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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도와 떼돈 번 미국 기업, 눈감은 백악관…추악한 2차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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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도와 떼돈 번 미국 기업, 눈감은 백악관…추악한 2차 대전

[프레시안 books] '전쟁국가 미국' <2> 자크 파월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2차 대전은 오늘의 세계를 만든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두 차례 세계 대전의 결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19세기 이후 세계를 지배해온 유럽 열강들이 2류 국가로 전락한 반면 미국과 소련이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소련이 자국 영토에서 피비린내 나는 대(對)나치 항쟁으로 기진맥진한 반면 미국 본토는 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았고, 전쟁 물자의 거의 대부분을 미국 기업들이 공급함으로써 미국은 엄청난 경기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날 당시 미국의 경제 규모는 소련의 3배에 달했다. 게다가 미국은 만능의 무기인 핵무기를 홀로 갖고 있었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세계 경제의 절반을 차지하는 최강의 경제력과 핵무기 등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패권 국가가 됐다. 1941년, 언론인 헨리 루스가 예견했던 '미국의 세기'는 2차 대전 종전 이후 지금까지 70년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2차 대전을 '좋은 전쟁(Good War)'이라고 부른다. 역사상 '가장 좋은(Best ever)' 전쟁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전쟁을 통해 1930년대의 대공황을 벗어났고, 파시즘 등 전체주의 세력을 물리치면서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의 공산 진영과 대결하면서 이른바 '자유 진영'을 이끌었다.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와 평화의 수호자임을 자부했다. 1989년 유럽의 냉전이 종식되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미국은 세계 유일의 패권 국가가 됐다. 그런데 지난 25년간 유일 초강대국 미국이 이끌어온 세계는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이 아니라 전쟁과 폭력, 가난과 경제적 불평등으로 얼룩져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와 평화의 수호자인 미국이 이끈 세계는 어쩌다 이 모양이 됐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 미국은 왜 2차 대전에 참전했으며 전쟁을 통해 이루려는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파헤쳐야 한다,

미국은 자국의 2차 대전 참전이 '세계를 구하기 위한 신성한 사명'이었다고 주장한다. 독일 나치즘을 비롯한 유럽의 파시즘과 일본 군국주의로부터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를 지키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이른바 '자유 진영'에서는 이러한 미국의 주장이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이러한 내용을 배우며, 일반인들은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할리우드 영화들을 통해 이러한 주장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지상 최대의 작전(The Longest day)>, <머나먼 다리>, <발지 전투>,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등이 그러한 영화들이다.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었다

ⓒLorimer
그러나 과연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라는 이상적인 목표를 위해 전쟁에 참여했던 것일까? 미국은 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 했던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벨기에계 캐나다 역사학자인 자크 파월(Jacques R. Pauwels)은 기존의 통념과는 전혀 다른 역사 해석을 내놓는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대외 정책은 2차 대전 이전부터 전시, 그리고 전후에 이르기까지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정책의 주된 동기는 자유, 정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미국 대기업을 비롯한 정치, 경제, 사회 분야 파워엘리트의 이익이었다. 파월은 "2차 대전은 (유럽) 파시즘과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미국의 성전이 아니라 기업의 이해관계와 돈, 이윤을 놓고 벌인 투쟁"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미국의 파워엘리트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미국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 그리고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추구했다. 민주냐 독재냐, 또는 평화적 수단이냐 군사력이냐는 중요하지 않았고, 미국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민주주의, 자유, 정의 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 책의 제목이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인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2차 대전은 미국의 파워엘리트에게는 좋은 전쟁이었을지 몰라도 대다수 미국 국민을 비롯해 제3세계 주민들에게는 결코 좋은 전쟁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파월은 그 증거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꼽는다. 첫째 포드, 제네럴모터스(GM), IBM, ITT(국제전신전화회사), 스탠다드오일 등 미국의 대기업들은 1933년 히틀러 집권 이후 독일에서 매우 수지맞는 기업 활동을 벌였으며, 더 중요하게는 전쟁 기간 동안에도 탱크와 전투기, 석유, 정보 통신 기술 등 전쟁 수행에 필요한 핵심 전략물자들을 나치 정부에 공급했다. 한때 미국 대기업은 독일군 탱크의 절반을 생산하고, 수입 석유의 90퍼센트 이상을 공급할 정도였다.

둘째,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이 해방시킨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에서 미국은 반파시스트 세력을 일관되게 억압했으며 금융가, 기업가, 대지주 등 파시즘을 지원했던 보수 세력들과 손을 잡았다. 반파시스트 세력의 지향이 급진적이며 친소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미국의 전쟁 목표는 민주주의의 회복이 아니라 미국 경제의 해외 팽창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보수 세력의 집권이 자신들의 목표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1941년 8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총리가 전쟁의 목표로 제시한 대서양헌장의 '민족 자결'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파월은 또한 독일의 분단, 냉전의 시작도 전적으로 미국이 주도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파월은 이 책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 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 서문에서 "(2차 대전이) 독재에 대한 민주주의의 투쟁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 전쟁의 '추악한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책을 썼다고 밝힌다. 나아가 이 책은 '기존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고 '분석이 아닌 종합'이며 '(2차 대전이라는) 역사적 드라마의 총체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베트남전쟁 당시 '악명을 떨쳤던' 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스, 가브리엘 콜코 등 미국의 수정주의 역사가와 C. 라이트 밀즈, 노엄 촘스키, 마이클 패런티 등 미국의 대외 정책을 비판해온 지식인들의 이론을 바탕으로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최신 역사 연구 결과 등을 활용해 집필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지난 2000년 벨기에에서 플레미시어(벨기에 북부에서 사용되는 네덜란드어)로 처음 발간됐으며, 발간 직후 4개월간 유럽에서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이후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로 번역됐고 영어판은 2003년에 나왔다. 2차 대전 종전 70주년을 맞는 올해 3월 개정판이 나온다.

저자 자크 파월은 벨기에계 캐나다인으로 토론토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요크대학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위의 두 대학 및 워털루대학에서 유럽 역사를 강의하고 있다. 이제 파월의 안내에 따라 2차 대전의 추악한 진실을 살펴보기로 한다. 2차 대전은 오늘의 세계를 만든 중요한 계기라는 점에서 두 차례에 걸쳐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파시즘을 사랑하고 공산주의를 증오했던 미국의 파워엘리트

미국에서 1930년대는 '추악한 30년대' 또는 '붉은 30년대'로 불린다. 대공황으로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겪었기에 '추악한 30년대'이고 미국의 노동자 등 서민들이 소련에 대한 동경을 품었기에 '붉은 30년대'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1차 대전으로 영국 주도의 자유무역 질서가 무너진 후 각국은 각자도생의 길을 걷는다. 미국의 뉴딜, 유럽 대륙의 파시즘, 소련의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또한 영국은 대영제국의 배타적 경제권 유지를 통해, 일본은 만주를 넘어 중국에 대한 본격적 침략을 통해 경제적 활로를 모색한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경제적 성과를 이룬 것은 파시즘과 공산주의였다.

독일 나치 정부는 1933년 집권 직후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정당을 해산하고 노동조합을 금지했으며 아우토반(고속도로) 등 인프라 건설과 재무장에 착수했다. 좌파 정당 및 노조를 해체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단결권과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는 한편 재무장을 위한 군수산업 활성화로 대공황의 근원인 수요 부족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당연히 미국의 대기업 등 파워엘리트들은 나치 정부의 경제 정책에 커다란 매력을 느낀다. 뉴딜 정책으로 노동자들의 힘이 세진 반면 정부의 대규모 공공 공사로도 경기 회복을 이룰 수 없었던 미국에 비해 나치 독일은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동시에 거대한 산업 수요를 창출해냈기 때문이다.

한편 소련은 1930년대 국가계획경제를 통해 2차 대전 후 독일의 경제 기적에 맞먹는 급속한 산업화를 이뤄냈다. 게다가 완전고용과 노후 연금 등 완벽한 사회보장제도로 '노동자들의 천국'이라는 찬사를 받게 됐다. 1930년대 미국의 노동자, 실업자, 지식인, 예술가들은 소련의 사회주의 실험(즉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대안적 사회의 건설)에 커다란 관심을 갖게 된다. 작가 맬콤 카울리는 이렇게 말한다.

"1930년대 내내 소련은 미국을 포함한 수많은 나라의 수백만 민중들에게 제2의 조국이었다. 소련은 러시아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내기 위해 인민들이 헌신하는 곳이었다. 서방의 급진주의자들에게 소련은 일개 국가가 아니라 이상이자 신념이며 인류 해방을 위한 국제적 희망이었다."

"붉은 30년대"라는 말이 나오게 된 이유다. 역사학자 제임스 밀라는 이렇게 말한다.

"소련이 위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이념적인 것이었다. 미국의 노동자, 특히 실업자들에게 공산 러시아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부각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따라서 1930년대 미국의 파워엘리트에게 소련 공산주의, 즉 볼셰비즘은 최대 위협이었다. 소련 공산주의의 성공은 곧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1930년대 미국의 파워엘리트는 '적색 공포'라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혁명(1917년) 이후 미국이 서방 국가들과 함께 소련 내전에 개입한 것은 바로 신생 공산 정부를 박멸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 유럽 파시즘은 이중의 의미에서 미국의 파워엘리트에게 매력적인 존재였다. 앞에 말한 노동자 통제와 대규모 유효 수요(군비 확장) 창출을 통해 미국 대기업의 경제적 활로를 뚫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적색 공포'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력한 해결책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드러내놓고 반소련 정책을 폈다. 집권 즉시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조 지도자들을 제거했다. 이들은 공산주의와 노동조합의 위협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가를 서방 세계에 보여주었으며, 이에 따라 '적색 공포'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미국, 영국, 프랑스 파워엘리트들의 존경을 받았다.

독일 역사가 베른트 마틴에 따르면 "히틀러는 정치 활동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볼셰비즘 박멸을 자신의 최대 임무라고 생각했다." 소련 파괴를 신이 자신에게 내린 최대의 과업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한편 후버 대통령(1929∼1933년)은 나치 독일이야말로 공산주의에 대한 요새라고 치켜세우면서 히틀러에게 소련을 멸망시킬 것을 촉구했다. (역사학자 찰스 히감에 따르면, 후버는 러시아 공산 혁명으로 자신이 소유했던 러시아의 광대한 유전을 잃었으며 이후 "소련을 박살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요약하면 1939년 2차 대전 발발 이전, 미국의 파워엘리트는 나치즘 등 유럽 파시즘을 대공황에 빠진 자본주의의 탈출구이자 소련 공산주의를 격퇴할 우군으로 여긴 반면, 대다수 국민들은 소련의 공산주의 실험에서 새로운 대안 사회의 가능성을 봤다는 얘기다.

나치 독일은 미국 대기업의 가장 매력적인 투자처였다

미국의 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1923∼1929년)는 "미국의 사업은 비즈니스다(Business of America is Business)"라는 말을 남겼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존재 이유는 기업 활동에 있으며 정부의 역할은 기업 활동을 최대한 돕는 데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기업은 무엇을 원하는가? 기업 활동에 대한 장애 제거, 낮은 임금의 순종적인 노동자, 해외 자원 및 시장의 확보, 국내외 경쟁 기업으로부터 보호 등을 원한다.

이런 의미에서 1933년 이후 히틀러 치하의 독일은 미국의 경제 엘리트에게 가장 매력적인 투자처였다. 대대적인 재무장으로 (대공황의 미국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엄청난 산업 수요를 창출했으며 (미국에서는 뉴딜 정책으로 활성화됐던) 노조를 없앰으로써 기업의 최대 이윤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독일 내 미국 자회사에서 파업이 일어나면 게슈타포가 즉각 개입해 파업 노동자들을 체포, 해고할 정도였다. 실제로 1936년 6월 뤼셀하임에 있던 GM의 자회사 오펠 자동차 공장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반파시스트 전사였던 오토 옌센은 "강제수용소행에 대한 두려움으로 독일 노동자들은 무릎 위에 앉혀진 애완견처럼 온순해졌다"며 이러한 사실이 독일은 물론 미국 기업가들을 기쁘게 했다고 말한다.

1933년 독일을 방문한 윌리엄 크누센 GM 회장은 독일 경제를 "20세기의 기적"이라고 칭송했다. 미국의 많은 기업가들이 나치 독일을 칭송한 것은 물론 듀퐁 등 일부 대기업은 미국의 파시스트 조직인 '블랙 리전(Black Legion, 검은 군대)'에 재정 지원을 하기도 했다. 미국도 독일과 같은 파시스트 국가가 되기를 은연중에 꿈꿨던 것이다. 1935년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이 폭로한 미국 기업인들의 파시스트 쿠데타 음모는 결코 허황된 얘기가 아니었다.

히틀러의 인종주의에 영감을 준 헨리 포드

▲ 헨리 포드. ⓒ위키미디어커먼스
미국 기업가들은 히틀러의 인종주의 정책에도 아무런 불만을 갖지 않았다. 미국 지체가 인종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또한 1920∼1930년대, 반유태주의는 미국은 물론 유럽 국가 대부분의 일반적 경향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반유태주의자는 헨리 포드였다. 그는 히틀러를 존경하고 재정 후원을 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초 <국제 유태인>이라는 반유태주의 책을 펴내 히틀러의 인종주의에 영감을 주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총통실에 포드의 초상화를 걸어두었고 1938년에는 외국인에게 줄 수 있는 최대 영예의 훈장을 수여했다. (1937년 IBM의 토마스 왓슨 회장도 이 훈장을 받았고, GM의 고위 간부 제임스 무니도 받았다) 포드는 또한 1930년대 미국 내에서 열렬하게 진행됐던 친나치 선전에도 돈을 댔다. 선전 작업은 최초의 대서양 횡단비행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가 주도했다.

미국은 히틀러의 반유태주의를 이유로 2차 대전에 나설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독일을 탈출한 유태인들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39년 봄 독일에서 탈출한 유태인들을 가득 태운 세인트루이스호는 결국 미국 상륙 허가를 받지 못해 독일로 돌아가야 했으며 간신히 앤트워프에 상륙할 수 있었다. 이후 유태인들은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으로 망명했다.

미국의 역사가 스티븐 암브로스는 "국내 인종 분리를 고수하고 군대에서도 흑인과 백인 병사를 분리했던 미국이 세계 최악의 인종주의 정권을 상대로 거대한 전쟁을 치렀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지적했다.

1945년 5월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은 강제수용소의 유태인들을 방치하고 학대했다. 1946년 9월 트루만 대통령이 마지못해 "우리는, 유태인들을 살해하지 않은 것을 빼놓고는, 나치와 똑같은 방식으로 유태인들을 다뤘다"고 인정해야 했을 정도였다.

1939년 GM과 포드의 독일 자동차 시장 점유율은 무려 70퍼센트

미국 기업의 대독일 투자는 1933년 히틀러 집권 이후 크게 늘어나 1941년 말 현재 총 투자액이 4억75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들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에도 수억 달러를 투자했다. 1930년대 독일에 진출해 큰 이윤을 남긴 미국 대기업은 약 20개로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포드, GM, 스탠다드오일 오브 뉴저지(석유 재벌 록펠러 제국의 핵심으로 현재 엑슨모빌), 듀퐁, 유니온카바이드, 웨스팅하우스, 제너럴일렉트릭(GE), 굿리치, 이스트만코닥, 코카콜라, IBM, ITT. 또한 J. P. 모건, 딜론 앤 리드, 설리번 앤 크롬웰 등 로펌과 투자회사, 은행들도 독일에 진출해 미국 대기업의 활동을 도왔다. (특히 설리번 앤 크롬웰은 존 포스터 덜레스와 알렌 덜레스 형제가 미국 대기업을 위한 국제 변호사로 활동했던 회사로, 덜레스 형제는 미국 및 독일 대기업들과 맺은 끈끈한 유착 관계를 바탕으로 2차 대전 후 냉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히틀러 집권 이후 독일 진출 미국 대기업의 매출과 이익은 급속하게 늘어났다. 코카콜라 독일 자회사의 경우 1934년 24만3000박스 생산에서 1939년에는 450만 박스로 18.5배 증가했다. 나치 정부는 독일 노동자들이 즐겨 마시는 맥주 대신 코카콜라를 제공함으로써 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더 빨리 일할 수 있다는 이유로 콜라 소비를 권장했다.

포드의 독일 자회사(Fordwerke)의 1935년 이윤은 6만3000마르크에서 1939년 128만 7800마르크로 20.4배 늘어났다. 반면 생산비 중 인건비 비용은 1933년 15퍼센트에서 1938년 11퍼센트로 줄어들었다. 또한 총 자산은 1933년 2580만 마르크에서 1939년 6040만 마르크로 2.3배 증가했다.

GM 오펠 공장의 독일 시장 점유율은 1933년 35퍼센트에서 1935년 50퍼센트로 늘어났다. GM의 독일 자회사는 193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적자였으나 히틀러의 재무장 정책에 따른 경기 호황으로 1938년에는 3500만 마르크의 이윤을 남겼다. 2차 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알프레드 슬로언 GM 회장은 나치 독일에서 전개한 기업 활동으로 매우 큰 이윤을 남겼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1939년 GM과 포드의 독일 자동차 시장 점유율은 무려 70퍼센트였다. GM과 포드는 독일의 2차 대전 수행에 필요한 거의 모든 수송 장비를 공급했다. 트럭과 같은 단순 수송 장비뿐만 아니라 탱크, 장갑차와 같은 전쟁 무기도 공급했다.

IBM의 독일 자회사 데호막(Dehomag)은 컴퓨터의 전신인 홀러리스 카드천공기 기술을 제공했다. 나치 독일은 이 정보처리 기술로 열차 운행 시간표 작성에서 유태인 색출 및 재산 압수, 처형 등의 자료 처리에 이용했다. 1933년 데호막은 100만 달러의 이윤을 남겼고, 히틀러 집권 초기 수년간 미국에 배당금 450만 달러를 송금했다. 데호막의 자산 가치는 1934년 770만 마르크에서 1938년 1400만 마르크로 2배 가까이 늘었다. 또한 이윤은 230만 마르크로 순자산 대비 16퍼센트나 됐다. 1939년의 이윤은 400만 마르크였다. <IBM과 홀로코스트>라는 책을 쓴 역사가 에드윈 블랙은 토마스 왓슨 IBM 회장이 히틀러를 존경하고 사랑했다고 말한다. 히틀러와 한 거래가 엄청난 이윤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히틀러가 서유럽 점령하자 뉴욕에선 나치 승전 축하연

미국 대기업의 히틀러 사랑은 1939년 9월 1일 나치의 폴란드 침공, 1940년 6월 네덜란드·벨기에·프랑스 점령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1940년 6월 26일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는 독일 상공인 대표단이 나치 승전 축하 연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GM의 고위 간부 제임스 무니 등 미국 기업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7월 1일 뉴욕에서는 또 다른 축하 연회가 열렸다. 미국 석유 기업 텍사코의 토길드 리버 회장이 주최한 행사였다. 이 자리에는 제임스 무니, 헨리 포드의 아들 에드셀 포드 등이 참석했다.

미국의 자동차 기업과 석유 기업이 나치 독일의 승리를 축하한 이유는 자신들, 즉 GM과 포드의 독일 자회사들이 생산한 트럭, 탱크, 비행기, 그리고 텍사코와 스탠다드오일이 제공한 디젤유, 윤활유, 고무 등 전략물자가 없었다면 나치의 전격전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미루어 미국의 대기업가들은 나치의 서유럽 점령에 대해 아무런 분노도, 문제의식도 갖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히틀러의 전쟁 물자 담당 장관을 지냈던 알베르트 스피어는 나중에 미국 기업이 제공한 합성석유가 없었다면 히틀러는 "결코 폴란드 침공을 꿈꾸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미국 역사가 브래드포드 스넬은 (스위스 은행들의 나치 협력, 즉 나치가 유태인들로부터 강탈한 금을 숨겨준 사실을 언급하면서) "나치는 스위스 은행의 협력이 없었어도 폴란드와 러시아를 침공할 수 있었겠지만, 제너럴모터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미국의 통신업체인 ITT, 정보기기업체인 IBM이 제공한 최첨단 통신 및 정보처리 기술은 나치 전격전의 성공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나치즘의 병기고

2차 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을 '민주주의의 병기고(Arsenal of Democracy)'라고 자부했다. 미국 자신은 물론이고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무기들을 미국 기업들이 생산해낸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전쟁 기간 동안 미국 기업들은 '나치즘의 병기고(Arsenal of Nazism)' 역할도 충실히 해냈다. 예를 들어 독일의 소련 침공(1941년 6월 22일) 직후인 1941년 7월 독일의 석유 관련 제품 수입 물량 중 미국산의 비중은 44퍼센트였으나 불과 두 달 후인 9월에는 94퍼센트로 뛰어올랐다. 미국 석유 기업은 중립국인 스페인을 통해 독일에 석유를 공급했다. 파월은 미국 석유 기업들의 연료 공급이 없었다면 독일 전차 군단은 모스크바 부근까지 진격할 수 없었을 것이며, 1940년 네덜란드, 프랑스 등에 대한 전격전도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분야의 권위자인 독일 역사가 토비아스 예르작은 스탠다드오일 등 미국 석유 기업이 나치에 제공한 석유를 "(히틀러) 총통을 위한 연료"라고 불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IBM과 홀로코스트>의 저자 에드윈 블랙은 IBM의 독일 자회사 데호막이 제공한 최첨단 정보처리 기술로 독일군이 전격전을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데호막의 기술로 유태인을 색출하고 체포하며 처형하는 효과적인 시스템을 갖게 됐다고 지적한다. 특히 IBM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1941년 12월 7일) 이후 미국과 독일이 교전 상태에 돌입한 이후에도 "데호막은 유럽 자회사라는 방패막이(즉 미국의 IBM은 독일 데호막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를 내세워 나치 전쟁 수행에 협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수백만 달러의 이익을 챙겼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거대 통신업체인 ITT(회장은 친파시스트 소스텐스 벤)는 1930년대 독일 비행기 제작업체 포케-불프(Focke-Wulf)의 지분 25퍼센트를 확보해 전쟁 기간 동안에도 갖고 있었다. 파월은 ITT가,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연합국 비행기를 수백 대 격추시킨 독일군 전투기 제작에 관련된 셈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독일군 전투기에 사용되는 합성석유는 미국의 스탠다드오일과 독일의 제휴 회사인 IG-파르번(Farben), 그리고 제너럴모터스가 합작으로 세운 자회사인 에틸GmbH라는 기업이 생산해냈다. 또한 독일군은 ITT가 제공한 기술로 최첨단 통신시스템을 갖추었으며, 이 기술을 이용해 미국 외교 전문의 암호를 해독해낼 수 있었다.

한편 포드는 수많은 트럭과 함께 독일군이 사용한 엔진과 각종 부품을 생산해냈다. 이들 전쟁 물자는 쾰른에 있는 포드 자회사는 물론이고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와 같은 피점령 국가, 그리고 핀란드,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과 동맹 관계인 국가의 자회사에서 생산됐다.

또한 폴란드 침공 직후인 1939년 9월 19∼20일 GM의 제임스 무니 회장은 히틀러와 회동한 이후 독일에 있는 모든 GM 자회사 공장들을 전쟁 물자 생산 체제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1935년 세워진 브란덴부르크의 오펠 공장은 독일 육군의 수송 트럭을, 뤼셀하임의 오펠 공장은 독일 전략폭격기의 중추인 JU-88의 조립 공장으로 변신했다. 한때 포드와 GM은 독일에서 생산되는 탱크의 절반 이상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이들이 생산한 독일제 탱크는 미군이 사용했던 셔먼 탱크보다 성능이 좋았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2차 대전 동안 포드와 GM의 기술 혁신은 미국과 영국의 공장에서보다 독일에서 훨씬 앞서갔다. 예를 들어 동부 전선의 진흙 수렁과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성능을 뽐낸 4륜 구동 오펠 트럭, 그리고 최초의 제트 전투기인 ME-262의 제트엔진은 뤼셀하임의 오펠 공장에서 생산됐다. 또한 쾰른의 포드 자회사는 런던 공습으로 악명을 떨쳤던 V-2 로켓의 터빈을 극비리에 생산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나치 정부의 전략 기획가들은 미국 기업의 독일 자회사들이야말로 "기술 발전의 선봉"이라고 치켜세웠다.

2차 대전 기간 동안 GM, 포드, ITT, IBM 등 미국 대기업들이 '나치즘의 병기고'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우선 당사자들은 당연히 이 민감한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또한 사정을 알 만한 일부 인사들도 미국의 2차 대전 참전 이후 이들 미국 대기업의 독일 자회사들이 나치에게 강제 압수됐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나 돌려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의 전문가 한스 헬름스는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나치는 집권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포드나 오펠(GM 자회사)의 소유권을 변경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전쟁 기간 동안 포드의 미국 본사는 쾰른에 있는 자회사(Fordwerke)의 지분 52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었고(나머지 지분은 독일 기업 IG-파르번이 갖고 있었다), 오펠의 지분은 100퍼센트 GM 소유였다. 미국 대기업은 독일인이나 제3국의 대리인을 내세워, 또는 중립국인 스위스의 자회사를 통해 독일 자회사의 일상적 경영에 개입했다.

에드윈 블랙에 따르면 IBM의 경우, 유럽 지역의 총지배인인 네덜란드인 유리안 쇼트가 전쟁 기간 내내 뉴욕의 IBM 본사에 상주하면서 "자신의 조국인 네덜란드와 벨기에 등 나치 점령 지역의 자회사들과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특히 중립국 스위스의 제네바 지사를 통해 "유럽 전역의 사업을 관리, 감독했다." IBM 제네바 지사의 대표는 스위스인으로 그는 "독일은 물론이고 (프랑스, 네덜란드 등) 피점령국, (스페인, 스위스 등) 중립국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IBM 등 미국 대기업들은 미국의 외교 행낭을 이용해 피점령국 및 중립국에 있는 지사들과 서한을 주고받았다. 결론적으로 블랙은 "대부분은 전쟁 기간 동안 미국 기업이 독일 및 피점령국 자회사의 경영에서 손을 뗐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뉴욕의 IBM 본사는 (독일 및 유럽) 자회사의 일상적 경영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 전쟁 기간 동안에도 IBM의 기업 활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말한다.

나치 정부가 독일 내 미국 자회사를 적성국 자산으로 지정하고 독일 정부 관리 하에 둔 것은 미국이 참전한 지 1년 가까이 지난 1942년 11월 25일이었다. 이와 관련, 독일 연구자 아니타 쿠글러는 나치 정부는 미국의 참전 이후에도 오펠의 경영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며 1942년의 적성국 자산 지정도 상징적 조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오펠과 GM이 주장하는 것처럼 독일 정부의 위탁 관리는 반미적 나치의 일방적 억압과는 거리가 멀었다. 위탁 관리자는 나치 정부의 명령을 강제로 수행하는 외부의 독재자가 아니었다. 1935년 오펠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그들이 임명한 인물이 위탁 관리자의 역할을 맡았다. 게다가 이 위탁 관리자는 법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이사회의 결정을 충실히 따랐다."

그러니까 전쟁 기간 동안에도 포드, GM 등 미국 기업의 독일 자회사들은 경영의 자율권을 인정받았다는 얘기다. 포드 독일 자회사(Fordwerke)의 경우 열렬한 나치 당원인 로베르트 쉬미트가 전쟁 이전부터 총지배인 역할을 했는데, 그의 경영 수완은 베를린의 나치 정부는 물론 미시간 주 디어본에 있는 포드 본사의 간부들에게도 대만족이었다. 헨리 포드의 아들 에드셀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서명이 담긴 축하 서한을 보냈고, 나치 정부는 쉬미트에게 "군사경제 분야의 선두 주자"라는 타이틀을 부여하기도 했다. 미국의 참전 이후에도 총지배인 자리를 유지했던 쉬미트는 종전 이후 나치 부역에 대한 징벌을 피하기 위해 잠적했다가 1950년 원래의 자리에 복귀해 1962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독일 자회사가 적성국 자산으로 지정되고 나치 정부의 관리를 받게 된 것이 미국 본사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1차 대전 때 미국의 독일 자회사, 그리고 2차 대전 당시 독일 기업의 미국 자회사가 그랬던 것처럼 전쟁이 끝나면 안전하게 되돌려 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드윈 블랙에 따르면, 미국과 독일의 자본가들은 상대방 적대 국가에 있는 자신의 자산이 "안전하게 유지되고, 적절하게 관리되며, 적대 행위가 끝나면 원상 그대로 반환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과 나치 정부는 (전쟁 행위와 무관하게 자본가의 재산은 절대적으로 존중돼야 한다는) 국제 자본주의의 불문율을 준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치에 의한 적성국 자산 지정은 미국 대기업에 또 다른 이득을 안겨주었다. 나치에 대한 부역, 그리고 이에 따른 이윤 획득을 부정할 수 있는, 이른바 '그럴듯한 부정(plausible deniability)'의 근거가 된 것이었다. 나치에 협조해 커다란 이윤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기간 동안 자신들의 독일 자회사가 나치 정부에게 강탈당했다는 방패막이를 내세워 모든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다.

▲ 2차 대전 당시 GM 오펠 공장에서 생산한 트럭. 나치 정부는 GM 오펠 공장에 "모범적인 전쟁 기업"이라는 명예를 부여했다. ⓒwww.opel.com


나치, GM 오펠 공장에 "모범적인 전쟁 기업" 칭호 부여

나치 정부에게 중요했던 것은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기업의 국적이 아니었다. 그 기업이 얼마나 많은 전쟁 물자를 생산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길어야 2∼3개월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됐던 소련에 대한 전격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전투가 길어지면서 더 많은 비행기, 더 많은 탱크, 더 많은 트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전쟁 물자를 대량으로 생산해낼 수 능력은 포드 등 미국계 기업들만이 갖고 있었다. 헨리 포드가 창안한 대량생산 기법, 즉 '포디즘'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치의 최고 전략 기획가인 헤르만 괴링과 전쟁 물자 담당 장관 알베르트 스피어는 포드나 GM 자회사의 경영에 대한 개입을 최대한 자제했다. 그리고 두 회사는 나치 정부의 목표치를 초과하는 대량생산으로 이에 보답했다. 이에 따라 나치 정부는 GM의 오펠 공장에 "모범적인 전쟁 기업"이라는 명예를 부여했고, 더 많은 '기업가적 자유'를 허용했다. 독일 연구자 아니타 쿠글러는 오펠이 "자신의 모든 생산 및 연구 역량을 나치에 제공함으로써 나치의 장기적 전쟁 수행 역량을 증강하는 데 기여했다"고 결론지었다.

GM과 포드의 소유주 및 경영자들에게 자신들이 생산한 전쟁 물자를 미군이 사용하느냐 독일군이 사용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윤이었다. 포드의 경우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의 포드 자회사들이 나치의 전쟁 수행에 협조하면서 커다란 이윤을 남겼다. 예컨대 전쟁 이전 별다른 이윤을 남기 못했던 포드의 프랑스 자회사는 1940년 6월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나치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1941년에는 5800만 프랑의 이윤을 남겼다. GM의 독일 자회사 오펠의 정확한 이윤 규모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쿠글러에 따르면 독일 내 기업 중에서는 가장 수지맞는 기업이었다고 한다. 나치 정부가 오펠 경영 수치의 공개를 금지할 정도였다. 전쟁 수행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독일 국민들을 독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계 기업이 막대한 이윤을 챙기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저자 파월은 미국과 영국 언론들이 나치 정부가 민간 기업의 경영에 개입하고 심지어 이윤과 재산을 강탈(국유화)한 것처럼 보도하고 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파시즘은 공산주의와는 정반대로 사유재산과 자유기업을 철저히 존중했다는 것이다. 독일의 비판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려는 자는 파시즘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것처럼 파시즘은 가장 사악한 형태의 자본주의였다. 따라서 독일 내 미국 자회사와 미국계 기업들의 재산권과 경영권은 확실히 보장됐다. 단지 나치는 이윤의 직접적인 송금만은 금지했다. 그렇다면 독일 내 미국계 기업들은 전쟁 기간 동안 이윤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회계 조작, 독일 및 프랑스 등 피점령국에 대한 재투자, 그리고 미국계 은행 등을 통한 은밀한 빼돌리기 등의 방법을 활용했다.

IBM의 경우 본사 소유 특허 기술에 대한 로열티, 허구의 대출금에 대한 이자 및 원금 상환, 기타 각종 비용을 독일 자회사에 떠넘기는 방식으로 자회사의 이윤을 최소화했다. 이른바 '가격 이전'으로 불리는 이 같은 회계 조작 방식은 1970년대 이후 초국적 기업들의 조세 회피 수법으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

한편 GM 오펠은 1942년 라이프치히의 주물공장을 인수하는 한편 기존 공장 시설을 개선하고 현대화하는 등 독일에서 얻은 이윤을 현지에 재투자했다. 1941년 포드의 프랑스 자회사는 알제리에 탱크 공장을 세웠는데, 여기에서 생산된 탱크는 롬멜 장군의 아프리카 군단에 공급됐다고 한다. 파월은 독일의 포드 자회사가 프랑스 자회사와 긴밀한 관계였다는 점에서 독일에서 얻은 이윤이 사용됐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한편 미국 기업들은 중립국인 스위스의 은행들, 그리고 독일 점령 하의 프랑스에서 영업 활동을 계속했던 체이스맨해튼(록펠러 소유), J. P. 모건 등 미국 금융기관 등을 통해 은밀하게 이윤을 송금했다.

특히 파월은 스위스 바젤에 있는 국제결제은행(BIS)의 역할에 주목한다. BIS는 독일의 1차 대전 전쟁 배상금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영 플랜(Young Plan)'에 따라 1930년에 세워진 은행이다. 파월에 따르면, BIS는 미국과 독일 금융가들에 의해 운영됐으며 이들은 미국의 참전 이후에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전쟁 기간 동안 BIS 사무국장은 나치 당원인 폴 헤츨러, 총재는 미국인 토마스 매키트릭이었다. 그런데 매키트릭은 당시 스위스에서 OSS(전략첩보국, CIA의 전신)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알렌 덜레스와 절친한 사이였다. 전쟁이 나기 전, 알렌 덜레스와 그의 형 존 포스터 덜레스는 뉴욕의 유명 로펌 '설리번 앤 크롬웰'의 파트너 변호사로서 당시 최고의 수익을 보장했던 미국의 대독일 투자를 전문으로 다루고 있었다. 따라서 덜레스 형제는 미국 대기업의 소유주, 최고 경영진은 물론 독일 금융가, 기업가들과도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미국의 참전 이후 알렌은 OSS 요원으로 스위스에서 활동하면서 매키트릭과 가까운 사이가 됐고, 형 존 포스터는 뉴욕에서 BIS의 고문 변호사로 일했다. 전쟁 기간 동안 BIS는 나치가 유태인 등으로부터 강탈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현금과 금을 관리했다. 파월은 덜레스 형제의 광범위한 인맥과 BIS의 활동으로 보건대, 이들이 미국 기업의 은밀한 이윤 송금에도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

미국 기업의 대독일 투자가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던 또 다른 비결은 히틀러의 철저한 노동자 탄압이었다.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 직후인 1939년 9월 4일, 임금 및 물가 동결 명령을 내렸다. 이후 독일 노동자들은 더 적은 임금에 더 많은 시간을 노동해야 했다. 임금은 동결됐지만 물가는 실질적으로 인상됐기 때문이다. 노동력 부족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오르지 않은 것은 나치의 노동자 탄압 때문이었다. 특히 많은 독일 젊은이들이 군인으로 차출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나치는 전쟁 포로와 유태인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 기업들은 이들을 관리하는 나치 친위대(SS)에게 약간의 대가를 제공하고 수백만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사실상 무상으로 사용했다. 미국계 기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 포로와 유태인 등을 강제 노동에 동원

전쟁 기간 동안 포드 독일 자회사의 기업 활동을 추적해온 독일 연구자 카롤라 핑스에 따르면, 포드는 1942년부터 외국인 노동자 및 소련, 프랑스, 벨기에 전쟁 포로의 강제 노동을 "열성적이고 공격적이며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미국 본사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일요일을 빼고 매일 12시간을 일해야 했으며 임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특히 1944년 여름부터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던 일부 유태인들도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

GM 오펠 공장은 유태인을 동원하지 않은 반면, 1940년 여름부터 전쟁 포로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 소련과 프랑스의 전쟁 포로, 그리고 동유럽 등에서 끌려온 민간인들이 노예 노동을 해야 했으며, 특히 소련군 전쟁 포로는 가장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역사가 아니타 쿠글러에 따르면 소련군 포로는 "최대의 노동 착취, 최악의 대우를 받았으며 (…) 사소한 잘못에도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을 관리했던 것이다.

노예노동을 비롯한 미국 기업과 나치의 추악한 거래는 미국 국민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언론과 대학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언론은 폴크스바겐 등 독일 기업의 노예노동에 대해서는 대서특필하는 반면 미국 기업의 같은 행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포드, GM 등이 최대 광고주이기 때문이다. 파월에 따르면 미국의 한 역사학자는 나치 독일과 2차 대전에 관한 1000쪽 이상의 방대한 연구서를 내면서 포드나 GM의 행적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 놀라운 재주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학자는 포드 본사가 있는 미시간 주의 한 대학 교수였기 때문이다. 미국 대학이 부르짖는 학문의 자유보다는 포드의 재정 지원이 훨씬 더 절실했던 모양이다.

▲ 1945년 4월 14일,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 갇혀 노예노동을 하다 해방된 소련 출신 포로가 수용자들을 학대했던 나치 경비대원을 지목하고 있다. ⓒ위키미디어커먼스


"IBM은 전쟁보다도 컸다"

루스벨트 정부는 미국 기업과 나치의 유착을 몰랐을까? 파월은 미국 정부가 그 실상을 잘 알고 있었지만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는 정신에 따라 미국 기업의 나치에 대한 투자와 교역에 애써 눈감았다고 지적한다. 미국 대기업의 이윤 추구 활동을 방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1930년대 헤르만 괴링의 친구였으며 1940년까지 GM 회장을 지냈던 윌리엄 크누센을 정부 요직에 임명하는 등 많은 기업계 인사들을 고위 공직에 임명했다. 나아가 루스벨트 대통령은 진주만 기습 이후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1941년 12월 13일, 미국 기업이 적성국과 사업 거래를 하는 것을 허용하는 특별명령을 은밀하게 발표했다.

미국 정부가 자국 대기업과 나치의 유착을 묵인한 것은 대기업의 도움 없이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역사가 찰스 히감은 루스벨트 정부가 "전쟁 승리를 위해 석유 기업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스탠다드오일의 석유는 히틀러에게 중요한 만큼이나 미국에게도 중요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1942년 미국 정부가 '적성국 교역 금지법'에 따라 스탠다드오일의 대독일 석유 공급을 처벌하려 했으나 극히 가벼운 처벌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스탠다드오일 측은 "우리가 공급하는 석유가 없다면 미국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고 한다. 결국 스탠다드오일은 약간의 벌금을 내는 것으로 처벌을 면했고 이후에도 나치와 계속 거래했다. IBM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IBM의 정보처리 기술은 미국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나치와의 유착을 막을 수 없었다. 역사가 에드윈 블랙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IBM은 전쟁보다도 큰 존재였다. IBM의 너무도 중요한 기술이 없이는 미국도 독일도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히틀러도 IBM이 필요했고 연합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2차 대전 당시 전쟁부 장관이었던 기업인 출신의 헨리 스팀슨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쟁을 하려면 전쟁 수행 과정에서 기업들이 돈을 벌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들이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 (…)"라고 말했다.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은 <전쟁은 사기다>에서 전쟁을 막을 방책 중의 하나로 기업이 전쟁을 통해 이윤을 얻을 수 없도록 하라고 말했다. 이윤이 남지 않는다면 기업이 전쟁에 뛰어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실제 이루진 것은 스팀슨의 조언이라고 할 수 있다.

ITT의 소스텐스 벤 회장이 나치 독일의 열렬한 추종자라는 사실은 워싱턴의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이 사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역사가 찰스 히감은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의 모든 정보기관이 벤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그의 활동을 잘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그에 대한 미국 정부 내의 신중한 비판마저도 모두 철저히 봉쇄됐다. 전쟁이 끝나면 독일과 헙력해 소련을 대적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벤 회장은 미국 군사 지도자들과도 친밀한 사이였으며 전시 중 미국 육군에 귀중한 기여를 했다는 이유로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명예의 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독일 내 미국 기업이 공습을 피한 이유

미국 정부의 기업 사랑은 독일에 대한 공습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독일 내 미국 기업에 대한 폭격만은 자제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쾰른은 지속적인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됐지만 쾰른 외곽에 있는 포드 자회사만은 거의 폭격을 받지 않았다. '쾰른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포드 자회사'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독일 역사가 한스 헬름스에 따르면 루스벨트 대통령의 고위 보좌관 버나드 바루치가 독일 내 특정 공장은 폭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특정 공장이란 바로 포드, GM 등 미국의 독일 자회사를 말한다.

뤼셀하임의 오펠 공장은 1944년 7월 20일과 8월 25일 크게 폭격을 당해 건물의 절반 정도가 무너졌지만 기계 등 생산 설비 피해는 10퍼센트에 불과했다. 사전에 생산 설비를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1945년 3월 25일 미군이 뤼셀하임에 도착했을 때, 공장은 100퍼센트 가동되고 있었다. 슈투트가르트 근처에 있던 데호막(IBM의 독일 자회사) 공장 역시 공습 피해를 거의 겪지 않았다. 데호막 공장에 처음 도착한 미군 중에는 IBM의 전 직원이 있었는데, 그에 따르면 공장은 "100퍼센트 완벽하며" "모든 기계, 모든 장비가 즉각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좋은 상태"였다. 이 병사는 토마스 왓슨 회장에게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공장 전체가 완벽하게 보존돼 있다"고 보고했다. 에드윈 블랙은 왓슨 회장만큼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백악관을 비롯해 미국의 최고위 지도자들과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사전에 공습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베를린의 IBM 공장은 공습으로 크게 파괴됐다. 그러나 공습은 공장 설비의 대부분이 독일 남부로 옮겨진 후에 단행됐다. 공습 정보를 미리 알려줄 정도로 미국 기업은 정부 및 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난 후 GM 등 미국 대기업은 나치와 협력한 것에 대한 처벌을 받기는커녕 연합국의 공습으로 독일의 자회사들이 피해를 봤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거액의 보상금을 타냈다. GM은 3300만 달러, ITT는 2700만 달러를 받아냈다.

그런데 이들 미국 대기업은 전쟁 기간 동안 자신들의 독일 자회사가 나치에 강탈당했다는 이유로 이미 거액의 보상을 받은 바 있다. 예를 들어 GM은 1941년 오펠 자회사의 총자산이 손실됐다는 이유로 미국 정부로부터 2270만 달러의 세금을 공제받았다. 따라서 오펠의 자산은 미국 정부의 소유가 된 것이다. 하지만 GM은 1948년 180만 달러의 세금을 납부하고 오펠을 되찾았다. 결국 GM은 오펠을 되찾는 과정에서 2100만 달러 가까운 이득을 챙긴 셈이다. 포드의 경우 1943년 독일 자회사(Fordwerke)를 손실 처리하면서 약 800만 달러의 세금 공제를 받았지만, 1954년 이 자회사를 미국 정부로부터 되찾을 때는 단돈 55만7000달러만을 냈다. 55만 달러가 이 자회사의 '적정한 가격'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미국 대기업이 챙긴 경제적 이득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독일 자회사들이 나치 독일에 강탈당했다는 법적 알리바이를 만들어냄으로써 적국에 탱크, 비행기 등 전쟁 무기를 제공하고 강제 노동, 노예노동 등 전시 중 범죄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전쟁이 끝난 후 전범 재판에서 미국은 히틀러의 몇몇 측근들만을 처벌했을 뿐, 히틀러의 집권과 전쟁 수행을 가능하게 했던 IG-파르번 등 독일 대기업의 전범 행위에 대해서는 일체 눈을 감았다. 이에 대해 미국 역사가 캐롤린 우즈 아이젠버그는 "독일 대기업의 전범 행위가 일부 미국 대기업의 의심스러운 행위와 너무도 긴밀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독일 대기업의 전범 행위를 파헤치다 보면 GM, 포드 등 미국 대기업의 전범 행위도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프랑스 르노자동차는 전시 중 비시 정권에 대한 부역 혐의로 국유화된 반면, IG-파르번 등 독일 대기업과 미국 대기업은 국유화 또는 재산 몰수 등의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나치 독일에 투자했던 미국 대기업들은 전쟁 기간 동안 엄청난 부를 축적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정계에 대한 영향력도 크게 키웠다. 이들은 특히 패전국 독일에 대한 미국 군정 당국의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대기업 출신 인사들이 대거 미국 군정에 직접 참여해 전후 대독일 정책을 주도했다. 아이젠버그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 대기업 출신 인사들은) 독일 기업과 맺은 개인적 친분, 그리고 그들 자신이 전쟁 이전 대독일 투자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미국 군정에 발탁됐다. 이에 따라 GM, ATT(ITT의 자매회사) 출신 인사들은 물론 (토마스 왓슨 IBM 회장의 친구이자 1920년대부터 상당한 대독일 투자를 했던 투자회사 딜론리드의) 윌리엄 드레이퍼 등이 미국 군정에 참여했다. 이들 대부분은 독일 대기업의 간부들과 개인적 친분을 맺고 있었다."

이로써 미국 대기업은 전시 중 독일과 맺은 의심스러운 협력 관계가 밝혀지거나 오펠 등 독일 자회사, 또는 제휴 관계에 있는 독일 기업들이 처벌 받는 사태를 모면할 수 있었다.

▲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 <진주만>의 한 장면. ⓒ터치스톤 픽처스


미국 대기업, 전쟁 통해 막대한 부와 엄청난 정치력 확보

지금까지 우리는 포드, GM, ITT, IBM, 스탠다드오일 등 미국의 20개 주요 대기업들이 나치 독일에 협력한 실태를 살펴봤다. 이들 대기업은 전쟁 기간 동안에도 적국인 나치에 협력해 상당한 이윤을 축적했다. 미국 대기업과 나치의 협력은, 기업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적국과도 협력할 수 있다는 것, 자본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돈이 된다면 적대국과도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드러냈다. 하지만 나치에 대한 전쟁 물자 공급은 전쟁 기간 동안 미국 대기업이 얻어낸 경제적 이익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미국 정부의 막대한 군사비 지출, 그리고 영국, 소련 등 연합국 전쟁 물자의 대부분을 생산하면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다. 즉 전쟁 특수를 통해 미국은 뉴딜로도 극복하지 못했던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2차 대전이 미국 경제를 살려낸 것이다.

미국 정부의 국방 예산은 1939년 30억 달러, 1941년 50억 달러에서 참전 직후인 1942년에는 200억 달러, 그리고 1945년에는 450억 달러로 급속하게 늘어났다. 1939년 대비 15배나 늘어난 것이다. 그런데 무조건 막대한 이윤이 보장되는 정부 발주 전쟁 물자 계약 중 75퍼센트를 60개 미만의 대기업들이 독차지했다. 일례로 IBM의 경우 매출이 1940년 4600만 달러에서 1945년에는 1억4000만 달러로 3배나 늘어났다. 반면 미국 정부는 1942년 '승리세(Victory Tax)'라는 것을 도입해 미국 국민들에게 전쟁 비용을 부담하게 했다. '위험과 부담은 국민 대다수가, 이윤과 혜택은 극소수 대기업이 독차지하는' 전쟁의 철칙이 드러난 것이다.

전쟁 수행을 명분으로 한 미국 정부의 기업 사랑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미국 정부는 국방 관련 신기술 개발을 위한 2000여 개의 공공 프로젝트에 자그마치 170억 달러의 자금을 투입했다. 그리고 그 혜택의 대부분은 미국 대기업이 가져갔다. 예를 들어 민간 기업들은 전쟁 기간 동안 헐값에 정부 시설을 임대한 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실제 가격의 절반 내지 3분의 1 가격에 사들였다. 미국 대기업들은 거의 무한정 쏟아지는 정부 예산 따먹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해리 트루먼이 '법적인 도둑질'이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언론인 데이비드 브링클리는 전후 미국에서 벌어진 민영화 열풍에 대해 "정부 돈으로 엄청난 돈 잔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 '자유 기업'을 외치던(정부 개입을 극도로 싫어했던) 기업계 인사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고 비꼬았다.

2차 대전을 통해 미국 기업은 엄청난 이윤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이 미국 사회 전반으로 커져갔다. 우선 전쟁 수행을 이유로 '반독점법'이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대기업의 독점력이 강화됐다. 또한 기업계, 금융계 등 경제인 출신들이 미국 정부 요직에 진출했다. 이들은 특히 국무부와 국방부에 대거 기용됐다. 1941년 국무부 차관보를 시작으로 국무부 차관과 장관을 지낸 딘 애치슨, 초대 국방부 장관 제임스 포레스탈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처럼 2차 대전을 계기로 비대해진 연방정부와 대기업 간의 유대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미국의 대기업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의 대외 정책을 좌지우지하며 이윤을 확보하게 된다.

미국의 비판적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즈는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민간 기업의 발전은 공공 자금에 의해 뒷받침돼온 것이 사실"이지만 특히 "전쟁은 이들 민간 기업이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 데 필요한 많은 기회를 제공해 왔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그는 2차 대전은 "미국의 생산 수단에 대한 핵심적 통제권을 민간 기업에 넘겨주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전쟁들이 가져다준 혜택을 그야말로 보잘것없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미국 대기업은 2차 대전을 통해 대공황을 벗어나고 엄청난 부를 축적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정치에 대한 영향력도 비약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기업국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 특수에 의한 미국 경제의 회생은 '전쟁국가'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2차 대전 수행을 위한 막대한 투자로 경제가 살아난 만큼 전쟁이 끝난 이후 전쟁 특수에 맞먹는 유효 수요를 창출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사학자 리차드 드 보프에 따르면 미국의 군사 관련 지출 총액은 1939년 90억 달러에서 1945년에는 2000억 달러로 늘어났다. GNP 대비 군사 지출 비중은 1939년 1.5퍼센트에서 1945년 40퍼센트로 급증했다. 이에 따라 미국 제조업 관련 기업의 가치 총액은 1939년 400억 달러에서 1945년에는 660억 달러로 1.5배 이상 능가했다. 자크 파월은 미국 경제가 2차 대전 동안 정부의 대규모 군사비 지출이라는 극약 처방에 의해 회생했으며, 이는 일종의 마약과도 같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군사비 지출'이라는 마약을 끊게 되면 미국 경제는 다시 불황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전쟁 의존'이라는 위험한 경향을 갖게 됐다. 전쟁이 없으면 경제가 죽을 수밖에 없는 '전쟁경제', '전쟁국가'의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의 공장들은 100퍼센트 가동됐으며 완전고용을 달성했다. 미국 여성들이 직업전선에 뛰어든 것도 바로 이때였다. 전쟁 이전(1939년) 20만에 불과했던 미국의 병력이 1600만 명으로 늘어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진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의 임금도 1939년 주당 23달러에서 1945년에는 44달러로 약 90퍼센트 늘어났다(같은 기간 인플레이션은 25퍼센트였다). 미국 노동자들도 전쟁의 덕을 본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다면, 군수물자 주문이 끊어지고 수백만 참전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일감은 떨어지고 실업자도 수백만으로 늘어날 것 아닌가.

전쟁 역사가 가브리엘 콜코는 이미 1942년부터 전후 불경기에 대한 경고가 쏟아져 나왔다고 말한다.

"1942년부터 경제 기획가들 사이에서는 전후 실업 사태에 대한 우려가 나왔고, 공식·비공식 기구들은 전후 국제 교역 부족, 원자재 부족, 투자 기회 부족에 대한 비관적 전망들을 나이아가라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당시 젊은 경제학자였던 폴 새뮤얼슨은 전쟁이 끝난 후 "정부 지출의 감축으로 500만 미국인이 일자리를 잃거나 노동시간의 상당한 감축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예측을 내놓았다. 또한 딘 애치슨 국무부 차관은 1944년 11월 의회 청문회에서 전후 미국이 "해외 시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완전고용과 번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즉 전쟁 특수가 끝난다면 미국 경제가 지탱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상황이 전쟁 이후 냉전이라는 일종의 영구 전쟁을 도모하게 되는 경제적 배경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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