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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몽골 제국의 창건자 칭기즈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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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몽골 제국의 창건자 칭기즈칸!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5]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소장 엄구호)는 지난 4월 6일부터 5월 25일까지 총 8회에 걸쳐서 "유라시아의 영웅, 실크로드로 '다시' 보다" 시민 강좌를 진행했다. 이 강좌는 러시아·유라시아 전문 연구 기관을 표방한 아태지역연구센터가 고선지, 혜초 등 역사 속 인물을 통해서 실크로드의 현재적 의미를 재발견하고자 마련되었다.

<프레시안>과 아태지역연구센터는 매주 한 차례씩 이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역사학자 김기협 프레시안 상임기획위원, 지배선 연세대학교 교수, 김규현 한국티베트문화연구소장에 이어 김호동 서울대학교 교수(동양사학과)의 강좌 핵심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제5강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몽골 제국의 창건자 칭기즈칸'의 강의는 지난 5월 4일 이뤄졌으며 이 내용을 <프레시안>에서 취재, 정리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일원으로서 미래를 준비해야 할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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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 모두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인상을 갖고 있을 것이다. 칭기즈칸에 대한 인상은 어떤가? 파괴와 살육의 주인공, 무자비한 정복자, 이런 게 아닌가? 그만큼 칭기즈칸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압도적이었다.

구(舊) 소련 시대엔 특히 더 했다. 소련 학자들은 칭기즈칸이 전 세계를 정복해 야만에 빠지지 않도록 막았던 건 러시아 인민의 위대한 투쟁 덕분이었다고 선전했다. 몽고에 있어서 칭기즈칸은 가장 자랑스러운 존재였지만, '상전'인 러시아의 입장이 그랬기 때문에 몽고 학자들은 조상을 비판하는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련이 붕괴되고 몽고도 독립하면서, 칭기즈칸에 대한 평가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은 몽고에 가면 공항에서부터 그에 대한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소련이 무너진 것도 원인이지만 학자들의 연구도 한 몫 했다. 1995년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지난 1000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물었는데, 1위로 꼽힌 것이 바로 칭기즈칸이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최고경영자(CEO)'의 바람직한 모델로, 리더십을 갖춘 인물로서 그를 부각시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렇듯 부정적인 평가와 긍정적인 평가를 오가는 인물이지만, 그를 어떻게 봐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늘은 그에게서 뭘 배울 것이냐 보다, 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떻게 살았는지를 찬찬히 살펴보려고 한다.

▲ 몽골 언덕에 그려진 칭기즈칸의 초상화. ⓒnavercast.naver.com

몽골 출현 전야

칭기즈칸 태어나던 당시는 혼돈의 시대였다. 중국 당나라 북쪽엔 위구르라는 유목민족 제국이 있었다. 그런데 이 당나라와 위구르가 모두 840~907년에 걸쳐 망한다. 큰 나라가 버틸 때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이때부터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금 위구르는 중국의 서쪽에 있는데, 원래 위구르 민족은 몽고 초원 지역에 있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그보다 북쪽에서 내려온 키르기스의 침공을 당해 쫓겨 내려간다. 그런가하면 남쪽의 당나라도 무너진다. 그 후 '5대 10국' 시대라는 혼란이 찾아온다. 이런 상황에 북방에 거란족이 유목국가를 세운다.

거란의 원래 이름은 키탄(Qitan)이다. '야율아보기'라는 사람이 거란을 세웠다. 이 국가는 순수한 유목/농경 국가가 아니라 유목과 농경이 걸쳐져 있는 체제였다. 그래서 지배 방식도 '이중 지배체제'가 된다. 농경민을 지배하는 방식과 유목민 지배하는 방식이 공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몽골족이 이쪽으로 이주하게 된다.

원래 초원엔 위구르 제국이 있었다고 말씀드렸다. 위구르가 멸망하며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면서 힘의 공백이 생겨났다. 그 가운데 만주 북방 아무르 강 인근에 살던, 몽골어 계통의 집단이 이동을 하게 되는데 그 대열에 몽골이란 이름의 집단도 있었다. 거기서 후에 칭기즈칸이 출현하게 된다. 그런 그가 다른 민족을 통합하고 국가를 세우니, 그가 속해 있던 집단 이름이 국가 이름, 하나의 민족 이름이 된 것이다. '몽골'은 이렇듯 원래 아주 작은 집단 이름이었다.

몽골족의 이주

몽골 사람들이 남긴 유명한 책으로 <몽골 비사>가 있다. 여기에 몽골의 조상 설화가 나온다. 설화는 보르테 치노(청색 늑대)와 그의 아내인 코아이 마랄(흰 사슴)이 만나 자식을 낳는 얘기로 시작된다. 거기서 나온 자손이 '알랑 고아'란 처녀와 혼인을 하고, 그 자손이 몽골의 후손이 된다.

알랑 고아는 원주민 도본 메르겐과 결혼해 아이를 낳는데, 남편이 일찍 죽는다. 그런데 그 뒤에 여인이 다시 아이를 가진다. 그러자 죽은 남편 사이에 난 아들들이 항의를 한다. 여인은 이렇게 해명한다. 밤에 달빛이 겔(천막집)의 에루게(천막 위로 난 창문)의 창문을 통해 들어와, 배를 쓰다듬었더니 그 빛이 뱃속으로 들어왔다고. 하늘의 아이를 배었단 뜻인데, 거기서 낳은 자식들 중 막내아들 계통에서 칭기즈칸이 나온다. 원주민과 이주 민족의 결합이라는 테마가 설화 속에 드러난다.

한편 페르시아에서 만든 <집사>라는 책이 있다. 세 권이 있는데 두 번째 책이 <칭기즈칸 기>다. 여기에도 칭기즈칸의 조상들이 어떻게 이주해왔는가가 나온다.

그의 조상들에 해당하는 이들이 전쟁으로 모두 절멸해 도망가다가 협곡을 만난다. 그 협곡 사이에 펼쳐진 초원에서 자리를 잡고 몇 세대를 산다. 점점 인구가 많아져 초원이 부족하게 되자, 나갈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 이들은 고민하다 70마리의 소를 잡아 껍질을 벗겨 풀무를 만든다. 협곡을 둘러싸고 있는 철산 주위에 불을 지피고 풀무를 불어대서 철산을 녹이기 시작한다. 그랬더니 시냇물이 흐르고 통로가 보이기 시작해, 나와서 초원 세계를 개척했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몽골 민족은 원래부터 그 지역에 살던 이들이 아니라 현재의 중·소 국경지역 위에서 내려온 사람들이고, 위구르 제국이 붕괴돼 힘의 공백이 생기면서 내려왔다는 것이다. 시기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여러 자료들로 보면 900년경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칭기즈칸이 속했던 집단의 이주는 그 이후, 한 12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되니 굉장히 복잡해지는 거다. 10~12세기 걸쳐 계속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혼란스러워지고, 전쟁이 계속 벌어진다. <몽골 비사> 254절에 쿠쿠초스라는 사람의 시가 나온다. 칭기즈칸의 통일 이후 국가를 누구한테 물려줄까 하다가 두 아들이 싸우는데, 이 쿠쿠초스가 우리가 어떻게 힘든 세월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가를 시로 읊으면서 그 둘을 말린다. 그 내용을 보면 몽고인들이 얼마나 힘들게 전쟁을 해 왔는가를 알 수 있다.

투르크계니 몽골계니 집단끼리 서로 싸우게 되고, 그러다보니 기존의 사회조직이 흔들린다. 기존 사회는 부계 친족 조직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계속되면서 계층이 분화되기 시작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생기고 칸(왕)이라는 칭호가 생긴다. 그리고 노얀(군사 귀족), 카라추(평민), 보골(노예)으로 이어진다. 누케르(맹우)와 안다(의형제)라는 새로운 사회관계도 형성된다.

칭기즈칸, 등장에서 사망까지

이제 칭기즈칸의 일생을 보도록 하자. 칭기즈칸의 아명(兒名)은 테무친이었다. 테무는 쇠, 그러므로 쇠처럼 단단한 사람이란 뜻을 가진 이름이다. 그는 왕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아니요, 가난한 집 아들도 아니었다. 군사 귀족 이수게이 바타르의 아들이었다. 출생연도 불분명하다. 학자 간에 1155년이다, 1162년이다, 1167년이다 의견이 분분하다.

소년기는 어두웠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 중에, 과거에 자신이 약탈했던 집단으로부터 보복 공격을 받아 독살 당한다. 그러면서 테무친의 고난의 길이 시작된다. 아버지를 추종하던 무리들이 다 떠나간 것이다. 그는 장남이었고 여러 명의 동생이 있었다.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어려워 가족들 모두 산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깊은 산속에서 풀뿌리를 캐먹고 종달새를 잡아먹고, 강의 물고기를 낚시해 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먹을 것을 두고 싸우다 이복형제를 죽이기도 한다.

그러다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면서, 부인을 맞게 된다. 상대는 원래부터 '데릴사위'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던 집의 여자다. 이름은 부르테. 이때 혼수로 받은 최고의 모피 코트를 당시 최고 실력자이자 아버지와 의형제였던 케레이트의 옹 칸에게 갖다 주는데, 그 사람 눈에 들게 되어 테무친은 자리를 잡아 간다.

그러다가 '메르키트'라는 집단과 전쟁이 벌어지는데, 부인을 빼앗긴다. 그는 부인을 찾기 위해 다른 집단과 연합해 메르키트 공격하는데, 이게 그의 명성을 몽고 초원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이후 테무친은 전쟁을 통해 몽고 제국을 통일해 간다. 그 가운데 그가 부딪쳤던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어릴 때 그의 의형제였던 자무카다. 죽마고우였던 둘은 성장해 상당한 집단의 리더가 되어 있었는데, 누가 더 상급자인가 겨루는 싸움이 나게 된다. 여기서 '13익(翼) 전투'가 벌어진다. '익'이란 1000개의 텐트를 묶는 단위를 이르고, 테무친은 '13익'의 리더였다. 그러니까 1만 명 이상의 전사를 휘하에 둔 리더였던 것이다. 아무튼 이 싸움에서 궁극적으로 테무친이 승리하게 된다.

다음으로 자신의 보호자나 다름없었던 옹 칸과 대결하게 된다. 테무친이 자신이 공을 세운 것을 근거로 옹 칸의 딸을 요구했는데, 건방지다며 거절당해 대결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알타이 산맥에 있던 '나이만'이라는 집단이 패하게 되면서, 그는 최종적으로 몽고 초원을 통합하게 된다.

테무친은 1206년 쿠릴타이라는 행사에서 즉위해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즉위 후 그는 새로운 나라의 기본적인 구조를 만들어 나간다. 가장 중요한 게 셋 있다. 천호제와 친위병, 그리고 법령 제도다. 천호제는 1000개의 호구로 구성된 95개의 '밍간'을 다스리는 방식이다. 즉 9만 5000명의 병력이 있었단 얘기다. 이 1000호를 다시 100호로 나누고 10호로 나눠 조직적인 군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장'(만호장, 천호장, 백호장)들을 통해 자신의 명령을 일률적으로 전달시켰다.

다음으로 친위제다. 취약한 권력 기반을 보완하려고 자기한테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친위병을 구성했다. 아까 말했던 '장'들의 자제들을 불러다 친위병으로 세우고, 그들에게 굉장한 특권을 줬다. '장'들에게 권력을 넘보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는, 인질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법령을 만들었다. 몽고말로 '자삭'이라고 한다. 특히 도망가는 군인의 사형법 등 군율에 관해 많이 썼다. 후에 자삭이란 말이 사형이란 뜻으로 바뀌는 데에서 보듯 엄격한 법령이었다. 이를 통해 제국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이렇게 내부를 다지면서 그는, 점령 준비를 마친다. 최초의 원정 공격 대상은 중국이었다. 당시 중국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있었다. 여진족 역시 북방에서 내려왔고 기마민족이었다. 싸우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은 야호령이라는 북경의 서북쪽 관문을 돌파하면서 그곳에 주둔해 있던 금나라 군대 30만 명을 몰살시킨다. 이때 북경이 포위되면서 결국 항복을 받아내게 된다.

칭기즈칸은 당시에 중국을 '정복'하겠단 생각은 없었다. 그냥 조공을 바치고 공녀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군대를 철수해 돌아갔다. 그런데 금나라 황제가 약속을 어기고 북경에서 황하 남쪽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황하가 엄청 큰 강이기에 기마부대가 못 건너올 거라고 생각한 거다. 그러자 칭기즈칸은 대노해 응징을 시작한다. 산동, 하북 각지를 약탈하며 초토화시킨다.

한편 1218년에 '오트라 사건'이 터진다. 칭기즈칸이 호레즘이라는 나라에 상인과 사신 450명을 보냈는데 전체가 몰살당한 사건이다. 호레즘은 서아시아에서 바그다드까지 통치하던 강력한 나라였는데, 군주가 이 450명을 스파이라고 생각해서 다 죽인 것이다. 금나라보다 강력한 세력에게서 도전을 받은 칭기즈칸은 중국 정벌 작전을 중단하고 호레즘 원정을 결의해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 유명한 서방 원정, 7년 전쟁이 시작된다. 유목민족이라 가족과 가축을 다 데리고 오가느라 가는데 2년, 오는데 2년 정도 걸렸다. 이 전쟁으로 중앙아시아 지배하던 호레즘이 완전히 무너지고, 국왕은 카스피 해까지 도망가서 토인들에게 붙잡혀 죽는다. 그리고 칭기즈칸 군대는 그대로 산맥을 따라 러시아로 넘어가, 거기서 전투를 벌여 러시아도 괴멸시키지만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1225년 몽골리아로 회군한다. 러시아를 지배하게 된 건 그로부터 20~30년 뒤, 칭기즈칸의 손자인 바투의 원정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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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전쟁의 기록을 보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그리고 약탈의 잔인성도 대단했다. 한번은 바미얀이란 곳에서 칭기즈칸의 둘째아들의 아들, 그러니까 손자가 적에 의해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그래서 바미얀 주민들뿐 아니라 개와 고양이까지 샅샅이 죽였다고 한다. 결국 중앙아시아 전체가 파괴되고 만다.

칭기즈칸의 마지막 원정 장소는 지금의 티베트 북쪽 서하(西夏, 탕구트)라는 곳이었다. 전쟁을 한 이유는 서방 원정할 때 물자를 지원해 달라고 했는데 거절을 당했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은 거기서 목숨을 잃는다. 이유에 대해선 낙마를 했다, 화살을 맞았다 등 여러 설이 있다.

그의 시신을 모시고 가는 동안, 매장지를 알리지 않으려고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매장지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다. 탐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그 매장지를 찾아 헤맨다고 한다. 분명한 건 '부르칸 칼둔'이라는 산에 있다는 것 하난데, 바로 그가 어릴 때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종달새 잡고 고기 낚았다는 그 산이다.

'피의 정복자' 그리고 '동서 문화 교류의 아버지'

지금까지 칭기즈칸의 삶을 살펴 보았다. 그를 어떻게 봐야 할까? 칭기즈칸에게 리더십은 분명히 있었다. 강력한 정치적 의지와 결단력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민족들을 받아들이는 포용력도 있었다. 천호제나 자삭 법령 등에서 알 수 있듯 상당한 조직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몽고 제국의 창건자이지만, 그걸 완성한 사람은 아니다. 자식과 손자 대에 걸쳐 확장된 거다. 그러니 몽고 제국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로 인해 유례없는 동서 간 문화교류가 이루어졌다. 비록 처음엔 피를 통해 파괴하고 이룬 작업이었지만, 몽고 제국은 후대에 이어 문화적 교류와 인류 역사에 기여하는 제국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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