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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변의 과잉, 사변의 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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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변의 과잉, 사변의 과소

[프레시안 books] 서동진 <변증법의 낮잠>

서동진 교수(이하 필자로 약칭)의 신작 <변증법의 낮잠 : 적대와 정치>(꾸리에, 2014년 12월 펴냄)를 읽으면서 평자는 이 책의 서평을 맡은 것을 약간 후회했다. 필자 자신이 직접 서평을 부탁하지 않았다면, 이 책의 서평을 쓰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내가 이 서평을 고사하기 위한 이유는 많다. 책에서 다루는 까다로운 내용에 비하면 주어진 시간이 짧을 뿐더러, 무엇보다 내가 연말까지 꼭 끝내야 할 일들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연말연시에 서평이라는 악역을 맡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어쨌든 나는 서평을 쓰기로 약속했고(새해에는 부디 약속에 신중한 인간이 되었으면!), 지금 마감 시간에 쫒기면서 지면을 메워가고 있다.

매우 사변적인, 하지만 덜 사변적인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기 전에 이 책을 읽은 감상을 이야기한다면, 참 매끄럽게 잘 쓴, 그리고 그 덕분에 술술 읽히는, 하지만 그 내용은 상당히 결기를 품고 있는, 그런데 매우 사변적인 논의가 주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런 논의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무엇이 문제인지 잘 가늠하기 쉽지 않을, 그래서 왜 "이토록 논쟁적인 책은 없다!"는 선전 문구가 책의 띠지에 적혀 있는지 잘 이해하기 어려운, 그럼에도 좌파 정치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숙독해볼 만한 책이라고 요약해볼 수 있겠다.

또 하나의 감상을 덧붙이자면, 책을 읽으면서, 특히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논의가 너무 사변적이어서 깜짝 놀랐다는 점이다. (또 좌파 정치 또는 급진 정치를 생각하고 논의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멋지게 사변적으로 논의해야 하는구나 하고, 혹시 어린 학생들이 생각할까봐 걱정스러웠다는 점도 덧붙여 두어야겠다.) 더욱 놀란 것은 그 사변적인 논의의 핵심 내용이, 근저에서 본다면 루이 알튀세르와 에티엔 발리바르의 작업, 그것도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작업에 기반을 둔 것이라는 점이었다. 마치 지난 수십 년 간의 사상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구조적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듯, 필자는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논점들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학부 시절인 1980년대 후반 처음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를 접한 평자로서는, 대략 20여 년 전 숙독하던 그 논의들을 이 책에서 다시 한 번 읽게 된 셈이다.

그러니 필자의 논의가 반갑고 고무적이어야 할 텐데, 그의 책을 읽고 난 평자의 심정은 그리 편치 않다. 그것은 필자의 이 사변적인 논의가 매우 선별적인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낫겠다. 필자의 논의는 한편으로는 과잉 사변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소 사변적이기도 하다. 과소 사변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이유만 들자면, 필자의 논의에는 이데올로기론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사상적 편력을 1960년대의 구조 인과성, 1970년대의 이데올로기론, 유고집의 우발성의 유물론으로 각각 계기화해본다면, 필자는 뒤의 두 가지 측면은 빼놓은 채, 다시 1960년대의 구조 인과성의 복권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의 함의가 어떤 것인지는 뒤에서 좀 더 논의해보겠다.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꾸리에
이 글이 서평인 만큼, 책의 주요 논지를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는 것이 필요할 터이다. 이 책에서 필자가 목표로 삼는 것은 프롤로그에서 말하듯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따져보는 일이다(17쪽). 이것은 두 가지 유혹을 피해야 하는 일이다.

한편에는 자본주의 자체를 철폐하려는 거창한 목표, 흔히 말하듯 거대 서사에 기반을 둔 반자본주의적 변혁(이전에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불렀던 것)을 추구하는 대신 주변의 이런저런 불행들을 행복으로 바꿔나가는 구체적 유토피아의 정치, 곧 "행복의 정치라는 긍정의 정치"(같은 곳)가 있다. 필자에 따르면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략이 아닌 예언에 기반을 둔 것으로, 정치보다는 예언의 과학을 자처하는 보험 설계나 재무 분석의 도움을 더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쪽에는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추상적 보편에 기반을 둔 위대한 부정의 정치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구체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구체적 유토피아의 정치는, 지젝의 표현을 빌리면 "기회주의자들"에게나 알맞은 것이고 쪼다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행복하게 지낼 양이면 쪼다로 살면 된다. 진정한 주인들이란 결코 행복하지 않다. 행복은 노예들의 범주다."(15쪽에서 재인용) 정치라는 이름에 값할 만한 정치는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행위 자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관점과도 거리를 둔다. "이 역시 행복이라는 이상에 굴복하는 것 못잖게 공허하다. 위대한 부정의 몸짓을 찬미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부정을 통해 어떤 세상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책임을 회피하고 기꺼이 궂은일을 마다치 않을 각오로부터 도망하는 것은 졸렬한 일이다."(16쪽)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극복을 추구하면서도 궂은일을 마다치 않는, 구체적인 현실적 쟁점들을 관통하면서(또는 매개하면서) 보편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필자는 이를 보여주기 위해 본문의 논의를 구성하고 있다. 모두 5장으로 이루어진 본문은, 세월호 문제를 다루는 마지막 5장은 별개로 하면, 네 개의 논리적 계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논리적 계기는 흥미롭게도 각각 하나의 개념쌍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인민이여 안녕, 민주주의의 안녕'이라는 제목이 붙은 1장에서는 "보편적인 주권적 주체로서의 인민" 대 "구체적인 여러 가지 사회적 집단의 총체로서의 인민"(30쪽)이라는 개념쌍이 문제다. 이것은 또한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클로드 르포르가 제시한 바 있는 "정치적인 것" 대 "정치"라는 개념쌍과 겹친다. '달아나는 사회, 그리고 사회-주의 이후의 정치'라는 제목의 2장에서는 사회적인 것 대 사회라는 개념쌍이 중핵을 이루고 있다. 필자의 규정에 따르면 "사회적인 것, 즉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모순"(61쪽)이 "얼마간의 역사적 시대 동안 취했던 특수한 형태"(53쪽)가 바로 '사회'다.

그런가 하면 3장 '제거할 수 없는 정치의 불변항, 노동'에서는 "노동권"(droit au travail)과 "노동의 권리"(droit du travail)라는 대립쌍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된다. "자유의 근거로서 스스로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를 영유할 수 있는 권리"(107쪽)를 가리키는 노동권과 달리, "노동의 권리란 인간 또는 시민으로서의 권리인 노동권과 달리 상품으로서의 노동, 노동력 상품이라는 상품으로 축소된 권리"(110쪽)를 가리킨다. 그리고 필자에 따르면 "이때 소유의 원천이었던 노동은 상품으로서의 노동으로 탈바꿈된다."(같은 곳)

4장 '종합할 수 없는 두 가지, 정치와 경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경제적인 것"과 "경제"라는 개념쌍이다. 경제라는 개념이 가리키는 것은 자신의 독특한 법칙을 지닌, 자율적인 실체로서 나타나는 것이다.(176쪽) 경제학자들이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이것일 테고, 또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이든 아니면 신자유주의자들이든 정치를 결정하거나 또는 그것을 대체한다고 간주하는 것도 바로 이 경제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필자에 따르면 경제적인 것은 "적대적인 사회관계, 계급투쟁"(같은 곳)과 다르지 않으며, 경제가 경제로서, 곧 자신의 법칙을 지닌 자율적인 것으로서 출현하기 위해서는 "적대적인 사회관계, 계급투쟁을 억압하고 제거"(같은 곳)해야 한다. 그렇다면 역으로 좌파 정치란, 필자가 지젝을 원용하여 주장하듯이, "경제의 자기 이중화"(178쪽), 곧 우리가 현실 경제라고 부르는 것 이외에 적대적 사회관계로서 경제를 드러내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논의를 거쳐 필자는 결론에 해당하는 '코다-낮잠 자는 변증법'에서 "단체를 조직하는" 일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필자에 따르면 변증법은 단체를 조직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단체로서 조직화한다는 것은 이미 세계의 모순을 다른 방식으로 주관화하면서 동시에 객관화하는 것"이며, "조직화된 노동자 계급이 서 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주체의 편에서의 전환이 아니라 객관적인 현실에서의 전환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이 조직화되어 자신을 새롭게 주체화할 때 자본은 전과 같은 방식으로 생산방식을 조직할 수 없고, 이윤을 착취할 수 없으며, 국가를 지배할 수 없으며 (…) 등등이다."(224쪽)

또한 변증법적으로 사고한다는 것, 곧 "세계를 모순으로서 바라본다는 것은 세계의 악이라든가 고통을 발견하고 그것을 비난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서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세계를 탐색하고 추궁하는 것이다."(227쪽) 필자에게 "정치란 그런 변증법적 부정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이제 낮잠 자는 변증법을 깨울 때가 되었다.

네 가지 개념쌍에 관하여

이 책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서평에서는 세 가지 점에 대해서만 몇 마디 논평을 해보기로 하겠다. 이 책에는 이밖에도 숱한 쟁점들이 담겨 있지만, 그것들을 충분히 다루기에는 내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적다. 앞으로 필자와 토론을 위한 계기가 더 있을 것이니, 다른 문제들은 그때 생각해봐도 될 것이다.

우선 이 서평의 제목에 대해 몇 마디 해명을 해보기로 하자. 나는 서평의 제목을 "사변의 과잉, 사변의 과소"라고 붙였다. 우선 내가 사변적이라는 말을 경멸적이거나 부정적인 뜻으로 쓰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두어야겠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정치에 대해 사고하는 목표를 지니고 있고, 그 목표를 해명하기 위한 논의로 조직되어 있는, 이 책과 같은 종류의 저작이 사변적이지 않을 수는 없다. 실로 마르크스의 <자본> 자체가 지극히 사변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주어져 있는 사실을 사실로 보지 않고, 그것의 기원이나 목적 내지 결말을 따지는 것, 또한 그 기원 및 목적(결말)의 근거를 헤아리는 것이 고전적인 의미에서 사변(또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형이상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이라면, 자본주의가 보편적인 생산양식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유한한 생산양식이라는 것, 그리고 그 생산양식의 근저에는 그것의 파괴 내지 종말로 이끄는 모순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 그러한 모순은 자본주의의 기원 자체를 이루기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책이 사변적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사회주의가 현실적인 정치 체제로 존재하던 시기, (특히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러한 사변을 과학이니 역사의 법칙이니 하는 별도의 이름으로 불렀을 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자체의 유래와 결말을 해명하고, 더욱이 그것의 본질에 자리 잡은 모순에 입각하여 그 해명을 수행하려는 작업은 사변적이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사변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일 텐데,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이 책은 사변이 과하면서도 또한 부족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동일한 현상의 두 측면이다.

우선 이 책의 중심을 이루는 네 가지(또는 다섯 가지) 개념쌍을 살펴보자. 필자는 이 개념쌍들을 통해 인민, 정치, 사회, 노동, 경제 같은 문제들, 따라서 자본주의적 모순 및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의 쟁점들이 해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이 대립쌍들은, 필자가 인정하듯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적인 것과 존재적인 것, 또는 존재와 존재자라는 대립쌍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거슬러 가면 거기에는 칸트 식의 초월론 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때문에 누가 뭐라 하든 간에 하이데거가 없는 20세기 유럽 철학, 특히 프랑스 철학은 생각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개념쌍들의 요점은, 하나는 사태의 현상적인 모습 또는 실정적인 측면들을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현상의 근저에 있는 사태의 진상 내지 원리를 표현해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제도적인 정치의 질서, "현실 정치" 배후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원리와 규칙을 새롭게 창안하는 실천으로서의 정치"(29쪽)가 있으며, "각자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진 사회집단의 묶음"으로서 인민 또는 인구의 맞은편에는 민주주의의 보편적 주체로서 인민이 존재한다. 또한 1848년 혁명 이후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적대를 완화하기 위해 설립된 사회는 "사회적인 것, 즉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모순"(61쪽)이 지닌 "특수한 역사적 형태"(87쪽)다. 노동의 권리와 노동권, 경제와 경제적인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쌍의 맹점 중 하나는 이것들이 꼭 이원적인 대립쌍으로, 그것도 각각 양쪽에 꼭 하나의 항만이 존재하는 이원적 대립쌍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마치 하나의 보편적인 것과 하나의 특수한 것, 또는 하나의 초월론적인 것과 하나의 경험적인 것이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라는 철학의 보편적 범주를 문제 삼았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로 잘 드러나지 않았다면, 하이데거를 원용하는 사상가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문제점이 곧바로 부각된다.

왜 보편자는 하나뿐일까? 그리고 왜 그 보편자는 정치적인 것이거나 경제적인 것 등일까? 가령 어떻게 르포르는 '정치적인 것'에 대해,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등을 포함하는 사회 영역 전체, 곧 인간적 삶의 영역 전체를 창설하는 특권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일까? 그 존재론적·논리적 근거는 무엇일까? 르포르는 이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않는다. 아니 질문 자체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굳이 장황한 형이상학의 영역에 뛰어들지 않고도, 마르크스주의에 맞서 정치적인 것에는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또는 오히려 경제를 근거 짓는 초월론적 역량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상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 근거는 근대의 역사적 경험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르포르는 메를로 퐁티의 제자답게 현상학적이다.

그렇다면 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경제 또는 경제적인 것에 대해 최종 심급의 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일까? 알튀세르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최종 심급으로서 경제 또는 필자의 용어법대로 하면 '경제적인 것'을 주장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에 관한 유일한 과학, 진정한 과학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과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존에 존재하는 이런저런 과학들이 사실은 과학이 아니라 전(前)과학적인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드러내줄 수 있는 과학이다. 알튀세르가 가스통 바슐라르나 조르주 캉길렘이 제창한 과학철학을 원용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갈릴레이-뉴턴의 물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물리학이 사실은 전과학적 이데올로기임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진정한 과학임을 보여주었듯이, 역사유물론은 기존의 사회과학, 특히 경제학 내지 정치경제학이라고 불리는 학문이 사실은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정치경제학 비판) 자신의 과학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 과학이 경제 내지 경제적인 것이 지닌 최종 심급으로서 지위를 보증해준다.

필자의 경우에는 한편으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르포르나 로장발롱을 원용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알튀세르의 구조 인과성을 옹호하기 때문에 사정이 더 어려워진다. 더욱이 필자는 스스로 이들을 모방하여 사회 대 사회적인 것이라는 새로운 개념쌍을 추가하고, 몇몇 프랑스 사회과학자들의 논의의 도움을 받아 노동의 권리 대 노동권 역시 비슷한 개념쌍의 지위를 부여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필자는 이 모든 개념쌍이 동일한 이론적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듯한데, 그것은 그가 이 모든 개념쌍을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정치의 문제를 사고하기 위한 목적에 따라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구가 됐든, 정치가 됐든, 아니면 사회나 경제, 노동의 권리가 됐든 개념쌍의 한쪽 항은 모두 자본주의적 모순과 적대를 은폐하거나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적 항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내가 경향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필자의 논의에 얼마간의 애매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면 인민,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경제적인 것, 노동권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진정한 정치의 개념적 지주들로 나타난다. 하나의 개념쌍으로 사태를 설명하는 데에도 수많은 난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필자의 사변적 논의는 과도하면서 과소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네(다섯) 가지 개념쌍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과도하다면, 그것들 사이의 적절한 논리적 관계는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과소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라는 쟁점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제는 좀 더 간단히 이야기하기로 하자. 서두에서 지적했다시피 사변의 과소의 또 다른 이유는 이데올로기론의 부재와 관련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1970년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론에 몰두한 것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다른 글에서 나는 이를 변증법의 '과소 결정'이라는 측면에서 해명한 바 있지만(진태원, '과잉결정, 이데올로기, 우발성: 알튀세르와 변증법의 문제', 진태원 엮음, <알튀세르 효과>, 그린비, 2011 참조), 다른 각도에서 말하면 이데올로기는 구조 인과성의 현상학적 측면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아주 역설적인 현상학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말하자면 주체의 불가능성의 현상학이기 때문이다. 주체의 불가능성의 현상학인 이유는 첫째, 이데올로기 이전에 주체란 존재하지 않고,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만,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만 주체가 구성될 수 있다면, 정의상 모든 주체는 이데올로기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둘째, 따라서 알튀세르는 공산주의에서도 이데올로기가 지속된다고 말했는데, 이는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는 이데올로기의 존재로 인해 축소된다는 것(또는 심지어 극단적으로 본다면, 양자가 구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로 인해 제기될 수밖에 없는 문제는, 이행의 극도의 어려움 또는 심지어 이행의 불가능성이라는 문제만이 아니라(이것이 과소 결정이라는 말의 원래 뜻이다) 과연 이행의 근거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곧 자본주의보다 공산주의가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착취가 없는 체제이기 때문에? 그런데 공산주의 사회(만약 이런 것이 존재한다면)에 착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엇이 보증하는가? 또는 적어도 착취가 없는 대신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착취보다 덜하다는 것을 무엇이 보증해주는가? 아마도 알튀세르가 1970년대 내내, 그리고 말년에 광기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고민했던 문제가 이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가 '코다'에서 주장하듯이, 변증법을 사고하기 위해 물신숭배나 소외를 다시 한 번 불러들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필자가 말하는 물신숭배나 소외는, 정의상 이미 진정한 주체가 (잠재적으로든 현실적이든)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필자가 1960년대의 알튀세르만을 원용하는 것, 또는 그 알튀세르를 제임슨이나 지젝과 결합시키려고 하는 것은 이유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수수께끼 같은 문제는 왜 그 주체는 주체로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가상과 기만을 꿰뚫어볼 만한 인식 능력이 부족해서? 조직화가 덜 되어 있어서? 아마 그런 이유도 존재할 것이다. 단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전제가 이미 타당한 것으로 가정되어야 할 것이다. 가령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가 훨씬 더 낫다는 전제, 이데올로기 바깥에 진정한 주체가 존재한다는 전제, 진정한 주체는 오직 반자본주의적 주체일 수밖에 없다는 전제, 곧 민족 해방이나 여성 해방, 인종 해방, 소수자 해방 등등의 모든 해방의 정치의 주체는 모두 반자본주의적 변혁의 주체로 수렴된다(또는 수렴되어야 한다)는 전제, 또한 반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정치는 진정한 정치일 수 없다는 전제 등이 당장 떠오르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런 전제들은 타당한 것들일까? 그렇다면 그 타당성은 어떻게 입증될 수 있는가?

1 : 99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1 : 99"라는 문제를, 정말 간단히, 생각해보자. 필자는 "1 : 99"라는 구호의 한계를 "그들이 어이없게도 1%를 더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25쪽)고 본다. 더 나아가 그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왜 그들은 스스로가 100%라고 주장하지 않았을까. 왜 우리가 전체라고 강변하는데 주저했을까. 왜 우리가 평등의 보편성을 주장한다고 우기지 않았을까. 아마 그들이 1%를 더하지 못한 것, 스스로를 99%가 아니라 전체, 즉 보편적인 주체라고 단언하지 못한 것이야말로 그들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1%의 부족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보 정치가 직면한 한계를 응축한다고 의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같은 곳)

평자가 보기에 필자의 논의는 1 : 99의 의미를 다소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1 : 99"라는 구호의 의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극도로 불평등하다는 것, 따라서 계급적인 불평등으로 얼룩진 체제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더욱이 1퍼센트라는 계급의 적에 맞서 99퍼센트가 연대해야 한다는 점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이는 계급투쟁의 필요성까지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만약 필자의 주장처럼 시위대가 "우리가 100퍼센트다"라고 말한다면, 여기에서 사라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계급적 불평등, 계급투쟁이 아닐까? 그 '우리' 속에는 1퍼센트의 자본가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로 민주주의의 보편적 주체에는 예외가 없다. 거기에는 노동자나 농민, 빈민, 실업자만이 아니라 대통령과 재벌 등도 모두 포함된다. 따라서 "우리가 100퍼센트다"라고 선언하기 위해서는, 인종적 차이나 성적 차이, 국적의 차이, 직업적 차이를 비롯해 계급적 차이까지, 일체의 차이가 소멸되어야 한다. 따라서 계급 적대와 민주주의적 보편성은, 이율배반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이율배반을 해결할 수 있는 개념적 수단을 지니고 있는가?

더욱이 차이 없는 현실은 현실이 아니다. 차이 없는 100퍼센트의 동일성은 오직 순간적으로만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봉기의 순간이다. 그러나 삶은 봉기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봉기 이후에는 삶이 찾아오고, 삶이 찾아오는 순간 차이는 팽창한다. 이데올로기가 세계를 뒤덮는 것이다. 사회주의 70년의 성쇠를 경험한 오늘날의 진보 정치는, 어떻게 봉기를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을 넘어서 봉기와 일상의 이율배반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도 물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여기야말로 사변이(물론 '사변만'은 아니다) 필요해지는 곳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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