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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동서 이은 세계의 영웅, 그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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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동서 이은 세계의 영웅, 그를 기억하라!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2]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소장 엄구호)는 지난 4월 6일부터 5월 25일까지 총 8회에 걸쳐서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 시민 강좌를 진행했다. 이 강좌는 러시아·유라시아 전문 연구 기관을 표방한 아태지역연구센터가 고선지, 혜초 등 역사 속 인물을 통해서 실크로드의 현재적 의미를 재발견하고자 마련되었다.

<프레시안>과 아태지역연구센터는 매주 한 차례씩 이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에 이어서 역사학자 김기협 프레시안 상임기획위원이 강좌의 핵심 내용을 추려서 독자에게 전달한다. 유라시아 대륙의 일원으로서 미래를 준비해야 할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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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서 교역의 새 역사를 연 장건(張騫)

한 무제는 즉위 3년차인 기원전 139년 장건을 월지(月氏)에 사신으로 보냈다. 한나라 개국 때부터 북방을 위협해 온 흉노에 대항하기 위해 월지와 동맹을 맺으려는 것이었다. 월지는 서북방 초원 지대의 큰 유목민 세력으로서 오랫동안 흉노와 맞서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장건은 월지를 찾지 못했다. 월지가 30여 년 전에 흉노의 공격을 받고 멀리 서쪽으로 옮겨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건 일행은 흉노에게 붙잡혀 11년간 포로로 지냈다. 그 동안 유목 세계의 사정을 잘 알게 된 장건은 기원전 128년 흉노를 탈출하고 다시 월지를 찾아 나섰다. 파미르고원을 넘어 헬레니즘 세계에 들어가 있던 월지를 방문하고 2년 후 장안으로 돌아와 13년에 걸친 사행을 마쳤다.

서방에 정착해 있던 월지에게 중국 변경으로 돌아와 흉노와 다시 겨룰 뜻이 있을 수 없었으니, 장건의 원래 목표였던 동맹은 이뤄질 수 없었다. 그러나 장건이 가져온 서방의 물화와 견문은 한나라 조야에 서방과의 교역에 대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장건은 기원전 119년 오손(烏孫)에 사신으로 가서 4년 동안 그곳에 체류했다. 그 사행의 목적도 공식적으로는 흉노에 대항하는 동맹이었지만, 실제로는 서역 교역로의 확충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장건의 활동이 가진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떠올려본다.

(1) 장건 이전 중서 간 교역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었는가?

중국과 서방 사이의 교통로는 천산산맥 북쪽의 '초원의 길'과 천산산맥 남쪽 타림분지를 지나는 '사막의 길'이 있었다. 인도차이나반도를 우회하는 '바다의 길'은 한나라가 지금의 광둥성 지역도 확보하지 못한 단계에서는 거론할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사막의 길에 비하면 초원의 길이 자연조건에서는 편안한 길이었다. 그러나 초원 지대에는 유목민이 거주하고 있어서 약탈의 위험이나 통과세 등 상품 통행에 많은 비용이 들었다. 강대한 국가 권력이 뒷받침하지 않는 민간 상인들의 자생적 교역 활동은 규모와 범위에 제약이 있었다. 전국 시대 이래 중국의 경제 발전은 원거리 교역에 대한 잠재적 수요를 크게 키워놓고 있었지만, 그 수요를 충족시킬 만한 교역 체제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진한제국의 통일이 이뤄지고 있을 때 북방 유목 세계에서도 흉노가 거대한 정치 조직을 이룬 데는 초원의 길을 통한 교역의 이득이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정치 조직의 형성과 유지에는 큰 비용이 든다. 흉노는 유목 세계의 패권을 장악함으로써 중서 간 교역의 이득을 독점할 수 있었다.

(2) 한나라의 중서 간 교역 수요는 어떻게 자라나고 있었는가?

'실크'로드라는 이름대로 비단은 고대에서 중세까지 중국의 최대 수출품이었다. 근세 이전의 원거리 교역에서 가공 제품이 이처럼 오랫동안 대량 수출 품목의 자리를 지킨 것은 특이한 일이다. 산업혁명 후 유럽의 가공 제품이(그것도 직물을 중심으로) 세계 시장을 정복한 것과 비견할 만한 일이다.

중국은 전국 시대에 하나의 산업혁명을 이룩했던 것이다. 그 기반은 철기 혁명이었다. 철기 문명은 기원전 15세기경부터 히타이트제국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지만, 중국에서는 기원전 6세기경부터 새로운 차원의 철기 문명을 이루었다. 고열을 이용한 주조(鑄造) 기술의 발전으로 철기의 사용량이 급속하게 늘어난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주조 기술을 도입해 철기 사용을 늘린 것은 기원후 10세기경 이후의 일이었다. 중국은 1500년간 최고의 재료 기술을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국 시대 중국의 급격한 변화는 철기 혁명 덕분에 생산력이 급격히 향상한 결과였다. 양잠-견직 산업은 집약 농업의 사회 경제적 조건이 뒷받침해 준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제조 기술이 더러 전파되더라도 중국과 경쟁할 만한 생산력을 키울 수 없었다. 생산력 향상으로 인한 소비 수준의 상승이 중국인의 원거리 교역 수요를 계속해서 늘려주었다.

(3) 한나라와 흉노의 관계는 중서 간 교역에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가?

전국 시대까지 흉노는 그리 큰 세력이 아니었다. 진시황의 통일과 비슷한 무렵 묵특선우(冒頓單于)가 유목 세계의 패권을 세운 이래 진한 제국과 맞장 뜨는 적수가 되었다. 한 고조가 흉노에게 포위당해 큰 곤경을 치른 이래 '돈으로 평화를 사는' 화친 관계를 맺어 무제 때까지 10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이 화친기 동안 한나라와 흉노의 관계를 '2중 제국'의 구조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거대한 생산력을 발판으로 거대 제국이 세워졌는데, 직접 생산을 담당한 한 제국 위에 그것을 착취하는 흉노 제국이 올라타 있는 모습이다. 한나라가 평화의 보상으로 해마다 보내는 막대한 선물과 함께 중서 간 교역의 이득이 흉노 제국의 유지 비용을 충당해준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나라 백성들이 흉노의 농노 노릇을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나라의 생산력이 워낙 거대해서 흉노에게 바칠 것 바치고 뜯길 것 뜯기면서도 무제 때까지 엄청난 재정 비축이 이뤄졌다. 흉노의 통제에서 벗어날 실력이 갖춰진 것이다. 무제는 즉위 후 10여 년간 전마(戰馬) 10여만 필 수입을 비롯해 군비를 확충한 끝에 기원전 129년 정면 공격을 시작해서 10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에 흉노의 통제력을 와해시켰다.

장건을 오손에 파견한 것은 흉노의 통제력이 와해된 뒤의 일이었으므로 파견의 목적이 군사 동맹보다 교역로 확보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무제는 그 직후 남방의 남월과 동방의 조선을 정벌해서 '천하 체제'를 구축했다. 중국 문명의 경제력이 하나의 제국으로 세워진 것이다.

▲ 둔황 막고굴 제323굴 북벽에서 발견된 장건출사서역도. ⓒwikipedia.org

(4) 장건이 개척한 실크로드는 어떻게 운영되었는가?

후한 때의 중국 역사 지도를 보면 서쪽으로 커다란 혹이 하나 붙어 있는 모양이다. 지금의 칭하이성과 타림분지에 해당되는 이 혹 모양의 지역은 한나라의 정상적 지방 행정이 펼쳐진 곳이 아니라 교역로 운영을 위해 주둔군이 배치된 지역이었다. 인구가 희박한 이 지역에는 안정된 조공 관계를 맺을 만한 큰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주둔군을 통해 한나라 조정이 직접 관할한 것이었다.

흉노 제국이 무너진 뒤에도 북방 초원 지대에는 유목민이 계속 살고 있었다. 천산산맥 북쪽의 '초원의 길'은 이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흉노의 통제력이 사라진 후 한나라 입장에서 이 교역로를 이용하려면 분산되어 있는 유목민 세력들을 하나하나 상대해야 했다. '사막의 길'은 1~2만 명의 주둔군만 배치해 놓아도 현지 세력의 도발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편리한 길이었다.

중화 제국이 운영한 사막의 길과 유목민이 장악한 초원의 길은 교역로로서 경쟁 관계에 있었다. 중화 제국의 힘이 강할 때는 사막의 길이 활발하게 이용되어 교역량이 커지고, 약할 때는 동서 간 교역량이 줄어들었다. 예외적인 상황은 몽골제국 시절이었다. 유목민이 주도권을 쥔 이 시절에는 초원의 길이 거침없이 활용되어 동서 간 교역이 다른 시기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활성화되었다.

중국은 비단을 위시한 가공 제품을 실크로드를 통해 수출했다. 수입품은 무엇이었는가? 장건과 무제 당시에는 막대한 수량의 전마가 도입되었다. 그 수요가 줄어든 뒤에는 옥과 귀금속 등 사치품이 수입품의 주종이었다. 실크로드 교역은 중국의 산업 발전에 작용하기보다는 중국 기술의 전파로 서방의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

장건은 두 번째 사행에서 다녀온 이듬해인 기원전 114년에 죽었다. 사마천은 그의 행적을 <사기> "대원(大宛) 열전"에 적었다. 장건의 신분은 열후(列侯)로서 우리 사회로 보면 국회의원 정도? 직위는 관리로서 우리의 장관급인 대행령, 군인으로서 우리의 군단장 급인 중랑장에 겨우 이르렀다. 신분만으로는 사마천이 열전을 세워 줄 위치가 아니었다.

그런데 사마천은 장건이 죽은 23년 후 완성된 <사기>의 "대원 열전"을 실질적인 "장건 열전"으로 꾸몄다. 그 20여 년 동안 장건의 유업이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대원 열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장건이 죽은 후) 1년 남짓 지나자 장건이 대하(大夏) 등지에 보냈던 사신들이 모두 파견된 곳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에 서북의 나라들이 비로소 한나라와 교통하게 되었다. 그런데 장건이 이 길을 연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이 모두 박망후(博望侯, 장건의 열후 호칭)의 이름을 들어 바깥나라의 믿음을 얻으려 했고, 바깥나라 사람들은 그 이름을 통해 믿음을 주었다."

외국을 대상으로 한 6편의 <사기> 열전 중 서역 방면은 "대원 열전" 하나뿐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실질적인 "장건 열전"이었으니, <사기>를 극도로 존숭한 후세 사람들에게 장건의 이름은 곧 '서역 개척'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진시황이 중국을 처음 통일했다고 하지만 진정한 '천하 제국'은 한 무제의 흉노 격퇴로 완성되었다. 중국 문명이 정치적 통일체와 경제적 통합체를 이룩한 것이다. 한 무제와 장건 이후 1000여 년간 중화 제국이 중서 교역의 주도권을 지킨 것은 이 통일성과 통합성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그 기간 동안 실크로드를 통해 상품을 옮긴 사람들 중에는 중국인보다 외국인이 많았다. 그러나 교역 내용과 규모가 중국 시장의 조건에 따라 1차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중국의 주도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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