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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선총과 현미경을 든 미래 전사, 은밀하게 전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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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선총과 현미경을 든 미래 전사, 은밀하게 전진하라! [김창규의 '기계 나비의 꿈'] 브루스 스털링의 <스키즈매트릭스>
대중성과 작품성(또는 작가주의의 밀도)에 대한 고민과 논쟁은 <길가메시 서사시>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 요소의 경계는 한없이 불분명하다. 특히나 요즘에는 자칭 의견 선도자들이 너무나 많은 탓에 타인의 감상평을 자신의 의견이라고 (자발적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많다보니, 경계를 논하는 행위조차도 무의미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장르의 특성이 더해지고 보면 얘기는 더 복잡해진다. 늘 언급되는 SF의 경이감은 대중적인 요소일까? 누군가는 우주에서 광선총을 난사하는 장면을 보며 경이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때의 경이감은 경계선의 어느 쪽에 있을까? SF의 재미는 우화나 비유로 보지 않을 때에 비로소 시작된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해도 끝내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SF의 작품성이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걸까.

결론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독자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이해할 의무가 없다. 그러려고 해봐야 불가능하다. 그 대신 어떤 재미를 무조건 도외시해야 할 강제성도 없다. 말하자면 자유야말로 감상의 본질이다. 그리고 자유의 넓이는 정제된 정보의 누적에서 온다.

▲ <스키즈매트릭스>(브루스 스털링 지음, 최용준 옮김, 시공사 펴냄). ⓒ시공사
<스키즈매트릭스>(1985, 한국어판 최용준 옮김, 시공사 펴냄, 2003)의 서평도 그런 방향에서 시작해야 적당할 것이다. 작가인 브루스 스털링은 윌리엄 깁슨과 함께 사이버펑크 조류의 봇물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공동 작품집을 낼 정도로 함께 활동했으면서도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현재의 활동만 보더라도 그렇다. 윌리엄 깁슨은 인터뷰나 강연보다는 작품을 내세우고 뒤에 숨는 경향이 있으며 최신작은 근미래 테크노 스릴러이다. 브루스 스털링은 그에 비해 현재의 기술 지향적 흐름들을 분석하고 그 의미와 지향점을 제시하는 강연 활동을 많이 벌인다. 사이버펑크 조류가 흥하던 시절에는 일종의 사이버펑크 전도사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사이버펑크는 옛 유행이다. 그 옛 유행을 대표하는 것은 신체 일부가 기계로 대체된 인간, 네트워크와 인간의 결합 등이었다. 이제 사이버펑크는 하나의 밈(meme)이 되어서 거의 모든 최신 SF의 밑바닥에 스며있다. 과연 어떤 식으로 스며들어 있을까? SF는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변화의 소재로 삼는다. 그러니 우리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인간이란 단순히 육체가 아니라 정신과 문화와 역사의 총합이다. 그리고 문화와 육체는 따로 뗄 수 없다. 따라서 육체의 의미가 달라지면 문화도, 세계를 보는 우리의 눈도 달라진다. 바이러스 때문에 신체에 변이가 생기든, 우주복 없이 우주선 밖에서 활동을 하는 기계 육체 속에서 살든 간에 달라진 우리가 새로 꾸려가는 세계를 그리는 최근의 SF는 모두 사이버펑크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

출간한지 20년이 다 돼가는 작품이다 보니 <스키즈매트릭스>는 전성기 시절 사이버펑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류는 유전공학에 중점을 두고 육체를 개조한 조작주의자와 전자공학을 몸 안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기계주의자로 나뉘어 대치한다. 주인공인 린지는 조작주의자를 위해 활동하는 정치기계로 훈련을 받았다가 길고 긴 방랑을 시작한다. 이 작품을 대표하는 핵심 요소는 두 가지이다. 크고 작은 정파들의 모습, 도저히 인간이라고 보기 힘든 새 인류의 모습. 독자의 흥미를 우선적으로 끌 만한 요소는 후자, 즉 새 인류의 모습이다. SF는 고전적인 육체에서 탈피한 인간을 다양하게 그리는데, <스키즈매트릭스>는 이 장르에 막 입문한 독자에게 그 종합판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온갖 정파나 자칭 독립국들의 모습은 소설의 무게감을 깎아먹는데 일조하고 있다. 주인공이 작품 초반에 몸을 담는 '포르투나 광부 민주국'이나 후반에 등장하는 선 세로토닌 교도들은 어느 정도 현실감이 있다. 그들의 주장은 (그게 진실이든 프로파간다이든 간에) 삶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 둘을 제외한 나머지 집단들은 거부감이 생길만큼 이상만을 강요하다보니, 책을 다 읽고 손에서 놓을 때쯤에는 브루스 스털링이 자신의 신조어 만들기 취미에 너무 빠져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인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소설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절반 정도는 조형에 실패한 반쪽짜리 인물들이다. 살아온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제 입으로 설명하는 데에 그치기 때문이다. '외계인'은 외계인인 만큼 이런 굴레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으련만 그러지 못한다. 애당초 작가가 '인간의 미신 때문에 강력함이 너무 과장된 정치세력'으로 외계인의 성격을 한정지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는 그처럼 잘못된 포석의 (또는 부족한 역량의) 끝을 보여준다.

<스키즈매트릭스>는 아주 느슨한 성장소설의 형식을 따르는데, 잘 만든 성장소설이라고 보기에는 현자나 단기적인 스승이 너무 많이 등장하는 바람에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만다. 물리적인 제약을 모조리 무시하는 '존재'마저 고작 '절대자'라는 촌스러운 단어나 언급하다니, 85년작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허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 브루스 스털링. (사진 Robert Scoble, Creative Commons)
잘 편집된 이야기로 보기에 <스키즈매트릭스>는 너무 부족하다. 그러면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자. 인류가 우주로 퍼져나가서 끝없는 암흑과 적막 속에서 번성하려면 어떤 능력이 필요할까?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답을 모르기 때문에 대비책이 하나 떠오른다. 서로 다른 길을 따라가며 스스로를 인위적으로 진화시키는 인류의 총집합, 즉 '스키즈매트릭스'를 계속 확대시키는 것만이 대비책이다. 최후에 살아남는 것은 수중 호흡이 가능한 육체로 갈아탄 인류일 수도 있고, 개개인이 하나의 도시를 이뤄야 존재를 유지할 수도 있으며, 행성개조를 통해 행성과 인간이 한 몸이 되어야 우주에서 살아남을 수도 있다.

여기서 얘기하는 생존이나 번성이 육체적인 의미만은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가 자신의 몸과 행성을 완전히 개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그 구성원들의 모습은 실로 무한에 가깝도록 다양할지도 모른다. 인위적인 진화도 진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런 진화에 방향성이나 정답은 없다. 따라서 스키즈매트릭스 전체의 모습은 아마도 카오스이론에서 제시하는 양상을 따를 테고, 그 개체들의 총합은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빅 데이터'로 파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모습은 고전적인 이야기 구조나 인물을 이용하지 않고 다른 식으로 그려야 할 것이다. 브루스 스털링은 <스키즈매트릭스>를 그렇게 접근했고,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한 걸로 보인다.

그 대신 거시적인 인류의 미래를 즐겨 상상하는 SF팬이라면 <스키즈매트릭스>의 미완성 구조 안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을 것이다. 사이버펑크와 똑같이 영향력을 남겨두고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진 포스트모던적 재미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하듯 새 인류는 새로운 SF로 그려야할지도 모른다. <스키즈매트릭스>는 그런 단초의 하나일 수도 있다. 독자나 감상자가 달라진다면, 비록 그 변화가 감지하기 어려울 만큼 느리다 해도, 재미나 대중성의 색깔 또한 복고 운명론자들의 예견에서 벗어나 달라질지도 모른다. 지금 이 서평을 읽는 모든 이들이 살아 생전에 그런 시대를 경험하지는 못한다 해도, <스키즈매트릭스>같은 작품을 통해 어렴풋이 상상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본래 SF란 한 손에는 광선총을, 다른 손에는 현미경을 들고 있는 장르이다. 그 두 가지 문명의 이기가 한데 모여 얼마나 첨예하고 은밀한 소설을 쓸 수 있는지, 그러다가 어떻게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는지 구경하고 싶다면 <스키즈매트릭스>를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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