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이 지난 6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아이쿱 협동조합 지원센터'에서 연중 조합원 교육을 시작했다. (☞ )
'협동조합, 사회를 바꾸는 새로운 힘'이라는 주제로 열린 첫 강연에서는 김성훈 프레시안 고문(전 농림부 장관)이 "협동조합의 원형은 우리 조상들의 생활과 전통에 있었다"는 주제로 2시간가량 열띤 강의를 했다.
김성훈 고문은 "상부상조 정신에 기틀을 둔 계, 두레, 향약, 품앗이 등이야말로 협동조합의 원형"이라며 "조선왕조가 혼란 속에서도 500년이나 유지된 비결 또한 이들 자치 제도들에 있다"고 말했다.
김 고문은 협동조합 정신을 "소농, 소비자, 노동자 등 약자들이 서로 도와서 경영의 효율성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전통에서 비롯한 '협동 정신'은 근대가 되면서 탄압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김 고문은 "일제 강점기에는 협동조합 운동이 독립운동으로 탄압받고, 6. 25 때도 협동조합 정신은 공산주의라고 여겨졌다"며 "힘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큰 경영의 이점을 도모하자는 협동조합 정신이 요즘 말로 '종북 좌빨'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오해와는 달리 협동조합은 사실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며 "자본주의 체제가 (많은 모순을 안고도) 존속할 수 있던 큰 동력 중에 하나가 바로 협동조합의 보장이었으며, 금융 자본의 돈놀이 싸움에 대응하는 것이 바로 협동조합"이라고 설명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농림부 장관을 지냈던 김 고문은 1999년 '생협법(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이 시행되기까지의 뒷이야기도 풀어놓았다. 농림부 장관 시절 그는 IMF 경제 위기를 극복할 대안으로 협동조합을 제시했지만, 재계와 경제부처의 반대 끝에 "살 빼고 기름 빼고 뼈만 남겨진" 생협법이 통과됐다는 것이다.
특유의 입담으로 청중을 사로잡은 김 고문은 "협동조합 중에 제일 힘들고 가보지 않은 협동조합이 언론 협동조합이다. 박인규 이사장이 겁도 없이 시작했다"면서도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도 애정 어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평생 농민과 함께하며 협동조합 운동에 힘썼던 김성훈 고문은 1998년 농림부 장관직에 오르자마자 생협법 제정을 이끌었다. 2004년 경실련 공동 대표를 역임하고, 2008년부터 프레시안 고문을 맡고 있다.
다음은 김 고문의 강의를 요약한 내용이다. <편집자>
협동조합의 원형이 바로 우리 조상들의 생활과 전통 속에 있었다고 강조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개인적으로 제 일생이 협동조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었기에 사적인 이야기도 끼워 넣겠습니다.
여러분 중종 때 개혁가 조광조 씨 들어보셨죠? (연산군을 몰아내고) 쿠데타에 성공해 정권을 잡은 대신들이 지방의 토착 세력과 연줄을 맺었어요. 지방에서는 토호 세력들이 가렴주구로 백성을 등쳐먹고, 중앙에서는 대신들이 토착 세력들이 가져온 걸 쌓아놓아 곳간이 넘치고, 나라 곳간은 비어서 나라의 힘은 약해졌어요. 그때 개혁가 조광조가 내놓은 대안이 '대동계'였어요. 조광조는 평민과 농민들이 우선 단결해서 권력의 상징인 토호 세력과 중앙의 수구 대신들에 대항하자고 주장합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서민, 노동자, 농민, 중소상공인이 단결해서 권력의 상징과 붙자는 뜻이죠.
이것을 이론적으로 완성한 사람이 두 명 있습니다. 그중 하나인 성호 이익은 경제적 측면을 강조했고, 그의 정신은 '향약'으로 나타납니다. 향약(鄕約)이란 한 고향을 약속으로 모으자는 뜻입니다. 퇴계 이황은 반상의 질서를 제대로 잡자는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이 두 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이 조선 후기 실학자인 유형원입니다. 그가 쓴 <반계수록>에 '향약' 이론이 나옵니다.
이러한 이론이 실제 구체화된 것이 동네에서 내려온 두레, 계, 품앗이입니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있죠. 두레, 계, 품앗이가 바로 협동입니다. 공동으로 논을 갈고 모를 심고 김도 매고 벼도 베고 타작합니다. 또 누가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어이야, 어이야' 구령하고 장지에 가서 묻어주는 것도 다 두레 형태죠. 마을은 생활, 경제, 위계 문제, 범죄에 대한 자치제를 유지했는데, 이게 바로 대동계예요.
당파 싸움으로 나라가 쉴 날이 없어도 조선왕조 500년이 유지된 비결이 바로 대동계, 두레, 계, 향약이에요. 마을은 자체적으로 이러한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왕이 외척에 휘둘리고, 당파 싸움으로 상대방을 죽이고 중앙이 개판이 되어도, '상부상조'의 정신의 기틀을 둔 대동계, 두레, 향약이 있었기에 조선이 500년 동안 버틸 수 있었죠. 이게 바로 오늘날 각종 협동조합의 원형입니다.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의 산물"
그런데 협동조합에 대한 오해가 많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협동조합 운동하면 '독립운동'한다고 탄압했어요. 독립운동한다고 탄압하기에는 명분이 좀 그러니까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했어요. 6. 25 때도 협동조합 정신은 '공산주의, 빨갱이'라고 했어요. 주로 힘없는 소농들이, 나약한 사람들이 모여서 큰 경영의 이점을 도모하자는 정신은 요즘 말로 '종북 좌빨'이 되는 거예요. 카를 마르크스의 책을 아무리 뒤져봐도 협동조합이 빨갱이라는 말은 없는데 말이죠. 그런데 하필이면 북한의 농장 이름이 뭐죠? 천리마 협동농장이에요. (좌중 웃음)
제가 미국에서 5년 공부했습니다. 알고 보면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의 산물이에요. 자본주의가 오늘날 인간이 개발한, 그나마 가장 나은 경제 체제로 존속할 수 있던 비결 중에 하나가 바로 협동조합의 허용이에요. 기업 독과점 금지법 등으로 자본주의 자체의 병폐를 제어하고 사전에 막는 장치를 강구한 것이 그나마 자본주의 체제가 존속되는 큰 동력이 된 거예요.
경쟁에서는 효율성 높은 놈이 이기게 돼 있는데, 효율성이 높으려면 규모를 키움으로써 단가를 낮춰야 합니다. 단가가 비싼 쪽은 망합니다. 노동자, 농민, 작은 기업이 모여서 협동조합을 통해 대기업의 이점을 취해서 단가를 낮춰야 경쟁에서도 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진짜 자본주의 나라일수록 협동조합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금융 자본주의가 경제를 하루아침에 삼킬 만큼 불안정한 세태에서는, 금융 자본의 돈놀이 싸움에 대응하는 게 협동조합이에요. 미국에서 자본주의가 제대로 굴러가게 하려고 독과점을 규제하고, 공정 거래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어요. 진짜 자본의 논리로 본다면, 오히려 승자 독식 횡포를 막아줄 장치가 바로 '규제'란 거예요.
최근에 와서 협동조합은 크게 각광받았어요. 2008년 세계 공황이 발생했을 때, 끄떡없이 버티고 평온하게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이 있던 곳이 바로 협동조합 경제가 생활의 주축이 된 곳이었습니다. 유럽에 경제 불황이 찾아왔을 때 그와 관계없이 협동조합 도시 몬드라곤 사람들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었어요. UN은 협동조합의 마력에 관심을 두고, 2012년을 세계 협동조합의 해로 지정하게 됐습니다.
우리나라에도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이 발효된 것은 한국 자본주의 사회와 정치경제 체제에서 하나의 큰 변혁이에요.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협동조합 만들기가 그렇게 힘들었어요.
'생협법'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사실 1999년 제정된 생협법(소비자협동조합법)의 가장 큰 수혜자가 저이기도 한데, 그 법이 처음에는 대자본과 그와 유착한 학자들에게 방해를 받았어요. 특히 슈퍼마켓과 슈퍼 체인의 반대를 받아서 20년 동안 법안이 썩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국민의 정부 들어서 제가 초대 농림부 장관이 됐어요.
1998년 3월 3일 임명장을 받고, 이틀 후인 3월 5일에 국무회의가 열렸어요. 현황도 파악 못 하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총리가 아니라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직접 주재했어요. (대통령이) "오늘은 안건을 준비 못 했고, 여러분도 업무 파악을 못 했을 테니, 자유로운 의견을 개진해달라"면서 "IMF 위기를 빨리 극복하고 물가를 안정시킬 방안이 있으면, 소관 부처 책임과 관계없이 이야기하라"고 했어요. 제 차례가 왔는데, 제 가슴 속에 20년간 쌓였던 좌절된 울분, 비원이 솟구쳐 올라왔어요. 그래서 "선진국, 중진국, 개발도상국에도 생산자 협동조합뿐 아니라 소비자 협동조합이 있는데, 대한민국은 건국 60년이 넘어도 아직도 소비자 협동조합, 생협이 없는 유일한 중진국입니다"라고 얘기했어요.
생협이 되면 뭐가 좋으냐고 해서 "지난 20여 년간 각종 생협이 존재합니다만, 법률적 뒷받침을 못 받는 임의 조직이다 보니 일반 구멍가게보다 차별받고 대우를 못 받아서 자생력을 잃고 있습니다. 생협이 법적으로 뒷받침되면, 전국의 소비자들이 안전한 농산물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직접 조달할 수 있고, 생산자 농민에게도 판로가 확보됩니다. 물자가 부족할 때 가격이 폭등하지 않고 가격이 폭락했을 때 농민들이 피해를 안 보니, 물가 안정에 크게 기여할 것을 확신합니다"라고 답했어요.
대통령이 "어느 부 소관"이냐고 물어서 재경경제부 장관이 "저희 부 소관입니다"라고 했어요. 그러면 왜 생협법이 안 됐느냐고 했는데, 재경부 장관이 답변을 안 하시데요? 그래서 제가 장관 된 지 2일밖에 안 됐고 농민 운동하던 가락이 남아서 그대로 말했죠. "슈퍼마켓 체인 협회가 최고 권력층과 가까워서, 법조문까지 제출했는데 안 되고 있습니다."
아까 제가 '내 마음속에 일어난 울분'이라고 말했는데, 전에 경실련(소비자 대표)하고 전농회 등이 모여 생협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생협이 법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임의 단체'이다 보니 한계가 많았어요. 결론부터 말하면 1년 반 제가 이사장 했는데, 적자가 2억 원이 넘었고, 제 소중한 돈 꼬라박고 파산 직전까지 됐어요. 안 그래도 '(생협에 농산물을 제공하는) 농민분들을 어떻게 대하나' 하는 생각에 죽겠는 판인데, 참 질문 잘해주셨죠. 그래서 생협법 이야기가 그냥 튀어나온 것입니다. 이건 준비된 답변이 아니라, 원한이 서린 답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통과했거든요?
그런데 얼마 뒤에 재경부 담당 유통 국장이라는 사람이 저를 찾아왔어요. "유통 체인이 반대해서 안 되는 걸 뻔히 알면서, 왜 그걸 국무회의 때 제기해서 우리를 이렇게 못 살게 하십니까?"라고 저한테 항의했습니다. 제가 하도 화가 나서 나가라고 하면서 "자네 직급이 뭔가? 우리 부서 담당 국장을 자네 부서 장관한테 보내서 답변하겠네"라고 했어요. 그 말에 그 국장이라는 사람 얼굴이 하얘지데요.
그 사건이 벌어진 직후인데, 대통령께서 한 달 뒤에 "국무회의에서 얘기한 생협법이 어떻게 됐느냐"고 물어보니 재경부 장관이 "아직 검토 중"이라고 답변했어요. 제가 갑자기 발언권도 없이 벌떡 튀어나와서 말했어요. "저렇게 20년째 검토만 하고 있습니다." (좌중 웃음) 저는 틀림없이 그 장관이 "어떻게 무엄하게 예의도 안 갖추고 말하느냐"고 항의할 거라고 기대했어요. 그러면 제가 "그러니 귀 장관이 아랫사람을 보내서 나에게 항의하느냐"고 까불라고 작정한 거예요. 그런데 제 말이 끝나니 갑자기 국무위원들이 막 웃었죠. 웃음소리가 그쳐요. 왜 그런가 보니 대통령 안색이 하얘졌어요. '아, 이거 큰일 났구나. 내가 손도 안 들고, 발언권도 없이, 시종 잡배나 다름없이 대한민국 국무회의에서 말하다니.' 역시 운동권 출신은 (장관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실 것도 같고. 저도 당황했죠. 다들 침묵하는데 그 장관이 벌떡 일어서더니 "즉시 시행토록 준비하겠습니다."라는 거예요. 그분이 그 전 정권에서도 장관 했거든. 역시 장관은 두 번 해야… (정치 감각이 생긴다). (좌중 웃음) 그러자 대통령 안색도 풀어지고, 국무위원 안색도 풀어지고. 그렇게 1년 동안 법조문을 검토하고 관계 부처와 협의하고 법사위를 통과해서 생협법이 만들어졌거든요?
그런데 막판에 가서 브레이크가 걸렸어요. 당시 IMF 위기를 타개할 목적으로 총리실에 '규제개혁위원회'가 있었어요. 새 법률을 제·개정할 때마다 규제개혁위원회를 통과해요. 당연히 통과 의례일 줄 알았는데, 거기서 브레이크가 걸리는 거예요. "중앙 정부가 협동조합을 지원할 수 있다는 말도 지워라, 전국 생협이 중앙연합회를 만든다는 조항도 지워라, 친환경 제품을 판매한다는 걸 빼라, 공산품 빼고 친환경 농산물만 판매한다고 해라." 등등. 살 빼고 기름 빼고 다 빼고 뼈다귀만 남겨 놓은 거예요. 그 위원회에 모 교수가 "우리 유통업계를 짓밟으려는 이런 엉터리 법률을 운동권 장관이 하자고 했다면서?"라면서 완전히 살을 다 발라놔 부렀어요. 기름도 빼고 피도 다 빼불고.
"프레시안, 어려운 길 택했다"
협동조합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지원해야 할 건데, 지원하지 않아도 좋으니 방해만 안 했으면 좋겠어요. 독재 정권의 속성이란 게 -현재 정권이 독재 정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른말 하는 사람들을 싫어하거든요. 어렸을 때 동네에 똑똑한 사람이 꼭 있어요. '아저씨 이러면 안 되지 않아요?' 따지는 사람더러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말 많은 놈, 빨갱이'라고 했어요. 요즘은 까딱하면 '종북 좌파'라고 해요.
협동조합 중에 제일 힘들고 가보지 않은 협동조합이 언론 협동조합입니다. 박인규 이사장이 겁도 없이 시작했어요. 사실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나에게 만나자고 한 게 작년 1월이었어요. 주식회사에서 협동조합으로 바꿔보려고 한다기에 "그러면 나도 마누라 몰래 몇 년간 꽁쳐놓은 돈이 조금 있거든? 나도 출자하겠다"고 했어요. (좌중 웃음) 협동조합은 서로 약자끼리, 어려운 사람끼리 서로 도와야 합니다. 여하튼 조상들의 핏속으로부터 전해진 협동과 상부상조의 DNA가 여러분께 남아 있다고 감히 말씀드리면서 강의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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