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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힌 한국, 일본·미국 짬짜미에 또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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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힌 한국, 일본·미국 짬짜미에 또 당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66> 한일협정, 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덟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일협정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1961년 일본에서 한일 회담과 관련해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다.

서중석 : 1961년 11월 12일 박정희 의장과 이케다 하야토 수상이 일본 수상 관저에서 정식 회담을 했다. 박정희-이케다 회담에서 박 의장은 "청구권 문제에 성의를 보여준다면 자유당 정권 같은 막대한 금액의 청구권을 요구하지 않겠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적인 배상 등도 요구하지 않을 작정이다",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가 일본에 도착한 1961년 11월 11일 저녁 일본 수상 관저에서 만찬회가 열렸다. 그러나 박정희와 이케다 하야토는 이 자리가 아니라, 이튿날 오전 10시부터 두 시간 동안 계속된 정식 회담에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회담 직후인 12일 오후 박정희는 기자들을 만나 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청구권, 평화선 등과 관련해 중요한 발언을 했다. 이를 보도한 1961년 11월 13일 자 <동아일보> 기사의 해당 부분은 이렇다.

"대일 재산 청구권에 대해서 일본 국민이 오해할지 모르나 우리의 청구권은 전쟁 배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말한다. 확실한 법적 근거가 있어서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청구권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성의를 갖고 있느냐는 것이 회담 성패의 관건이 될 것이다." "일본 정부가 대일 청구권 문제에 있어 한국 국민이 납득할 만한 성의를 표시한다면 우리는 신축성 있게 평화선 문제를 다룰 용의를 가지고 있다." <편집자>)

그건 앞으로 한일 회담에서 사용할 전략·전술을 한꺼번에 다 버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치적인 배상, 한마디로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는 건 참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정말 흉허물 없는 사이라고 생각해서 얘기했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상대방 수상을 흉허물 없는 사이로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겠나. 그리고 청구권에 대해서도 자유당처럼 막대한 금액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한 것도, 과연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프레시안 : 청구권, 평화선 등에 대해 박정희가 취한 태도는 나중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서중석 : <아사히신문>에서 회담 바로 다음 날 보도한 게 있다. "이케다-박 회담이 가져온 성과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할 건 청구권 처리 방식에 대해 쌍방이 합의에 도달했다는 것"이라고까지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다. 배상은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일본이 청구권 문제에 성의를 보여주면 한국도 평화선 문제를 신축성 있게 처리할 용의가 있다"고 박 의장이 얘기했다고 보도했다. 이게 아주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한마디로 이케다-박 회담이 청구권 처리 방식에서 얘기한 건 "이제 한국의 대일 청구권 요구는 개개의 한국인의 은급", 이건 일제 때 전쟁과 관련한 활동을 한 사람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은급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과) "미지불 임금 등을 중심으로 한 청구권이지 배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일본 측의 주장을 한국 측이 인정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맨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저들의 주장을 인정하고 들어가 버렸다고 하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는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당사국이 아니기 때문에 배상 청구권을 요구할 수 없고, 다만 영토 분리로 인한 민사상 청구권을 명확한 근거를 갖춰 요구할 수는 있다'는 것이 일본의 기본 태도였다. <편집자>)

박정희 의장은 11월 12일 이케다 하야토와 한 회담에서 평화선 문제에 대해 신축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이건 일본 측으로서는 '평화선 문제는 이제 다 해결된 것이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지난번에 살핀 것처럼 1961년 7월 최덕신이 대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평화선 철폐를 고려할 것"이라고 한 것도 그렇고, 이런 이야기를 처음부터 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것 아닌가. 나중에, 그러니까 1964년과 1965년에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정부는 '우리는 평화선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그렇지만 일본 정부와 내각에서는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한다. 평화선은 한국 측이 포기한 것으로 내각 관계자들이 올린다. 그러니까 국민들이 이걸 어떻게 보겠나. 한국 정부는 아니라고 하는데 일본 정부는 저렇게 나오고 있을 때 많은 사람은 '정부가 평화선을 일찌감치, 처음부터 포기한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평화선과 관련해 한국인의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한일 회담 반대 시위가 일어나는 것을 초래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평화선과 관련된 것도 군사 정권의 미숙함, 굴욕적 저자세를 잘 보여준다.

▲ 일본과 미국의 담합으로 한국은 대일 전승국이 되지 못했다. 이에 더해 박정희 정권이 배상 요구를 포기하면서 과거사 문제는 한일 회담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못했다. 국교 정상화 후 수십 년이 지났지만 과거사 문제가 여전히 살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일 회담 의제에도 오르지 못한 '위안부' 문제도 그중 하나다. 사진은 2010년 2월 8일,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일본 외상 방한을 앞두고 일본 대사관 앞에서 과거사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모습. '99엔'은 2009년 일본 정부가 근로정신대였던 여성들에게 후생 연금 탈퇴 수당금으로 지급한 돈이다. ⓒ연합뉴스


사라진 배상, 뒷전으로 밀린 평화선…박정희의 무리수

프레시안 : 박정희 의장이 "우리의 청구권은 전쟁 배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말한다"고 한 것도 논란거리다.

서중석 : 배상 청구권 문제에 대해서도 군사 정부가 여러 가지를 충분히 고려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배상과 관련해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많이 이야기하지 않나. 그런데 이 조약을 체결할 때 필리핀, 인도네시아, 미얀마(버마), 베트남 다 초청을 받았다. 물론 이 나라들이 미국,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일본과 싸운 게 조금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군 활동이나 독립 운동으로 일제와 싸운 것과 이런 나라들이 잠깐 싸운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한국은 초청을 받지도 못했다. (중국과 북한도 초청을 못 받았다. 대일 강화 조약은 이처럼 일제 침략의 최대 피해자이자 가장 격렬하게 맞서 싸운 나라들을 배제한 채 체결됐다. <편집자>) 이런 점을 생각해야 한다.

또 한 가지, 배상과 관련해 많은 한국인들도 잘 모르는 문제가 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적극적으로 한국의 참여를 막은 것은 일본이다. 그런데 일본이 무슨 이유로 막았는가, 이걸 잘 알아야 한다.

2001년 일본 아사히TV가 보도한 건데, 그 보도에 따르면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부 특별 고문, 조금 있으면 미국 국무부 장관이 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바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초안 담당 특사였다. 이 사람의 초안에는 한국을 대일 전승국으로 명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요시다 시게루 총리에게 설득당해서 한국이 조인국에 참여하지 못하게 됐다.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아주 강하게 반대했다.

요시다 시게루는 한국이 조인국에 참여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문서로 제시했는데, 이렇게 돼 있다. "한국은 일본과 전쟁 상태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 이건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요시다 시게루의 논리대로 한다면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배제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편집자>) 그리고 한국의 독립군은 일본과 계속 싸우지 않았나.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인 건데, 일본 측은 그런 주장을 펴면서 한국의 참여를 막았다. 더 커다란 이유는 바로 그 뒤에 나온다. "한국이 조인국이 되면 한국인들이 연합국과 동등한 재산 청구권과 배상금을 주장할 것이다. 재일 한국인이 100만 명이나 되는데, 이 사람들이 증명할 수 없는 과도한 배상 청구를 할 경우 일본은 혼란을 피하기 어렵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에 더해 요시다 시게루는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이 대부분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미국이 경기를 일으킬 만한 이야기였다. 요시다 시게루와 존 포스터 덜레스는 1951년 4월 23일, 한국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배제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체결했다. <편집자>)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한국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과는 다르다. 일본 침략으로 인한 피해가 다방면에 걸쳐 있고, 논의해야 할 대상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배상 문제도 우리가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 국가가 저지른 일로 인한 피해가 배상 문제의 주요 대상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볼 때, 주장할 수 있는 것이 굉장히 많다. 물론 일본 측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한국의 참여를 막은 것처럼 이것도 똑같이 막으려고 했겠지만, 한국 정부가 상당한 노력은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군사 정부는 한일 회담을 다시 열자마자 배상 같은 건 요구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나갔다. 도대체 전략·전술이 있는 사람들이냐, 이런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조인하는 딘 애치슨 미국 국무부 장관. ⓒ위키미디어커먼스


일제 35년 지배에 맞서고도 배상 한 푼 못 받은 한국

프레시안 : 일본에 35년간 짓밟힌 것에 더해, 1951년에는 일본과 미국의 짬짜미에 다시 된통 당한 셈이다.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한다는 밀약)을 떠올리게 만든다.

서중석 : 한국과 중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배상을 강하게 요구할 수 있는 나라다. 그런데 박정희 군사 정부는 너무 빨리 배상 문제를 포기하고 청구권 협상으로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청구권 협상조차 바로 액수 문제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좋은 조건으로 해주면 된다', 이런 식으로 된다.

한일 회담은 박정희-이케다 회담이 있던 무렵부터 구체적으로 열리다가 1962년 3월 양국 외상 회담이 결렬되면서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중 그해 6월 한국에서는 화폐 개혁 문제가 생기고, 바로 이어서 7월에는 일본에서 제2차 이케다 내각(제2차 개조)이 출범한다. 이때 오히라 마사요시가 외상으로 등장하면서 일본 쪽에서 한일 문제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박정희 의장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보내고, 김종필은 10월 21일과 11월 12일,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 오히라 마사요시를 만난다. 그 결과 1962년 11월 12일, 그 유명한 김-오히라 메모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 메모의 요지는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 경제 협력 1억 달러', 이런 정도로 김종필과 오히라 마사요시가 합의했다는 것이다. 김-오히라 메모는 밀실 외교, 흑막 외교의 대명사로 불리며 나중에 한일협정 반대 시위대에 악명을 떨치게 된다. '그 뒤에 뭔가 있지 않느냐', 이런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어쨌든 한일 회담은 김-오히라 메모에서 마치 일단락된 것처럼 되기도 하다가, 민정 이양기를 맞이하면서 모든 게 멈추고 만다.

배상 포기 결정의 부작용

프레시안 : 1965년 타결되는 한일기본조약과 여러 협정의 내용을 살펴보면, 중요한 여러 문제가 제대로 다뤄지지 않거나 아예 논의조차 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배상 문제를 그렇게 포기해버린 것과 무관치 않다.

서중석 : 과거사 사과, 을사조약과 병합조약 등 조약 문제, 그와 관련된 식민 지배나 강제 연행, 징병, 공출 문제 같은 것들을 한일 회담에서 충분히 논의할 기회를 갖기 어렵게 됐다. 배상 문제가 없어져 버렸으니 이런 문제들이 얼마만큼 얘기될 수 있었겠나. 그래서 청구권에 논의를 국한하게 됐다. 그런데 그것도 구체적으로 청구권의 내용을 가지고 논의한 게 아니었다.

(예컨대) '강제 연행된 사람들로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데' 하면서, 그러니까 청구권에서 요구할 여러 사항들에 대해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면서 회의했다고 보기가 어렵다. 구체적인 자료를 모으고 조사하고 연구하는 작업이 청구권 회의에서도 사상이 된 것이다. 그러니 액수에 치중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액수는 높더라도 사실 한국인이 만족하기가 어렵게 돼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 의장은 김종필을 보내 이걸 딱 처리하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김-오히라 메모는 그 존재가 알려지기는 했지만 제대로 공개가 안 됐다. 알 만한 사람은 '그게 어떻다더라'라고 했는데, 그것만으로 알려진 게 아니라 '그 뒤에 또 뭐가 있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연결됐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는 잘 안 알려졌다. 이게 공개되는 건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 일어나는 1964년 3월 이후로 보인다. 3월 24일 시위가 일어난 후 3월 30일, 박정희 대통령은 학생 대표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학생 대표들이 김-오히라 메모 공개를 요구하자, 박 대통령이 공개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게 나온다. (그다음 날인 3월 31일 학생 대표 57명에게 김-오히라 메모를 비공식적으로 공개한 것으로 돼 있다. <편집자>) 그걸 보더라도 국민들이 사실상 잘 모르고 있었고 그만큼 의혹에 싸일 수밖에 없었다. 이게 공개됐어도 의혹에 싸일 수가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되니까 여기에 대한 반대 운동이 굉장히 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보니 군사 정부는 재일 교포 문제나 문화재 문제 같은 것엔 관심도 갖지 않고 무대책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한마디로 조사하고 자료를 모으는 일을 했다는 게 별로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되니까 민단계에서도 일각에서 반대하고 그런다. 민단계 청년들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데모하고 그랬다. 재일 교포 문제, 문화재 문제, 청구권, 평화선 문제를 다 들고나왔다.

프레시안 :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기본 원인은 일본에 대한 저자세였지만, 그에 더해 여러 국내 요인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서중석 : 1964년과 1965년에 시위가 그렇게 커진 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전력에 대한 의구심도 작용했다. 보수적인 종교인들을 비롯한 각계 지도층에는 박 대통령의 좌익 전력에 대한 의구심이 계속 있었다. 그들을 써놓은 글 같은 걸 보면 그런 게 나온다. 중앙정보부장을 하는 김형욱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걸 갖고 있는 사람이 있지 않나. 희한한 일이다.

또 박정희와 김종필의 민족적 민주주의는, 학생이나 지식인 등에게 '그게 도대체 뭔가' 하는 의구심을 계속 자아냈다. '행정적 민주주의를 말한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건 있어도 구체적인 내용을 밝힌 건 별로 없기 때문이다. 1963년 선거에서도 이 이야기가 나왔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이라는 건 별로 얘기를 안 했다. 그리고 5.16쿠데타 직후에 그 많은 혁신계, 진보 세력을 구속한 것에 대해 통일을 희구하는 세력이라든가 학생 등은 상당히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인 것이다. 그리고 1961년과 1962년에 경제가 잘된 게 하나도 없지 않았느냐 하는 것들이, 1963년 선거에서 도시민의 대다수가 박정희를 안 찍고 야당을 찍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았나. 그게 1964∼1965년에 또다시 폭발한 것이다. 1964∼1965년에 그렇게 크게 폭발한 것에 대해서는 이처럼 여러 가지를 살펴봐야 한다.

굴욕적 저자세는 한일 회담에도, 청구권 액수에도 도움 안 됐다

프레시안 : 당시 상황에서 역사 문제 등을 제대로 해결하고 배상도 충분히 받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그림이었나 하는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다.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한국인의 자존심을 충분히 지키면서도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었다고 보는 건 무리한 것 아니냐는 시각이다.

서중석 : 내 얘기는 박정희가 처음부터 굴욕적 저자세로 나간 게 한일 회담에 하등의 도움이 안 됐고 청구권 액수를 정하는 데도 도움이 안 됐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정권이 했더라도 일본을 상대로는 애먹게 돼 있었다. 일본은 지독한 면이 있고 한국을 아주 깔보지 않나. 그리고 한국을 손에 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박정희보다는 나았을 것이라고 본다. 청구권 액수도 박정희가 받아낸 것보다 적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때쯤 되면 일본엔 줄 돈이 있었다.

프레시안 : 이 사안은 한일협정 반대 투쟁을 한 쪽에서 "외세 의존이 아닌 민족적 자립"을 주요 구호 중 하나로 내건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닿아 있다. 단순화해서 거칠게 말하면, '그게 현실에서 가능한 일이었나? 당시 북한처럼 했어야 한다는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게 가능하다.

서중석 : 그건 상당히 복잡한 문제를 품고 있다. 단순한 대답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실 종교인들이 반대한 이유도 가만히 보면, 저자세와 굴욕적 태도가 제일 크지만 일본 자본의 침투를 경계하는 것도 아주 강하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워낙 약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자립 경제를 내세운 건 아닌데, 학생들의 경우 그 부분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매판 자본이라고 하면서 일본 자본 전체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었다.

그런 부분은 박정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교섭할 경우에도 부닥칠 수 있는 문제다. 예컨대 장면 정부 때도 이미 재일 교포를 통해 일본 돈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장면 정부 때는 별로 문제가 안 됐다. 하여튼 정부 쪽에서는 그런 돈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들어오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경제가 운용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학생 쪽에서는 그런 것에 대해 민족주의적인 견지에서 강하게 반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건 결국 구체적인 현실과 맞닥뜨리면서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자기 생각을 현실화해나가고, 정부는 정부대로 학생 의견을 들으면서 '너무 매판적인 성격을 보이면 안 된다', 이런 점을 또 생각하는 식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역사에서는 조정과 타협을 꼭 눈에 보이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은연중에 서로 정책을 펴가면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박 정권은 그런 면에서도 경색돼 있었다. 그러니까 학생들도 경색된 태도를 보인 것이다.

1970년대에 '일본 경제에 한국이 종속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대일 부채 증가에 대한 위기감이 있었다. 정말 많이 있었다. 그와 함께 부익부 빈익빈 현상, 재벌 중심, 이렇게 세 가지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데 나중에(1980년대 이후) 경제가 발전하면서 그 부분들이 상당히 완화된다. 또 세계 경제가 바뀐다. 예컨대 우리는 달러로 빚을 갚고 있는데 이자율이 갑자기 떨어진다든가 하는 여러 현상이 나타났다. 그렇지만 박정희 정권에 대해 비판해야 할 것은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당시 학생들 것만 다 옳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학생들 주장에 비현실적 대목도 있었다. 박현채 선생의 <민족 경제론>에 사실은 좀 문제가 있었다. 개방 시대에 맞지 않는 면이 있었다. 그런데 박 정권 시대는 또 개방 시대도 아니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은 개방된다. 그전엔 폐쇄적인 게 강했다. 이렇게 논의가 참 복잡하게, 어렵게 전개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내 말을 요약하면, 정상적인 정부와 정상적인 진보 학생이라면 계속 자신들의 주장을 하고 서로 생각을 수정해가면서 최대한 현실적 대안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데 박 정권 때는 그런 면에서도 경색돼 있었다는 것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예순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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