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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간첩은 어떻게 조작돼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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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한민국에서 간첩은 어떻게 조작돼 왔나 [간첩, 상상과 실제 ①] 간첩과 간첩 조작의 역사
최근 증거 조작 논란을 빚고 있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의 피의자 유우성 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간첩인가요?" 유 씨는 "전에는 이런 질문에 상처를 받았지만 지금은 그냥 웃고 넘긴다"고 했다. 그는 간첩이 아니라고 했다. 국정원 조력자의 증거 조작 전모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국정원이 간첩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내세웠던 증인들조차 말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아직 판결은 나지 않았다. 그는 무죄로 추정되는 인간일 뿐, 무죄는 아니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라는 제목의 일본 영화가 있다. 지하철에서 닫히는 문에 끼인 옷자락을 빼려고 했던 청년은, 수상한 손짓을 보였다는 이유로 성추행범이 된다. 일단 규정된 순간, 그는 사회적으로 성추행범이 돼야 마땅했다. 권력과 관료제의 희생양이 된 그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다"며 무죄를 주장한다.

간첩. 우리 분단 현실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 중 하나다. 간첩이라는 말은 세 겹의 공포를 딛고 서 있다. 간첩에 의해 삶이 파괴될 수 있다는 공포, 내가 간첩이 될 수 있다는 공포, 그리고 내가 옹호하는 사람이 간첩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가 상존한다. 유우성 씨 사건을 계기로 <프레시안>은 한국 사회 속에 존재하는 허상이자 실제인 '간첩'의 사상누각을 짚어보고자 한다.(편집자)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을 계기로 한반도의 허리가 잘려나갔다. 분단 과정을 거치면서 남한과 북한은 치열한 첩보 활동을 벌였다. 1950년 이후 남북한 곳곳에서 활동했던 간첩은 상상이 아니라 실제였다. 이들은 정보 수집, 반정부 지하조직 구축, 요인 살해, 납치, 파괴 등의 활동을 했거나, 시도했다.

남한 내에서 얼마나 많은 간첩이 활동했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북한 정부의 부인, 검거 실패, 작전 수행 성공 등으로 인해 정확한 통계를 내기는 어렵다. 간첩으로 오인당하거나, 정권의 필요에 의해 조작된 사건도 있기 때문에 검거된 간첩 숫자 역시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한겨레 기자 출신인 김성호 전 국회의원의 <우리가 지운 얼굴-북파 공작원>,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검거 간첩 연도별, 기관별 통계> 등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검거된 간첩은 4495명에 달한다. 남한에서 북한에 침투시킨 요원은 생환자 포함 1만1273명이다. 물론 북한이 보낸 남파 간첩의 경우, 검거된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투입됐을 것으로 보인다.

남파 간첩의 숫자는 주로 1950년대(1674명), 1960년대(1686명)에 집중돼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 시절이다. 1970년대에 검거 간첩은 681명으로 줄어든다.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했던 1980년 대에는 340명,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에는 114명의 간첩이 검거됐다.

표면적으로 1970년대 들어서 검거된 간첩이 줄어든 것은 남파 간첩 숫자 자체가 줄어든 탓이 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성과 중 하나인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 전 세계적 해빙 무드에 맞춰 남북한의 관계도 다소 개선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1974년 7월 이른바 '울릉도간첩단 사건' 피의자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 울릉도 간첩 조작 사건은 유신 정권 하에서 조작된 대표적인 간첩 사건이다. 47명이 검거됐고 3명이 사형당했다. '사법살인'이었다. 이 사건은 훗날 재심을 통해 조작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들의 잃어버린 삶은 그러나, 누가 보상해줄까. 박정희 정권은 살인을 저지르고 어떤 대가를 치렀나. ⓒ연합뉴스

국가정보원이 '국정원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국정원 과거사위)'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지난 2007년 10월 펴낸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에 따르면, 간첩 사건의 '주류 유형'은 1976년을 기점으로 다소 변하게 된다. 1976년 이후 간첩으로 자수하거나 체포, 사살된 사람은 약 700명인데, 그중 침투 단계에서 사살된 사람이 130여 명이었다. 검거된 직파 공작원은 1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대부분 재일교포, 해외 취업 등을 통한 우회 간첩 사건이나, 월북자 가족 관련 간첩 사건, 납북 어부 간첩 사건 등이었다. 1990년대에는 주로 남한에 자생한 '운동권' 관련 간첩 사건들이 터져 나왔다. 간첩 숫자는 줄었지만 조작 사건은 상대적으로 늘어났다. 정치 사회적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생긴 변화라면 변화였다.

2000년대 초반 활동했던 과거사 진상 규명 관련 기관들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재심 신청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는 사례들도 많아졌다. 이를테면 최근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긴 하나, 1974년 무려 47명을 검거해 3명을 사형시켰던 '울릉도 간첩 사건'은 지난 1월, 2월 재심 법원에서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 외에도 숱한 간첩 조작 사건의 진상이 더디지만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정권의 '정통성' 약해질 때, '조작 간첩' 사건이 나타났다

간첩 사건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직파 간첩 사건, 월북자행방불명자 가족 관련 간첩 사건, 해외 관련 간첩 사건(우회 간첩 사건), 납북 귀환 어부 간첩 사건, 운동권 북한 연계 조직 관련 간첩 사건 등이다.

1971년 대선에서 정권의 안위에 위협을 느낄 정도의 민심을 감지했던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유신 체제를 구축하는 최악의 수를 둔다. 유신 정권 이후부터는 무리하게 조작된 간첩 사건이 줄줄이 터진다. '사법 살인'으로 불리는 민청학련-2차 인혁당 사건, 울릉도 간첩 조작 사건 등이 그것이다.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을 '국가 안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치환시키기 위해 공안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이다.

1970년대의 굵직한 간첩 사건은 그래서 조작에 의한 것이 많았다. 개별적 남파 간첩이 줄어들자 대규모 자생적 조직 사건, 즉 '간첩단 사건'이 늘어나게 된다.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진상 규명 노력에 의해 밝혀져 재심이 청구된 사건들의 상당 부분이 1970년대 벌어진 사건들이다. 정치적인 상황도 관계가 있다. 1974년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과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등을 계기로 재일교포 간첩 조작 사건 등이 늘기 시작했다.

1970년대는 그야말로 '겨울왕국'이었다.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에 제시된 통계에 따르면 수사기관(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군 보안사, 경찰, 검찰)이 수사한 간첩 사건 중, 공소 사실의 간첩죄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난 사례는 1970년대에 단 두 건뿐이다. 그 두 건은 군 보안사에서 수사했던 사건이었는데, 권력이 가장 강했던 중앙정보부가 수사한 사건에서는 단 한 건도 무죄 판결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은 흥미롭다.

반면 1970년 이전에는 중정·안기부가 수사한 간첩 사건 무죄가 세 건이 있었고, 심지어 법원이 자체적으로 재심 결정을 내려 무죄를 선고한 사례도 있었다. 서슬 퍼렇던 1980년대에도 11건의 간첩 사건 재판에서 무죄가 나왔다.

지금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유우성 사건의 경우에는 조작된 증거가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 들통난 사례다.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 셈이다.

과거에는 어땠을까. 노무현 정부 과거사 관련 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전직 조사관은 "과거에는 무죄가 나더라도 '조작'이 인정되지는 않았다. 다만 증거가 너무 허술해 핵심 증거인 피의자의 자백과 상충되는 부분이 많아, 판사가 도저히 유죄를 선고할 수 없는, 그런 허술한 사건들에 한해서 무죄가 나왔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가로지르는 간첩 사건 중 대표적인 조작 사례는 '송창섭 일가 간첩 사건'이다. 북한 노동당 연락부부부장을 지냈던 송창섭의 남한 내 남겨진 부인, 일가 친척들을 간첩단으로 조작, 기소한 사건이다. 황당한 것은 이 사건이 안전기획부에 의해 발표된 1982년, 정작 송창섭과 그의 부인 한경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수사를 하는데, 간첩 행위자는 없고, 그 친인척들로 구성된 일종의 '조직원'만 있었던 희한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법원은 연루된 송 씨 일가 사람들 대부분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수사 착수 경의도 황당하다. 안기부는 "충북 출신 월북자 송충건(송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충청도에 지하당을 건설한다는 뜻)이 남파, 연고선을 접촉하고 복귀했다는 제보"를 받았다. 문제의 인물 '송충건'을 충북 출신 월북자 송창섭으로 추정하고 내사를 진행했다. 송창섭은 22년 전인 1960년, 4.19혁명 직후 남파돼 민주당 정권 하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김영선을 만나고 복귀했던 전력이 있다. 즉 1960년부터 공안 당국이 주목했던 인물인 셈이다.

그런데 송창섭은 정작 1960년대 후반부터 북한의 공식 기록에서 사라지게 된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사람의 일가친척을 엮어 '간첩단'으로 포장해 발표한 셈이다.

송창섭이 1960년을 포함, 이후 1977년까지 총 8회 남파됐다는 것이 안기부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8회에 걸쳐 남파됐다는 정황 증거는 대부분은 반대 증거에 의해 탄핵당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고문, 감금, 증거 조작 등이 동원되면서 결국 송 씨 일가는 간첩죄로 유죄를 선고 받게 된다. 이 사건의 핵심 인물들은 최근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30여 년만에 누명을 벗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잃어버린 삶'은 누가 보상해 줄까.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한 원인을 제공했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김정사(오른쪽)씨와 유성삼씨가 34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고 서초구 서초동 고등법원에서 소회를 밝히고 있다. 2011.9.23 ⓒ연합뉴스

1980년대, 영사증명서 이용한 간첩 조작. 그리고 2014년

1980년대에는 직파 간첩 사건이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죽산 조봉암 선생 사법살인 사건 등 수많은 간첩 조작 사건 변호를 맡았었던 최병모 변호사는 "1980년 10월 10일 노동당 제 6차 대회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을 내놓으면서 북한은 사실상 '적화 통일'을 포기하게 되는데, 그 때부터 대남 전략도 바뀐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남파 간첩이 줄어든 계기에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 상황 변화도 있었다는 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된 후 1980년에는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났다. 신군부가 정권을 폭력적으로 찬탈한 것이다. 정통성이 없는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공안 정국은 또다시 조성됐다. 당시 나왔던 간첩 유형은 재일교포 간첩 사건 등, 과거 남파 간첩 사건과는 다른, 제 3국을 낀 유형의 사건이 횡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해외 연계 간첩 사건에서 단골로 등장했던 '영사증명서'가 주요하게 사용된다. 해외 연계 간첩 사건이 많았던 이유는 조작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영사증명서는 1970년대 주요 해외 연계 간첩 사건의 증거로 활용됐다. 날조가 되더라도 확인할 길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짜맞추기 증거'들이 법정에 제출됐다.

최근 국정원의 증거 조작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유우성 씨 사건은 1980년대 재일교포 간첩 사건, 제 3국 우회 간첩 사건들과 닮았다. 재북 화교 출신 탈북자라는 유 씨의 특수한 상황은 북·중 접경지대에 있는 영사관에게 역할을 부여해줬다. 현재 중국 정부는 유 씨의 출입경 기록 발급 사실을 증명하는 영사공증 문서 등을 '위조'로 지목한 상황이다.

이 사건의 특이한 부분은 대공수사를 담당하는 국정원이 증거를 조작했고, 그 증거 조작이 재판 과정에서 발각됐다는 점이다. 과거에도 재판을 통해 무죄가 선고된 간첩 사건이 있었지만, 증거 조작은 재판 과정에서 확인된 경우는 없었다. 혹시 드러나더라도 국정원이 압력을 행사해 무마시키는 일들이 허다하게 일어났다.

유 씨가 간첩 혐의를 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재북 화교임에도 불구하고 북한 공민권자인 것처럼 해, 탈북자로 인정받았다는 것 때문이다. 국정원은 첩보를 수집하는 내사 단계에서 그가 화교인 줄 몰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남한에 들어온 재북 화교들이 탈북자로 인정받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유 씨는 억울할 만한 이유가 있다. 재북 화교는 현재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본인을 북한 사람으로 여겼던 유 씨가 의도적으로 재북 화교 신분을 숨긴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를 탈북 후 포섭된 간첩으로 볼 수 있느냐 여부는 별개다. 1심 재판부는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심 재판 과정에서 국정원과 검찰이 유 씨에게 유리한 자료들을 의도적으로 숨기고 그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자료를 조작하려 한 정황도 드러났다. 이후 항소심 재판 과정에서는 국정원과 검찰의 참담한 증거 조작 실체가 드러났다. 21세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에서나 있었던 간첩 조작 사건의 유령이 여전히 한국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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