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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매뉴얼'은 그만! 그녀의 '디테일'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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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매뉴얼'은 그만! 그녀의 '디테일'이 온다 [프레시안 books] 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
가끔 고민 상담을 요청하는 친구들 때문에 내 위로의 매뉴얼을 점검해본 적이 있다. "힘내"라는 말도 쉽게 꺼내면 안 될 것 같고(김현진의 <당신의 스무 살을 사랑하라>(해냄 펴냄)에 나온 것처럼), 풀이 죽은 친구를 위해 예의상 "언제 한번 보자"라는 말도 편하게 던지면 안 될 것 같은(정이현의 <오늘의 거짓말>에 나온 것처럼) 상황을 자주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자주 떠올리고 고민하는 단어가 '디테일'이다. 디테일이란 무엇일까? 단지 섬세하다, 구체적이라는 표현을 넘어서서 생각해보자. 나와 당신의 만남을 가정해본다면, 그것은 내가 당신에게 에너지를 더 쓰겠다는 것, 당신을 위해 애를 쓰겠다는 것, 더 나아가 삶을 좀 더 성의 있게 살아보겠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언제나 "세계는 두 번 진행된다"라는 말이 나의 방법론이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두 번째야말로 우리의 어떤 욕구를 설명한다.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정혜윤 지음, 민음사 펴냄)10쪽

정혜윤의 신작 <삶을 바꾸는 책 읽기>(민음사 펴냄)에는 디테일이 책의 마음이자 상태로 다가온다. 사실 디테일은 정혜윤의 지난 책 속에서 강조되었던 글쓰기의 특성이자 자신이 주창하던 삶의 방법론이기도 했다. 디테일은 성의이면서도 의지이다.

일상의 편한 예를 들어보자.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 걸어오면 우리는 상대방이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어"라는 말을 할 확률을 계산해본다. 이는 '헷갈리는 문제에서 대개 첫 번째 찍은 답이 맞다'와는 다른 경우다. 여기서 당신이 건넬 수 있는 디테일은 ("그래요 그럼"이란 뜻이 들어 있는) 어색한 침묵을 이겨낸 "여기 이게 맛있는 것 같은데…"일 것이다.

▲ <삶을 바꾸는 책 읽기>(정혜윤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첫 번째 질문에 자신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이들, 두 번째 질문을 건네야만 "어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라며 조금씩 그 의사를 표현하는 이들을 비단 특수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곧 우리이며, 사회는 이런 우리의 연약함, 가녀림, 소심함을 나쁜 쪽으로 몰아간다. 이런 가운데 정혜윤이 자신의 책에서 자주 쓰는 "다시 한 번 더"라는 평범한 표현은 비범한 기운을 함께 안고 가는 삶의 태도이자, 책의 태도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발견한다는 게 '번뜩이다'와 같은 뜻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삶이 어찌 그리 쉽던가. 밑줄을 긋고, 책을 '도그지어(dog's ear)' 모양으로 접어가며 (심지어 책 속 여백에 메모까지 해가며) 재차 읽고 읽어야 "뻔함에서 해방되었네"를 외칠 수 있다.

삶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싶은 이들의 태도도 이런 책 읽기의 '고달픔'과 같을 것이다. 이는 책 쓰기의 고달픔과도 연결되고 그 고달픔에서 추출된 디테일이란 결과물은 그녀가 강조하고 독자들에게 제안하는 '다시 읽기'의 산물이기도 하다. '디테일은 곧 성의이자 의지다'가 정혜윤의 글쓰기가 지향하는 행동 양식을 뜻한다면, 고달픔은 그녀가 추구하는 디테일의 방향으로 읽힌다.

단순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평소 '행복은 단순하며 불안은 복잡하다'라는 시선을 도식처럼 믿는 사람이기에 정혜윤이 우리 삶을 책으로 돌아볼 시간으로 언급한(혹 그녀가 확보한 '자율성의 시간'인) "새벽 3시"의 기운에 공감이 간다. 이 시간은 "원인과 결과로 이어진 단선적 시간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입 밖으로 내본 적이 없는 말, 상상으로 오갔던 말, 결코 들으려 하지 않았던 말들이 등장"(41쪽)하는 시간이다.

트위터 타임라인도 잠이 들고 누군가가 보지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괴성 섞인 감정의 언어들을 혼란스럽게 폭발해내는 시간, 뜬금없이 깨어 화장실에서 일을 보면서 갑자기 상사에게 억울하게 혼난 일이 떠올라 홀로 '씨발씨발' 거리는 화풀이의 시간. 사람들이 감추어두었던 디테일을 토해내는 시간이자, 사람들의 디테일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아울러 책 읽기 시간으로서의 새벽 3시는 이 고단한 하루 속에서 "언제 한번 가보나"라는 다른 세계, 다른 삶을 접촉하는 시간이면서 그 이룰 수 없음에 상처받은 내 삶을 위로하는 시간일 것이다. 정혜윤은 이 시간의 확보를 통해 나를 돌아보고 그런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을 누군가로서의 나를 상상해보는 '공통성의 경험'을 제안한다.

이 경험들의 소개와 인용은 그녀가 삶과 책 속에서 만난 스승들의 말과 구절에서 비롯된다. 저자가 접촉한 다른 누군가의 시선이 소개되는 공간. 그 공간을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일례로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펴냄)가 큰 호응을 얻었을 때 혹자들이 엄기호가 청춘이란 이름 아래 놓여 있는 당사자들 스스로가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부여했다는 것을 책의 미덕으로 분석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는 엄기호의 글쓰기에 나오는 분위기와 정혜윤의 글쓰기에서 나오는 제법 비슷한 분위기를 비교해보면서 "그들이 말하게 하도록 하다"가 살며시 인정해버리는 수직적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삶의 비통함을 힘겹게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백을 '다시 한 번 더' 성의 있게 그대로 따라해 보겠다는 태도를 지향하는 것은 아닐까.

가령 A가 "오늘 나 부장 새끼한테 열라 기분 나쁜 말 듣고 사표 쓸려고도 생각했어. 그 사람은 일할 때는 제법 이성적인데 왜 이렇게 인간관계가 어설프고 약한지 몰라"라는 내용으로 당신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치자. 디테일을 놓친 당신은 "A야, 그럴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매뉴얼을 서둘러 꺼낼지 모른다.

하지만 디테일을 안고 가는 당신이라면 "아 그러니까 말이지, A 너의 말을 정리해보면, 부장 새끼한테 이런 일로 기분 나쁜 소릴 들었는데 사표를 쓸려고 생각했구나……"라고 할 것이다.

이 비유를 고스란히 가져와보면, 정혜윤이 공유하고 싶은 삶에 대한 메시지를 책의 긴 인용으로 처리하는 것은 책의 말을 그대로 한 번 더 따라해 보겠다는 성의이자 자신과 책의 꼴을 그대로 포개어놓는다는 의지 같다(그녀는 읽었으면 행동하기를 외치는 '책 행동학'의 창시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녀가 만난 삶 속 사람들의 말을 고스란히 전하는 것 또한 그들의 삶에서 표출되는 인상적인 언어들을 그들 스스로 열리게 했다는 우월감 보다는 그 아픔을 함께하겠다는 의지가 섞인 반복적 발화로 보인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서사에 대한 경청과 열중을 향한 강조는 그녀의 데뷔작 <침대와 책>(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서도 발견되는 대목이다.

그녀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점잖고 조용한 아버지가 술자리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어 떠나려는 사람의 손목을 힘껏 비트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적이 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서 몹시 열중하다 보면 우리에게 버릇 들게 한 것, 예사로 보아 넘겼던 것이 무서운 수수께끼로 떠오를 수 있고 그렇게만 된다면 인생은 태초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다시 던져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평생 고향을 떠나지 못했고, 매일 같은 직장에 출근했던 성실한 가장이던 우리 아버지가 자기 인생에 대해 지루하다거나 환멸을 느낀다고 말하는 것을 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침대와 책>, 119쪽)

<삶을 바꾸는 책 읽기>는 정혜윤만의 '디테일론'이 보다 쉽고 명확하게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독자들과의 접촉면이 예전보다 더 넓어진 느낌이다. 이 책은 간결하며, 무엇보다 쉽고 따뜻하다.

다만 나는 이런 디테일을 삶과 책 속에서 찾아나선 그녀의 행보에서 그녀가 소개하는 스승들의 범주에는 아쉬움이 많이 든다. 그 어떤 논쟁도 허락할 수 없는, 이미 인생의 성인군자가 되어버린 듯한, 특히 도시인 특유의 온정주의가 투영된 듯한 노동자와 노인이라는 대상에게 너무나 손쉽게 덧씌워지는 '책에서도 만날 수 없는 배울 거리가 여기에 있더라' 유의 메시지가 불편했던 것은 왜일까.

그녀들의 스승은 시종일관 유지되는 그 디테일의 범주엔 끼지 못한 채 왜 그녀가 구축하려는 삶 속 아름다운 '동화'의 마땅한 주인공으로 포장된 듯 보일까. 그녀가 지향하는 삶을 향한 애정에 담긴 온기가 고마우면서도 다분히 나르시시즘적인 '깔끔한' 태도엔 의문 부호를 남긴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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