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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대국 일본이 돈으로라도 덮고 싶어 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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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대국 일본이 돈으로라도 덮고 싶어 한 진실

[프레시안 books] 가와다 후미코 <빨간 기와집>

1991년 김학순이 국내에서 최초로 당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하여 국내외에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같은 해 오키나와에서 사망한 배봉기는 그 훨씬 전인 1975년 위안부로 언론에 처음 알려졌다. 미군이 점령했던 오키나와가 1972년 일본 땅으로 복귀하자 불법 체류자로 강제 퇴거당할 위험에 처한 배봉기는 특별 체류 허가를 신청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것이 밝혀진 것이다.

가와다 후미코는 1977년 배봉기를 처음 만난 후 여러 차례의 구술 작업, 자료 조사, 위안소가 있었던 게라마 열도 현지 조사를 통해 1987년 이 책 <빨간 기와집 :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꿈교출판사, 2014년 8월 펴냄)를 썼다. 저자는 30대 중반이었고 배봉기는 60대 초반이었다.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시작된 피해자 증언이 대개 70대에 이루어진 것에 비해 15년 정도 빨랐고 그만큼 기억은 생생했다. 배봉기는 처음에는 식칼을 휘두를 정도로 가와다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끈질긴 설득에 마음을 열었다. 몇 년에 걸친 취재가 가능했던 것은 배봉기에게 호소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또한 저자가 이를 잘 받아주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위안소 제도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던 시기에 어려운 작업을 통해 이 책을 완성한 저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책은 센다 가코의 책과 함께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자는 몇 년에 걸친 취재 작업의 결과 70여 시간에 걸친 테이프가 남았다고 했다. (2009년 한국정신대연구소는 독립기념관 프로젝트로 이 녹음테이프들 중 18시간 분량의 녹취록(번역 포함)을 만들었다.)

이 책은 1992년에 번역된 적이 있다(한우정 번역, <빨간 기와집 : 조선에서 온 종군위안부 이야기>, 매일경제신문사 펴냄). '위안부' 해결 운동이 한창이던 시기라서 번역되었을 것이다. 이번에 일본어 전문 번역가 오근영이 새로 번역했는데,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새로운 각주도 달았고 용어 선택도 세심하여 독자들이 읽기 쉬워졌다.

일찍이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진 윤정옥 선생님이 배봉기를 만나러 1980년 오키나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배봉기는 사람 만나기를 꺼렸고 두통으로 힘들어 해서 아주 어렵게 한 시간 정도밖에 만날 수 없었고 '위안부'와 관련한 것은 물어보지도 못했다. 1988년에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때 배봉기는 만남을 거절하고 문도 제대로 열어주지 않았다.

배봉기의 '위안부' 피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건 가와다의 이 책 덕분이다. '위안부'로 끌려간 바로 그 지역에서 해방 후에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계속 살아온 피해자의 존재보다 그 피해와 상처를 처절하게 증명하는 것이 있겠는가?

1990년대에 들어서야 피해국인 한국을 비롯해 대만, 필리핀 등에서 일본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식 사죄하고 배상하라는 요구를 시작했다. 2014년에도 여전히 일본 정부는 사죄와 배상을 권고하는 유엔의 권고를 무시하고 있다. 한일협정으로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었으며 도덕적 책임으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만들어 위로금을 지급하려 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피해자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 수령을 거부했다. 최근 일본 정부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지키겠다고 하면서도, 작성 경위를 밝힌 문서를 발표하여 교묘히 고노 담화를 흠집 내고 있다.

이 책에서도 군의 명령으로 군대와 경찰의 협력을 얻어 제주도에서 일주일 만에 205명의 여성을 모집했다고 한 요시다 세이지의 책을 인용하고 있다(61쪽). 이와 관련, 최근 <아사히신문>이 예전에 보도했던 요시다의 증언 기사를 취소했고 국내외 연구자들도 요시다 세이지 책의 신뢰도에 의문을 품고 있으므로 독자들도 유의할 것을 당부한다. 이러한 기사 취소에 대해 일본의 우익 신문들과 정부 쪽에서 강제 동원의 근거가 없어졌다고 맹공을 퍼붓고 있지만, <아사히신문>은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 "여성의 자유의사에 반해 존엄을 유린당한" 것이라고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다.

최초의 '위안부' 피해자로 배봉기가 세상에 알려진 지 거의 40년이 지났다. 그의 진솔한 증언에 다시 귀를 기울여보자. 일제 강점기 극빈층 가족들이 어떻게 생존해야 했는지, 부모 복이 없으면 남편 복도 없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좋은 곳에 취업시켜 주겠다는 말에 왜 귀가 솔깃했는지, 그 결과 어떤 참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

식민지 조선의 가난한 여성, 배봉기

ⓒ꿈교출판사
배봉기는 1914년 충남 예산에서 농가의 머슴을 하던 아버지와 아산 출신 어머니 사이의 2녀 1남의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따로 집을 마련하지 못해 배봉기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배봉기의 언니는 여덟 살에, 배봉기는 일곱 살에 남의집살이를 하러 떠나야 했다. 남동생 역시 다른 집에 보내졌다. 어머니에 대해 배봉기는 "죽었는지, 어떻게 된 건지 나도 몰라"라고 했지만 이렇게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된 계기는 어머니의 가출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암만 생각해도 아이는 역시 낳아준 부모가 키워야 하는 거라오. 가정이 제일 중요해요." (31쪽)

열일곱 살에 처음 얻은 남편도, 도망가서 다시 얻은 남편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극빈층이었다. 가난했어도 아버지처럼 성실하게 일하는 남자였다면 그래도 결혼 생활을 계속하지 않았을까? 배봉기는 두 번째로 얻은 한심한 남편을 스스로 떠나 여기저기 농가를 전전하다 1943년 신흥 공업 도시 흥남으로 가게 되었다.

거기에 있다가 오키나와로 가게 된 배봉기의 방랑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낯선 나라에서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안 통하고 돈도 없었다. 미군에 점령된 오키나와를 걸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어디를 가도 불안했다. 대부분은 환락가의 술집에서 손님 접대를 하며 살았다.

오키나와의 더운 여름에도 덧문까지 꼭 닫고 사람을 피해 살던 배봉기는 노상 머리가 아팠고 신경통에 고통스러워했다. 통증 때문에 파스를 잘게 잘라 붙였는데, 그때 쓰는 가위로 목을 콱 찌르고 싶은 심정을 느끼기도 했다. 신경통이 심해 걸을 수 없게 되고서야 생활 보호를 받고 거주지가 정해졌다고 한다.

꿈속에서나 고향에 갔는데 그 꿈에서조차 집도, 다른 무엇도 없이 밖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다녔다고 한다. 저자는 배봉기에게 고향인 예산의 신례원에 같이 가자고 권했다. 처음에는 가고 싶다고 했으나 막상 여권을 받는 상황이 되자 단호하게 거절했다. 고향에 가는 것은 배봉기의 꿈이었으나 '가봐야 어쩌겠는가?' 하는 현실적인 생각에 그러지 않았을까, 저자는 추측했다.

저자가 신례원을 방문해 알아보니 배봉기의 남동생은 강원도로 간 후 행방불명이었다. 저자는 수소문 끝에 배봉기의 언니를 만났다. 근처 농가에서 일을 해주며 살고 있던 언니는 동생의 소식을 듣자 "동생 소식은 모르는 게 나을 뻔했어요"라고 했다. 언니의 소식을 전해들은 배봉기 역시 "신례원까지 갔어도 언니는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걸 그랬어요"라고 했다. 어렸을 때 헤어진 자매는 소식을 들어서 반가웠겠지만, 서로 만나러 갈 수도 없는 처지라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나았을 것이라는 넋두리밖에 나오지 않았으리라.

1991년 10월 오키나와 나하에서 사망한 배봉기의 유골은 일본의 절에 안치되었다가 한국의 친척에게 반환되어 1997년 11월 충남 아산 선산에 안치되었다. 유품은 같은 해 12월 나눔의 집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에 기증되었다.

빨간 기와집에 도착하기까지

배봉기는 1943년 흥남에서 어떤 남자들을 만나면서 빨간 기와집에 가게 됐다. 그해 늦가을, 29세의 배봉기에게 일본인 남자와 한국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일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데가 있는데 가보지 않을래? (…) 과일도 지천이야. 파인애플, 바나나는 산에 가서 나무 밑에 누워 입을 벌리고 있으면 저절로 떨어진다고." 일본 남자의 지시에 따라 한국 남자가 통역을 했는데, 이런 권유에 배봉기는 마음이 동했다. 이 한국 남자가 다른 여자 2명을 데리고 며칠 후 배봉기를 찾아왔다. 같이 흥남역을 출발해 경성 근처에 있던 한국 남자의 집인 가난한 농가에서 1944년 음력 1월을 보낸 배봉기 일행은 음력 2월에 가네코라는 다른 한국 남자에게 넘겨져 부산으로 갔다. 곤도라는 일본인 뚜쟁이가 부산의 한 여관을 통째로 빌려 여자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얼마 후 10여 명이 선발되어 출발했고, 한 달 남짓 지난 후인 음력 3월쯤 배봉기 일행(약 60명)도 성병 검사를 받고 떠났다.

일본 모지에 도착해 며칠 묵고 시모노세키에서 싱가포르에 간다는 일본군 배에 탔다. 승선한 이튿날 저녁 여자들만 내리게 해서 모지의 변두리 민가로 데리고 갔다. 여름에 접어들자 여자 4명이 도망갔다. 배치가 늦어지자 곤도는 여자들 중 6명 정도를 뽑아 자신의 유곽에서 일하게 했다. 일본에 온 지 6개월이 지나서야 여자들 51명이 가고시마로 옮겨 여관에 묵었다.

얼마 후 5500톤급 징용 수송선 마라이호를 탔지만 출항하지 못했다. 10월 10일 연합군의 오키나와 나하 공습 때문이었다. 11월 3일 출발해 오키나와 나하에 도착했다. 병원에 수용되어 이틀을 묵었다. 여기서 51명의 여성들을 배치했다. 게라마의 세 섬(도카시키 섬, 자마미 섬, 아카 섬)에 각각 7명, 나하에 20명, 다이토 군도에 나머지 10명이 배치되었다. 곤도의 부하들 역시 위안소 정산 담당으로 각기 배치되었다.

1944년 11월 초 배봉기 일행은 도카시키 섬에 도착했다. 게라마의 섬들에 일본군이 상륙한 것은 1944년 9월 9일이므로 일본 부대가 도착하고 두 달 후에 '위안부'가 온 것이다. 여성들은 초가에 머물다, 군이 접수한 민가를 위안소로 고친 빨간 기와집으로 옮겼다.


도카시키 섬의 빨간 기와집에서

빨간 기와집의 '위안부'들은 모두 한국 여성이었지만 일본식 이름을 썼다. 배봉기는 아키코로 만 서른 살이었고 다른 여섯 명은 기쿠마루(28), 하루코(23), 스즈란(20), 가즈코(23), 밋짱(19), 아이코(19)였다. 위안소가 개설되자 여성들은 매일 울다 눈이 빨갛게 부어오른 모습이었다. 배봉기와 마찬가지로 다른 여성들도 군인들의 식사 시중과 빨래를 하거나 간호사로 일할 것이라는 말에 속아서 왔다고 했다. 하루코는 일본어를 할 수 있고 얼굴도 예뻐서 가장 인기가 있었고, 애교가 있던 스즈란도 인기가 있었다. 밋짱과 아이코는 젊음 덕에 귀여움을 받았다. 기쿠마루는 중국에서도 군인을 상대했던 모양이라 거침이 없었다. 얌전한 가즈코는 그리 눈에 띄지 않았고, 나이가 가장 많은 배봉기도 조용히 지냈다. 군의관과 위생 하사관 혹은 위생병이 빨간 기와집을 방문해 매주 성병 검사를 했다.

그런데 1945년 2월 부대의 이동으로 도카시키 섬의 군인은 400여 명으로 줄었다. 빨간 기와집에 군인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당황한 정산 담당 가네코는 아카마쓰 전투부대장에게 위안소 이동을 재검토해달라고 부탁하러 갔다. 아카 섬에서는 제2대대가 오키나와 본도로 이동할 때 한국 여자들도 데리고 갔다. 그러나 도카시키 섬의 경우 한국 여성들이 비밀 병기(소형 돌격선 마루레)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동반 이동을 허락받지 못했다. 대신 아하렌과 도카시쿠에 임시 위안소를 개설했다. 작은 초가가 임시 위안소가 되어 2∼3일 동안 군인들이 모두 왔다 갔다고 한다.

3월 23일 미군 공습이 시작되어 여자들은 피난을 갔다. 하루코는 미군 기관총에 맞아 죽었다. 밋짱과 아이코는 중상을 입고 미군 야전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기쿠마루와 스즈란은 미군에 투항했다. 배봉기와 가즈코는 8월 26일 무장 해제식을 한 후 자마미 섬으로 보내졌다가 이시가와 민간인 포로수용소에 들어갔다. 가즈코는 수용소에서 나온 후 한국 남자의 첩이 되어 살다가 아들의 고교 졸업을 앞두고 병사했다.

도카시키 섬으로 동원된 7명 중 1명은 전쟁 중에 죽고 4명은 미군 포로가 되어 귀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은 두 명이 오키나와에 남아서 살다가 사망한 것이다. 7명씩 배치된 자마미 섬과 아카 섬의 경우도 현장 취재한 결과를 종합하면, 게라마의 세 섬으로 동원된 21명 중 6명은 죽었고 10여 명은 미군 포로가 되었고 3명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키나와 현지에 남은 것이 확인되었다.

▲ 나눔의 집에 있는 소녀상. ⓒ프레시안(최형락)


민간인 업자 앞세웠더라도 위안소 통제한 건 일본군

1930년대 초부터 1945년 패전 때까지 일본군은 군에서 계획하여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설치하고 위안소에서 일할 여성들을 동원했다. 중국, 동남아시아에서는 군이 직접 여성을 동원한 경우가 많았고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에서는 민간인 업자를 주로 이용했다. 배봉기의 경우에는 일본 모지에서 유곽을 하던 곤도라는 업자가 여러 사람을 조선에 보내 여성을 모집하고 소개비를 지급한 것으로 생각된다. 싱가포르로 보낼 '위안부'를 모집했는데, 현지 사정에 변경이 생겨 오키나와로 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군이 어느 지역에 몇 명의 '위안부'를 보내야 한다는 것을 정하고 배치한 것이다.

배봉기가 있던 위안소의 정산 담당 가네코가 위안소 이동을 부대장에게 요청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민간업자가 관리하는 위안소라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위안소가 일본군의 통제 아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너무도 많다. 군은 위안소 이용 규정을 만들어 위안소를 전반적으로 통제했다. 군의 회계부가 슈호(酒保), 위문단과 함께 위안소를 담당했다. 군의관이 섬을 방문해서 성병 검사를 했다. 도카시키 섬에서는 부대에서 민간인의 집을 지정해 위안소로 썼지만 다른 지역의 경우에는 군에서 직접 위안소를 지었다. 다이토 군도의 경우에는 진중일지(陣中日誌)에 '위안부'와 업자가 온 것과 함께 위안소 규정을 송부한다고 했다. '위안부'들에 대한 조사 보고까지 실려 있다. 비행대대가 작성한 진중일지에는 위안소 개축 설계도가 실렸고 오키나와 마시키(眞志喜) 경비중대는 위안소 건설 작업을 기록했다. 석병단 회보에는 위안소 가격, 성병 검진 시 주의 사항 등이 실려 있다.

오키나와의 지방사 연구자들에 의하면 오키나와 제도에 140개 정도의 위안소가 있었고 그중 49개 위안소(34개소는 국적 불명)에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으며 그 수는 584∼1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연합군이 이 가운데 오키나와 본도 이외의 여러 섬에서 온 110명과 본도 각지에서 모인 40명, 합계 150명을 귀국시켰다는 사실이 공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어떤 방식으로 동원되었든 일단 위안소에 들어간 여성들은 마음대로 외출할 수도 없었다. 배봉기의 경우와 같이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국의 섬에서 도망은 꿈꿀 수도 없었다. 위안소로 찾아오는 군인들을 거부할 자유 역시 없이 강제적으로 유린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군인들이 낸 돈은 정산 담당 가네코가 챙겼을 뿐 여성들에게 하나도 주지 않았다. 미군 포로가 되었을 때 배봉기의 손에는 빨간 기와집에서 군인들에게 받은 약간의 팁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봉기에게 가족, 고향, 고국이 어떤 의미였을지, 일본군이 위안소 범죄에 어떻게 관여했는지를 중점에 놓고 배봉기 증언을 잘 읽어보기 바란다.

끝으로 1944년 8월에 나온 법령은 여자정신대근무령(57쪽)이 아니라 '여자정신근로령'이므로 바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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