨는 <프레시안>에 자신의 입장을 담은 해명을 보내왔다. 황석영 씨와 <신동아>의 진실 공방을 독자들이 있는 그대로 확인할 수 있도록, 황 씨의 요청대로 해명 전문을 싣는다. 황 씨는 "<신동아> 측이 질의에 대한 응답을 자의적으로 편집해 실었다"며 "<신동아> 측의 질의도 참고로 전문 공개한다"고 전했다. <편집자>


지난달 <신동아>에서 <강남몽>과 관련하여 표절 시비가 불거진 뒤에 나는 원칙적으로 잘못된 부분은 겸허히 인정하되 '표절'을 단언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밝혔고, 더 이상의 소모적인 다툼은 새 작품 집필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신동아> 12월호에 실린 기사를 읽고 실망과 허탈감에 과연 침묵하는 게 옳은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제기된 내용들은 단순히 <신동아> 관련 취재물의 표절 의혹 제기 차원을 넘어 이 기회에 한 작가의 50년 가까운 문학 인생을 뿌리째 흔들어 놓겠다는 매우 악의적인 접근으로 보인다. 한 평론가의 주관적 판단을 마치 객관적 진리인 양 인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초지일관 나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조장하는 이 기사에 대해 나를 믿고 지지해 주는 수많은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소명할 것은 소명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동아>는 11월호에 이어 12월호를 준비하면서 원고 마감 며칠을 앞두고 지난 10일과 12일, 두 차례에 걸쳐 이메일로 답변을 요구하는 질의서를 보내오면서 15일 낮 2시까지 답을 달라고 했다. 나는 신중히 검토한 끝에 질문들에 너무나 많은 문제가 있어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성실하게 답변에 응했고 14일 밤 9시경에 답변서를 보냈다.

또 담당 기자에게 전화하여 왜곡되지 않도록 가감없이 반영해 달라고 정중히 부탁하는 예의까지 갖추었다. 기자는 내 답변서를 읽어보기도 전에 대뜸 관련 원고가 너무 넘쳐서 다 반영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대답을 했고, 내가 그렇다면 다른 매체에 전문을 공개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자 전문을 다 반영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다음날 기자는 다시 전문을 싣기 어렵다는 연락을 취해왔고, 막상 기사를 읽어보니 나의 답변이 제대로 반영되기는커녕 처음부터 자신들이 잡아놓은 방향대로 몰고 가기 위해 <강남몽>에 관련된 내용 외에는 상당 부분을 삭제 편집하여 진실을 호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작가로서 스스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그동안 기자와 주고받은 메일과 답변서 전문을 가감없이 공개한다.

▲ 소설가 황석영 씨. ⓒ청와대

<신동아>에 보냈던 메일 전문

귀하의 메일을 잘 보았습니다.

우선 경위야 어찌됐든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적 대립국면으로 치닫게 된 데 대해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귀하의 요청대로 <강남몽>에 관련한 <신동아> 측의 문제 제기에 즉각 답변하지 못했던 까닭과 입장 표명을 하기까지의 정황에 대해서 밝히겠습니다.

송홍근 기자가 처음 관련 기사를 내보내기 전에 내게 메일을 보내온 것은 10월 13일자였는데 15일 오전 중으로 입장 표명을 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내가 메일을 확인한 시점은 16일 밤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일은 그 전에도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다고 했지만 기자가 밝혔듯이 전혀 연락이 닿지 않은 상황이어서 뒤늦게 확인한 메일은 일방적 통보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무렵 나는 새 작품을 집필하느라 중국에 체류 중이었고 작품에 몰두하기 위해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끊고 있었지요. 기자가 내 입장을 확인하여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창비나 문학동네를 통해서라도 근황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내에게 송 기자의 메일 내용을 전해 들었을 때는 부득이한 일로 일시 귀국한 상태였는데 출판사에도 전혀 입국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내가 외국에 체류하느라 답이 늦어졌다고 한 것은 여러 정황상 문제 제기의 본질과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지만 구태여 답변하자면 다음 작품을 마칠 때까지 어떠한 외부적 방해 요소들로부터도 자유롭기 위해 그 입장을 견지했던 것일 뿐입니다.

어쨌든 <신동아>에 내 의견이 반영되기에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으므로, 먼저 기사를 다 작성해 놓고 형식적 절차를 거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이틀 후 <신동아>가 출간되었고, 동시에 <동아일보>에 일방적인 표절로 몰아가는 논조의 사설이 실렸지요. <신동아>에서만 기사가 다뤄진 상태였다면 내 입장을 <동아일보>가 아닌 타 신문사로 전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귀지의 문제 제기에 대하여 <경향신문>을 통해 답변했던 것이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나는 소설 <강남몽>이 한국 자본주의 현대사에 관한 것이며 일종의 다큐 소설이라고 여러 번 밝혀왔습니다. 오래 전부터 구상해 왔던 대하소설적 일감이 어떻게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축소되었는지도 밝혔는데, 그것이 전형적 캐릭터와 간추린 정치 사회적 사실과의 병존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소설의 역사물이나 시대물은 대개 역사적 기록이나 신문 잡지의 기사나 사실 자료를 취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 인터뷰와 대담을 통하여 구상 단계에서부터 현대사에 관한 서적과 신문 잡지의 기사와 인터넷 자료 등등을 참조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역사적 평가가 끝난 사건이나 인물은 실명 그대로, 아직 진행 중인 경우에는 가명으로 처리되었지요. 즉, 이 소설은 사실과 그에 합당한 추측 또는 예상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밝히자면 <강남몽>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도움을 받아 수집한 여러 참고 자료들 중에는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동아일보사 펴냄)로 출간된 귀지 조성식 기자의 취재 기사 '김태촌 ·조양은 40년 흥망사'(<신동아> 2007년 6월호), '시라소니 이후 : 주먹과 정치'(<신동아> 2008년 9월호)가 포함되어 있었고 그 외에도 '조폭의 계보'와 다수의 자료들이 있었습니다.

김·조 양씨는 1970~80년대에서 근년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사건이 터질 때마다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온 국민이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들의 행적은 자료에서뿐만 아니라 주위의 측근으로부터도 여러 번 들어왔던 것들이며 특히 조 씨의 행적은 스스로 만든 자전적인 영화까지 나와 있습니다. 나는 이 시기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과 폭력의 시대였으므로 <강남몽>의 인물 구성상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료들을 검토했을 때에 조성식 기자의 기사들이 취재한 장본인들의 육성 위주로 기록되었으며 검증된 것이라 좋은 자료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조 기자의 인터뷰 내용에 나오는 장본인들의 구술은 현직 기자의 취재물이므로 믿을 만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를 존중했습니다. 나는 인물을 지나친 허구로 왜곡하는 것보다는 팩트를 그대로 인용하되 다른 장에서 시도한 것처럼 적절한 장면에 조명을 주면서 각기 놓인 상황에 따라 인간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 그 이면까지 부각시키려고 했습니다.

이번에 밝힌 참고 자료는 문제의 초점을 흐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관행을 새로 정하자는 취지입니다. 외국에서는 시대물이나 역사적 사실에 의존한 작품의 경우에는 출판사 자료 팀이 철저하게 취재 조사해 주거나 작가에게 보조 작가를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미국에서는 일찍이 소설에서도 인용 또는 참고한 서적이나 자료의 표를 책의 말미에 첨부하는 것으로 압니다. 이번 일로 우리 출판계에서도 이러한 관행이 바람직하게 정착되기를 바랍니다.

▲ <강남몽>(황석영 지음, 창비 펴냄). ⓒ창비
분명한 것은 조성식 기자의 취재를 바탕으로 한 논픽션 기사 내용들이 상상력이 동원된 창작물이었거나, <강남몽>이 다큐 소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면 문제가 될 여지가 있겠지만 조 기자의 기사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취재한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수의 자료들을 비롯하여 조 기자의 취재물을 참조 인용했다 하더라도 작가적 관점에 따라 어떻게 취사선택되며 완성도를 높이느냐는 그야말로 작가의 능력 여하에 달린 것이므로 이 부분이 인정되어야 할 것이며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주장은 작가의 고유 영역까지 침해하는 어불성설입니다.

다만 이미 인정했듯이 그러한 사실들을 애써 취재한 기자의 노고를 헤아려 출처를 밝히는 데 소홀했던 것은 작가로서 불찰이었으나 이것을 표절로 몰고 가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이하 <강남몽>과 별개의 문제를 제기한 데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1. '아우를 위하여'에 대하여

이 작품은 1972년 <신동아> 1월호에 발표되었던 것으로 그 전 해인 1971년 10월경에 집필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아우를 위하여'는 삼선개헌을 반대하여 시위한 학생들을 첫 번째로 강제 징집한 상황이 계기가 되었던 작품입니다. '아우를 위하여'와 함께 이 무렵의 '잡초'나 '모랫말 아이들'은 유년 시절을 추억하여 쓴 영등포 3부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나로서는 기자가 언급한 일본 작가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고 작품의 제목조차 금시초문입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이라면 출판의 초창기여서 단행본 출판이 거의 없던 시절이고 일본 문학은 전집 형태로 고전과 유명 작가 몇몇이 겨우 소개되어 있던 시절입니다. 당시의 출판 현황에 대하여 조사해 본다면 간단히 알아볼 수가 있겠지요.

거론한 작가가 누구인지 이웃 나라의 내가 아직도 모르고 있다면 주요 작가도 아니겠고 당시에 출판은커녕 현재까지도 번역 소개되어 있을 것 같지 않군요. 나는 일본어를 배운 적도 없고 지금도 번역판이 없으면 읽을 수 없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국내에서도 일상이 자유롭지 못했고 더구나 일반 사람들은 해외여행의 자유가 없어서 일본과의 민간 교류가 없었을 때입니다. 내가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한 것이 1985년 12월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조차 모르는 일본 작가의 단편소설을 놓고 표절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평생을 한국 문학에 걸어온 작가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일 뿐만 아니라 기자 스스로도 자신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또한 이문열 씨에 관련된 내용들도 풍문으로 들은 적이 있지만 나는 게을러서 남의 작품을 잘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부러 확인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작품과 영화 드라마 심지어는 만화에 이르기까지 내 작품의 모티브를 임의로 사용, 표절한 예가 숱하게 많았으나 한 번도 문제삼은 적이 없었으니, 그 모든 작품들에 대해서도 귀사에서 자문을 요청했다는 평론가의 결론대로라면 '아무런 대응이 없음이 의아'하니 표절 혐의를 씌워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동안 간간히 이 씨 작품에 대한 지적만 있더니 나의 침묵 이후에는 아예 싸잡아서 전혀 엉뚱하게 둘 다 표절이라는 식이 되어 버린 것은 어느 쪽이 더 억울한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요.

2. <삼국지>에 대하여

<삼국지>는 내가 투옥되어 있었을 때의 행형법상 작가에게 집필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글 쓰는 기능을 상실 당하지 않기 위하여 번역이라도 하려던 의지의 결과물입니다. 당시에 법무부 당국에 냈던 청원과 그 결과로 교도소 당국이 했던 조치가 있으니 법적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후기에 밝혔듯이 나의 초기 번역은 대만의 삼민서국판과 일제 초기 영풍서관에서 간행한 언토삼국지를 참고했으나, 출옥한 뒤에 다시 시작하면서 강소고적 출판사에서 나온 번체자 수상삼국연의(1999년)를 저본으로 삼았습니다. 물론 간체본과의 대조는 원고가 출판사로 넘어간 뒤에 전문가들이 했으며 초판 1쇄의 상해 강소고적 출판사라는 부분은 출판 과정에서의 오기로, 이후 바로잡았습니다.

중국 대륙의 상해고적출판사에서 번체자 삼국연의를 냈는지는 모르겠고, 배인본 운운 부분도 전문 학자들이나 아는 얘기이며 판본과 관련해서는 가장 정확한 것이라 하여 남경 강소고적판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만 삼민서국의 오류를 대륙 강소고적에서(즉 배인본에서 배인본의 오류를) 바로잡을 이유가 분명치 않다"는 지적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으나 확인한 바에 의하면 '배인본'은 '필사본이 아닌 목판과 활자인쇄본에 대한 통칭'으로 배인본의 뜻을 정확히 알고 하는 질문인지 묻고 싶습니다. 덧붙이자면 대만 삼민서국판은 강소고적판보다 앞선 것으로 강소고적판이 삼민서국판의 오류를 바로잡는데 무엇이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요. 또한 판본 문제는 대만판 중국판 번체본 간체본, 그것은 연변 한글판본 등등 복잡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직은 학자에 따라 해석이 분분하다고 합니다.

문제 제기 당사자의 실체도 알 수 없거니와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나중에 나온 판본으로 이전 판본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은 당연하고 편집 과정에서 구할 수 있는 많은 한글 판본도 비교 참조했는데 그것은 새 번역본의 유리한 점이자 번역자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번역에 대하여는 당시에 지면을 통해 충분히 의견 개진이 되었다고 생각하므로 더 이상 재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오류 지적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확인하여 바로잡았습니다.

현암사와 관련한 질문은 왕훙시의 삽화 계약에 대한 출판사 간의 혼선이 있었을 뿐 텍스트에 대한 논쟁은 전혀 아는 바 없음을 밝혀두겠습니다.

3.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 대하여

1980년 광주 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된 뒤에 광주 시민들은 엄혹한 검열과 감시를 무릅쓰고 자체적으로 진상 조사를 벌이기 시작했으며, 당시에 여러 팀이 시민들의 회상 인터뷰와 국내외 취재 기자들의 자료를 가리지 않고 수집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료들을 근거로 광주 항쟁에 대한 실록을 세상에 내놓고자 하였는데 5·18 관계 단체의 효시였던 '전남사회운동협의회'가 발족되자 여기서 이들 자료들을 모아서 내게 대표 집필을 해달라는 위촉이 왔습니다. 당시에 광주에 거주하고 있던 나로서는 유명 작가로서 광주 시민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부채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돕는 젊은이들과 함께 1984년 말부터 1985년 봄에 이르기까지 기록을 정리했고 같은 해 3월 중순에는 기록의 일부가 대학가와 몇몇 기자들의 르포 기사로 퍼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1985년 4월 말경 풀빛출판사에서 지하 출판이 강행되었으나 수년 동안 불법 판금 서적이 되었고 나 역시 고초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 책은 나중에 5·18 광주 항쟁의 기록으로서 시내 도처에서 목격하고 체험했던 시민들의 구술을 통하여 집대성된 현장의 역사서가 되었으며 여러 차례의 청문회와 증언에 의하여 재확인되었던 근원적 자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애초부터 이 책이 내 고유의 '창작물도 아니고' 광주에 거주하며 살아남은 한 사람으로서 책무를 느껴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출간된 것인 만큼 단 한 푼의 인세를 받은 적도 없고, 저작권에 대한 권리조차도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측에 양도했습니다. 이러한 전말은 풀빛출판사의 발행인이었던 나병식 씨에게 물으면 대번 밝혀질 일입니다. 또한 출판 당시 도록은 화가 홍성담 씨가 그렸고 그 밖에 누가 자료 수집에 참가했는지 항쟁 당시의 '투사회보' 출신 인사들에게 물으면 간단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자가 나중에 첨부해 온 북한 저작물의 비 오는 장면이며 '민중 영령의 눈물' 운운 하는 대목은 광주 도청 앞 분수대에서 있었던 시민궐기대회에서 극단 광대의 회원 김태종 씨가 했던 말입니다. 앞서 밝힌 것처럼 기록의 과정이 엄연하고 아직도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가운데 '창작물'이 아닌 '사실 기록' 비슷한 장면 묘사가 나온다고 해서 이런 것까지도 심지어는 '북한 출판물에 대한 표절' 혐의를 씌우려는 식의 접근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이런 엄연한 역사적 사실들과 수많은 증인들이 있는 기록에 대해 정체불명의 북한 출판물과의 유사성을 주장하는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다만 추리해 본다면 당시 현장에는 서울에서 내려간 취재 기자들과 지방 주재 기자들이 있었고 수많은 외신 기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항쟁 기간 동안 항쟁에 참여한 시민들과 한국 기자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 많은 기자들이 도쿄 주재 해외 언론의 특파원들이었지요. 이들은 수많은 취재 기사와 비디오 영상을 남겼으며 나중에 서울에서는 일부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들이 해외로부터 역으로 수입되는 외신 자료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나의 항쟁 기록에도 1980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자의 기사로 검열에서 삭제된 부분이 들어가 있으며 동일한 장면들입니다. 일이 벌어진 국내에서는 온 국민이 언론 말살에 의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지만 해외에서는 기사와 비디오 영상 등으로 모두 알고 있던 사실들입니다. 이웃나라 일본에는 북 측도 있으니 물론 자세히 알고 있었겠지요.

여하튼 문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모든 질문들에 일일이 답변은 하였지만, 그러나 귀지 조성식 기자의 기사들을 내가 작품에 참조한 것을 미처 밝히지 못한 것과 타 신문사에 입장 표명을 했던 데 대한 감정의 연장선상에서 이러한 문제 제기를 하였다면, 이것은 나에 대한 고의적 흠집 내기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문학 인생 50년이 되어가는 칠십 바라보는 한 작가를 모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국 문학사 전체를 타매하려는 횡포라 할 것입니다.

끝으로 내가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성의껏 기자의 질문에 답변한 만큼 모든 내용이 가감없이 반영되길 바라고, 기사가 왜곡되거나 충분치 않게 나온다면 담당 기자와 귀지에서도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기자도 수고하였으나 나로서는 욕스러운 질문에 대하여 양심으로써 답변했으니 충분한 해명이 되었으리라 생각하며 이로써 피차 이 남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1월 14일

황석영
그 외에도 12월호에 추가된 대목은 <어둠의 자식들>에 관련한 내용으로 나에게 보내온 질의서에는 포함되지도 않았는데 이 또한 의도적으로 소음과 흠집 내기를 확대 생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 자리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누누이 밝혀 왔던 내용이지만 다시 한 번 위 저작물과 관련된 사실을 간략히 정리하고자 한다.

1978년 내가 전라남도 해남 생활을 접고 광주로 이사하여 살던 때였다. 부산에서 기독교 단체의 '현장 활동가'들 모임이 열리게 되어 참가했는데 거기서 이철용 씨를 처음 만났다. 그는 초등학교 중퇴에 전과도 있었고 빈민가에서 낳고 자랐지만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함께 사는 빈민들의 생활 향상을 위하여 일상적으로 싸우며 살고 있었다. 이철용 씨의 처가가 해남이어서 그는 종종 광주에 들르곤 했는데 문익환 목사도 그의 생활 태도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그를 도울 것을 권유했으므로 광주의 후배들과 더불어 이내 친해질 수 있었다.

당시에 '현대문화연구소'를 함께 준비하던 윤한봉 씨와 최권행(서울대학교 불문학과 교수) 씨 등이 그의 삶을 글로 쓰면 훌륭한 한국 도시 빈민 생활사가 되리라고 하면서 나의 도움을 요청해 왔고 나는 기꺼이 이를 수락했다. 그 무렵 나는 <장길산>을 연재 중이었고 <무기의 그늘>을 집필하다 중단한 상태였기 때문에 무리였지만 당시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 빈민 문제가 상당히 심각한 사회적 과제였기 때문에 그런 작업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이철용 씨 본인도 적극적인 의욕을 보였다.

전에도 밝힌 적이 있지만,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제목은 논의 중에 이해찬(전 국무총리) 씨가 제의한 것이다. 중남미의 빈민을 다룬 보고서 중에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제목이 있는데 빈민이 대물림되는 사회학적 과정을 다룬 것으로 1960년대부터 미국의 사회인류학계는 남미에서 비슷한 작업을 많이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산체스네 아이들' 같은 기록이며 그 밖에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에서도 도시 빈민에 관한 많은 보고서들이 있었다.

당시에 이해찬 씨와 최권행 씨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퇴학맞고 감옥을 다녀온 뒤에 한마당 출판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논의하기를 빈민 운동과 광주 전남 사회운동권의 기금을 마련한다는 것을 전제로 출판사 한마당에서 책을 내기로 했다. 이철용 씨가 구술을 하고 녹음을 하여 최권행 씨와 지금은 목사가 된 두 사람의 신학생이 구술 내용을 정리한 것이 대학 노트 십여 권이었다.

나는 이 노트를 받아 보았으나 앞뒤 순서가 뒤섞인 데다 종잡을 수가 없어서 최권행 씨와 함께 에피소드와 시간대별로 정리하여 수백 장의 카드를 만들고 들어낼 곳은 들어내고 재구성을 하여 '이야기'를 만들었다. 1979년 몇 월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출판 전에 먼저 독자들에게 선보이기 위하여 <월간 중앙>에 몇 차례에 걸쳐서 집중 연재를 하기로 했다. 물론 이는 누구보다도 이철용 씨 본인이 잘 알고 있는 과정이다.

윤한봉 씨는 현대문화연구소를 개설하고 산하에 현장 문화 운동의 근거지가 될 소극장 개설을 준비했고 극단 광대는 창설 기념으로 <한 씨 연대기>의 연습에 들어갔다. 한마당 출판사에서 <어둠의 자식들> 계약금이 나오면 약속대로 광주권에서 먼저 인세와 출판 이익금의 일부분을 확보한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 5월 15일이 소극장 계약 기일이었고 한마당 출판사의 최권행 씨가 원고에 대한 계약을 이행할 수 없게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소극장 계약 건으로 위약금을 물게 된 나는 속이 타서 5월 16일에 서울로 올라갔고 최권행 씨로부터 자세한 사정을 듣게 되었다. 이해찬 씨가 당시에 뒤늦게 복학이 되어 복학생 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계약금으로 준비했던 돈을 시위 준비 비용으로 다 써버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할수없이 이철용 씨와 의논하여 당시에 <장길산>의 출판을 맡고 있던 현암사에 제안을 했고 즉시 계약이 체결되었다. 단, 계약금 지불은 은행 거래가 되는 월요일에나 가능하다고 해서 나는 서울에 남았는데, 저 역사적 운명의 날인 5·18로부터 비켜서게 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5월 17일 토요일에 나는 후배들로부터 전국학생연합 간부들이 이대 후문 쪽에서 급습을 받았으며 각계 민주 인사들이 자택에서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5월 18일에 녹두서점의 김상윤 부인에게 전화를 해보니 남편을 비롯한 후배들은 연행되거나 지하에 숨었고 벌써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비보가 연이어 들려왔다. 주위의 만류와 역할 분담의 논의에 의하여 나는 광주로 내려가지 않고 이철용 씨와 허병섭 목사 등 몇몇 사람들과 함께 지하 유인물 조를 조직하여 광주의 사실을 전파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중에 책이 출간되었고 이철용 씨와 나는 출판사가 바뀌었으니 애초의 의도가 이제는 소용없게 되었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고, 현암사에 함께 가서 인세를 그에게 모두 지불해 주라고 내가 요구했다. 이철용 씨는 물론이고 발행인도 난색을 표하면서 두 사람이 인세의 절반씩 정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리고 저자 명도 '이동철(이 씨의 필명)'로 내보내자고 내가 주장했지만 발행인은 '그러면 누가 사보겠느냐'면서 나의 이름을 고집했던 것이다.

책은 출판되자마자 수백만 부가 팔려 나갔고 나는 그 절망의 계절에 혼자서 책이나 팔아먹는 작가가 되었다. 윤한봉 씨는 도피의 우여곡절을 견디다 미국으로 밀항하는 데 성공했고 이철용 씨는 우리들의 최초의 약속대로 서울로 도피한 후배들의 뒷바라지를 끝까지 해냈다. 우리는 한 번도 이러한 사정을 자세히 입에 담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당시 이미 <장길산>의 작자로 세간에 알려져 있던 터에 <어둠의 자식들>의 작가임을 내세우는 일이 내 이름을 빛내는 일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알려져 있듯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든가 <어둠의 자식들> 외에도 나는 수많은 선언문, 현장 대본, 노랫말 등등을 썼으며 당시의 현실 속에서 사회적 요구가 있을 때마다 불이익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내 이름과 몸을 팔았을지언정 그것을 사유화한 적이 없고 그렇다고 해서 후회해 본 적도 없다. 그런데 한 세대가 지나간 일을 이제 와서 들추어내며 본인의 확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왜곡하여 공격 수단으로 삼는 것은 그야말로 언론의 권력을 남용한 횡포라 할 것이다.

또한 선전용 문구로 표지에까지 나를 일컬어 '문화 권력' 운운했는데, 작가가 된 뒤로 과분할 정도로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고 평생 글을 써서 먹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오히려 그동안 의지해 온 독자들을 두려워하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껏 한 번도 스스로 어떠한 권력도 가졌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문단에서 권력을 행사한 적도 없다.

역시 질의서에는 포함되지 않은 채 기사로 다뤄진 <삼국지> 내용에 관련해서는 이미 과거에 거론된 것들이라 일일이 반박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며, 21가지 오류를 지적한다고 인용한 부분은 2004년 2월의 <국민일보> 논쟁 당시의 것을 그대로 갖다 쓴 것임을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신동아>가 의도적으로 오류투성이의 불성실한 판본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하여 추가 수정 사항과 황석영 <삼국지>에 대한 호평을 쏙 빼고 당시 기사를 그대로 갖다 붙인 것이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선입견 없이 청년사 <삼국지>(연변인민출판사 번역본)와 황석영 <삼국지>를 한쪽만 대조한다면 전혀 다른 번역임을 누구나 수긍할 터인데, 황당하게도 베끼기 의혹을 제기하면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소송까지 하려고 했다"는 등 금시초문의 익명에 기댄 발언을 인용하는 한편 뒤지고 뒤져 찾아낸 동일 오류 등을 침소봉대하려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참고로 황석영 <삼국지>는 2005년 <교수신문>에서 전문 학자들이 참여하여 진행한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에 의하여 '재미와 정확성을 두루 갖춘' 최고 번역본으로 꼽힌 바 있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이 기획은 2006년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있으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평생을 업을 삼아 <삼국지>만을 연구해온 분들이 전문가도 아닌 황석영이 <삼국지>를 번역한 데 대해 불신하여 계속 오류를 찾아내고 지적해 주는 것은 겸허하게 받아들일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문가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지나친 아집과 편견에서 비롯된 문제 제기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새로운 작품을 집필하는 데 쏟을 여력도 충분치 않으므로 더 이상의 소모적인 논쟁에 휘말려 일일이 대응할 생각이 없다. <신동아>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도 이로써 충분히 소회를 밝혔다고 생각한다.

두 차례에 걸쳐서 <신동아>가 보내온 질의서

2010년 11월 10일 수요일, 21시 13분에 보내온 질의서


황석영 선생님께

송구스럽지만,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 <강남몽> 관련 내용입니다.

1. <신동아>의 <강남몽> 문제 제기가 바르지 않았다고 보시는지요?

2. 10월 10일 새벽 2시 쿤밍공항에 계셨습니다. 10월 16일엔 일산 호수공원에서 산책을 하셨고요. 외국에 체류하느라 답을 못했다는 해명을 저희 처지에선 납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3. <강남몽> 18쇄에 참고한 도서 목록이 실리는 것으로 압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비롯해 15개 넘는 책자를 거론합니다. '개와 늑대의 시간'과 관련한 도서는 조선일보 기자 책과 <주먹을 말하다>인 것 같습니다. <주먹을 말하다>를 제외한 책은 기자 처지에서 보기엔 송구스럽지만 물 타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남몽> 4장의 서사는 다른 장과 달리 살아 숨쉽니다. 에피소드의 디테일이 강해서입니다. 다른 장에서 참고한 책은 빼다 박은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참고했다는 생각입니다. 4장의 닮은꼴은 다른 장과 분명히 다르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도 15권 넘는 자료를 밝힌 것은 저희가 납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출처를 밝히신 책을 읽어보았으나 빼다 박았다고 여겨지는 대목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 '아우를 위하여' 관련 내용입니다.

1. '아우를 위하여'와 가시와바라 효조(柏原兵三)의 '먼 길(長い道)'의 상관은 저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여쭙고자 합니다. 저희가 자문을 요청한 평론가의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전쟁이 소강 국면에 접어든 시절의 시골학교. 전학을 온 '나'. 반장 '타케시'의 보스적 위치. 학급 일에 대해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무관심한 담임교사. 반장 다케시의 권력과 횡포에 노출된 반 아이들. 사실이 이렇다 보니 참 난감하다. 애초에 이문열의 '우일영(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를 표절했다는 논란이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었음에도 황석영과 이문열 모두가 아무런 대응이 없음이 의아하였는데 혹시 그 이유가 이 일본 소설가의 작품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아우를 위하여'가 일본 작가의 '먼 길'을 표절했다는 혐의를 벗기는 어려울 것 같다."

* <삼국지>와 관련하여입니다.

황 선생님이 번역하신 <삼국지>에 대한 의구심이 아직까지 사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1. 황 선생님이 감옥에서 옮긴 <삼국지> 초고가 있는지, 그것을 공개할 의향이 있는지요?

2. 황 선생님이 <삼국지>를 번역하실 때 옌볜인민출판사본 '삼국연의'를 참조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3, 현암사가 위 판본을 계약하고 국내에서 출간하려고 했던 일을 알고 있는지요?

4. 현암사 직원들이 옌볜인민출판사본 '삼국연의'와 황 선생님의 '삼국지'를 대조한 결과 너무 비슷해 출간하지 못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5. 2004년 초 정원기 씨가 지적한 '오류 답습' 21가지에 대해 "사이트에 올린 옌볜본과의 유사성 사례 21가지 중에도 내가 납득할 만한 것은 3군데 정도이다"라는 요지의 반론을 <국민일보>에 폈는데, 그 세 가지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나머지 18가지 지적 사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내용에 관한 질문입니다.

북한에서 1982년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북한이 1985년 발행한 '광주의 분노'라는 책 내용과 '죽음을 너머'의 서사가 꼭 쌍둥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두 책이 닮을 수 있는지 의아스럽니다.

저희하고 인터뷰를 길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대면 인터뷰가 어려우시면 서면으로라도 충실하게 답변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희가 오해하는 부분도 적지 않으리라고 여겨집니다. 끝으로 저희 쪽이 아닌 <경향신문>에 강남몽 관련 해명을 보내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날씨가 춥습니다. 건강 유의하십시오.

2010년 11월 12일 금요일, 21시 26분에 보내온 질의서

몇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 '죽음을 넘어'와 '주체에 기치따라'가 아주 많은 곳에서 디테일이 너무나 비슷합니다. 한 군데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왜 이런 상황이 나타났는지 의문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군중들은 희생된 시민들을 위해 묵념하였다. 한 학생이 "지금 내리는 이 비는 무참히 죽어간 우리 젊은이들의 눈물이다. 우리는 이 비를 모두 맞아야 한다"고 웨쳤다. 억수같이 퍼붓는 빗줄기에도 우산을 펴는 시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583쪽)

이럴 때 비가 쏟아져 내렸다. 우산을 펼치는 사람들, 비옷을 쓰는 사람들, 아무 것도 없이 서 있다가 비옷을 쓰거나 우산을 펼치는 사람들 틈으로 끼여드는 사람들 모두가 비를 피하느라고 소동이 일어나고 무질서가 조성되였다. 그러자 궐기모임을 사회하던 한 사람이 "여러분 조용합시다! 이 비는 원통하게 죽은 광주의 영령들이 눈을 감지 못하고 흘리는 피의 눈물입니다. 우리가 이 비를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격조높이 웨쳤다.<중략> 하기에 모두가 펼쳤던 우산도 머리에 썼던 보자기도 다 걷어 넣었다. 그리고는 대줄기같이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영령들을 숭엄하게 추모하였다.

('광주의 분노' 94~95쪽)

대회 도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하자 군중들이 어수선해졌다. 사람들은 우산을 펴들기도 하고 비를 피하려고 건물의 처마 밑으로 몰리기도 했다. 사회자가 "이 비는 원통하게 죽은 민주영령들이 눈을 감지 못하고 흘리는 눈물입니다"라고 말하자 잠시 혼란스럽던 군중들은 모두 우산을 접고 다시 숙연한 분위기로 모여들었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대회가 계속 진행되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174쪽)

- '광주의 분노' 같은 경우는 출간일이 선생님께서 쓰신 책보다 하루 늦게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디테딜까지 닮은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떻게 봐야 하는지 답을 해주셔야 합니다.

- 죽음을 너머의 자료 조사는 직접 하시지 않은 것 같은데요.

- 실제 저자가 따로 있단 얘기도 있습니다만….

선생님이 번역하신 '삼국지' 저본에 대한 의구심도 여전합니다. 강소고적출판사는 '상해'가 아닌 '남경'에 있다는 점, 중국 대륙에서 '번체자' 삼국연의를 낸 곳은 '상해고적출판사'라는 점, 그리고 대만 삼민서국의 오류를 대륙 강소고적에서(즉 배인본(排印本)에서 배인본의 오류를) 바로잡을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 등도 의심을 낳게 하는 부분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 2004년 <삼국지> 관련, 국민일보 지상 논쟁 이후 토론을 더 갖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요?
- <삼국지>를 번역할 때 참조한 책들은 무엇인지요? 광복 전에 나온 다른 한글 삼국지들에도 의존했는지요?

- <삼국지>와 관련, 현암사 측과 만나서 의견을 조율한 적이 있는지요?
-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표절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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