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31일 창간호를 낸 '프레시안 books'가 2년 만에 100호를 냅니다. 이번 프레시안 books는 100호 그리고 2주년을 자축하면서 숫자 '100'을 열쇳말로 꾸몄습니다. 또 100호를 내면서 프레시안 books 100년을 상상합니다. 2013년 100주년을 앞둔 일본의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을 찾아가고, 100년이란 시간을 견딘 서점, 도서관 등을 둘러본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열두 명의 필자는 자신의 추억과 '100'을 엮은 글을 선보입니다. 여러분도 프레시안 books가 펼쳐 나갈 100년을 함께 지켜봐 주세요. <편집자> |
어려서 신설동에 살 때 일이다. 오늘날은 흔적도 찾기 어렵지만 신설동 오거리 목 좋은 곳에 극장이 하나 있었다. 당시 극장 간판이야말로 어린이들을 위한 미술관이었는데, 아이들이 영화를 보러 정말로 표를 사는 일은 드물었고 그 미술관 앞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굉장한 작품이 전시된 것이다. 로봇과 함께 사내아이들의 양대 로망이라 할 수 있는 공룡 그림이 올라왔다. 결국 어머니를 조르고 졸라 며칠 뒤 동생과 함께 극장에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문 하나를 지나면 순식간에 암흑의 공간이 펼쳐지고, 안내원들이 손전등으로 표를 확인 한 후 작은 비상등을 따라 좌석을 찾아주는 극장의 의식(儀式)은 얼마나 경이로웠던가!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크기의 공룡들이 나왔고, 익룡이 여자를 납치해 갔으며, 심지어 공룡은 아니지만 공룡만큼 거대한 거북이도 나왔다. 19세기보다 더 짙은 휴머니즘을 어디서 배웠는지 원시인들은 약자를 보호하며 처절할 만큼 감동적으로 공룡들과 투쟁했다. 온갖 괴물들의 뼈를 넣고 끓인 서덜탕 같은 이 영화는 바로 돈 채피의 <공룡 100만 년(One Million Years B.C.)>(1966년)이다.
▲ <공룡 100만 년(One Million Years B. C.)>(1966년) |
온갖 컴퓨터 그래픽 효과를 자유자재로 만들어 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의 공룡들이란 참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러나 공룡 영화의 고전으로서 이 영화가 사람들의 두뇌에 새긴 흔적은 인두 자국처럼 놀랍고 선명한 것이어서, 후에 국내에선 '똘이 장군'이 스스로 주연을 맡은 <공룡 100만 년 똘이>(1981년)라는 영화를 창조하는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공룡, 원시인, 버뮤다 삼각 지대, 심지어 외계인까지 동원되는 이 1980년대 초반 작품은 좀 중구난방인 감이 없지 않은 애니메이션이었다. 역시 우리의 똘이 장군은 반공 소년으로서 붉은 돼지를 쫓고 간첩을 잡아야 박력도 들어가고 힘도 내지, 공룡을 상대할 때는 영 아니야, 라고 씁쓸해한 소년들이 많았으리라.
'100'이라는 숫자는 이 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 제목의 '100만'이, 100이라는 숫자와 연관을 가지는 것은 서양이 아닌 우리 문화에 속하는 일이지만 말이다. 영어의 'million'이라는 단어 자체 안에는 100이라는 표기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서구 문화에서는 '10만(a hundred thousand)'이 100이라는 숫자 표기와 관련을 가진다.
셈하는 방식의 상대성 때문에 100이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이 사실에서 벌써 우리는, 100이라는 숫자만의 고유성은, 가변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정해지는 셈의 단위가 아니라, 규정할 수 없는(즉 무한한) 이념으로서 다루어져야 하지 않는가 하는 점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다시 이 영화를 떠올린 것은 얼마 전 시조새와 관련해서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이 가시화되었을 때다. 창조론자들은 괴물들과 인간들을 같이 그려놓은 고대의 유물을 보고서 공룡과 인간이 공존했다는 주장을 한다고 했다(논거들 가운데 하나이다). 공룡과 인간이 진화의 단계상 거리를 두고 출현한 것이 아니라, 창조에 의해 한 번에 만들어졌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어? 바로 이 영화 <공룡 100만 년>이 그렇잖아? 인간과 공룡이 같은 생태계 안에서 함께 사투를 벌이는 이 영화는 혹시 진화론을 비판하기 위한 고도의 술책인가? 영화의 제목 자체가 진화론과 과학을 철저하게 비웃고 있다. 공룡은 6500만 년 전에 이미 지구에서 사라졌으니, "기원전 100만 년"이라는 영화의 원제는 공룡이 사라진 지 6400만년이나 되는 아주 늦은 시기를 엉뚱하게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대놓고 과학을 무시하고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진지한 표정으로 할 수 없는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리라. 예술 작품 속에서 사실에 대한 진실을 탐구하는 것은 무의미한 까닭이다. 예술로서의 영화는 과학 또는 진화론 너머로 무한히 자신을 확장해 나갈 수 있지 않은가? 칸트 식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예술 안에서 상상력은 개념에 종속되지 않고 작동한다. 여기서 개념이란 과학적 명제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과학적 명제를 뛰어넘음으로써, 예술은 '사실의 세계 속에서 확인된다는 조건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게 되는 진리'와 이별한다. 그리고 예술은 진리와 이별하는 대신 더 큰 것을 얻게 된다. 바로 사실의 세계 속에서 확인할 수 없고 오로지 마음속에 품어볼 수만 있는 것, 흔히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을 예술은 자신 안에 간직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이념의 구체적 내용은 개개 작품마다 다르다.) 과학적 명제는 참이기 위해서는 경험 안에서 확인되어야 하지만, 이념은 마음속에 있을 뿐 경험 안에서 자신의 대응물을 발견하지 못한다.
우리 삶은 경험 안에서 확인되는 진리가 아니라 바로 이 이념을 기둥으로 삼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가령 이념의 한 가지로서, '자신의 인생 전체'라는 상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인생의 매순간 진리에 몰두한다. 우리가 몰두하는 과학적 법칙은 경험 중에서 확인되어야 비로소 진리일 수 있기에 우리는 그 확인의 방법으로 실험을 수행한다. 비단 이런 학문 세계에서만 사실의 차원에서 확인 가능한 진리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 속에서 역시 우리는 이런 진리에 몰두하는데, 가령 신문에서 읽은 것이 정말이라고 믿을 수 있기 위해선, 그것은 사실 속에서 확인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 계약서는 합의한 대로 맞게 쓰여 있는지, 약속한 일은 지켜지고 있는지, 우리는 늘 이러저런 일들이 참되게 돌아가는데 마음을 쓰고, 또 그것이 참된지 아닌지 확인할 수단을 경험 가운데서 얻어낸다.
그러나 나날 속에서 잡다하게 이루어지는 이러한 모든 일은 무엇의 인도를 받고 있는 걸까? 바로 '자신의 인생 전체'라는 '이념'의 인도를 받고 있다. 누구나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학업을 위해 시간을 보내며 또 직장 일이 있고, 살림이라는 폭넓은 말로 일컬어지는 자질구레한 일들이 우리의 하루를 각기 필요한 만큼 조각조각 빼앗아 간다.
그러나 이 모든 개개의 일들은 자기 충족적이 아니다. 그것들은 풍경화 안의 소실점 같은 '하나의 지향점'이 있기에 비로소 의미를 지니는 것인데, 바로 '하나의 인생 전체'라는 이념이 그것이다. 경험은 잡다한 조각들일 뿐인 까닭에 하나의 인생 '전체'는 결코 경험 안에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머릿속에 생각으로서 가지고 살 뿐이다.
그러나 나날의 경험 속에서 참되거나 그른 것으로 확인될 수 있는 모든 일들은 바로 이 하나의 사념, 하나의 이념인 '한 인생 전체'를 설계도로 삼고서만 비로소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나, 어떤 사안 하나를 손에 들고 물을 때 우리는 사실에서 일어나는 개별적인 일을, 경험 안에 다 구겨 넣을 수 없는 삶 전체에 비추어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물음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까닭은 삶 전체란 경험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로서 주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만일 예술이 위대하다면, 경험적 사실로서 확인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인간의 삶의 방식에 개입하는 저런 이념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은 바로 이념을 창조하는 힘이다. 이념은 경험 안에서 진리로서 확인되지 못하는 것, 즉 과학이 아닌 것이지만 모든 개개의 경험적 진리 탐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공룡 100만 년> 안에 구현되어 있는, 사실 관계로부터 자유롭게 풀려나온 사태(사실상 양립할 수 없는 인간과 공룡의 생태계가 얽혀있는 일)는 바로 이렇게 경험에 대응하는 진리를 초월해 이념을 창조할 수 있는 예술 고유의 힘에서 유래한 것이다. (물론 이 영화가 '훌륭한 작품'이라는 미적 기준―이것은 늘 특정한 철학, 문화, 시대 중 한 가지에 종속되어 있다―을 충족시켰는가는 또 다른 문제지만.)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거꾸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공룡 100만 년>이 진화론을 무시한 것은 그것이 예술이라는, 과학적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정말 비난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예술 안에서만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이념을 마치 경험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인 양 거기에 진리의 이름을 주고 진화론과 맞세우는 입장이 아닐까? 이념적인 것이 경험적 진리의 차원으로 내려와 그 영역을 담당하고 있는 과학과 맞서서 경험적 진리를 흉내 낼 때 세상은 뒤죽박죽이 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100이란 숫자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고증적으로 볼 때 100만 대군을 일으킬 능력도 없는 초라한 고대 국가들이 걸핏하면 100만 대군을 일으켜 전쟁을 했다는 이야기를 역사책에서 심심찮게 읽는다. 이때 100은 특정한 셈의 체계 안의 한 단위가 아니라, 경험을 넘어선다는, 경험적 한계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지표다. 그것은 인간이 제한된 경험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양(量) 너머를 사유할 수 있는 인간 사유 능력의 무한성을 가리켜 보이는 표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100이라는 숫자를 특별히 기념한다면 그것이 바로 무한히 넘쳐나는 인간의 정신을 가시화하고 찬양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러하리라.
99는 평범하지만, 하나가 보태져 100이 되면 갑자기 한계가 없는 숫자가 된다. 인간의 생각은 100이라는 숫자를 마술 양탄자처럼 타고 무한한 궤도에 가닿는다. 만일 역사의 여러 순간에서 인류가 계산 가능한 제한된 경험 세계를 넘어 놀라운 비약을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경험적 진리 바깥에서 무한하게 사유를 펼치는 능력 때문이리라. 그 사유를 전개하고 표현할 때 인간은 '100'이라는 말을 필요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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