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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배낭 여행, 걸어서 인도·이란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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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배낭 여행, 걸어서 인도·이란을 가다!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4]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소장 엄구호)는 지난 4월 6일부터 5월 25일까지 총 8회에 걸쳐서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 시민 강좌를 진행했다. 이 강좌는 러시아·유라시아 전문 연구 기관을 표방한 아태지역연구센터가 고선지, 혜초 등 역사 속 인물을 통해서 실크로드의 현재적 의미를 재발견하고자 마련되었다.

<프레시안>과 아태지역연구센터는 매주 한 차례씩 이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유라시아 대륙의 일원으로서 미래를 준비해야 할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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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8세기 초 신라의 혜초(慧超 : 704~787년) 화상이 지은 불후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그것은 '1283년 만의 귀향'이란 화려한 수식어를 앞세운 <실크로드와 둔황> 특별 기획전이 용산 국립박물관에서 열렸는데, 그곳에서 그 동안 사진으로만 알려졌던 실물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혜초를 유라시아와 실크로드를 주름잡았던 영웅의 한 사람으로 추켜세워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담보로, 그것도 무려 1300여 년 전에, 미지의 세계를 돌아다닌 행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나 역시 역마살(驛馬煞)을 타고 났는지 '혜초'란 인물을 가슴으로 만나서 지난 30년 동안, 혜초의 그 길을 화두로 삼아, 모두 10여 차례에 걸쳐 2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그의 행적을 답사했다. 그 길은 워낙 방대하여 한두 번의 답사로는 무려 오만 리나 되는 전 코스를 주파할 수가 없었고 또한 옛날에 임이 자유롭게 갔던 곳이라도 지금은 국경이라는 인위적인 '선' 때문에 갈 수 없는 곳이 많았다.

'죽의 장막'에 가려 있던 붉은 중국의 광대한 영토가 그랬고, 구 소련이 해체되기 전의 중앙아시아가 그랬고, 탈레반 정권 시절의 아프가니스탄이 그랬다. 이글은 혜초의 '세계정신'과 '최초'의 의미 그리고 문명 교류의 현장에서 겪었던 경험담을 독자들과 함께 '다시' 음미해보고자 하는데 있다.

혜초의 '세계정신'

▲ 서울여자대학교 김미자 교수 등의 복식 고증을 거쳐 추정 복원한 스물세 살 무렵의 혜초.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의 제자인 디지털 복원 전문가 박진호 씨가 작업했다. ⓒ박진호
혜초에게는 '첫째'란 수식어를 여러 개 부칠 수 있다. 우선 우리나라 '최초'로 중국과 인도를 지나 서역과 아랍권까지 갔던 테마 배낭 여행객(Backpackers)으로서의 위상이, 그 무엇보다 우뚝하다.

다음은 가장 오래된 문헌을 남긴 저술가로서의 초상 또한 부연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제목도 없고, 앞뒤도 없이, 온전치 못한 두루마리 상태라도 '세계 4대 여행기'에 꼽힐 정도로 귀중한 것은 평가절하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다음으로는 선구자적인 구법승으로서의 위치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기록을 남기지 않은 이름 없는 입축구법승(入竺求法僧)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중화권에서는 3∼11세기까지 약180여 명에 달하는 이름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중 무려 17명이나 되는 해동 출신의 입축구법승이 있다는 사실은, 이웃 일본과 비교해보아도,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진취적이었나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정점에 혜초가 단연 우뚝하다.

사전류에는 혜초의 생몰 연대가 확실히 적혀있지만,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혜초가 언제, 어디서 태어나서, 언제 인도로 떠났고. 그리고 언제 열반하였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727년에 천축에서 돌아왔고 780년에 오대산에서 경전의 서문을 썼다는 것 이외의 나머지 앞, 뒤는 모두 추정에 불과하다.

<왕오천축국전>이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물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 정신'이겠지만 그러나 혹자는 그 행간 속에서 또 다른 의미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이라는, 민족이라는, 종교라는, 선을 넘어서 보편타당한 세상으로 돌아가자는-이른바 드넓은 세계를 두루 섭렵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세계정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세 권짜리 <왕오천축국전>

마지막 난관인 파미르고원을 넘어 순례에서 돌아온 혜초는 짬짬이 메모해 두었던 기록들과 기억의 편린들을 되살려가며 정리를 해나가며 두루마리 종이에다 몇 번이나 옮겨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작업은 둔황의 어느 석굴 안에서 했을 것이다.

이런 가설 하에서, 혜초는 둔황에서 겨울을 보내고 장안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을 때 그 중 제일 깨끗한 한 부를 말아 가지고 돌아왔을 것이다. 물론 이 <수고본(手稿本)>은 그 뒤 다시 보완되어 3권으로 묶여져 장안의 종이 값을 올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이런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당 혜림(慧琳)이 편찬한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안에 기록되어 있는, 상중하 3권으로 된 <왕오천축국전>이 지금도 해인사 판 팔만대장경에 있기 때문이다.

<왕오천축국전>의 출현은 드라마틱하기 그지없다. 사실 1000여 년 동안 이 여행기는 제목만 존재하던 전설상의 여행기였다. 그러다가 1908년 프랑스의 페리오(Pelliot)라는 동양학자 눈에 띠어 마치 1000만 년의 블랙홀에서 튀어나오듯 모습을 드러냈다. 제목도, 저자도, 앞뒤도 없는 필사본 두루마리 형태로 말이다.

당시 능히 한문초서도 읽을 수 있는 실력이었던 페리오는 필사본의 어휘 중에서 총18자가 <일체경음의>에 적힌 85자와 일치하는 점에 유의하여 그가 찾아낸 낡은 두루마리가 바로 이름만 전해지고 있던 혜초의 인도 여행기로 단정하였다.

문명 교류의 현장들

(1) 장안성의 50년 세월

천축 순례를 무사히 마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728년 봄 마침내 제2의 고향 장안으로 돌아왔을 때의 혜초의 나이는 25살(?)이었다. 물론 704년 출생설이 유효하다면 말이다. 이후 혜초는 무려 반백년이란 긴 세월을 장안성에 머물며 밀교승으로서 활동을 하였다.

혜초는 장안에 돌아와 처음에는 천복사(薦福寺)라는 사찰에 여장을 풀었고 그 다음으로는 대흥선사(大興善寺)로 거처를 옮겼다. 바로 중국 밀교의 태두인 금강지(金剛智)와 불공삼장(不空三藏)이 주석하고 있던 곳이다. 당시는 '안사의 난'(755년)과 같은 전란으로 장안이 자주 유린되었던 시기였기에 호국 불교란 이름하에 역대 황제들은 주술적인 신통력에 의지하기 위해 밀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는데, 그 중심 도량이 바로 대흥선사였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기록을 찾을 수 있는데, 바로 혜초의 스승 불공삼장이 입적하기 전에 발표한 유서(774년 5월 7일)로, "내가 지금까지 밀교의 비법을 전수한 지 30여 년 동안에 문하에 제자가 자못 많지만, 그 중 6명이 우뚝했다"라고 하면서 2000명에 달했다는 제자들 중에서 '6대 제자' 중 3번째로 '신라 혜초'를 지명했다.

(2) 오천축국의 순례

고생 끝에 혜초는 마침내 꿈에도 그리워하던,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Bodhgaya) 보리수 아래에 도착하여,

이렇게 하여 대탑에 이르렀다. 내가 본래부터 원하는 곳에 왔음으로 무척 기뻐서 내 어리석은 뜻이나마 대략 엮어서 오언시를 지었다.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 않는데 어찌 녹야원이 멀다 하리오"라고 읊었다.

이른바 혜초가 남긴 '총5수' 중 첫 번째로 나타나는 오언절구로 혜초 자신의 고백처럼 부처님의 나라를 그리워했던 한 젊은 구도승의 꿈과 환희심이 잘 표현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명구이다. 그리고 남천축국에서 읊은 시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그곳으로 돌아가네. (…) 따뜻한 남쪽에는 기러기 오지 않으니, 누가 내 고향 계림에 날아가 소식 전하리."

카이버고개 넘어 아프간으로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고 세상에 소개한 페리오도 다음과 같이 혜초의 서역 순례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혜초는 우리에게 8세기 전반기 인도에서의 불교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특히 서북인도, 아프간, 러시아령 투르케스탄, 중국령 투르케스탄에 관해서는 다른 기록에서는 볼 수 없는 지식을 많이 제공해준다. 그는 중앙아시아 제국의 명칭을 통상적인 중국식 명칭과 함께 현지 명을 기록해 놓고 있다. 예를 들면 소륵(疎勒)을 실제의 호칭인 카슈카르로 적은 것 등이다.

나는 1995년, 2001년 두 번이나 파키스탄과 아프간의 국경에서 금단의 땅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다가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것은 1983년 KBS 취재팀의 경우도 그랬는데, 그때의 작가는 그 심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혜초 스님은 가운데 길로 내려가다가 석장을 흔들며 그만들 돌아가라고 손짓을 한다. 우리는 왜 혜초를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것일까? (…) 아, 우리는 언제 다시 혜초의 뒤를 따라 敦煌 깊숙이 묻혀버린 <왕오천축국전>의 짙은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인가?

아프간은 근대에 들어와서 역사란 이름의 운명에 의해 희롱만 당했던 슬픈 과거를 가진 나라로 오랜 내전과 구 소련의 침공 그리고 이어진 극우파적인 탈레반 정권으로 인해 오랫동안 포연이 걷히는 날이 없었다. 내가 카이버고개에서 뒤돌아서야만 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4) 폐르시아의 땅, 이란으로

사실 현존본 대로 혜초가 실제로 페르시아나 아라비아까지 갔을까? 하는 문제는 학계에서도 한 동안 이론이 많았지만, 근래에 이란의 마샤드(Mashad)까지 갔다는 정수일의 주장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5) 파미르고원을 넘다

혜초는 모두 4차례에 걸쳐 파미르를 넘는 귀향길을 모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카슈미르에서 파미르의 동쪽 루트를 넘어 호탄으로, 두 번째는 파키스탄의 오장국 밍고라에서 스와트 계곡을 타고 파미르를 넘어 총령으로, 세 번째는 아프간의 와칸계곡으로 넘는 시도였다.

그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혜초는 다시 발길을 서쪽으로 돌려 페르시아까지 갔다가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와서 동쪽 페르가나 계곡까지 와서는, 이상하게도 천산을 넘어 카슈가르로 가는 전통적인 '천산남로'를 이용하지 않고, 결국은 남쪽으로 우회하여 아프간 북부의 와칸계곡을 거슬러 올라와서 총령진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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