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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했던 미시시피, 그해 여름은 위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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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참혹했던 미시시피, 그해 여름은 위대했다 [프레시안 books] 브루스 왓슨 <프리덤 서머, 1964>
1964년 여름 미시시피. 이 시공간은 미국 민권운동의 역사에서도 가장 긴장되고 참혹했던 한 장면을 의미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하고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국은 그때까지도 인구의 10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는 흑인에게 백인과 동등한 지위의 시민의 자격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헌법에 새로운 조항을 추가하여 흑인을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시킨 지 100년이 지났지만, 대부분의 흑인들은 투표권을 비롯한 시민으로서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 남부 대부분의 주들은 흑인과 백인을 학교, 주거지, 공공시설 등에서 분리하는 법을 만들었고, 백인 공동체는 하나로 뭉쳐 이 규칙을 엄호했다. 그들의 규칙을 어기려는 흑인은 죽음에 이르는 폭력으로 철저히 응징되었다.

물론 1954년에 내려진 역사적인 대법원 판례(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로 공립학교의 흑백 분리가 위헌 선고된 이후 서서히 변화가 시작되었지만, 이러한 변화에 대한 백인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인종 통합을 막기 위해 한때 군대를 동원하고 휴교령까지 불사했던 이들의 최후의 보루는 바로 흑인의 참정권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민권운동가들이 흑인을 투표인으로 등록시켜서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자, 백인 사회의 근간을 무너뜨릴 이러한 시도를 용납할 수 없었던 백인들은 구타, 살해, 방화, 폭탄 테러 등으로 응답했다. 폭력의 대상은 규율을 어기는 흑인과 그들을 돕는 백인에게까지 확산되었다. 바로 1964년 여름, 그 폭력적 저항이 가장 심했던 미시시피의 깊고 깊은 시골 마을들에 북부 출신의 민권운동가들, 대부분이 백인 대학생이었던 자원봉사자들이 파견되어 일상적인 죽음의 위협 속에서 신념을 위해 일했다. 이 책, 브루스 왓슨의 <프리덤 서머, 1964>(삼천리, 2014년 8월 펴냄)는 바로 그들의 "자유 여름(프리덤 서머)" 기간 이야기이다.

미국 역사에서 민권운동을 서술하면서 마틴 루터 킹 같은 인물을 빼놓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시내버스에서 인종 통합을 위해 그가 승차 거부 운동을 조직한 이래, 이 앨라배마 주의 침례교 목사는 전국적 유명 인사가 되었고, 민권운동의 주요 사건과 요소요소마다 반드시 나타나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책에도 킹 목사가 등장하지만, 딱 한 번 약 3쪽에 걸쳐서 나온다. 물론 그의 등장은 지역 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중요한 순간이지만, 그 순간 오히려 부각되는 것은 그를 만난 자원봉사자들이다. 이는 운동권의 주요 지도자와 활동가를 중심에 두었던 기존의 민권운동 내러티브와 큰 차이를 보이는 이 책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죽은 채 살기'를 거부한 그들이 만든 감동의 여름

ⓒ삼천리
한편 그간 "자유 여름"에 대한 관심은 주로, 이 기간에 벌어진 다양한 폭력 사태와 특히 3인의 민권운동가의 실종 및 살해 사건에 집중되어 있었다. 현지 조사 중이던 백인 둘, 흑인 한 명으로 구성된 활동가들이 실종되었다가 6주 만에 부패한 시체로 발견되었던 사건은 전국적 관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미시시피 버닝>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잘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여름 한 달 반 동안 도합 4명의 민권운동가 살해, 3명의 흑인 동조자 살해, 30여 흑인 사업체의 폭파 및 방화, 교회 37개 폭파, 80여 명의 민권운동가에 대한 폭행, 그리고 도합 1062명의 '외부' 활동가 체포로 응답한 미시시피 백인들의 폭력적 대응의 일부였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책에서 "자유 여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조직해 내는 두 지도자, 밥 모지스와 페니 루 헤이머조차 생소할 것이다. "자유 여름"은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가 북부의 활동가와 남부의 흑인 주민을 연결해, 흑인 유권자 등록 운동에 대한 전국적 환기를 불러일으키고자 기획한 것이었다. 모지스와 헤이머는 자유 여름 운동가들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존재로서, 현장에서 이들을 격려하고 배치하고 교육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세 명의 활동가가 실종되었다가 6주 만에 부패된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에도 남아 있던 활동가 가운데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었던 것은 모지스나 헤이머의 뛰어난 포용력과 이들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존재들은 프랜 오브라이언 같은 대학생 자원활동가들이다. 기독교도로서 봉사를 위해 "자유 여름"에 참가하기로 결심한 이 수줍음 많고 지극히 평범한 오리건 출신 백인 여대생은 미시시피의 빅스버그에 정착하여 여름 한 달 반 동안 흑인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공예 교실을 열고, 흑인의 선거인 등록을 돕는 일을 했다. 그녀가 버텨야 했던 일상적 폭력의 정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출퇴근길, 정해진 차량을 타지 못하면 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일하는 건물이 언제 폭파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날마다 걸려오는 협박 전화에도 친절히 응답해서 성난 백인들을 더 이상 자극하지 말아야하는 시기였다. 언제 KKK가 습격을 해서 그녀를 끌어내고 폭행을 가할지 알 수 없는 긴장된 시간이 하루하루 계속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어느 날 폭도들에게 끌려가 폭행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정해진 기간을 버텨냈고, 그 과정에서 그녀의 남은 일생 동안 인종과 자유에 대한 인식을 바꿀 중요한 경험을 했다. 신체장애나 정신장애가 있는 아동의 교사로 진로를 선택한 그녀는 바로 본인이 "자유 여름"을 만든 일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 외에도 춤 파티를 좋아하고 의식이라곤 별로 없어 보였던 캘리포니아의 대학생이었으나 누구보다도 열성적인 운동가로 변모한 프레드 윈, "죽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분노하라"고 외친 데이브 데니스, 부모의 반대에 학교로 돌아갔다가 혹은 안락한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남부를 찾아 내려와야만 했던 엘런 레이크를 비롯한 수많은 대학생들이야말로 바로 풀뿌리 민권운동가라 할 만한 엄청난 존재들이다. 여기에, 도와달라는 SNCC의 요청에 많은 것을 감수 또는 포기하고 현금을 싸들고 미시시피로 내려왔던 가수 해리 벨라폰테와 배우 시드니 포이티어. 이들 각각이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자신의 위치에서 "자유 여름"을 돕기 위해 참여했던 여정들은 하나하나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이들 모두 그동안 비교적 경시되었던 민권운동의 주역들임을 생생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이 책 <프리덤 서머, 1964>는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1964년 미시시피와 2014년 퍼거슨…"자유 여름" 운동은 아직도 필요하다

책은 2009년 1월 20일,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식을 경험하는 1964년의 용사들의 후기로 마무리를 짓는다. SNCC 베테랑들은 수도에서 열린 축하 모임에 참석했고, 밥 모지스는 진보적 케이블 방송에 출연하여 이날을 가능하게 한 것은 1964년의 도전이었다고 평했다. 모지스는 미국인 가운데 특별한 능력을 보여준 사람들에게 수여되는 맥아더 펠로우쉽을 받은 교육자로서, 소수집단 어린이 수학 교육 프로젝트의 기획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 밖의 수많은 활동가들이 자신의 집에서, 직장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날"을 감격과 추억에 휩싸여 지켜보았다.

하지만, 바로 "자유 여름"의 50주년인 올해 이 후기를 썼다면, 이렇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을까? 2014년 여름의 미국은 아마도 미주리 주 퍼거슨 시로 기억될 것이다.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흑인 청소년이 경찰의 총격 6발을 맞아 사망했고, 이에 대한 흑인들의 분노가 해당 경찰에 대한 수사를 요구하는 시위로, 시위가 상가 약탈과 폭동으로 이어졌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과 주방위군이 출동한 가운데 주지사는 비상사태까지 선포해야 했다. 문제는 이후로도 이 사건에 대한 흑백 간의 의견 차와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흑인 커뮤니티에서 피해자 가족을 위한 모금 운동을 했지만, 정작 백인 경찰을 위한 모금액이 더 많았다. 이 사건이 인종 문제를 제기하는가에 대해 흑인은 80퍼센트가, 백인은 37퍼센트만이 그렇다고 답했고, 인종 문제가 지나치게 주목받고 있다는 데에 흑인의 18퍼센트, 백인의 47퍼센트, 그리고 공화당원의 61퍼센트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또한 경찰의 총격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신뢰하느냐는 질문에는 흑인의 18퍼센트만이, 그러나 백인의 52퍼센트가 그렇다고 답함으로써 퍼거슨 사태에 대한 인종 간의 인식 차이가 크다는 것을 드러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당선시키기는 했지만 미국은 아직도 "자유 여름" 운동이 필요해 보인다. 사건이 발생한 퍼거슨 시는 주민의 67퍼센트가 흑인이지만, 경찰 가운데 흑인은 고작 6퍼센트뿐이다. 경찰의 대부분이 백인이라는 사실이 퍼거슨에 사는 흑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생각해볼 만하다. 또한 퍼거슨 시가 속해 있는 세인트루이스 광역도시 내에서 고학력 백인 집중 지역인 클레이튼의 평균 수명은 85세인 반면, 퍼거슨 시의 평균 수명은 70세이다. 그러니까, 클레이튼에 태어나는 것과 퍼거슨에 태어나는 것은 대략 15년을 더, 혹은 덜 생존하게 되는 결과를 만든다. 흑인의 폭동 자체에 경악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폭동을 일으키는 사회적·경제적 조건을 형성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문제다. 에모리 대학의 캐롤 앤더슨 교수는 "경찰에 대한 흑인의 분노가 아니라, 진보를 거부하는 백인의 분노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여전히 흑인에게 동등한 삶의 조건을 보장하기를 꺼리는 백인 위주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리덤 서머, 1964>가 지나치게 희망적으로, 낙관적으로 마무리 지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암울한 시절 때문일까. "연방정부는 누구 편인가?"라며, 계속되는 폭력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정부에 분노를 터뜨리는 SNCC의 목소리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민권법과 투표권법을 통과시키는 역사적인 대통령이지만 린든 존슨은 "자유 여름"과 같은 주 단위의 사건에는 개입을 꺼린다. 법은 있지만 지켜지지 않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셈이다. 한편, 부당함에 맞서려는 사람들에 대한 이념적 공격도 우리에게 낯선 장면이 아니다. FBI 국장 에드거 J. 후버는 킹 목사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정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 믿었고, 민권운동이 공산주의와 결합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남부를 변화시키겠다며 내려간 학생들의 "응석"을 받아주지 않겠다고 한 것도 그였다. 미시시피의 KKK는 세 활동가의 실종 사건이 "미개한 흑인"과 "공산주의 우두머리에 의한 날조"라고 시종일관 주장했다. 비이성과 야만에 대한 시민의 항거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던 정부와 근거 없는 이념 공격이나 일삼았던 1964년 미국 사회의 모습에서, 어쩔 수 없이 2014년 한국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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