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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신문에 '하악하악'…그 욕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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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신문에 '하악하악'…그 욕망은? [프레시안 books] 이승원의 <사라진 직업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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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들려오는 출근길 구두 소리에 예민하게 군 적이 있다. 오기로 한 택배 기사가 누른 벨 소리에 이 햇빛 쨍쨍한 대낮에 집에 있는 내 처지가 웬 말이냐며 그냥 자버리기도 했다. 광화문 흥국생명빌딩 지하에 있는 씨네큐브에 영화를 보러 가면, 회사원이라 인증하는 스태프(staff) 목걸이를 건 이들의 점심 걸음이 부러웠다. 직장을 구하지 못한 '나'에게 낮은 고통과 불안감 그 자체였다.

직업. 이젠 그 이름 참 낯설기까지 하다. 자주 들어서 오히려 둔감해진, 그러나 절박하지 않은. 취업. 정말 선명하게 다가온다. <영혼이라도 팔아서 취직하고 싶다>(강준만 지음, 개마고원 펴냄)라는 어느 신문 기사의 내용을 인용한 책 제목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실업. 일단 취업 너머의 문제다. 취업 못 한 사람에겐 행복한 고민, 직장 다니는 사람에겐 진짜 고민이다.

자, 여기 <사라진 직업의 역사>(이승원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란 책이 있다. 혹 제목을 보고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 지음, 쌤앤파커스 펴냄)의 앞 장처럼 힘내라는 용도로 누군가의 이름 적을 빈 칸을 찾는다면 오산이다. 이 책은 저자가 선택한 아홉 가지의 옛 직업을 통해 본 근대 조선의 풍경담이다. 요즘 유행하는 위로의 인문학이기보단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김진송 지음, 현실문화연구 펴냄) 같은 근대 조선의 사회문화사를 다룬 책이다.

취업 문제로 팍팍해진 스스로에게 '모떤'에 관한 교양을 잔뜩 허하고 싶다면(혹 지금 이 독서도 취업의 일환이라면 암울하겠지만) 권장할 만한 책이다. 어느 날 카페에서 친구들과 면접 준비를 하다가 이게 뭔가 싶어 직업이란 놈 그 자체를 대면하고 싶을 때 조금 도움이 되는 책이기도 하다. 그래도 역시 이런 책을 '당장' 반가워 할 사람으로는 1900~1930년대 근대 조선의 일상에 푹 빠져 <별건곤> 읽기에 여념 없는 국문학도나, 임금에게 모닝커피를 직접 내리는 조선의 바리스타 같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역사 마니아가 떠오른다.

저자는 한국 근대성 연구에 줄곧 관심을 보였던 국문학자다. 저자 본인이 참여하진 않았지만 왜 이런 역사 쓰기에 몰두하게 되었을까 궁금하다면 <한국 근대성 연구의 길을 묻다>(돌베개 펴냄)가 솔직하게 답변해줄 것이다. 또, 이 책이 스케치하는 근대 조선의 풍경을 근대적 소비 생활, 의학, 성 문제 등등으로 분명하게 정리하고자 한다면 <전통과 서구의 충돌 : '한국적 근대성'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역사비평사 펴냄)가 보탬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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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직업의 역사>(이승원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이 책은 근대 조선의 문화적·일상적 풍경을 세밀하게 그리겠다는 포부, 오늘날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직업의 의미를 함께 가져가려 한다. 하지만 전자의 기운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여기서 발생하는 아쉬운 점. 첫째, 직업이 사라진 연유를 밝히는 과정에서 새로운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탄생이 개입되는 대목은 좀 더 꼼꼼하게 봤으면 어떨까 싶었다. 일례로 전화 교환수, 변사, 인력거꾼이 가진 삶의 애환을 조망하는 시도 그 자체는 좋았다. 다만 그들의 소멸에 미디어 테크놀로지(자동식 전화 교환기, 유성 영화, 버스와 택시 등)가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당연한 상식으로 허무하게 귀결시킨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 부분은 '사라진'이라는 표현에 숨어 있는 저자의 비판적 시각에 담보되어야 할 논리성을 갉아먹었다. 인간 대 미디어 테크놀로지라는 단순한 구도 속에서 단지 그때 그 시절, 그 직업을 그리워하는 것 같은 감정 이상을 느끼긴 어려웠다. 물론 저자의 주장처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직업은 그 사회의 욕망의 배치가 바뀜에 따라 함께 변화한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는 명제이다. 그러나 이 명제를 따져 보면 난처한 질문이 나온다. '사회의 새로운 욕망을 반영하는 발전된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소비하는 당시의 근대 조선인은, 사라진 직업을 가졌던 자 앞에서 일말의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걸까'라는.

둘째, 책에 소개된 사람들의 직업적 고통이 이런 종류의 사회문화사 서적에서 늘 접해온 '유형화된 고통'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 전화 교환수, 기생, 유모, 여차장의 고통은 근대화를 체험하는 여성을 향한 그릇된 시선에 기인한다. 그러나 책에서 말하는 고통의 깊이는 여기까지다. 즉, 각 직업에서 자연스레 나타나는 특색이 빚어낸 고통과 그 이해의 정도는 기존의 한국적 근대성 연구에서 일찌감치 구성해놓은 당사자들의 고통 안에서만 다뤄졌다. (물론 나는 이들의 고통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다 보니 사실상 책에 소개된 각론으로서의 아홉 가지 직업이 지닌 특색과 그 의의는 근대 조선의 문화적 일상이라는 전형적인 총론을 드러내는 데만 소비된 도구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저자는 자신이 선택한 근대 조선의 직업군이 지금 여기의 문화와 일상의 지형도를 설명하는 매개가 된다고 주장하지만 꼭 이 직업이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읽는 내내 감출 수 없었다.(<한국 근대성 연구 가이드 : 1900년~1930년>으로 책 제목을 바꿔도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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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기억하는지도 모른다."(234쪽) 독자에게 건네는 저자의 시선이다. '사라진'이라는 표현에 비판적 의미를 포개어놓은 저자의 의도를 짐작한다면 이 책의 마음을 정리하는 문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구는 저자 그리고 저자와 유사한 관심사를 갖고 역사 쓰기를 하는 이들을 향한 독자의 질문일 수도 있다. 당신들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쓰고 있진 않은가.

이 질문을 위한 간단한 업계 브리핑. 시와 소설만을 파는(공부하는) 것이 국문학이냐며 이제는 문화로 가겠다고 외친 몇몇 소장 국문학자들이 있었다. 문화 연구는 그들의 숨통을 트이게 했다. 그들은 문화사·미시사·풍속사라는 광야를 통과해 거리의 산책자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이르렀다. 국문학도 중요하지만 국문학에 영향을 주는 사물의 질서와 역사, 그 사물이 배치되어 있는 거리의 나날들에 주목하면서 국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나갔다. 과거 그들에게 이게 무슨 국문학 연구냐며 비난하던 이들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역사 인플레' '사회문화사 인플레'라는 표현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시대에 이들의 연구는 어느덧 주류가 된 듯하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너도나도 근대 조선의 풍경을 연구하겠다고, 또 책으로 내겠다고 하는 이 시간. 그들이 애초에 다짐했던 복원되어야 할 기억들은 여기까지인 걸까. 관련 책들을 읽어보면 표방하는 소재는 다양하지만 소재와 엮인 사적인 기억과 그 함의는 일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지금 여기'의 사유는 1900~1930년대 잡지나 신문을 부지런히 읽으면서 발견한 유별난 사건에서 오는 게 아니다. 지금 밟고, 보고, 듣는 이 세상의 현안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본다. 치열하게 지금 이 순간을 고민할 때 나오는 다채로운 시선. 그것이 사료와 만났을 때 역사 쓰기의 시너지 효과는 발휘될 것이다. '당신들의' 사회문화사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건넨 지극히 상식적인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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