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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왜 '쓰레기통'이라는 조롱을 당해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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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왜 '쓰레기통'이라는 조롱을 당해야 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9> 해방과 분단, 열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해방과 분단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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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이승만 정권 때 부정 선거 등의 문제가 일부 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심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나온다.

서중석 : 이승만처럼 자유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우선 자유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사람을 중심으로 자유주의를 꽃피우지 않나.

(그런데) 자유주의가 민주주의 제도와 꼭 관련이 있는 건 아니다. 경제적 자유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명확히 구별해야 하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뉴라이트라든가 수구 세력은 이걸 같은 걸로 막 몰아붙이고 있다. 애덤 스미스 이래 경제적 자유주의라는 게 유럽 경제 사상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건 레세 페르(laissez faire, 자유방임주의)를 통한 자유로운 무역 같은 걸 가리키는 것이지,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 제도와는 상관이 없다.

프레시안 : 자유민주주의 개념과 보통 선거의 역사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서중석 : 유럽 정치사 등을 서술한 여러 책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잘 설명하고 있다. 한국 정치학자들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설명하고 있다. 이건 공화주의하고도 차이가 나는 주장이다. 사실은 프랑스에서조차 대혁명 때는 말할 것도 없고 19세기에도 민주주의라는 말이 그렇게 각광받은 게 아니다. 19세기까지 프랑스에서 주된 싸움은 왕당파 대 공화파의 싸움이었다. 왕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시민이 지배하는 사회, 이게 공화주의 아닌가. 자유민주주의는 공화주의하고도 상당히 다르다. 이 부분을 또 중요하게 알아야 한다.

여러 사상사 책에 쓰여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프랑스대혁명 때나 19세기에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저 주장이 뭐냐', 이런 이야기도 나오고 그랬다. 영국에서도 '노동자나 농민이 어떻게 우리 부르주아하고 똑같은 권리를 행사한다는 말이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노동 운동이 아주 치열해지면서 상황이 바뀐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올 때에는 사회주의 혁명이 가시적이 되고, 그러다가 (1910년대에)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나타나고 헝가리에서도 한때 사회주의 혁명 정부가 들어서지 않나. 독일에서도 로자 룩셈부르크라든가 칼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좌파 사회주의 세력이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 (부르주아로선) 무서운 상황을 보게 된 거다. 이 모든 것과 관련해 부르주아 세력이 대타협을 하는 것 아닌가. '노동자와 농민의 정치적 자유를 인정한다', '노동 운동의 자유를 인정한다', 다시 말해 폭력 혁명을 주장하지 않는 한 정치적 자유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건 뭘 얘기하느냐 하면 기본적 자유를 준다는 것과 함께 보통 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주장이다. 혁명을 막기 위해선 1인 1표(에 동의하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부르주아들이 본 것이었다. 지역 차별, 인종 차별, 남녀 차별 같은 것 없이 일정한 연령 이상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한 표씩 준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 보통 선거가 널리 실시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서중석 : 보통 선거를 실시한 나라가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뉴질랜드를 시발로 호주, 핀란드, 노르웨이 등이 실시했고 그에 이어 시행한) 영국과 독일 등 몇 군데밖에 없었다. 프랑스조차 남자만의 보통 선거는 2월혁명이 일어난 1848년에 있었지만 여성은 참여하지 못했다. 1944년 드골이 파리에 입성하고 난 후 최초로 자유민주주의 선거인 보통 선거가 실시됐다. 일본도 1945년에 가서야 실시했고 이탈리아도 그 무렵에 가서야 한다.

한국이 1948년 5.10선거에서 최초의 보통 선거를 치렀다는 것은 늦은 게 결코 아니었다. 난 '(5.10선거가) 분단을 초래한 점에선 참 (마음을) 무겁(게 하)지만 그럼에도 (최초의 보통 선거라는 점에서) 그것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긍지를 가질 만한 것이다', 이런 점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를 심었나? 이건 (진실과) 너무 거리가 먼 얘기 아니겠는가. 자유민주주의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활동을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승만이나 박정희나 전두환이나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쓰니까 마치 (이들이) 자유민주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하면서 역사 논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선 보통 선거가 중요한데, 그 보통 선거조차 이승만 정부 같은 데에서 제대로 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보통 선거 법안 문제에서도 이것(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가 거리가 멀다는 점)은 잘 드러난다.

▲ 이승만 정권 때 치러진 여러 선거는 불법과 부정으로 얼룩졌다. 사진은 1948년 5.10선거 모습. ⓒ국가기록원

'쓰레기통' 조롱 자초한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 화신?

프레시안 : 구체적으로 어떠했나.

서중석 : 이승만 측, 한민당 측은 (1947년) 보통 선거 법안을 통과시킬 때 '선거권자는 25세 이상, 피선거권자는 30세 이상이어야 한다', 이런 걸 강하게 주장했다. (유권자의) 나이가 많을수록 자기들한테 유리하다고 보고 그렇게 높이려 한 건데, 이건 보통 선거의 취지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이때 과연 정치적 자유가 있었는가 하는 것도 논란이긴 하지만, 하여튼 (이승만 측과 한민당 측의 주장이) 보통 선거 취지에 맞느냐(를 따져봐야 한다). 김규식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이 사표를 내면서 강경하게 싸웠다. 그래서 23세로 선거권자의 연령을 낮추긴 했다. (이때 피선거권자는 25세 이상으로 결정됐다. 보통 선거 문제는 친일파 처리 문제와 함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이었다. <편집자>) 미국도 이것('선거권자 25세 이상, 피선거권자 30세 이상' 주장)은 과하다고 봤다. 미군정에서도 '이건 연령이 너무 높다'고 하다가 나중엔 인준을 하긴 했다.

그런데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와서 구체적으로 선거를 집행해야 할 상황에 접어들면서 (선거권) 21세, (피선거권) 25세로 조정했다. 20세도 생각했던 것 같긴 한데, (최종적으로는) 그렇게 조정했다. 그런데도 이승만 측과 한민당 측이 집요하게 (선거권) 23세, (피선거권) 25세를 주장한 적이 있었다. 이런 정치적 자유를 떠나, 노동 운동의 자유가 한국에서 언제 보장됐나? (그 이전에) 선거 하나도 제대로 한 적이 얼마나 있었느냐, 이걸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0년) 3.15 부정 선거로 쫓겨난 사람 아닌가. 3.15선거는 그만큼 노하우가 쌓여 이뤄진 거다.

프레시안 : 어떤 노하우를 말하는 건가.

서중석 : 최초의 (대통령) 직선제 선거였던 1952년 8.5 정부통령 선거에서 (다수의) 국민이 잘 알지도 못했던 함태영이라는 사람이 부통령에 당선된다. 이것 자체가 이 선거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선거였다는 걸 단적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2년 후(1954년)에 치른 5.20 총선, 이건 (경찰의 곤봉이 당락을 결정했다고 하여) '곤봉 선거', '경찰 선거'라고 했다. 수많은 입후보자와 선거 운동원들이 두들겨 맞았다. 조봉암도 세 군데에서나 입후보하려 했지만 (방해가 워낙 심해) 끝내 입후보를 못했다. (조봉암이 피해 대중론과 평화 통일론으로 바람을 일으킨)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는 또 어떤 식으로 치러졌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조봉암이 선거 막바지에 몸을 피해야 할 정도로 야당에 대한 테러와 선거 방해가 심했다. <편집자>) 1958년 5.2 총선, 이건 투·개표 부정이 무지무지하게 일어난 선거였다.

이런 것들이 쌓여 3.15 부정 선거가 탄생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자유민주주의 정권이다? 이건 정말 (진실과)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다. 박정희 정권 때도 선거가 얼마나 공정했느냐 하는 얘기가 나온다. 무엇보다도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정권이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와 더불어 1972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 체제를 만들어 대통령 직선제를 없애지 않았나.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한 유신 체제에서 치른) 총선도 보통 선거 취지에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너무 뻔한 얘기지 않나.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을 조롱한 외신 보도가 오랫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서중석 : 당시 외국에선 이승만 정권에 대해 '경찰 통치를 하고 있다. 경찰 국가다'(라는 비판을 했다.) 특히 빨갱이몰이 같은 것이 많은 비판을 받고 그랬다. 영국 언론에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길 기다리는 것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을 기다리는 게 낫다'는 보도가 나와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이야기되고 하지 않았나.

(이렇듯) 자유민주주의와 이승만·박정희의 관계를 명확하게 인식해야 하는데 한국인 중엔 (이 문제와 관련해) 불분명한 사람이 많다. 교사 등에게 강연할 때도 많이 물어봤는데,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딱 부러지게 설명하는 분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자유민주주의가 민주주의 발전 도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자유민주주의가 뭘 가리키는가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서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가 어떻게 했는가를 알면 자유민주주의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김구는 왜 이승만과 오랫동안 손잡았나

프레시안 : 다른 사안을 짚었으면 한다.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 문제다. '해방 이후 김구' 하면 1948년 남북 협상을 하며 이승만과 대립각을 세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승만과 오랫동안 협력한 것도 충분히 살펴야 김구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이승만과 손잡은 것이 분단을 막을 길을 매우 좁게 만든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서중석 : 김구는 이승만과 숙명적인 관계에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한다. 한국독립당(한독당) 내부에서도 해방 3년기에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에 대해 상당히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한독당 간부들이 이승만을 보통 혹독하게 비판한 게 아니다. 조완구 같은 사람들이 특히 그랬다. 그런데 김구가 이승만과 긴 이야기를 하고 나오면, 자기들 생각하고 다른 게 나오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 당시 '이승만이 참 노회한 사람인데, 그 노회한 책략에 김구가 많이 당한 것 아니냐', 이런 얘기도 없지 않아 있었다.

김구가 이승만과 상당히 오랫동안 협력한 제일 큰 이유는 반탁 우익이 대단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구는 명분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 사람인데, (이 시기에는) 이 점을 굉장히 중시했다. 김구 비서였던 장준하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직후 쓴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김구의 반탁 운동은 단정 운동 세력한테 이용당한 측면이 있다. 단정 운동 세력은 처음부터 반탁 운동 정신에 맞춰서 한 게 아니라 단정으로 가려고 반탁 운동을 한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장준하가 (단정 운동 세력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울러, (1945년) 귀국한 직후 (김구가) 이승만을 만났을 때 좌익 세력, 인민공화국 세력이 굉장히 셌다는 것이 김구가 (이승만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데 역할을 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프레시안 : 김구는 1948년 초 이승만과 결별한다. 그러면서 이승만의 권력 기반이던 친일파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다른 모습을 보인다.

서중석 : 친일파 처리 문제와 관련해, 김구가 (1945년) 11월 23일 귀국 직후 이승만과 만나서 장시간 얘기를 하는데 그때 이승만이 '친일파 처리를 그렇게 강하게 주장할 게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하여튼 김구는 (이승만과 협력하던 때에는) 이 부분에 대해 아주 강한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1948년에 가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에 오면서 김구는 남북 요인 회담을 주창하고, 친일파 문제에 대해서도 강하게 나가게 된다. 그러면서 이승만과도 마치 빙탄불상용(氷炭不相融, 얼음과 숯처럼 성질이 정반대여서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의 관계라고 할까, 그런 식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 두 노인네가 남북 협상 이후에는 정말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김구의 강경 발언이 나오는 것도 이런 점과 무관한 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프레시안 : 해방 공간의 비극 중 하나인 테러와 암살 문제에서 김구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서중석 : 김구와 테러의 관계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뒷얘기들이 있다. (해방 공간에서) 고하(송진우, 1945년 12월 30일 피살), 몽양(여운형, 1947년 7월 19일 피살), 설산(장덕수, 1947년 12월 2일 피살)이 암살되는데 특히 설산이 죽었을 때는 한민당 쪽에서 아주 강하게 '배후에 임정 측이 있다'는 식으로 나온다. 심지어 김구가 미군정 법정에 증언하러 가야 하는 일까지 생기지 않았나. 그리고 (극우 테러 단체인) 백의사에서 1946년 초 김일성을 암살하러 (평양에) 가서 폭탄까지 터뜨려 상당한 규모의 사고가 발생했고 이것도 (김구와 관련돼 있다는) 설(說)이 있는데, 뚜렷한 증거가 있나? 설로만 받아들인다.

프레시안 : 김구가 남북 협상 때 취한 태도를 2년 정도만 먼저 보였으면 상황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도 있다.

서중석 : 그 점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서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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