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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관점에서 본 중국의 개혁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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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관점에서 본 중국의 개혁개방

[세교연구소 심포지엄 '중국 사회주의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발표 1]

머리말

개혁개방정책이 시작된 지 20년을 넘어설 무렵, 한국에서도 개혁개방의 성과와 향방을 가늠하기 위한 학자들의 노력이 있었다(정재호 편 『중국개혁-개방의 정치경제 1980~2000』, 까치글방 2002). 당시 발표자는 역사가의 입장에서 개혁개방을 해석해달라는 주문을 받고 「중국의 체제개혁과 대외개방: 근대화의 역사성」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부터 벌써 11년이 지난 지금, 글을 다시 읽어보면 역시 오늘날 G2와 글로벌 헤게모니가 운운될 정도 중국이 맹진(猛進)할지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고백해야겠다. 10여년 전에는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을 동아시아 지역경제의 특징을 보여주는 개발독재형의 근대화정책으로 보는 시각이 주류였다면,(1) 오늘날은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을 넘어서 '중국의 부상' 자체를 문제시하면서 세계사의 변수로 다룬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남짓한 짧은 시간동안 중국은 개발도상국 이미지를 벗어나 미국과 패권을 경쟁하는 G2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결론을 앞서 이야기하자면 발표자가 보는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은 그럼에도 11년 전의 진단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먼저 그간 역사학계가 중국의 부상과 개혁개방정책을 어떻게 파악해왔는지를 먼저 소개하면서 발표자의 의견도 덧붙이도록 하겠다.

예전의 글에서도 개혁개방정책과 중국의 부상을 조명하는 역사학계의 여러 주장과 사회과학계와의 연동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으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중국 해석은 한국, 일본, 미국 등 지역에 따라 자국의 아젠다에 동원되어 굴절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개혁개방정책의 결과물로서 오늘날 중국을 파악할 때, 정치, 경제, 사회 어느 분야를 보는 가에 따라 시각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총체'로서 중국을 파악하는 것 역시 어렵다. 따라서 편의적이나마 크게 정치, 경제, 국제관계라는 세 분야로 나누어 개혁개방정책 30년의 결과물로서 중국의 부상을 보는 시각을 살펴보겠다.(2)

1. 정치: '당국체제(黨國體制)'에 대한 평가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은 중국공산당이 유일한 정당이며 당기구가 국가기구에 우선하는 '당국체제'라는 정치체제하에 추진된다. 이러한 시스템은 외형적으로는 최초의 사회주의국가였던 소련의 모델을 도입한 서구이식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당국체제를 지탱하는 정당성과 논리로 파고들자면 오히려 위로는 청말(淸末)과 중화민국 시기에 모색되었던 정치모델 논쟁에서부터 아래로는 오늘날 중국의 정치개혁을 둘러싼 지식인들의 논쟁까지 이어지는 긴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또한 더 거슬러 올라가 개혁개방을 이끄는 중국의 일당체제(一黨體制)를 전통중국의 황제권력에 비견하여 그 봉건성의 증거로 삼거나, 전근대시대부터 이어지는 중국적 정치문화의 속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의 대표적 주자들은 자민당과 보수우익이 장악한 일본정치에 대한 염증으로 사회주의 중국에 희망을 걸었다가 문화대혁명으로 환멸을 맛보고, 최근 중국의 부상을 우려의 눈으로 보는 일본의 역사학자가 많다. 그 대표적 논자는 요코야마 히로아키(橫山宏章)로, 그는 '현인지배(賢人支配)'의 '선정주의(善政主義)' 전통이야말로 전근대 이후 오늘날까지 이르는 중국정치의 속성이라고 본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이 탄생한 후 중국의 근현대는 국민당과 공산당 양대 정당의 투쟁사로 점철되었다. 중화민국은 아시아 최초로 등장한 공화국임에도 결국은 다당제와 의회제의 근대적 정치시스템이 정착하지 못했고 일당독재로 귀결되었다. 이는 중국정치의 특징이 현인지배의 선정주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손문의 표현을 빌자면, "먼저 깨달은 자[先知先覺者]"가 무능한 "늦게 깨닫는 자[後知後覺者]"를 지도하는 것이 좋은 정치라는 것이다. 山田辰雄은 이를 '대행주의(代行主義)' 전통으로 부르는데 인민의 직접적 정치참여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동일하다. 문제는 누가 '현인'인가인데 이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황제체제하에서 현인이 과거시험에 선발된 신사층(紳士層), 독서인 계층이 바로 현인을 구성하는 엘리트집단이었다면, 근대 이후는 중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부국강병을 이룩하도록 지도할 국민당, 공산당이 현대적인 현인집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코하마는 "국민당이나 공산당이나 훌륭한 전위당이 인민을 지배하는 것이 좋은 정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하는 '당치(黨治)의 정통성'이 현대판 현인지배"라고 말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지배자가 선정주의를 인민에게 강제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민은 선정에 의해 구제된다"고 확신하고, 그 확신을 인민도 자율적·타율적으로 공유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일당독재의 논리는 이미 손문(孫文)에게서 체계화되어 나타났다. 손문은 삼서론(三序論)을 주장하여. 중국은 '헌법의 통치'로 가기 전에, 먼저 '군법의 통치'와 '약법의 통치'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 직후에는 반혁명분자를 완전히 제어하기 위해 군정부가 지도하는 군사독재체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치가 안정되어도 중국에 바로 헌정을 도입하기에는 인민의 정치수준이 낮기 때문에 국민당이 국민을 계도하고 훈련시키는 기간이 어느정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과도기에는 헌법 대신 국민당이 정한 '약법'이 존재하며, 국민당은 사실상 의회의 견제를 받지 않은 일당독재를 실행한다. 국민당은 인민에게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개설하는 헌정 단계에 필요한 자질을 교육하며, 그 기간이 끝나야 '헌법의 통치'로 넘어갈 수 있다. 입헌군주제를 지지하여 손문과 경쟁하던 정치적 논객 양계초(梁啓超) 역시 의회정치를 불신하고 중국인민에게 그러한 소양은 없다고 믿었다는 면에서, 또 개명된 군주에 의한 통치가 훌륭한 정치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손문과 마찬가지로 '현인지배'를 주장하였다.

이 삼서론은 후에 군정-훈정-헌정론으로 정교화되는데, 손문에 이어 국민당을 지도하여 1928년 중국을 통일한 장개석(蔣介石)은 이 훈정개념을 십분 이용하여 '이당치국론(以黨治國論)'을 전개하고 훈정시기의 자신과 국민당의 독재를 합리화하였다. 요코야마는 1956년 이래 "공산당의 지도"를 절대화하는 중국공산당 역시 인민민주주의 독재를 표방하면서도 인민 스스로가 전위당으로서 공산당을 능가할 수 있는 계기는 부정한다는 면에서 공산당으로 대변되는 현인지배와 우민관이 그대로 관철되어 있다고 보았다.(3)

중국의 현인정치 전통과 우민관에 대한 요코야마의 비판은 근본적으로 다당제와 의회제로 대표되는 서구적 정치모델을 "받아들여야 할" 우월한 문명으로 은연중에 규정한 것이다. 또한 개혁개방정책 이후에도 일당독재를 유지하는 것도 중국 정치문화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이 된다. 그의 이러한 의견과 달리 일본과 미국 같은 자본주의·제국주의 국가가 중국을 정치적으로는 일당독재에다 공산당이 비합리적으로 경제를 일원 지배하는 체제로 만들었으며, 따라서 그 조건이 사라지면 이러한 정치도 바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오쿠무라 사토루(奧村哲)다.

오쿠무라는 항일전쟁 시기의 전쟁동원체제가 국민당과 공산당의 정치체제를 규정지었으며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체질을 결정했다고 본다. 국민당이나 공산당이나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당독재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중국공산당이 건설한 사회주의 중국은 사회주의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했던 결과가 아니라, 일본의 침략을 배경으로 경제적 후진국이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취한 총력전의 태세가 역사적으로 계승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4)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총력전체제로서의 사회주의체제를 지탱하는 힘은 과거는 일본, 이후는 미국으로 상징되는 파시즘에 대한 강한 반발의식이다. 이 체제는 철저하게 개인이나 사적 영역을 인정하지 않은 전체주의적 억압 체제이며, 국가와 일체화된 당이 모든 것을 규제하는 일원적 체제이다. 중국이 국민당이나 공산당을 막론하고 총력전체제라는, 일당독재보다 더한 억압적 체제로 간 데 대한 책임을 오쿠무라는 일본제국주의뿐 아니라 미국에도 돌린다. 일제가 패망한 후 1949년 성립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신민주주의노선을 취하면서 급격한 사회주의화의 너울을 쓴 총력전체제로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는 미국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개입하여 중국이 이 전쟁에 개입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급격한 사회주의화나 미국을 적국으로 가상한 총력전 체제를 유지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5)

개혁개방정책은 바로 이러한 인민전쟁체제, 총력전체제로부터의 탈각을 의미했다. 개혁개방정책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마오 쩌둥(毛澤東)의 전쟁불가피론과는 다른 덩 샤오핑(鄧小平)의 신사고와 방위전략의 전환이 먼저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덩 샤오핑은 1977년에 전쟁은 불가피하지만 뒤로 미룰 수는 있다고 주장했고, 1985년 인민공사가 해체한 뒤에는 "전쟁의 위기는 의연히 존재하지만 비교적 장기간 평화적 환경을 쟁취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며, 우리 군이 임전(臨戰), 반임전(半臨戰) 상태에서 평화건설로 궤도를 전환하는 전략적 결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으로 공산당을 설득한 후에야 병력감축과 경제적 합리성에 따른 연해지구(沿海地區) 발전전략이 나올 수 있었다.(6)

그렇다면 경제적으로는 전면적 시장경제로 이행하여 총력전 체제를 벗어났으면서도, 정치 면에서는 여전히 중국공산당 일당독재가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오쿠무라는 이를 소련 및 동구권과는 다른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중국은 반(半)식민지국가로서 독립과 주권의 회복을 희구해온 내셔널리즘 속에서 사회주의에 접근해갔다. 그 자신이 제국주의국가였던 소련과는 다르다. 또 소련에 의해 피동적으로 공산화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와 달리,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사회주의국가는 제국주의 국가와 투쟁하여 자력으로 국토를 보위해냈고 지배의 정당성을 가졌으며 소련에 대해서도 강한 독자성을 견지했다. 한편 외세와의 투쟁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지배의 정당성을 위해서도 사회주의 국가임에도 내셔널리즘이 크게 고취되는 경향이 농후했다. 또한 중국과 아시아는 소련과 동유럽 국가와 달리 1980년대까지도 공업화가 미진했고, 오히려 유휴노동력의 과잉이 문제가 되는 사회였다. 그러므로 중국의 경제개혁은 꼭 기존 시스템의 내부를 바꾸지 않고도, 외곽에 새로운 기업을 만들어 경제를 외연에서 양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로 강력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었고 총력전체제하의 일당독재를 강화했기 때문에 정치적 대체세력 역시 형성되지 못했다. 그 결과 총력전체제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진 뒤에도 일당독재는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쿠무라는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에 대해 "사회주의는 오로지 명의일 뿐으로, 중국의 독재도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인용자) 또한 보통의 개발독재가" 되었다며, 궁극적으로 중국의 사회주의는 붕괴하고 민주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고 보았다.(7)

요코야마와 오쿠무라의 주장은 2000년대 이전에 일본뿐 아니라 세계학계가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당국체제를 보는 주류적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후 중국공산당이 '붕괴'하지 않고 중국이 미국과 경쟁하는 경제·정치대국으로까지 성장하면서 미국이나 한국학계의 중국 정치체제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바뀌고 있다. 즉 의회제와 다당제라는 표준을 아예 부정하지는 않지만, 당국체제가 경제성장에 효율적이었던 점이나 초대형 국가라는 '중국적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전향적 평가 역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중국 학계에서는 대놓고 의회제나 다당제는 중국에 맞지 않으며, 중국공산당이 계속해서 민본주의를 구현하고 자정능력을 갖추도록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미국의 정치·경제모델과 가치를 상징하는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항한 베이징 컨센서스의 제기 역시 중국 외부에서도 어느정도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중국의 부상을 가장 위협적으로 느끼는 일본 학계에서는 그러한 전향적 반응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반응이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거의 "전혀"라고 할 정도로 없다는 점은 일본의 위기의식과 혐중(嫌中) 분위기가 사상적 차이를 덮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오쿠무라는 냉전의 종식으로 총력체제의 전제가 사라졌다고 보았지만, 발표자가 보기에는 총력체제는 여전히 재활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를 첸 리췬(錢理群)은 마오체제라고 불렀으나, "현실과 가상의 적으로서 제국주의" "현실과 과장된 위기의식"은 청말부터 지금까지 독재를 합리화하는 체제강화 논리로 줄곧 사용되었고, 실제 합리적인 판단이기도 했다. 양계초는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이래로 의회제와 공화제에 늘 의구심을 표명하면서 그 제도가 나쁜 것이 아니라 중국이 적자생존의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강력한 개명군주에 의한 전제정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가토 히로유기(加藤弘之)는 스펜서의 사회유기체론에서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고 방임하여 전체 사회의 발전을 가져온다는 부분만 전도(顚倒)시켜서, 서구 개인과 시민의 자질에 비해 일본의 구성인자가 떨어지는 이상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개인에게 애국심을 동력으로 심어주고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지 결국 국가와 개인 모두 생존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는데, 양계초는 바로 그의 이론을 수용했던 것이다. 이남주는 중국 지식계에서 개혁개방을 통해 세계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중국은 지구적[球籍]을 박탈당할 것이라는 표현을 소개하면서, 이 말은 마오 쩌둥의 1956년 8월 연설에도 나오며 개혁개방의 절박성을 선전하는 말로 1980년대와 오늘날까지도 쓰인다고 소개하였다.(8) 그런데 사실 이 말은 과분(瓜分)의 위기가 횡행하는 청말에도 1920년대 중서문화논쟁(中西文化論爭)에서도 쓰였다. 다만 과거에는 "주권을 보존하고 생존을 하려면"이라는 전제가 붙었지만, 이후에는 "부국강병"을 하려면, 그리고 G2를 바라보는 오늘날에는 양계초가 말한 식의 "대중화문명을 구현하고 지난 100년의 국치를 씻으려면"으로 가정이 바뀌었으며, 여전히 당국체제는 여러 가지 중국적 특수성을 동원하여 불가결한 선택이라고 선전할 것이다.

2. 경제: 중국경제는 왜 성장하는가?

이처럼 정치분야에서는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많지만, 중국이 단기간에 성취한 경제적 성장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도 사회과학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하면서 왜 중국경제는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지 나름의 답변을 내놓고 있다. 역사학계의 평가는 중국 전근대 경제는 유럽 못지않게 성숙했으며 금일의 성장역시 이례적이니 것이나 기적이 아니라 원래 지위의 회복이라는 점에 중점이 있다. 이에 비해 중국경제가 미국경제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을 하자, 사회과학계는 사회주의체제 하의 중국경제의 성장을 중국의 전근대 경제의 속성, 자본주의적 경제 속성, 사회주의적 지향이 융합된 혼종형 경제로 보고, 하나의 대안모델화하는 경향이 있다.

1) 중국근현대사에서 개혁개방 이후의 성장

청말 이래 지금까지 중국의 경제적 근대화의 내용은 아무리 부정해도 산업혁명 이후 서구의 근대경제를 모델로 하고 있다. 또 그러한 면에서 19세기말부터 현재 중국의 개혁개방에 이르기까지의 근대화의 연속성은 더욱 명료해진다. 중국의 경제적 근대화의 역사를 시기 구분을 한다면, 개혁개방은 어느 단계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차이나 쿼털리』의 1930년대 남경국민당정부(이하 남경정부로 약칭) 시기의 재평가에 관한 특집에서, 브란트(Loren Brandt)는, 비교적 통계수치가 갖춰져 있는 1914~18년과 1931~36년을 비교해보면, 중국의 경제는 연평균 6.8%의 성장율을 보이고 있으며, 1930년대의 근대적 부문(modern sector)은 연간 6%대의 고성장을 지속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동시대의 일본보다 조금 낮고 인도보다 높은 수치였다. 브란트에 의하면, 일본과 중국의 근대화 격차를 낳은 결정적 요인은 사회구조상의 근본적 차이라기보다는, 근대화를 수용하는 정치적 시스템의 상이(相異)에 있었다. 즉 근대기술 도입에 적극적이었던 일본과 달리, 중국은 청조의 정부관료의 반대로 근대적 기술도입과 매뉴팩처 등의 근대적 부문의 출현이 개항 직후인 1840년대가 아니라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외국인에 의한 중국현지의 공장설립권이 인정된 1895년 이후에야 실질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만약 중국이 1840년에 기술도입을 시작했더라면, 1930년 중반에는 근대적 부문이 GNP의 1/4에 달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브란트는 중·일의 근대화에 대한 정치적 태도의 차이를 지적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개방 시기의 문제로 바꿔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근대화에 결정적인 요소로 개방성이 등장한다. 브란트는 중국의 근대화 역사의 시기구분에서, 중국경제가 국제경제에 링크되는 1890년대와 중국경제의 성장이 중단되는 중일전쟁 시기를 분수령으로 설정했는데, 이 역시 대외개방과 근대화의 긴밀한 관계를 지적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9) 중국이 대외개방을 하고 적극적으로 근대경제를 수용했다면 발전 잠재력은 못지않았고, 결국 정치에 의해 유예된 것이 된다.

한편 일본의 경제사학자 구보 토오루(久保享)는 더욱 세분화된 시대구분론을 폈다. 구보는, 중국근현대 경제사를 크게 4개의 국면으로 분할했다. 제1국면은 1880~1910년대 중반까지로, 대외경제 주도의 발전을 이루었다. 대외무역이 확대되고 외국자본이 유입되어 근대적 상업ㆍ금융ㆍ공업이 초보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제2국면 1910년 중반~1930년대에는 국내경제주도의 발전으로, 경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수입대체공업화가 진전되고 경공업제품의 자급화가 거의 완성되었다. 이 시기에 통신·교통·에너지 등 사회기반산업이 확충되고 중공업이 초보적으로 시작되나 여전히 경공업 위주였다. 1940~70년대의 제3국면은, 군수공업을 축으로 하는 급속한 중화학공업화가 핵심을 이룬다. 그러나 대외경제와 상업금융의 대폭 쇠퇴와 중공업건설을 위한 경공업과 구매력의 억제로 시장 규모가 제한되어 경제성장이 한계에 봉착하자 1970년대말 이후 개혁개방의 제4국면이 출현했다. 이 시기에 중화학공업화의 편중이 개선되고 농업·경공업에 새로운 발전이 이뤄졌으며, 대외경제가 팽창하면서 상업ㆍ금융도 활기를 띄고 유기적 연관을 가진 경제발전이 가능해졌다.(10) 이상과 같은 구분법은 브란트의 대외개방성과도 사실상 상통한다.

발표자는 대외개방성, 중국의 통일, 자율경제와 통제경제, 대외위기의식과 민족주의 등의 변수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초보적인 시기구분을 제시하였다.

19세기말은 청조가 서구열강에 정치적으로 반종속된 강제된 피동적 대외개방이었다. 외국자본과 기술이 신속하게 유입되고 근대적 상공업이 초보적으로 발전했지만 청조라는 통일정부 하에서 이러한 외자분배권을 장악하고 상공업 발전을 주도한 것은 정부 통제하의 관상합판(官商合辦) 부문이 주도하고 있었다. 20세기의 10년대와 20년대 중국은, 북경정부 하에서 명목상의 독립국가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지방에 군벌이 자립하여 통치하는 분할시기였다. 이 시기의 중국은 대외적으로는 독립, 대내적으로는 통일정부의 부재라는 상황에 놓였다. 대내적 분할은 정부가 아닌 민간경제 주도의 자율적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1차대전과 대외수출의 급증에 따라 대외개방과 무역의 확대 역시 피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것이었다.

이어 1930년대는 대외적으로 세계공황의 영향하에 무역이 수축되고, 대내적으로는 북벌로 중국을 재통일한 남경정부가 국가통합을 전개해간 시기였다. 30년대의 중국은 불평등조약의 철폐와 관세자주권의 회복으로 능동적 대외개방을 실현할 수 있는 입장에 놓였으나, 세계공황과 이에 따른 국내산업 보호라는 필요성 때문에 중국은 고관세정책을 실시했고, 상대적으로 대외무역도 수축되었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개방에 대한 역행은 아니었다. 남경정부는 대외무역을 중시하고 미래의 수출확대를 지향하고 재정의 상당부분을 관세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대외개방성을 지향한 위의 부분적 후퇴였다고 평가된다. 다만 경제 성장의 주도권의 문제는 민간자율적 성장과 정부통제적 성장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남경정부는 국가체제의 성격이 모호한 '훈정(訓政)'이라는 틀 안에서, 국가통합(national integration)과 국가건설(nation-building)을 위한 여러가지 정책을 시도했다. 이 시기는 근대화라는 목표를 달성할 방도로서, 자유주의적 경제모델, 소련식 계획경제, 파시즘적 국가자본주의가 모두 하나의 가능성으로 검토되던 시기였다. 남경정부는 국영기업의 성장과 정부부문의 확대를 꾀했지만 상공업 세수의 원천인 민간경제의 보호에도 주력했고, 실제로 남경정부의 통제경제적 성격이 농후해 진 것은 중일전쟁기에 들어가서였다.

중일전쟁기와 내전시기를 포함하는 1940년대는 전시경제하의 폐쇄적·통제적 경제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마오 쩌둥 체제하의 경제는 냉전체제와 중소분쟁 등 정치적 요인으로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경제였고, 이러한 대외적 폐쇄성은 자발적인 것이었다. 이와 비교하면 1978년 이후 개혁개방기 중국경제의 성격은 자발적 대외개방성으로 규정할 수 있다.

발표자는 1930년대 남경정부의 근대화정책과 중화인민공화국 시기 중국의 근대화정책이 근본적으로 대단히 유사함을 지적하고, 경제 및 재정의 각 주요 범주를 설정하여 양자를 비교한 바 있다. 1930년대의 국가건설의 경험이 마오 쩌둥 노선과 개혁개방노선에 모두 일정정도 모델을 제공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1930년대의 국민정부의 시행착오 과정에는 국가자본주의적 내지 권위주의적 노선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장경제의 자유를 어느정도 인정하면서 그 위에 국가주도의 건설을 겸비하는 개발독재식 모델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경제정책면에서는 통제경제와 자율경제의 적절한 줄다리기가 존재했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발표자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중국의 경제성장에 대한 평가는 개발독재형 성장이라는 판단에 변함이 없으며, 한국이나 대만과 달리 정치적 민주화로 연결되지 않은 것은 중국공산당의 효과적인 통치능력, 대안세력의 부재,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내셔널리즘의 "위기의식" 때문이라고 본다. 또한 19세기 중후반, 20세기 전반과 중반 100여년간의 세계경제에서 중국의 위상 추락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여전히 경제성장 잠재력이 충분한 성숙한 경제였다고 보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절을 바꾸어 살펴보자.

2) 중국의 부상과 세계사의 재조명

1990년대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되며 냉전의 저울이 기울어지자 자본주의는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이는 서구 근대문명의 우월성을 재확인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명의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중국의 사회주의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역사학계에서는 왜 자본주의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가,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를 낳은 근대, 근대를 낳은 유럽문명이 왜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화두로 뜨거웠다.(11) 세계사가 새삼 주목받았고 거시사(macro󰠏histories)가 유행했으며, 2000년을 전후하여 프랜시스 후쿠야마(F. Hukuyama), 제러드 다이아몬드(J. Diamond) 등의 학자들이 "왜 유럽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각자의 답을 내놓았다.(12)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논하면서 헤겔을 인용하여 자유민주주의야말로 인간의 인정받고자 하는 상승욕구를 가장 조화롭게 사회발전으로 유도하는 최종적 정치체제라고 주장했다.(13) 다이아몬드는 결국 문명의 우열을 결정지은 것은 지정학과 생태환경이 압도적이었다고 주장했다.(14) 경제사학자 랜디스(D. Landes)는 지난 천년간 진보의 핵심은 '서구 문명과 그 확산'이라고 주장했으며,(15)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학자 에릭 존스(Eric Jones)는 사회제도적 환경, 즉 사유재산권 확립, 분할된 유럽제국내 상호경쟁 시스템, 군사󰠏재정국가와 자본주의가 "유럽의 기적"(European miracle)을 낳았다고 주장했다.(16) 위와 같은 이들의 주장은 계몽주의 시대 몽테스키외를 필두로 맑스와 헤겔의 저작에 이미 나타났던 것이며, 사실상 근대유럽의 오리엔탈리즘 담론의 변종이다. 여하튼 게임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와 미국의 "정치적 승리"에 대한 자축이 배타적 민족주의의 확대, 분쟁지역의 확대로 퇴색될 무렵,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회주의 대국 중국의 "경제적 승리"는 갈수록 빛을 발해갔다. 물론 2차대전 직후 제3세계권에 있었던 지역 중에 유일하게 동아시아가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동아시아지역의 경제적 저력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유교경제론이나 기러기형 발전론 등 다각도로 주목을 받아왔지만, 미국을 위협할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중국경제의 부상은 차원이 다른 충격이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경제적 성장을 역사적으로 해명하려는 흐름은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2000년을 전후하여 중국이 미국에 도전할 정도로 국제적 위상이 정치·경제적으로 커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구미 중심의 세계사 자체를 총체적으로 재점검하는 조류로 전개되게 된다. 이제 중국이 왜 이렇게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에 대해 역사학적 답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이론이 캘리포니아 학파(California School)의 신세계사(new world history)이며,(17) 이들의 역사학 성과를 적극 활용한 사회과학 이론 진영에서 프랑크(A. G. Frank)와 아리기(G. Arrighi) 등 새로운 세계체계론이다.(18)

20세기 말과 21세기의 문턱에서 미국 역사학계에서는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중국과 동아시아를 세계사 전개의 중심에 부각시킨 새로운 학문사조가 흥기하였다. 역사학 분야에서 이전의 16세기 혹은 산업혁명 이래 유럽이 창출한 근대문명이 세계사를 주도하고 변형시켰다는 통설에 도전하여 19세기 초반까지 동서양의 명확한 힘의 역전은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힘과 부의 원천이 된 산업혁명을 일으켰다고 하는 여러 조건들은 거의 동양에도 존재했거나 혹은 서양에만 존재하는 단일요소가 그것만으로―즉 동양이나 비서구와는 무관하게―서양의 힘과 부를 가져오지는 못했다는 연구가 발표되었다. 미국역사학계에서 이러한 유럽중심적 세계사의 그림을 크게 바꾸고 있는 그룹이 바로 '캘리포니아 학파'다.(19)

그 대표적 주자인 웡(R. Bin Wong)은 1997년 발표한『중국의 전환』에서 18세기 유럽과 중국 경제를 분석하여 두 세계의 경제적 발전 단계는 유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멘델스(Mendels)가 제기한 유럽이 산업혁명 이전에 이를 배태한 원공업화를 겪었다는 이른바 원공업화론(proto-industrialization)을 비판하면서, 유럽의 원공업화가 그려낸 농촌 가내수공업과 시장이 견인하는 발전 형태는 기본적으로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묘사한 시장과 분업이 주도하는 발전 형태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기준으로 보자면 18세기 중국의 스미스적 경제는 유럽에 대등한 혹은 그 이상의 발전수준에 달해 있었다.(20)

또다른 주요 논자인 포머란츠(K. Pomerantz)는 더 나아가 산업혁명은 유럽과 중국이 모두 한계에 달해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던 스미스적 경제역학을 영국이 유일하게 돌파함으로써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유럽과 중국은 모두 스미스적 경제발전과 원공업화를 겪었으며, 농촌 가내수공업의 발전과 인구 증가, 이로 인한 토지에 대한 인구압(人口壓)의 증가 및 생태환경의 악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유럽 중에서도 영국만이 이 막다른 골목을 전혀 다른 방식, 즉 화석연료와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이라는 산업혁명으로 돌파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영국만이 향유한 두가지 조건 때문이었다. 하나는 석탄자원이 주요 공업지역의 근거리에 노천광으로 집중 분포해 있어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는 행운이다. 다른 하나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확보인데, 집약적 토지이용이 한계에 달해 생태적 위기에 직면해 있던 영국이 공업화에 필요한 식량, 원료, 토지 자원을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이용해 자국에 유리하도록 저렴하게 착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점에서 실증적 증명에 대거 인용이 된 것이 중국 자본주의맹아론의 성과였다. 1930년대부터 중국의 사회학자들은 중국의 전근대에 자력으로 근대화할 경제적 성장이 있었으나 '제국주의의 억압'에 의해 그 가능성은 압살되었다고 주장했다. 1939년에 발표한 문장에서 마오 쩌둥은 이 이론을 '자본주의의 맹아'가 중국 전근대에 존재했다고 공식화함으로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역사학계는 중국사에서 이 '맹아'를 찾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21) 자본주의 맹아론은 상처난 중국의 자존심을 되찾고, '제국주의론'과 표리의 관계를 이루면서 혁명의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게 했다. 서구의 학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맹아론을 주로 관변사학으로 평가절하해왔다. 그러나 주로 명청시대 양자강 유역의 농촌수공업과 시장경제 발전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 축적은 이제 원공업화의 양상, 즉 농촌가내수공업, 인구증가, 시장경제의 발달이 삼위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경제가 중국에 존재했고, 그 발전수준은 결코 유럽에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훌륭한 증거물이 되었던 것이다.

자본주의맹아론은 중국 내부에서는 1950년대와 80년대 두차례 논쟁을 거치면서 성숙되었는데, 전기의 대표적 학자로는 푸 이링(傅衣凌), 후기의 대표적 학자로는 우 청밍(吳承明)을 꼽을 수 있다.(22) 이 이론은 기왕의 서구학계를 점령하던 중국 정체론적 시각을 타파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원공업화론의 출현 당시에도 이미 서구학계에서는 중국사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재검토가 일어났지만, 원공업화론의 유럽 모델이 중국사 연구성과와 결합하여 본격적으로 동서 비교사로 나아가 세계사의 재검토로 이어진 것은 1990년대말에 가서였다. 그리고 그 시기는 1990년대 냉전 종료 이후 서구 문명과 근대자본주의 문명의 절대화와 찬양 붐이 사그라지고, 환경문제의 대두 등 근대산업주의의 후유증이 글로벌한 규모로 전개된 시기와 일치하며, 또한 중국경제의 급격한 부상과 글로벌 경제에서 동아시아 지역의 비중 확대가 확연해진 시기와도 일치한다.

이제 근대유럽이 산업혁명을 통해 획득한 경제적 역량이 중국을 누르고 우위에 서는 것은 182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가능했다고 서술되기 시작했다. 거꾸로 중국경제에 대한 서구경제의 역사적 우위는 200년으로 단축되었다. 이제 21세기 중국경제의 부상은 기적의 결과가 아니라 잠시 양보했던 우위의 재탈환으로 비치게 되었다.

그 점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인 것은 미국의 사회과학계였다. 특히 과거 사회주의에 희망을 걸었던 뉴레프트 계열의 학자들은 이러한 역사학의 새로운 시각을 적극 흡수하고 오늘날의 현상 분석과 미래 전망에까지 동원했으며, 중국의 발전경로를 좌파의 새로운 대안적 가치로 부상시켰다. 냉전체제의 붕괴 이후 잠시 자본주의의 세계적 승리와 확대가 확정된 듯 보였을 때 좌파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이외에 대안이나 출로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생태와 환경 문제라는 글로벌한 위기의 등장으로 그러한 승리가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비서구적 혹은 비자본주의적 대안으로 아시아적 발전경로, 오늘날 사회주의 기치를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자본주의를 수용하는 중국의 발전경로가 역사적으로 재검토되기에 이르렀다.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의 동료이자 '저개발의 개발'로 종속이론의 시발점이 된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리오리엔트』를 저술함으로서 월러스틴의 유럽중심적 세계체계론을 비판하고 세계체계의 중심은 19세기까지 여전히 중국이었으며, 오늘날 중국의 부상은 겨우 약 200년간 지속되었던 서구의 우위를 끝낼 것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23) 프랭크의『리오리엔트』가 출간되었을 때 그의 중국중심론을 비판했던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는 그의 유작이 된『베이징의 애덤 스미스』를 2007년에 펴내면서, 프랑크의 주장을 상당부분 수용하여 자신의 세계체계론을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크게 수정하였다. 아리기의 핵심 주장을 살펴보자.(24)

2차대전이 끝난 뒤 1960년대 아리기가 세계 남측으로 부르는 제3세계에서는 유럽중심의 세계질서에 반발하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혁명이 달아올랐다. 그런데 이후 세계 북측(미국과 유럽, 일본)은 정치경제적으로 다시 압도적인 힘을 회복했고 이 "비서구 세계 민족들의 서구에 대한 반란"을 진압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기 확연해지고 있는 동아시아의 경제적 부흥은 일시적으로 회복한 것처럼 보였던 세계 북측의 세계 남측에 대한 압제를 끝장낼 것이라고 암시한다. 즉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國富論)』에서 예언한 유럽과 비유럽 사이에 "용기와 무력에서 평등해지고 상호 존중하는" 세계가 21세기에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25) 20세기 헤게모니국가 미국은 냉전에서 승리한 뒤 진정한 세계제국으로 군림하여 지위를 유지하려 하지만 중국과 동아시아의 경제적 팽창은 미국을 대체하는 힘으로 등장하면서, '신아시아시대'를 열고 있다. 그 내용은 자본주의-서구적 국가체제의 역사적 유산과 동아시아적 유산이 결합한 새로운 문명이며 기존의 자본주의와는 다른 길이다.

아리기는 중국과 동아시아의 부상이, 경제적으로 불평등하고(富) 전쟁으로 점철된(힘) 자본주의적 발전경로("부자연스러운" 서구 경로)를 수정하고 동아시아적 경로의 장점인 경제적으로 더욱 평등하고(富) 평화(힘)를 구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더구나 동아시아의 경제적 부상에 이어 21세기 중국은 경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잠재적 패자로 등장함으로써 부와 힘의 헤게모니 전환의 새로운 계승자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전 구 헤게모니국가와 달리, 부가 아닌 힘, 즉 군사력만은 더욱 집중되고 강력하게 소유하고 있으므로 쉽게 헤게모니 자리를 내놓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아리기는 새로운 발전 경로를 알리는 역할을 기대받는 중국과 인도가 세계 남측의 대변자 역할을 하고 미국이 평화롭게 중국의 부상을 받아들이고 헤게모니를 넘겨주어야 새로운 평등의 세계가 도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6)

그렇지만 아리기는 미국 역사학계 내의 동아시아론을 수용한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와 미래의 전망으로 확대시킨다. 캘리포니아 학파가 역사학자 위주로 근대 이전 동서양이 걸어온 경제발전 경로가 유사했고 그 수준이 동등했음을 강조했던 것에서 끝났다면, 사회학자인 아리기는 애덤 스미스를 베이징에서 발견해서 미국 헤게모니의 역사적 종말과 21세기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까지 끌어낸다. 그는 기존 경제사 연구에 머물렀던 캘리포니아 학파의 연구 그리고 하부구조의 연구에 몰두하여 상부구조의 역동성에 소홀한 맑스주의 학파의 연구를 뛰어넘어, 스미스의 표현대로 부와 힘의 역동적 구조를 파헤친다.

그럼에도 과연 아리기가 차세대 헤게모니로 지목한 중국이 새로운 문명을 구현할 그러한 존재인가. 즉 서구적 가치, 자원소모적이고 비인적 자원에 의존하는 "비자연적인" 경제발전 경로를 극복할 친환경적이고 인적 자원에 의존하여 한층 평등한 분배를 실현할 그러한 세력인가. 아리기의 원래 관심인 종속론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세계 북측과 세계 남측의 구조적 불평등을 전복시키고 세계를 진정으로 "평평하게" 만들 세력인가. 아리기는 중국경제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으며, 서구 경로와 동아시아 경로의 혼합교배형의 더욱 평등하고 분배적인 경로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서구 경로와 동아시아 경로의 혼합 교배형을 새로운 경제발전의 대안으로 내놓고 이 개념으로 동아시아 경제의 비약적 성장을 설명하는 스가하라 카오루(杉原薫)는 대안적 경제의 구상이나 동아시아 경로에 대한 강조에서는 아리기와 뜻을 같이 하지만, 그 경로의 대표적 모델을 20세기 일본의 경제성장에서 찾지, 21세기 중국의 경제성장에서 찾지는 않는다.

3. 중국이 이끄는 국제질서

중국의 대국화와 가시화되는 가운데, 아직 완전히 현실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근미래에 중국이 이끄는 동아시아 지역질서 혹은 글로벌 질서는 어떠한 것일까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중국의 경제적 성장에 대한 호의적 평가와 달리, 중국이 이끄는 국제질서에 대해서는 호불호, 낙관과 비관이 상당히 갈린다.

먼저 중국 학계에서는 근년 중국의 전근대 조공질서를 재평가하고 이를 미래에 계승해야 할 국제질서로까지 높이 평가하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는 전인갑이 분석한, 1990년대 중반 이후 급속히 주류로 부상한 문화보수주의 담론의 한 지류이기도 하는데, 중국의 경우 역사적 평가와 역사학 연구가 늘 현재 중국사회의 아젠다를 추동하는 수단으로 동원된다는 면에서 중요하게 보지 않을 수 없다. 즉 역사적 실체로서 중국이 이끄는 조공체제라는 국제질서는 21세기에 중국이 동아시아와 세계에 주장할 국제질서의 한 자원으로 재발굴되고 있는 것이다. 전인갑은 중국의 역사공정으로 대표되는 역사학 연구는 역사학계만의 이슈가 아니라 중국사회 전반의 지식구조에 연동되어 이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사실 멀리는 공자의 『춘추』 저술에서, 가까이는 청말민초의 경세학(經世學), 양계초의 신사학(新史學)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사학은 현실과 미래 구상에 깊이 개입하는 전통을 가졌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의 주요 정치투쟁 역시 역사적 사실의 해석을 빌미로 벌어졌다. 전인갑은 대국 굴기를 준비하는 중국사회의 비전이 역사학 해석에 연동되고 있다고 지적하는데, 그러한 면에서 오늘날의 조공질서의 재평가는 대국 중국이 이끌 지역질서, 국제질서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27)

이러한 문화보수주의는 중국의 제국전통을 적극적으로 현대중국이 적극 수용하라 것을 주장하는데, 그 속에서 조공질서 역시 긍정적으로 표현된다. 그 대표적인 주장으로는 판 웨이(潘維)의 『당대중화체제(當代中華體制)』(2009)와 자오 팅양(趙汀陽)의 『천하체계(天下體系)』(2005), 간 양(甘陽)의 문명-국가론, 통삼통론(通三統論)을 들 수 있다.

판 웨이는 국민경제, 민본정치, 사직체제(社稷體制)로 구성되는 삼위일체모델인 당대중화체제를 주장하면서 중국전통의 중화적 천하관을 되살리자고 주장했고, 자오 팅양 역시 중화적 천하관의 복귀를 주장했다. 자오 팅양은 오늘날 유럽 근대민족국가가 확장된 제국주의의 논리를 극복하기 위하여, 중국의 전통적 천하관이 21세기 평화의 세계질서 원리로 유용하다며 그 복권을 주장했다. 그는 중화제국이 근본적으로 국가가 아니고 정치·문화적 제도이며 세계사회라고 설명하면서, "적을 벗으로 변화시키는"이론이며 남을 끌어들여 참여시키는 것이지 정복하는 논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보자면 전근대 조공체제는 대단히 관용적이고 자발적인 것이 되는데, 주변이 그 중국의 중심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천하관을 인정하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설명은 사라진다.

간양은 오늘날 중국이 계승해야할 전통을 세가지, 즉 유교전통, 마오 쩌둥 시기의 평등과 참여의 전통, 개혁개방 이후 형성된 시장경제에 대한 신념과 자유 추구로 규정하고 이 세 가지 전통 내지 문명을 통합하여 중화문명을 발전시키자고 주장했다. 나아가 20세기의 핵심과제는 민족국가 형성이지만, 21세기는 민족국가 논리를 넘어선 문명국가의 건설이 핵심이라고 제시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어떠한 문명국가를 건설할 것인가를 논할 때, 중국근대의 사상적 성과를 참고해야 한다면서, 양계초가 『신민설(新民說)』에서 주장한 "대중화문명국가"의 건설이 높게 평가되고 있는 점이다.(28) 사실 양계초는 더욱 솔직하게 유럽의 민족주의가 극성(極盛)하자 제국주의가 나왔고, 각국의 제국주의를 높게 평가하면서, 중국 역시 제국주의의 길로 어서 나아가야 된다고 주장했는데, 최근의 중국 학계는 양계초를 재발굴하여 인용하면서도 근대 민족국가와 제국주의 질서의 대안으로 조공체제를 논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왕 후이(汪暉) 같은 신좌파 역시 조공질서의 재평가에 합류한다. 그는 전근대 중국의 조공관계 속에는 상호인정과 상호존중의 평등관계가 포함되어 있으며, 현대국가가 제국주의 정치를 초월할 수 있는 문화적 자원이라고까지 평가했다.(29) 또 조공체제를 "규범적이고 정돈된 제도가 아니라 비교적 융통성 있는 연결모델"로 규정했다.(30)

이처럼 조공체제는 중화제국의 운영방식으로 중국 학자들을 중심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사실 이 점은 일부 해외 학자들이 먼저 선도적으로 제시했다. 그 선구가 된 것은 조공무역체제론을 제시하여 아시아의 주변 국가가 중국이 설정한 조공질서의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경제적 유인(誘因)을 강조한 바 있는 하마시타 다케시(濱下武志)의 연구였으나, 이를 더욱 확대 개발한 것은 주로 서구의 사회과학자들이었다. 앞서 살펴본 프랑크와 아리기 같은 중국에서 대안을 찾는 뉴레프트 그룹의 학자들은 중국에게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뿐 아니라 근대의 폭력적 제국질서의 극복까지도 희망한다. 특히 아리기는 중국이 영위해온 조공체제를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유럽의 국가간 질서와 달리 거의 400년간 평화를 유지한 질서로 높게 평가했다. 최근에는 이러한 이념적 지형과 별 관계없는 국제정치학자들도 조공체제를 재해석하기 시작했는데, 워맥(Brantly Womack)은 게임이론을 이용하여, 조공체제는 주변에 비해 우월적 지위에 있던 중국이 비대칭적 관계를 갖는 이웃국가들과 합리적 선택과 전략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만들어내고 유지한 합리적인 제도였다고 보았다.(31) 마틴 자크(Martin Jacques)는 중국을 국민국가 아닌 문명국가로 보는 입장에서 조공제도를 "문화적·도덕적 제도"로 보는데, 그의 주장은 앞서 중국학자들의 문명국가론, 천하관, 조공체제론과 가장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최근의 경향에 대해서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바로 한국 학계라고 할 수 있다. 한국 학계는 중국 학계나 서구 학계가 근대제국적 질서를 뛰어넘는 것으로서 전통 중국과 조공질서를 배치하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중국의 전근대적 제국전통, 제국적 성격이 오늘날 화려하고 부활하고 있다고 보고 이를 팽창주의적이고 위협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제국"을 키워드로 전통시대, 근현대 중국, 오늘날의 중국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국민국가적 시각만으로는 중국현대사의 의문을 다 해소할 수 없고 제국 개념을 활용해야 한다는 배경한의 주장이나, 오늘날 중국의 중화민족론이 가진 "제국성"을 지적한 유용태, "제국적 민국가" 이론으로 연속성의 시각에서 중국의 근현대사와 금일의 중국을 이해하려는 전인갑의 연구에서 잘 드러난다.

유용태는 중국의 지식인들이 개혁개방의 성공과 대국 지위의 회복에 따라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전망하면서 조공관계의 합리성과 평등성을 강조하는 것은 중국인의 제국경험을 당연시함으로써 자신의 제국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일방적인 제국의식의 표현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중국이 근대조약체제가 도입된 이후도 조공체제와 조약체제를 상대를 달리하여 구사하는 이중외교를 구사하였다고 지적했다. 청(淸)이 서구 열강을 제외하고는 일본과 대한제국 이외에는 국가로 승인한 적이 없었고, 중화민국 이후에도 이러한 의식은 이어져 장개석의 국민정부 역시 조공체제적 관점에서 태국과 외몽골을 줄곧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버티다가 2차대전 이후에야 승인한 점을 검토했다.(32) 아울러 한중수교 20주년을 기념하여 역사학자 배경한은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까라는 현실적 고민 속에서 20세기 전반기 한국의 망명정부와 중국의 관계를 검토하였다. 신해혁명기에는 신규식 등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지나치게 중국 의존적 태도와 사대주의적 태도를 보였으며, 중국은 이들 망명한인에 대해 전통적 중화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한 후에도 이러한 중화주의와 사대주의의 교차는 나타났으며,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해서 싸운다는 명분이 뚜렷했던 중일전쟁 기간에조차 국민정부는 임시정부에 위계적인 통제의 태도를 보였다. 특히 1944년 중반 이후에 국민당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를 외교적으로 승인해주는 방식으로 궁극적으로는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꾀하려 시도했는데, 이 시도는 미국의 견제로 실패했지만 중국의 이러한 움직임은 전후 한반도에 군사적·경제적 진출을 계획하는 큰 그림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33)

역사학계의 경계는 한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본과 미국학계에서도 나타난다. 오카모토 다카시(岡本隆司)는 근대 한청관계를 분석하여 구한말 청은 조선에 대하여 전통적 조공관계에 따른 속방(屬邦) 논리에서 한층 더 나아가 실질적 지배를 시도했음을 상세히 고증하였고,(34) 하버드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청사(新淸史) 연구는 유목민족인 청조의 제국적 질서는 전통적인 중화제국과는 상당히 이질적이었음을 밝혀 청의 판도를 그대로 오늘날 중화민족론에 복사하거나 조공체제론에 투사하려는 중국학계의 동향을 경계했다. 특히 커크 라센(Kirk Larsen)은 한말 청의 양무파의 조선에 대한 정책은 단순하나 종주권(宗主權)의 회복이 아니라 근대의 세례를 입고 진화한, 영국과 손을 잡은 "비공식적 제국주의"(Sino-British Informal imperialism)"였다고 진단하였다.(35)

맺음말

이처럼 한중수교 2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정치, 경제, 국제질서 각 영역에 따라 보는 중국을 평가하는 시선은 다양하고 학문별이나 국가별로 차이도 나타나지만, 크게 보자면 역사학계에서는 안팎으로 중국의 정치체제나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중국의 역할에 대해 견제하는 시선이 농후하다. 이에 비하여 한국 사회과학계에서는 상당히 복합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다.

중국연구로부터 오늘날 한국사회가 가야할 방향타를 모색하는 데 실마리를 모색하는 이남주의 입장에는 그러한 복잡성이 잘 드러난다. 그는 리영희를 대표로 하는 냉전시기 중국연구의 한 흐름인 비판적 전통이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와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크게 약화되었다고 진단한다. 한국에서의 중국에 대한 학문적 토론이 서구의 자유주의 담론으로 주도권이 넘어가서 경제적 시장화와 정치적 권위주의 사이의 불균형을 비판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고, 민주주의, 인권, 시장 등 개념이 중국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위한 무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이 서구 자본주의모델을 수용할 것이냐 아니냐의 질문 방식을 버리고 과거의 비판적 중국연구를 복원하자고 주장한다. 그는 물론 오늘날의 중국모델이 일본, 한국, 대만, 싱가포르에서 이미 나타났던 "동아시아 발전모델로 자본주의적 발전방식의 하위유형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도, "축적위기에 직면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돌파구를 제공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세계체제 위기의 신호를 제시된 것은 자원과 생태위기, 미국 지위의 불안정화와 주기적 금융불안 같은 현상인데, 이 현상들에 금일의 중국의 부상은 모두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36)

그렇지만 중국에 대한 평가는 흔들리기만 한다. 즉 바람직한 비판적 중국연구는 중국 내에서 서구 근대성의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지구화와 근대성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중국공산당에 대해서도 비판적 거리를 두어야 한다면서, "이중적 비판의 과제"를 제시하면서도, 결론적으로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적 거리가 내용이 무엇인지, 서구 근대성의 대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답변은 분명하지 않다. 다른 곳에서는 "중국의 부상이 세계경제에 심각한 불균형을 가져오고 자원과 환경의 제약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고 하여 중국의 부상이 세계체제 내지 세계자본주의의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는지, 아니면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애매하기만 하다.(37)

역사학계와 사회과학계의 중간에서 대화를 끊임없이 시도해 온 백영서는 한반도야말로 서구근대문명에 의해 변경화된 동아시아의 일국으로 식민지를 경험했다는 면에서도 주변이지만, 전근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질서에서도 변경화되었던 이중의 주변이라고 규정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위협론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중국 중심주의를 제대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시각,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적 시각으로 중국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이중적 주변의 시각"이라고 규정했다.(38) 그러나 궁극적으로 둘 다를 견제한다는 것이 현재 지점에서 필자가 중국에 대한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는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사실상 이남주나 백영서의 입장은 1960~70년대 새로운 모델로서의 중국의 길을 21세기에 비판적으로 복원할 가능성을 조심스레 제시하면서도 중국공산당의 지배 성격이나 개발의 생태파괴적·자본주의적 성격 때문에 선뜻 중국의 길에 지지를 표명하거나 낙관을 표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유예적인 입장은 중국의 지식인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1980년대에 중국이 큰 희생을 치른 오랜 사회주의의 실험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서구 자본주의국가에 확연이 뒤떨어지자, 청말처럼 "지구적"에서 빨간줄이 그일 것이라는 위기감이 등장했고, 그 당시는 개혁개방정책을 통해 전통을 극복하고 현대화로 나가는 선명한 주장을 내세울 수 있었다. 그 30년이 지난 뒤 실현가능성이 높을 것 같지 않았던 백년국치를 씻고 문명의 중심에 다시 설 수 있는 G2 시대가 오자 중화문명론이 등장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문명론은 사실상 청말 중체서용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중국의 독자성, 중용과 융합 강조는 이때 이후로 20세기 초와 개혁개방 이후의 중서문화논쟁까지 반복하여 등장했다.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백년국치 기간 동안 계속 반복되었던 논전에서 언제나 중국 특수성의 강조와 중용과 융합 강조는 체제강화를 꾀하는 보수적 논리로 작용했었다는 점이다. (*)

□ 필자 주석

(1) 中村哲은 중국이 개발독재형 중진자본주의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진단했다(中村哲 編 『東アジア專制國家と社會ㆍ經濟-比較史の視點から』(東京: 靑木書店 1993), 1~3면. 중국의 조합주의(組合主義)를 분석하여, 일본과 대만, 한국 등의 동아시아 각국의 권위주의식 경제개발방식을 따른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澳〕安戈ㆍ陳佩華 「中國, 組合主義及東亞模式」,『戰略與管理』, 第1期, 總44期 (2001), 52~56면). 필자는 대체로 開發獨裁論의 주장에 동의한 바 있다.

(2) 발표자의 연구 가운데 이 주제와 관련된 논문은 다음과 같다. 「중국의 체제개혁과 대외개방: 근대화의 역사성」, 정재호 편 『중국개혁-개방의 정치경제 1980~2000』, 까치글방 2002; 「16~19세기 중국경제와 세계체제-"19세기 분기론"과 "중국중심론"」, 『이화사학연구』 31호, 2004; 「대담: 중국 시민사회의 인문학적 전망과 동아시아」, 조효제·박은홍 엮음 『한국, 아시아 시민사회를 말하다』, 아르케 2005; 「16~19세기 동아시아무역권의 세계사적 변용-따라잡기형 발전모델의 모색」, 『동아시아의 지역질서』, 창비 2005; 「제국주의시대와 동아시아의 경제적 근대화-식민지근대화론의 재고와 전망」, 『역사학보』 194호, 2007; 「동아시아로 다시 쓴 세계사-포머란츠와 캘리포니아학파」, 『역사비평』 82호, 2008; 「세계체계와 국민국가의 회색지대-동아시아론의 성과와 한계」, 『인문연구』 57호, 2009; 「역자 후기」, 지오반니 아리기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강진아 옮김, 길 2009; 「중국의 부상과 세계사의 재조명-캘리포니아 학파에서 글로벌 헤게모니론까지」, 『역사와 경계』 80호, 2011 등 참조.

(3) 橫山宏章 『중화민국사』, 박종현 옮김, 신서원 2000, 6~8면, 19~21면, 284면.

(4) 奧村哲 『中国の資本主義と社会主義ー近現代史像の再構成』, 桜井書店 2004, 5면.

(5) 奧村哲 『中国の現代史ー戦争と社会主義』, 青木書店 1999, 194~96면.

(6) 奧村哲 『中国の資本主義と社会主義ー近現代史像の再構成』, 桜井書店 2004, 391면.

(7) 奧村哲 『中国の現代史ー戦争と社会主義』, 青木書店 1999, 197면, 203~204면.

(8) 이남주 「중국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한중수교 20주년을 맞이하여」, 『창작과비평』 2012년 가을호 182면, 각주 4번.

(9) Loren Brandt, "Reflections on China's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ry Economy," The China Quarterly, No. 150 (June 1997), 303-305면.

(10) 久保亨 『中國經濟100年のあゆみー統計資料で見る中國近現代經濟史ー』(福岡: 創硏出版 1991), 121~22면.

(11) Gale Stokes, "The Fates of Human Societies: A Review of Recent Macrohistories,"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106.2 (2001), 508∼509면.

(12)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이상훈 옮김, 한마음사 1997). 원문은 Francis Fukuyama,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New York: Free Press 1992).

(13) 후쿠야마의 등장과 헤겔의 부활에 관해서는 이동희 「헤겔 역사철학에 있어 '동양적 전제주의'의 문제」, 󰡔헤겔연구󰡕 28호(2010), 60면 참조.

(14) 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김진준 옮김, 문학사상 2005), 35면.

(15) David S. Landes, The Wealth and Poverty of Nations: Why Some Are So Rich and Some So Poor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1999), 513면.

(16) Eric Jones, The European Miracle: Environments, Economics and Geopolitics in the History of Europe and Asia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17) '캘리포니아 학파'라는 이름은 현재 유럽 중심주의적 역사해석에 대해 경제사의 측면에서 반론을 가하고 있는 일단의 그룹을 가리켜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명명한 것이다. Patrick Manning, "Introduction," AHR Forum: Asia and Europe in the World Economy, American Historical Review Vol. 107-2, April 2002. 이들을 캘리포니아 학파라고 부르는 이유는 대체로 참여 학자들의 근무지가 캘리포니아대학 계열에 있기 때문이다. 이 그룹의 주도적인 인물인 포머란츠(K. Pomeranz)는 캘리포니아대학 얼바인(UC. Irvine) 사학과 교수이고, 인구사 연구자 왕 펑(Wang Feng)은 같은 대학 사회학과 교수이다. 또다른 주요 논자인 웡(R. Bin Wong)은 얼바인 사학과에서 UCLA 아시아연구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들 외에 제임스 리(James Z. Lee), 왕 펑(Wang Feng), 프랑크(A. G. Frank), 잭 골드스톤(Jack A. Goldstone), 리처드 폰 글란(Richard von Glahn) 등이 있는데 현재는 자리를 옮긴 학자도 적지 않지만 본격적인 활동 당시 대부분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연구를 했다.

(18) 국내에도 다양한 연구 성과가 존재한다. 강성호 「유럽중심주의 세계사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을 넘어」, 󰡔역사학연구󰡕 39호(2010); 강성호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를 말한다」,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푸른역사 2009); 강성호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유럽에서 시작되었나?」, 󰡔서양사론󰡕 90호(2006); 조지형·강선주 외 󰡔지구화시대의 새로운 세계사󰡕(혜안 2008); 박섭 「서평: 안드레 군더 프랑크 󰡔리오리엔트󰡕」, 󰡔역사와 경계󰡕 53호(부산 2004); 김택연 「홉스봄 다시 읽기: 그의 역사관에 대한 몇가지 비판」, 󰡔서양사론󰡕 186호(2003); 강진아 「동아시아로 다시 쓴 세계사󰠏포머란츠와 캘리포니아학파」, 󰡔역사비평󰡕 82호(2008); 강진아 「16~19세기 중국경제와 세계체제―"19세기 분기론"과 "중국중심론"」, 󰡔이화사학연구󰡕 31호(2004); 강진아 「세계체계와 국민국가의 회색지대―동아시아론의 성과와 한계」, 󰡔인문연구󰡕 57호(대구 2009); 박희 「세계경제의 위기와 동아시아의 부상―危와 機의 동학」, 󰡔담론201󰡕 41호(2011) 등을 참조. 이외 더 많은 성과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필자의 식견이 좁은 탓이다.

(19) 캘리포니아 학파에 관한 논의는 강진아 「동아시아로 다시 쓴 세계사―포머란츠와 캘리포니아 학파」 및 「16~19세기 중국경제와 세계체제―"19세기 분기론"과 "중국중심론"」참조.

(20) R. Bin Wong, China Transformed: Historical Change and the Limits of European Experience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97), 31∼32면, 42면.

(21) 毛澤東 「中國革命和中國共産黨」, 󰡔毛澤東選集󰡕 第2卷(北京: 人民出版社 1991), 626면.

(22) 대표적 저서로 傅衣凌 󰡔明淸時代商人及商人資本󰡕(北京: 人民出版社 1956); 傅衣凌 󰡔明代江南市民經濟試探󰡕(北京: 人民出版社 1957); 吳承明 󰡔中國資本主義與國內市場󰡕(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85); 李文治 等著 󰡔明淸時代的農業資本主義萌芽問題󰡕(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83) 등이 있다.

(23) Andre Gunder Frank, ReOrient: global economy in the Asian Ag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한국어본 󰡔리오리엔트󰡕, 이희재 옮김, 이산 2003) 프랭크의 저작에 대한 소개로는 예를 들어 강성호 「'전지구적' 세계체제로 본 세계사와 동아시아사―안드레 군더 프랑크」, 󰡔역사비평󰡕 82호, 2008이 잘 정리하고 있고 여러편의 서평도 나와 있다( 박섭 「󰡔리오리엔트󰡕 서평」, 󰡔역사와 경계󰡕 53호, 2004; 최갑수 「유럽중심주의를 넘어 다시 동양으로: 󰡔리오리엔트󰡕」, 󰡔서평문화󰡕 50호, 2003; 박홍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리오리엔트󰡕」, 󰡔황해문화󰡕 39호, 2003 등) 참조.

(24)Giovanni Arrighi, Adam Smith in Beijing, Lineages of the Twenty-First Century, Verso Press, N.Y., 2007(한국어본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강진아 옮김, 길 2009).

(25)Giovanni Arrighi, Adam Smith in Beijing, Lineages of the Twenty-First Century, 1~3면, 5면.

(26) 같은 책 Introduction 및 Epilogue 참조. 특히 386면을 보라.

(27) 전인갑 「현대 중국의 지식구조 변동과 '역사공정'」, 『역사비평』 82호, 2008.

(28) 甘陽 「从民族-国家走向文明-国家」, 『文明国家大学』, 北京: 三聯書店 2012(백영서 「중화제국론의 동아시아적 의미: 비판적 중국연구의 모색」, 제33차 중국학 국제학술대회 '제국전통과 대국화' 기조발표문, 2012.8.22, 서울대 사범대학, 재인용); 이남주, 앞의 글 183~84면, 190면; 유용태 「중국의 지연된 근대외교와 한중관계―동아시아 지역사의 시각」, 『한중인문학연구』 37호, 2012, 27면.

(29) 유용태, 앞의 글.

(30) 왕후이 『아시아는 세계다』, 글항아리 2012, 299면, 312~13면(백영서, 앞의 기조발표문, 재인용).

(31) Brantly Womack, "Asymmetry and China's Tributary System," The Chinese Journal of International Politics, Vol. 5, 2012(백영서, 앞의 기조발표문, 재인용).

(32) 유용태, 앞의 글.

(33) 배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화민국의 외교관계(1911-1945)」, 『중국근현대사연구』 56호, 2012.

(34) 오카모토 다카시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강진아 옮김, 소와당 2009.

(35) Kirk Wayne Larsen, "From Suzerainity to Commerce: Sino-Korean Economic And Business Relations during the Open Port Period 1876-1910", June, Harvard University, Ph. D dissertation, 2000 (Kirk W.Larsen, Tradition, Treaties and Trade, Qing Imperialism and Chosǒn Korea 1850-1910,Cambridge (Massachusetts) and Londo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8로 출판)

(36) 이남주, 앞의 글 183~84면, 188~89면.

(37) 이남주, 같은 글 191면, 196면.

(38) 백영서 「중국학의 궤적과 비판적 중국연구―한국의 사례」, 『대동문화연구』 80호, 2012, 568면, 59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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