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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십자가 퍼포먼스'가 세상을 바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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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십자가 퍼포먼스'가 세상을 바꿨나? [프레시안 books] 한승훈의 <혁명을 기도하라>
"이 책의 구성은 우연히도 기독교의 <신약성서>와 비슷한 면이 있다. 1부는 <신약성서>의 복음서와 같은 예수의 평전이다. (…) 2부는 한국 기독교를 예수와 대비시키는 일련의 주제를 다룬 글들이다. (…) 이것은 교회 밖에서 예수를 만난 나의 '사도서신'이 될 것이다. (…) 3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전통 내에서 예수 운동의 지향과 방식을 이어나가려는 사람들의 '사도행전'이 실려 있다. (…) 결언에서 나는 일종의 묵시록적 전망을 제시할 것이다." (13~14쪽)

재미있는 책의 서평을 쓰는 건 서평자의 고역이다. 책의 양념들을 인용하여 '재미있는 글'을 만들어 내는 것도 미안하고, 책 내용들을 요약하고 비판적으로 개입하여 '재미없는 글'을 만들어 내는 것도 마찬가지로 미안하다.

이왕 미안하려면 재미있는 쪽이 나으련만, 후자로 가게 되는 이유는 결국 어떤 질문이 남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재미있으면서도 착잡하게 읽었다. 그러나 그 착잡함은 저자 한승훈을 향한 것은 아니고 이 책이 다룬 문제들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의 삶과 실천이 현재의 교회가 요구하는 것과 사뭇 다르다는 이야기는 재미있으면서도 흔하다. 이에 더해서 예수의 삶과 실천을 사회 운동과 접목시키려는 시도 역시 오랫동안 있어왔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선 해방 신학의 소개와 민중 신학의 실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지적 조류나 실천이 퇴색하면서 대형 교회들이 성장해왔다. 교회만이 성장한 것이 아니라 한국 개신교의 삶에 대한 태도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강해져왔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은 이 모든 것들을 '개독교'라 몰아붙이는 모종의 반발의 조류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에 대한 총체적인 폄하의 효과는 애매하다. 한승훈의 지적대로 "보수 기독교의 이데올로기에서 기독교 전통의 내용을 빼기만 하면, 그것은 그대로 한국 보수주의의 이데올로기"(295쪽)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독'이란 낱말을 늘 내뱉는 이들이 '한국 보수주의의 이데올로기'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애매하다. 그런 반응은 비판의 핵심을 잡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자신도 별로 벗어던지지 못한 것을 비판하는 것일 수도 있다.

▲ <혁명을 기도하라>(한승훈 지음, 문주 펴냄). ⓒ문주
또한 그 비판은 비판 대상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존재 근거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져 즉각적인 반발을 일으킬 것"(360쪽)이기 때문이다. "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은 이 전인적인 체계를 깰 수 없"을 것이며, "기만적인 체제를 필요로 하는 욕망 자체는 그대로 둔 채, 단순히 '고전적인' 종교적 믿음을 걷어내"봤자 국가주의나 제국주의, 자본주의, 전체주의 등이 절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360~361쪽).

그래서 한승훈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예수에 관한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좋은 실천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사회 변혁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삶을 성찰하면서 모종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것 같다. 나도 이 책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근자에 바로 그런 역할을 의도했던 또 한 권의 책이 있다. 김규항의 <예수전>(돌베개 펴냄)이 그것이다. 나는 <예수전>에 대해서도 위에 서술한 저 두 역할을 한다는 점은 긍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김규항이 예수의 행적에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투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바리사이 인'에 대한 입장이 그것이다. 김규항은 예수가 당대 사람들이 훨씬 나쁘다고 보았던 사두가이 인보다도 바리사이 인에 비판을 집중한 분명한 이유가 있으며, 그것이 언제 어디서나 유효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요즈음의 그가 누군가들에 대한 비판을 집중하는 이유를 정당화한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하다'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모든 이방 문화로부터 이스라엘을 분리시켜 그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이었다. (…) 인민들은 로마와 야합하고 타락한 사두가이 인들을 존경하지 않았지만 바리사이 인들은 존경했다. 바리사이 인들은 오늘 윤리적이며 정의감에 넘치는 시민운동가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예수전>, 48쪽)

"바리사이 인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 먹고사는 데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 바리사이 인들은 인민들의 그런 죄의식과 열등감을 기반으로 여느 인민들에게서 자신들을 '분리'하여 품위를 유지했다. 예수는 그 공공연한, 그러나 아직 단 한 번도 문제시되지 않은 억압의 체제에 분노한다." (<예수전>, 58~59쪽)

"우리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비판이 반드시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을 대상으로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 사회적 비판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 세력은 두 가지 요건을 갖는다. 가장 악한 세력과 갈등하거나 짐짓 적대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인민들에게 존경심과 설득력을 가질 것, 그러나 그 갈등과 적대의 수준은 지배 체제 자체를 뒤흔들 만큼 심각하지 않을 것. 그 두 가지 요건의 절묘한 조화가 바로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다. 바리사이 인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예수전>, 117쪽)

"우리는 (…) 오늘의 바리사이 인들을 파악해 볼 수 있다. (…)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냉소한다. 그들은 'NGO', '시민 운동', '개혁 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 바리사이 인들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라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 (<예수전>, 119쪽)

위 서술에는 예수가 바리사이 인들을 비판했던 이유와, 사회적 비판이 집중되어야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과, 오늘날의 바리사이 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진단이 포개진다. 사실 예수의 행적을 보면서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첫 번째 것 정도일 것이다. (<혁명을 기도하라>에서도 이 점에 대한 분석은 대동소이하다.) 두 번째 것과 세 번째 것은 김규항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내가 통합진보당 문제와 관련된 언론 보도를 보면서 보수 언론보다 진보 언론에 욕을 퍼붓고 싶어지는 것처럼, 예수도 성전에 들어갔을 때 바리사이들에게 엄청난 분노가 치밀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하나의 정황이 이 사회에서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보다 <경향신문>, <한겨레>를 더 중점적으로 비판해야 한다는 지침을 제공해주진 못한다. 또 현대 한국 사회를 예수 시대의 사회와 곧이곧대로 비교하기 어렵다. 맞서 비유하자면 지금은 인민의 신망을 잃은 이들이 권세를 잡은 시대가 아니라 사두가이가 인민의 35퍼센트 정도의 지지를 얻고 있는 시대다. 김규항의 서술에선 예수의 행적을 당대의 맥락에 비추어 파악하고 그 맥락을 현재의 맥락과 견주어 보는 작업을 너무 쉽사리 건너뛰고 싶은 조급증이 느껴진다.

이 책의 장점은 적어도 그 조급증은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엔 저자가 전공자라는 조건도 작용했을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알 수 없는 당대의 정치적 맥락을 통해 그 서사의 의미를 복원한다. 가령 저자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각 복음서의 상이한 설화를 꼼꼼히 읽어내면서 이것이 로마 제국의 프로파간다에 대한 '전유'라는 사실을 밝혀낸다(42쪽). 이 책의 곳곳에는 예수가 벌인 여러 이적들과 여러 이벤트들이 당대의 문화적 코드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에 대한 꼼꼼한 해석이 적혀 있다. '겨자씨'는 원래 백단목처럼 크게 자랄 수 없는 나무였다는 지적이나, '호산나'의 외침을 들은 새끼 나귀를 탄 예루살렘 입성이 일종의 '가장 행렬'이며 3중의 조롱이었다는 해석은 통쾌하다(153~157쪽).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나는 좀 의구심을 느끼게 된다. 이는 저자가 예수가 속해있던 히브리 전통의 문화적 맥락을 설명하면서 야훼를 '노예들의 신'이며 성전도 갖지 못한 '사막의 잡신'으로 소개할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야훼는 원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이들의 신으로 출발했는가? 저자는 그렇다고 얘기하지만, 드문드문 다른 책을 읽다가 본 최근의 다른 연구들은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의 노예인 적도, 홍해를 건넌 적도 없으며, 가나안에 침탈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도 찾을 수 없어, 그저 처음부터 가나안에 살았던 가나안 인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야훼는 원래 만신전 안에 모셔진 보통의 중동의 지역 신 중 하나였으며, 이 신이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은 이후 '유일신'으로 승격되는 과정에 그 전의 전승들이 생겨났을 거라는 얘기가 있다.

물론 이런 얘기는 저자의 견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야훼'라는 신이 만들어진 '역사'가 아니라 그 신의 숭배자들이 만들어낸 '서사'의 함의에 주목하면 된다고 말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역사'와 '서사'의 차이에 주목해 주길 바란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삶의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서사'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그 삶의 깨달음을 남에게도 전파할 변혁을 꿈꾼다면 그 전례는 '서사'인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다시 <예수전>의 서술로 가보자.

"우리는 정치적 혁명성이 '주장'되는 게 아니라 지배 체제에 의해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겉보기엔 제아무리 혁명적이라 해도 지배 체제가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더 이상 혁명적인 게 아니다. 학술적, 문화적 차원에 머무는 혁명 이론 따위가 그렇다. 반대로 겉보기엔 그다지 혁명적이라 여겨지지 않는데 지배 체제가 어떤 과격하고 급진적인 혁명 운동보다 더 위협을 느끼고 적대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혁명적인 것이다." (<예수전>, 248쪽)

김규항은 예수의 행동이 체제 전복적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위 서술은 당대의 지도자들이 정말로 예수에 대해 다른 이들보다 심대한 공포를 느꼈을 때에야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에야 위 서술은 오늘날의 사회 운동의 지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것이 그저 동화에 불과하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마도 모종의 의미는 있겠지만 김규항이 원하는 방식으로는 아닐 것이다. 당장 우리 사회를 돌아보라. 사회주의자보다 체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촛불 집회이며, 촛불보다 더 그들이 경기를 일으키는 것은 주체 사상파다. 그리하여, 주체 사상파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혁명적인가? 김규항조차 이런 견해에 동의하진 않을 거다.

한승훈은 당대의 지배 계급이 예수를 가장 두려워했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대신 그는 예수의 행위에 대한 풍부한 해석을 통해, 그가 했던 것이 일종의 퍼포먼스였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내가 의구심이 드는 지점은 여기부터다. 예수가 모든 종류의 지배를 전복시키기 원한 아나키스트였고, 그의 공동체에선 사적 소유도 철폐되었다는 사실엔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퍼포먼스를 보는 이들에겐 이런 점은 중요하지 않다. 게다가 그런 정도의 실천은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혁명성이란 것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가 당대에 '인기'를 끌었다는 것을 통해? 아니면 죽임 당했다는 것을 통해?

문제는 그가 당대에 어느 정도 인기를 끌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복음서가 전하는 정황, 저자의 해석을 통과하는 정황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현대의 시민들이 시위대에서 어느 발랄한 공연자들에 대해 박수를 보내고 투표는 그 공연자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아닌 다른 곳에 투표하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삶의 마지막 순간이 자신의 정신을 전파하기 위한 일대의 결단이었다면 그것은 절반의 성공이었거나 어쩌면 처참한 실패였을 거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동의한다. 하지만 제자들은 왜 그의 신성을 강조하고 이 일대기들의 맥락을 거세할 수밖에 없었을까? 어쩌면 그런 작업이 없이는 예수가 특별한 인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매력적으로 실패하는 수많은 인물을 지나치면서도, 우리의 삶을 둘러싼 억압은 삶을 흘러가던 대로 흘러가게 한다. 저자도 어디선가 예리하게 지적하듯 예수가 내세운 삶의 태도 역시 제도화되려면 그 삶을 감독하는 권력자가 나타나 다른 이들을 억압할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 체제가 그런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모든 억압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말한다면 어떠한 변혁도 불가능하다. 그 '진심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실천'이 제도화되기 불가능하다면, 예수를 신으로 숭배하고 '이웃 사랑'의 교리정도나 설파하게 된 기독교 교회 정도가 성공의 최대치였을 수 있다. 그보다 훨씬 번영 신학 쪽으로 나아간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은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저자가 해석해낸 예수의 모습, 지배 권력을 해체하고 비웃는 그 전략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된다. 사실 그것은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 전승을 통해 효과를 발휘할 뿐이다. 그것은 가장 소외된 자의 퍼포먼스는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각될 수 없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저자가 요한의 활동을 팟캐스트에 비교한 것은 탁월했지만, 바로 그 탁월함이 이 퍼포먼스의 애매한 정치성을 드러내는 듯하다. 당대의 요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 거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게다가 그 퍼포먼스가 성공한다면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가? 각 민족이 모두 자신들의 윌리엄 텔을 가진다 하더라도 민족 해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저자가 보여주는 예수의 두 모습이 공동체에서 실천하는 실제의 삶과, 주류 질서를 거부하는 퍼포먼스라면, 이중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사회를 바꾸지는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산다고 남들이 모두 따라하는 것이 아니며, 퍼포먼스에 의해서 사람들이 통쾌함을 느낄지언정 실제로 권력이 해체되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저자의 참신한 해석은 복음서 안의 그 사내에 대한 인간적인 매력을 증대시키는 매력은 있지만, 그의 실패가 사회 운동에 던지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전달되지가 않았다. 그래서 착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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