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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아니었으면 일본 자금도 못 들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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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아니었으면 일본 자금도 못 들여왔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63> 한일협정, 첫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덟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일협정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한일 관계는 참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문제다. 옛날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그렇다. 해방 후 한일 관계의 분수령 중 하나가 일반적으로 한일협정으로 불리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가로놓인 문제들의 상당수가 한일협정 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도 차분히 되짚을 필요가 있다. 먼저 용어 문제부터 살폈으면 한다. 한일협정이 적절한 용어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예컨대 1965년에 체결한 것이 한일기본조약과 여러 협정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서중석 : 1964년 한일 회담, 1965년 한일협정 조인과 비준, 이 시기에 이렇게 두 가지 큰 일이 있었다. 그와 함께 1964년에 한일 회담 반대 투쟁·운동이 있었고, 1965년에는 조인·비준 반대 투쟁·운동이 장기간에 걸쳐 있었다. 이걸 뭉뚱그려 뭐라고 하느냐. 이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한일기본조약하고 한일협정의 성격이 조금 다른 것 아니냐, 따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 하면 너무 길고 해서 일반인도, 연구자도 한일협정으로 통칭하고 있다.

문제는 그것에 대한 반대 운동을 뭐라고 부르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가지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나 6.3동지회 같은 데서 논란이 많이 있었다. 우선 1964년의 경우 주로 학생들이 3월 24일부터 6월 3일까지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6월 3일에 있었던 것은 보통 6.3사태라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많이 부르고 있다. 그럼 3.24에서 6.3사태까지를 뭐라고 부를 것인가, 이게 문제인데 그냥 6.3운동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다음에 있었던 것은 한일협정 조인 반대 투쟁·운동, 또 한일협정 비준 반대 투쟁·운동, 이런 식으로 그 당시 신문에서 많이 불렀다. 이걸 합쳐 한일협정 조인·비준 반대 투쟁·운동, 이렇게 하면 너무 기니까 그냥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럼 6.3운동과 한일협정 반대 운동, 이 두 가지를 합쳐 뭐라고 부르느냐. 마땅치는 않은데 우선은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더 좋은 말이 과연 나올지는 모르겠다. 그럴 경우 비판하는 쪽에서, 6.3운동이 특히 그렇지만, '민주주의 운동으로서 6.3운동,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 있는데 그 용어가 그런 부분을 잘 살리지 못하는 것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는 있다. 용어 문제는 학계에서 더 많은 논의를 해야 할 것 같다.

금년이 6.3운동 50주년이고, 내년이 한일협정 체결 50주년, 을사조약 110주년이다. 내년에는 한일협정 체결 등 한일 간의 역사를 차분히 되돌아보고 바람직한 한일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다.

한일 회담 14년, 왜 박정희 정권만 거센 반대 운동에 직면했나

프레시안 : 한일 회담이 처음 열린 건 한국전쟁 때다. 1951년 10월 도쿄에서 예비회담이 열린 후 14년 만에 타결됐다. 그런데 거센 반대 운동이 일어난 건 박정희 정권 때뿐이다.

서중석 : 한일 회담은 이승만 정권 때도, 장면 정권 때도 있었는데 어째서 박정희 정권 때 그런 대규모 시위 또는 반대 활동이 전개됐느냐. 바로 그게 문제다. 1964년 3월 24일부터 6월 3일 사이에 있었던 시위 규모는 4월혁명 시기인 1960년 3∼4월에 있었던 시위와 거의 맞먹는다고 볼 수 있다. 1965년 3월부터 8월까지 계속된 시위는 그 규모가 1964년보다도 더 크고 더 길다. 1964∼1965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은 박정희 정권 18년을 통틀어 제일 큰 시위·반대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유신을 반대한 여러 운동을 하나로 묶으면 그렇지 않지만, 유신 반대 운동을 각각 분리해 이야기한다면 그렇다. 또한 1964∼1965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은 1987년 6월항쟁을 제외하면 규모 면에서 해방 이후 최대 시위운동이라고 이야기할 만하다. 이처럼 굉장히 큰 시위, 반대 운동이 2년에 걸쳐 벌어졌다.

이게 왜 벌어졌느냐. 그게 문제의 핵심이라고 본다. 한일 회담은 한국 정부로 봐서는 누가 맡든 간에 가장 어려운 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남북 회담처럼 수많은 변수가 작용하고 끈기와 전략·전술이 필요하다. 그뿐 아니라 한일 회담에 임할 때는 구체적인 자료, 사실, 연구 같은 것들을 굉장히 많이 알아야 하고 갖춰야 한다. 그런 것의 뒷받침 없이 그냥 정치적인 협상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보기가 어렵게끔 돼 있었다.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이 필리핀, 버마, 인도네시아, 베트남과 배상 회담을 했던 것하고 한일 회담은 굉장히 다르다. 왜냐하면 한일 회담에 비하면 전자는 상당히 단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일 관계의 경우 1905년 을사조약, 1910년 병합조약 같은 과거 조약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고, 35년에 걸친 일제 식민 지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다. 독도, 평화선, 어업 문제도 굉장히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재일 교포, 문화재 문제 같은 것들도 얽혀 있었다. 그래서 배상·보상 청구권 문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문제들을 하나하나 다룬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게 돼 있었고, 아주 전문적인 지식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을 깔고 있었다.

또 한일협정의 경우 민족 감정이라는 게 크게 작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도 상당히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경솔함, 독선, 독단 같은 것이 가장 위험한 것이었다. 한일 회담은 신중함과 명확한 사리 분별, 국민들과 소통하는 개방성 그리고 그 의견을 존중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프레시안 : 한국과 일본이 오랫동안 얽히고설키면서 문제가 켜켜이 쌓인 것도 한일 회담을 더 어렵게 하는 요소였다. 특히 35년에 걸친 일제의 강점은 결정적이었다.

서중석 : 한일 관계는 박정희 정부 때 특히 문제가 된 것만은 아니고 한국 역사 전반에 걸친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역사를 보면 삼국 시대나 그 이후 대개는 중국과 많이 관련돼 있지만, 일본과 관련된 부분도 적지 않다. 근대사의 경우는 중국보다 일본과 관련된 점이 훨씬 많다. 19세기 후반 세계와 한국이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가장 깊숙이 들어온 세력이 일본이지 않나. 그래서 민족주의의 기원이나 발생, 또 민족 해방 운동도 대개 일본과 관련돼 있다.

일부 학자들은 근대화, 개화 이 문제가 일본을 통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문제를 풀기가 훨씬 쉽지 않았겠느냐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한국인들은 임진왜란, 왜구 등 여러 가지를 통해 일본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개화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또 강제 수단을 썼다. 1875년 운요호 사건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계속 한국을 강압하면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물건을 팔아먹을 때도 한국인의 비위에 거슬리게 하지 않았나. 이렇게 일본을 통해 들어온 근대화, 개화가 일본의 침략, 일본에 대한 악감정과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이걸 받아들이는 태도가 고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갈등이 훨씬 심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전반기에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그것도 멸시하던 이웃 나라 일본한테 그렇게 됐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당시 많은 한국인은 일본을 멸시하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비롯된 민족 감정 문제도 있지만, 이 문제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 방식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유일한 비백인 제국주의 국가로서 일본의 식민지 통치와 강점은 백인 제국주의 열강의 동남아시아나 인도 지배보다 억압의 강도가 훨씬 심했다. 전에 친일파 문제를 다룰 때도 얘기했지만, 일제 강점기 내내 한국인들은 기본적 자유를 누려본 적이 없다. 심지어 3.1운동 후 1920년대 문화 통치기에도 어떤 언론, 출판의 자유도 없이 모두 검열을 받지 않았나. 집회와 결사의 자유도 큰 제한을 받았다. 정치적 자유도 일제 강점기에 한 번도 있어본 적이 없고 한국인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의회라는 통로도 전혀 없었다. 그런 속에서 1910년대에는 무단 통치를 당하고 1930년대 이후에는 전시 체제로 들어가면서 아주 심한 군국주의 파시즘 통치 아래 놓이지 않았나. 이처럼 일제의 식민 통치, 일제에 의한 억압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보다 강도가 월등하게 높았다.

과거부터 일본에 대해 갖고 있던 악감정에다가 식민 통치를 이렇게 받은 것에 대한 악감정이 겹치면서 반일 감정이 나타나는 측면도 있기는 있다. 그런데 거듭 이야기하지만 이승만, 장면 정권 때는 없던 한일 회담 반대 운동이 어째서 박정희 정권 때만 그렇게 거세게 일어났는가, 이 문제를 살피는 게 중요하다. 우선 그 이전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게 있다.

▲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은 거센 반대 운동에 부딪혔다. 사진은 1965년 4월 1일, '굴욕적 한일협정 반대'를 외치며 고교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모습. ⓒ연합뉴스


한일 국교 정상화, 누가 집권해도 안 할 수 없었고 또 할 수 있었다

프레시안 : 어떤 것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한일 회담 그리고 한일 국교 정상화는 누가 집권하더라도 1960년대 초나 전반기에 안 할 수가 없었고, 또 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난 그렇게 보고 있다. 사실 이승만 정권 때도 이승만 대통령만 한일 회담에 대해 배짱을 내미는, 그러니까 한일 회담이 순조롭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할까 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런 반일 운동을 1954년 이후에 펴지 않았나. 그러나 다른 쪽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야당, 예컨대 민주당의 조병옥이든 진보당의 조봉암이든 모두 '한일 국교는 이뤄져야 한다. 한일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당 간부조차 그건 마찬가지였다. 이 대통령이 워낙 강하게 누르니까 말을 못했을 뿐이지, 한일 관계는 정상화돼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 때 마지막 한일 회담 수석대표였던 허정 그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추진했는데, 이 대통령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정치인이나 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한일 관계는 정상화돼야 한다. 국교를 맺는 게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한 제일 큰 이유는 박정희 정권과 같다. 우선 한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하려면 선진국인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만 할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미 한국전쟁 때 전전(戰前) 수준으로 돌아가지 않았나. 한국전쟁 덕분에 대단한 발전을 해나가는 걸 볼 수 있다. (1945년 패전 후 일본 경제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군수 생산 금지, 생산 설비 손실 등의 문제가 겹치면서 1945년 일반 광공업 생산은 1935∼1937년 평균의 29퍼센트에 머물렀다.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 경제가 호황으로 돌아선 계기는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유엔군 군수품 조달 등에 따른 이른바 '조선 특수'('한국 특수') 덕분에 일본의 공업 생산은 1951년에 이미 전전 수준, 즉 1934∼1936년 평균을 넘어섰다. <편집자>) 사실 경제 자립, 경제 발전의 염원이라는 건 4월혁명 이전부터 한국인들 사이의 광범위한 공동 의견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게 4월혁명 이후에 더 강해졌다. 그래서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한일 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많은 사람이 본 것이다.

미국의 원조 정책이 바뀐 것도 영향을 줬다. 미국의 원조는 1950년대 한국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심하게 얘기하면 '미국의 원조 때문에 살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 미국이 1958년경부터 원조 정책을 전환해 그간 무상으로 주던 것을 축소하겠다는 걸 분명히 한다. 그러면서 이제는 한국이 차관을 얻어 쓰고 수출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걸 강조하는 걸 볼 수 있다. 미국의 무상 원조가 1958년에 이미 상당히 줄었고, 앞으로도 많이 깎일 것이라는 건 눈앞에 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 경우 또 기댈 수 있는 건 일본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점도 많이 작용했다.

그래서 허정 과도 정부가 4월혁명 후 출범하자마자 내세운 5개 시정 방침 중 하나가 일본과 관계 정상화였던 것이다. 장면 정부도 1960년 8월 23일 출범하자마자 경제를 최대의 중요 시책으로 펴나가겠다고 하면서 한일 국교 정상화가 가장 중요한 정책의 하나임을 분명히 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일본이 한일 회담 타결에 적극적이었던 이유

프레시안 : 한일 국교 정상화는 당시 일본에서도 바라던 바였다.

서중석 : 이때 일본 측도 '이제 한일 관계는 그전하고 달라야 한다. 국교 정상화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졌다. 1957년 기시 노부스케가 정권을 잡는데, 기시 노부스케는 그 전임 수상들에 비해 친미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미국이 한일 관계 정상화를 중시한다는 점에 기시 노부스케도 적극 동조했다. 그건 기시 노부스케가 친미적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기시 노부스케의 출신 지역이 한국과 가까운 야마구치 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야마구치 현은 혼슈의 서쪽 끝으로, 메이지 유신의 중심 세력이던 조슈 번이 있던 곳이다. <편집자>) 어업 문제 같은 것으로 한국과 충돌하고는 있었지만, 어쨌건 한국에 대해서는 각별한 관심이 있다는 식으로 기시 노부스케가 여러 번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시 노부스케가 한일 회담에 상당한 노력을 해보려 했는데 이승만 대통령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될 수가 없었다.

1960년 미일신안보조약이 체결되는데, 이 조약은 일본에서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나. 결국 기시 노부스케가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미일신안보조약을 더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미일한 3각 안보 체제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은 일본도 잘 알고 있었다.

5.16쿠데타 직후인 1961년 6월 미국에서 케네디 대통령과 기시 노부스케의 후임자인 이케다 하야토 수상이 정상 회담을 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한국의 반공 정권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때 이케다 하야토가 유명한 부산 적기론을 들고나온다. 부산이 적화되면 일본 치안에 큰 영향을 끼치니 일본도 남한의 반공 정부에 커다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화답한다. 한국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안보 면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프레시안 : 일본이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은 자국 자본의 한국 진출 문제와 이어져 있었다.

서중석 : 일본 경제가 이 시기에 많이 달라진다. 한국전쟁으로 일어선 일본 경제는 1958년 하반기부터 1961년까지 이와토(岩戶) 경기라고 불리는, 일본에서 보기 드문 대호황을 맞았다. 경제가 매년 10퍼센트 이상 성장했고, 전년 대비 민간 실질 설비 투자 증가율이 1959년에 59.17퍼센트, 1960년에 41퍼센트, 1961년에 37퍼센트, 이럴 정도로 무지무지하게 증가했다. 이 시기에 일본은 기술 혁신과 동시에 소비 혁명이 일어나고, 노동력 과잉 상태에서 완전 고용 경제를 성공시켜 평생직장이 이때부터 실현됐다고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놀라운 일은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일본은 자체 내에 충분한 소비 시장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많이 이야기했는데, 이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기세탁기, 전기냉장고, TV에 대한 국내 수요가 엄청나게 커서, 우리가 짐작하는 것과 달리 이때 일본은 수출이 국민총생산(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큰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선진 공업 국가보다도 일본이 더 내수가 좋았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수출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됐다. 그리고 1962년에 조금 안 좋아서 경제가 7퍼센트밖에 성장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1963년에도 10.4퍼센트, 1964년에는 13.2퍼센트나 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이제 일본은 경제 대국화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다 월남전(베트남전쟁)을 겪으면서 또 한 번 호황에 들어가서 1960년대 후반에 이미,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가면 확실하게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이 되는 것 아닌가. 참 무섭고 놀라운 일이었다. (1955년부터 1973년 제1차 석유 파동 때까지 일본 경제는 연평균 10퍼센트 성장했다. 1968년에는 서독을 앞지르며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에 올라섰다. <편집자>)

일본 경제가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커지면서 일본으로서는 이웃 나라인 한국에 진출하는 문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5년 10월 한국생산성본부와 일본경제조사협회가 '한일 경제 협력의 방향과 그 배경'이라는 공동 조사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걸 보면 핵심은 '후진 한국'과 일본은 수직적인 국제 분업 관계를 설정하고, 한국의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일본의 노동 집약적 산업과 사양 산업을 한국에 이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경공업, 중소기업을 한국에 많이 이전하고 기술 지도도 해주겠다는 것도 들어 있다. 어쨌건 일본이 한국에 대한 자본 진출을 포함해 경제 진출에서 어떤 구도를 갖고 있었는가, 또 얼마만큼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는가를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1965년 한일 국교가 정상화될 기미를 보이자 일본 재계를 대표하는 경단련(게이단렌), 그리고 일본섬유기계협회, 일본산업기계공업회, 일본경제조사협회 같은 데서 시찰단을 다 파견한다. 일본 주요 경제 단체가 다 그렇게 해서 '엔화의 매머드 출장'이라고도 부른다. 한마디로 뭔가 될 것 같으니까 일본 기업의 한국행 러시가 막 이뤄지는 걸 볼 수 있다.

한미일 3각 안보 체제 강화 위해 한일 수교 원한 미국

프레시안 : 한일 회담은 미국도 바라는 일이었다. 미국의 전후 동아시아 구상에서 핵심 축인 한미일 3각 안보 체제를 강화하는 데 한일 국교 정상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중석 : 한일 회담이 이뤄져야 할 또 하나의 큰 이유가 있었다. 미국의 요구다. 미국은 1950년대에도 이승만 정부에 한일 국교 정상화를 강력히 권했다. 그 때문에도 야당이 '한일 국교 정상화를 해야 한다'는 논리를 적극 펴고 그랬다. 1960년대 들어 미일신안보조약 체결과 함께 미국도 그 부분에 대해 더욱더 중요성을 느끼게 된다. 안보, 경제, 정치를 연결하는 이른바 동아시아 통합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들어 동아시아 정세가 크게 변화하면서 미국으로서는 그런 필요성이 더 커졌다. 특히 1964년에 가면, 1월에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중국을 승인하고 10월에는 중국이 핵 실험에 성공한다. (1949년 국민당이 공산당에 밀려 대만으로 쫓겨 간 후에도 서방 국가들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신중국을 승인하지 않았다. 여전히 대만의 국민당 정권이 중국을 대표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이와 달리 드골이 이끄는 프랑스는 서방 국가 최초로 마오쩌둥 정권을 중국의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편집자>) 1950년대부터 미국은 중국 포위 정책을 썼다. 중국 상공에 항상 미국 비행기가 떠서 사진을 찍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랬다. 1960년대에는 중국의 성장과 더불어, 미국으로서는 중국에 대한 포위 정책을 강화할 필요성을 훨씬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또 이때쯤 되면, 미국이 월남에 대한 개입을 점점 더 강하게 한다. 1963∼1964년에는 빠져나오기 어려운 상태가 되고 1965년에 가면 폭격 등의 형태로 개입하게 된다. 베트남전쟁 문제 때문에라도 한미일 3각 안보 통합 관계가 미국으로서는 절실하게 됐고, 그 때문에도 미국은 빨리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라고 했던 것이다.

프레시안 :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와 관련해 박정희의 '결단'을 부각하는 경향이 일각에 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후 욕먹을 각오를 하고 결단했기에 한일 국교를 정상화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일본에서 자금을 들여와 경제 개발을 할 수 있었다는 논리다. 달리 말하면, 박정희가 결단하지 않았다면 일본 자금의 국내 유입은 매우 적었거나 그 시기가 상당히 늦어졌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일 국교 정상화를 불가피한 것으로 만든 시대의 흐름, 국내 정치 상황과 국제 정세를 두루 살피면 그렇게 보기가 어렵다.

서중석 : 그렇다. 지금까지 한 얘기를 정리하면, 5.16쿠데타가 없었다면 1962년이나 1963년, 늦더라도 1964년을 전후한 시기에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장면 정부가 짧은 시기밖에 존재하지 못했지만, 그 시기의 한일 회담 진전 상황을 고려하면 그렇게 볼 수 있다. 한일 국교 정상화가 될 수밖에 없던 국내 상황, 일본과 미국의 상황에서도 드러나듯이, 장면 정권이 아닌 다른 민간인 정부였다고 하더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박정희 정부의 경우에는 1965년 연말에 가서야 한일 국교를 정상화한다. 그해 12월 비준서를 교환하며 국교 정상화가 실현되는데, 박정희 정부의 경우에도 다른 문제만 없었으면 빨리 될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1962년에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를 끝내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건 무리한 것이었다. 1963년 민정 이양기에는 한 해를 완전히 공치다시피 했다. 한일 회담을 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선거 기간 중에 1962년의 한일 관계(예컨대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어땠는가 하는 것만 폭로됐으면 그 선거에서 박정희 쪽은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야당이 정보 부족 때문인지는 몰라도 1961년과 1962년에 어떤 식의 한일 관계가 있었는지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선거 쟁점이 전혀 안 되다시피 한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이렇게 1963년을 공칠 수밖에 없었고 1964년에 가서 3월에 구체화하려는 순간 엄청난 기세로 반대 운동이 일어나버린 것이다. 그러다보니까 또 한 해를 제대로 못했다. 그래서 1965년에 가서야 6월에 조인하고 8월에 비준하고 연말에 정식으로 국교 정상화를 하는 방식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박정희 정부 경우조차, 잘 대처했더라면 국교 정상화가 좀 더 빨리 됐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예순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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