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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의 박정희, 청산만이 정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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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만주국의 박정희, 청산만이 정답인가? [프레시안 books] 강상중·현무암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장하준은 정승일 등과의 2005년의 대담집 <쾌도난마 한국 경제>(부키 펴냄)에서 박정희 시기 경제 발전을 사회주의 체제의 경제 정책과 연결 짓는다. 그를 '박정희 옹호자'란 오명을 듣게 한 바로 그 책이다. 그는 여기서 박정희의 경제 정책은 '반자유주의적'이라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남로당 전력이 있고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 거라 추측한다.

물론 정책의 틀을 볼 때 스탈린의 급속 공업화 정책과 남한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연관 짓는 생각은 무리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일생을 조금만 면밀하게 훑어봐도 그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장하준의 가설은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이 가설에서 잘못된 것은 결론이라기보단 매개자다. 장하준은 사회주의와 박정희 사이의 매개자로 남로당 전력을 언급했지만 그의 인생사를 살펴본 사람이라면 그 매개자로 그의 만주국 경험을 언급할 것이다.

나는 장하준이 이러한 사실을 막연하게라도 알았을 거라 생각한다. 만주국에서 입안된 경제 정책들이 일본 관료들이 본국에서는 실현하지 못했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있는 무언가의 번데기였기에, 만주국의 경험과 인맥으로 경제 정책을 입안한 한국의 경제 정책에도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너무나 간단명료하고 단순 명백하다. 그러나 이 사실 사이에 형의 죽음으로 잠깐 들어갔던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굳이 끼워 넣는 장하준의 입담은, 그가 무언가를 회피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강상중과 현무암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이목 옮김, 책과함께 펴냄)의 한국어 번역본은, 장하준이 회피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애초 일본어로 저술되었던 강상중과 현무암의 논의는 전후 일본 정치계의 거두였던 기시 노부스케와 한국 현대사의 핵심적인 인물인 박정희를 통해, 전후 일본의 재건과 한국의 경제 성장에 드리워진 만주국의 영향력, 만주국 인맥으로 이루어진 한일 보수 정치인들의 협력 관계를 다룬다.
▲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책과함께 펴냄). ⓒ책과함께

그러나 이 작업은 단순히 그들의 기원이 만주국에 있다는 사실을 '고발'하는 차원은 아니다. 오히려 본문을 읽어보면 이 작업은 일본과 한국의 '근대'를 이해하기 위한 탐구의 일환으로 보인다. 명과 암이 있었고 그것들을 다 기술하겠지만, 어쨌든 그 기원이 지금의 우리 삶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 이 작업 밑에 깔린 인식이다. 이것은 떨쳐냈다고 믿은 그 순간에도 다시금 돌아오게 되는 어떤 것이다. 책은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역사는 역설로 가득하다. 미국의 리먼 쇼크에서 볼 수 있는 금융 파탄이나 경제 위기와 함께 다시금 국가에 의해 지도된 통제와 변혁이 위기 탈출의 비장의 카드로 등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시가 만주국에서 실험적으로 시행하고 전후 일본에서 직접 지도했던 계획적인 통제와 개입이라는 시스템이 일본이나 한국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제의 '총본산'이라 할 미국에서도 일부나마 다시 햇빛을 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는 과도적인 긴급 피난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앞으로도 줄곧 그러한 시스템이 세계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될 것인가? 그러나 어느 쪽이 되었건, 국가나 통제, 계획화와 같은 말들이 다시금 주목받는 중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의 시대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끝나지 않은 셈이다." (287쪽)


물론 우리는 저자들의 인식에 반대할 수도 있다. 국가나 통제, 계획화와 같은 기획이 어느 정도의 효용은 있을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만주국과 같은 전체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통제를 수반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대립각에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를 놓는 것은 단순한 이분법이요, 신자유주의 폐해를 통해 전체주의를 정당화하는 일종의 야바위질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분법의 함정에 빠진 것이 과연 저자들일까? 이런 항변은 필연적으로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의 경제 정책'을 '정치 체제의 문제'와 분리하게 된다. 이를테면 만주국에 기원을 둔 그것들이 반드시 민주주의를 탄압하면서 실현될 필요는 없다는 얘기를 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유지하면서 '국가나 통제, 계획화와 같은 말들'로 특징지을 수 있는 그 기획의 장점을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장하준과 정승일과 같은 이들이 박정희 경제 정책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할 때 말하려는 바도 그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었을 리 없건만, 이런 문제에 대해선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그들의 서술은 '설명하는 것'보다는 '보여주는 것'을 택한다. 그 후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상념들은 다시 독자의 몫이다. 그런데 사실은 박정희 경제 정책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을 불쾌해하는 그 사람들이야말로, 독재 체제와 발전 국가의 필연적인 결합을 믿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박정희로부터 이탈하기 위해 자유주의를 원 없이 받아들여, 박정희와는 달리 민주주의에 철두철미하게 결합한다고 믿었던 그 자유주의가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는 꼴을 보게 된 것이 아닌가?

이처럼 '박정희'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극단적이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엔 박정희를 둘러싼 두 개의 구전 설화가 대립하고 있다. 찬양자들은 온전히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먹고산다고 말하면서도 그가 물려준 폐해는 후임자들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므로 그의 책임이 아니라 이야기한다. 한편, 비판자들은 한국 사회의 모든 구조적 문제를 그의 탓으로 돌리면서도, 그의 성취 따위는 다른 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가능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연구자들조차 두 설화의 틀에서 자유롭지 않다.

가령 여덟 명의 학자들이 2011년에 펴낸 <박정희의 맨얼굴>(시사IN북 펴냄)이란 책을 보면 한국의 진보적인 학자들에게 아직도 박정희가 하나의 도전의 대상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박정희 경제 성장 신화'에 맞서 양극화, 물가, 지가, 재벌 중심 경제 구조, 외환 위기, 노동 정책, 농업 정책, 복지 없는 성장 등의 뿌리가 '박정희 시대'에 있음을 입증하려 한다.

반면 장하준과 정승일 같은 사람은 1980년대에 완화되던 양극화가 1990년대 신자유주의 정책 시행 이후 심화되는 현상은 박정희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고 민주 정부가 받아들인 신자유주의 체제가 원인이라 본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박정희 시대 평가는 물론 1997년 외환 위기의 원인에 대한 분석에도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 대선 정국에서 운위되는 '경제 민주화'의 내용을 규정하는 상이한 두 가지 입장을 구성한다.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의 저자들이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에 접근하는 방식은 그러한 양극단의 방식과는 다르다. 그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들의 명과 암에 대해 얘기할 뿐이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추측으로 "그가 없이는 경제 성장이 없었다"거나 "그가 없었다면 더한 경제 성장을 했을 거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쇼와의 요괴'나 '만주국의 귀태'와 같은 표현들은 명백하게 부정적인 것이지만 그들이 말하려는 바는 '요괴'와 '귀태'에 대한 규탄이 아니라 그러한 변종들이 만들어낸 우리의 역사에 대한 진단과 성찰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세심한 독자들이라면 저자들의 서술에서 일종의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본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박정희 체제의 경제 성장'을 저자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당연시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당혹스러움을 해소해주겠다는 듯이, 한국어판에는 '해제'가 존재한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쓴 '만주국과 만주 친일파 그리고 박정희'라는 해제는 그 제목만 보아도 그 의도 내지는 무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에 관한 얘기를 접할 때 한국의 개혁 세력이 원하는 바는 박정희의 기원이 만주국임을 밝히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 사상과 인맥이 처음부터 친일파의 그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박정희의 모든 정책과 시책을 '친일 잔재'로서 '청산'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치닫는 것이다.

만주국이라는 공간이 일본 제국주의 체제 하에서도 특이한 곳이었고, 그곳에서 일본 엘리트 관리들의 여러 가지 실험이 이루어졌다는 종류의 '맥락'은 이 인식에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바다. 그들은 새마을 운동이 어떤 제대로 된 예산안을 가진 정책이 아니었고 일종의 정신 개조 운동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큰 영향력을 미치는 '성공'을 거두었다는 책의 서술에는 눈을 감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이 운동이 만주국에서 있었던 무슨 운동과 매우 유사하다는 서술에서만 눈을 크게 뜰 것이다. 이러한 맹목적인 청산의 욕망이 장하준과 정승일이 비판해온 '박정희만을 반대하기 위한 자유주의 개혁 노선'과 궁합이 잘 맞을 것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책에 대한 진보 언론들의 리뷰 자체가 책 내용을 요약하는 듯하면서도 실은 '박정희와 만주 친일파 그리고 만주국'의 관계를 부각시키겠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들 속에서 우리가 처한 조건과 다음에 가능한 시도들을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으로 나누고 '더러운 것'은 청산하고 쓸어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정확히 이에 물구나무서는 인식으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말하는 뉴라이트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특히 친일파 청산과 통일정부 수립이 좌절된 역사적 트라우마 속에서 '친일파' 문제는 단죄하는 것 이외의 다른 종류의 성찰이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남는다. 장하준이 박정희를 사회주의 경제 정책과 연결시키기 위해 '만주국'이 아닌 '남로당'이라는 매개자를 선택한 이유도 어쩌면 그 점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본문과 해제가 보여주는 묘한 위화감은 우리의 역사 해석이 아직도 정치 투쟁을 위한 편 가르기 아래 종속되어 있는 게 아닌가하는 불안감을 준다. 그렇기에 우리 정치 현실의 조건인 그 불안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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