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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나라>, 두 가지 반가움과 한 가지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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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농부의 나라>, 두 가지 반가움과 한 가지 아쉬움 [프레시안 books] 정기석 <농부의 나라>
"농업은 농촌과 농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와 국민 모두를 살리는 유일무이한 방책입니다. 국민 생존권과 국가 주권의 마지막 보루입니다."

정기석의 <농부의 나라>(한티재, 2015년 2월 펴냄)를 추천하는 글의 한 부분이다. 적어도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에 관한 한 행동하고 실천하는 대표적 지성인 원로학자 김성훈 선생의 추천사이다. 그러나 내게는 이 문장이 책을 추천하는 글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호소하는 노학자의 진정으로 다가온다.

평소 존경하는 선생의 호소에 공명하는 내 마음속 울림이 <농부의 나라>를 단숨에 읽어가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훌쩍 읽어버린 후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대단히 반갑다. 그리고 조금은 아쉽다'는 느낌이 스치듯이 지나갔다. 아마도 정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느낌이 바로 이것일 게다. 크게 반가우면서도 약간은 아쉬운 기분이 교차하는 느낌을 간직한 채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아내기 위해 다시 첫 장을 펼친다. 이번에는 긴 호흡으로 다소 느긋하게 차근차근 페이지를 넘긴다.

농업·농촌·농민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

ⓒ한티재
<농부의 나라>가 크게 반가웠던 첫 번째 이유는 정기석이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을 분리해서 바라보지 않고 일체화된 통합적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정기석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약간의 면식만 있을 뿐 '농(農)'에 대한 그의 생각과 사고 체계가 어떤지를 알지 못했다. 이번에 내가 읽은 정기석은 '농'에 대한 통합적 시각이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었고, 이것은 나의 시각과 일치했다. 그래서 무척이나 반가웠던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주류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을 따로 분리해서 사고할 것을 오랫동안 강요해 왔다. 적어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도입된 이후부터는 분리해서 사고하고 접근할 것을 강제로 주입받아 왔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을 분리해서 접근하는 사고 체계가 일상화되어 있다. 학자도, 전문가도, 관료도, 언론도 예외는 아니다.

산업적 시각에서 농업에 접근하면 경쟁력에 가장 중점을 두게 되고, 경쟁력을 갖춘 농업인 혹은 농업 경영인을 중요시하게 되며, 이 때문에 정작 농사를 짓고 있는 대부분의 농민은 농업 정책에서 소외되어 왔다. 지역 개발의 관점에서 농촌에 접근하면 그것이 분산이든 균형이든 도시 개발 모델을 농촌에 이식하는 데 중점을 두게 되고, 이 때문에 농촌의 특성이 소외되면서 지역 개발에도 불구하고 농촌이 황폐화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사회복지적 관점에서 농민은 그저 시혜와 돌봄의 대상이 될 뿐 농업과 농촌의 주체라는 생각은 화석화된 관념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류 패러다임이 강요하는 분리적 시각과 달리 현실의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은 일체화되어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사례를 보더라도 이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경험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농업은 산업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농'의 한 부분이다. 농촌은 지역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농'의 한 부분이다. 농민은 주민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농'의 한 부분이다. 산업과 지역 그리고 주민의 일부로서 갖는 성격을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동시에 '농'의 한 부분이라는 통합적 시각과 접근 방법도 중요하게 고려해야만 현상과 실체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많은 사람이 분리적 사고와 접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것에 비해 정기석은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흔치 않은 진짜 전문가라고 감히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농부의 나라>에서 이런 진짜배기 전문가를 만났으니 어찌 크게 반갑지 않을 수 있을까.

혹시라도 책의 목차만 보면 오해할 수도 있겠다. 정기석은 사회민주적 농민, 사회경제적 농업, 사회생태적 농촌으로 각 챕터(chapter)의 제목을 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기석이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을 분리적으로 사고한다고 오해할 필요는 없다. 서술의 편의상 그렇게 제목을 붙였을 뿐 실제 책의 전반적인 구성과 내용을 보면 '농'에 대한 통합적 시각과 접근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농민운동이 제시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수렴하는 정기석의 대안 농정론

내가 크게 반가움을 느낀 두 번째 이유는 정기석이 제시하는 대안 농정에 공감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농부의 나라>가 우리에게 말하는 대안 농정의 키워드로는 중소농, 농사 공동체, 마케팅 보드, 친환경 농업, 로컬 푸드, 도시 농업, 여성 농민의 권리, 협동조합, 지속 가능, 국민 농업, 농도 상생, 먹거리 정의, 민관 협치(농정 거버넌스), 식량 주권, 지역 균형 분산, 연대와 협동 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키워드는 내가 평소에 강조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농민운동은 지난 2007년과 2012년에 각각 농정의 새로운 대안 패러다임을 제시한 바 있다. 2007년에 나온 '지속 가능한 국민 농업' 그리고 2012년에 제시한 '식량 주권 제도화 방안' 등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의 주류 농정 패러다임으로서 신자유주의 개방 농정을 대체할 새로운 대안 농정 패러다임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나 역시 그 일에 참여했기 때문에 농민운동이 제시하는 대안 농정의 패러다임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다. 농민운동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대안 농정의 키워드들은 정기석이 말하는 그것들을 모두 명시적으로 포함하고 있을 정도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단지 비슷한 용어의 키워드를 많이 사용한다고 해서 내가 반가움을 느낀 것이 아니다. 그런 종류의 키워드들은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확산되어 왔고, 각각의 키워드에 해당하는 대안을 실천하려는 노력도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중에는 협동조합이나 로컬 푸드 등과 같이 제도화되는 성과를 거둔 것들도 있다.

내가 크게 반가움을 느낀 것은 '농'과 관련된 각각의 다양한 대안적 노력들이 집합적으로 수렴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각각의 대안 키워드들은 모두 '농'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농'이라는 하나의 그릇에 모두 담아낼 수 없는 측면도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대안 패러다임과 대안적 노력들 사이에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 더 크게 작용하여 대안이 수렴되기보다는 발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현실에서는 대안을 실천하는 주체들의 다양한 가치 지향과 이해관계 때문에 각자 따로 노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다양한 대안 패러다임 사이에 공통분모를 찾아내고 서로 공존·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는 일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대안적 실천 활동 사이의 연대와 협력 또한 절실히 필요하다. 나 역시 '농'이라는 그릇에 한 발을 담그고, 동시에 다른 한 발은 다양한 대안 키워드들 사이의 연대와 협력을 찾기 위해 바삐 움직인다. 그런데 정기석 역시 나와 비슷한 고민과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그의 분주한 발걸음에 담긴 고민과 노력에 충분히 공감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무척이나 반갑다.

물론 정기석의 <농부의 나라>가 나와 똑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방향이 서로 비슷하거나 가깝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와 목적지가 서로 다를 수도 있지만, 차이를 강조하면서 서로 배제하려는 노력보다 집합적인 공통분모를 찾아내려고 바삐 움직인다는 점에서 정기석을 읽은 것은 무척이나 기분 좋은 일이다.


실현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아쉽다

이제 커다란 반가움의 한 귀퉁이에 살짝 묻어나는 아쉬움도 애기해 보자. 그 아쉬움의 실체는 아마도 '답답함'이나 '허전함'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농부의 나라>를 향한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고, 대안 농정을 고민하는 모든 이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읽은 정기석이 말하는 대안은 대체로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글의 전반에 걸쳐 매우 강하게 배어 나온다. 가치 지향적인 측면이 너무 두드러지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상대적으로 실현 가능성 측면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때문에 가치의 당위성에 대한 커다란 공감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이 다소 부족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농부의 나라>가 얼마나 농민을 설득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 국민을 설득할 수 있을까,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 혹은 사회적 협약을 이끌어낼 수 있을 만큼의 설득력이 있는가 등을 생각할 때 미지수를 대하는 답답함이나 허전함을 깨끗이 떨쳐낼 수는 없을 것 같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농부의 나라>에서 느끼는 아쉬움은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내가 느낀 아쉬움과 상당히 유사하다. 나는 기본소득의 필요성이나 당위성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리고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진정성과 열정에 대해서도 추호의 의구심도 없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기본소득이 실현 가능한가에 대해 묻는다면 내 대답은 느낌표가 아니라 물음표이다. 아직까지 기본소득 주장은 상대적으로 가치 지향적인 측면이 너무 강한 반면에 제도화의 실현 가능성 측면은 상대적으로 너무 왜소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안 농정이 갖는 당위성에 대한 공감과 아울러 실현 가능성에 대한 공감도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제도와 법률의 마련, 예산 및 재원의 확보 등과 같은 관문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읽은 <농부의 나라>에는 이 부분이 너무 왜소하게 취급되어 있다. 대안적 키워드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제도화 방안은 무엇일까? 이러한 제도화 방안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이러한 제도화 방안을 사람들은 얼마나 설득력 있게 받아들일까? 이 제도화 방안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예상되는 반대 논리는 무엇일까? 기득권 세력의 반대 논리를 극복하기 위한 반박 논리는 무엇일까? 바로 이와 같은 부분들에 대해 정기석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모두 해소할 수는 없었기에 약간의 아쉬움이 긴 여운으로 남는 것 같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이 아쉬움은 정기석을 향한 것이 아니다. 나를 포함하여 대안 패러다임의 실현을 갈구하는 우리 모두를 향한 아쉬움이다. 우리의 능력이 아직은 그만큼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것이다.

대안 농정을 연구하는 전문가나 대안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는 현장 운동가나 우리 모두 지금보다 좀 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대안 패러다임의 제도화 과정은 기득권 세력과 대안 세력 사이의 투쟁의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가 열거하고 있는 많은 대안적 키워드 가운데 일부는 현실에서 목격하듯이 기득권 세력이 받아들일 수도 있다. 기득권 세력은 자신의 주류 패러다임을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대안적 키워드를 부분적으로 포섭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포섭의 결과는 대안 패러다임이 지향하는 가치를 왜곡하거나 혹은 각 영역별 대안의 실천 과정에서 자기만족적 합리화에 안주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대안 패러다임이 기득권 세력에 의해 부분적으로 포섭되기보다는 사회 전반에 걸쳐 실현되기를 바란다면 언제나 그렇듯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소중한 한 걸음을 내딛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농부의 나라>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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