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은 영국, 소련, 미국과 독일, 이탈리아, 일본 간의 생사를 건 일대 결전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에는 대결 구도가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대 소련으로 바뀌었다. 왜 그런가?
2차 대전에서 전사, 부상했거나 포로로 잡힌 독일군의 숫자는 1350만 명에 이른다. 이 중 1000만 명 이상이 동부전선에서 희생됐다. 즉 소련과 벌인 전투에 의한 것이었다. 독일군 전사자의 90퍼센트가 소련과 벌인 전투에서 발생했다. 당연히 소련군의 인명 피해도 막심했다. 1300만 명이 전사했다. 민간인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3000만 명에 이른다. 당시 소련 인구의 15퍼센트다. 이에 비해 일본을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까지 포함해 미군과 영국군 전사자는 60만 명에 불과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군 전사자 대 소련군 전사자의 비율은 1 대 53이었다고 한다. 인명 피해로 따지면 소련은 나치 격퇴의 9할 이상을 담당한 셈이다.
2차 대전이 미국과 소련에 미친 경제적 결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대부분의 전투를 자국 영토에서 치른 소련의 경제는 치명적 타격을 입은 반면, 미국 본토는 전쟁 피해를 전혀 겪지 않은 데다 막대한 전쟁 특수로 사상 유례가 없는 호황을 누렸다. 소련의 전쟁 피해는 1280억 달러에 이른다. 당시 소련 GDP의 25년치에 해당된다. 1945년의 GDP는 1941년 대비 20퍼센트나 감소했다. 반면 미국 정부의 국방 예산은 1939년 30억 달러에서 1945년 450억 달러가 되며 15배로 늘어났고, 영국, 소련 등 연합국에 대한 무기 대여(Lend-Lease)의 총 규모는 자그마치 500억 달러나 된다. 현재 가치로는 6560억 달러에 이른다. 2차 대전 수행에 필요한 전쟁 물자의 거의 대부분을 미국이 생산한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뉴딜로도 해결하지 못했던 대공황을 2차 대전을 통해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소련이 독일로부터 받아낸 전쟁 배상금은 51억 달러에 불과하다. 실제 피해액의 4퍼센트가 채 안 된다. 얄타회담 당시 미국과 영국이 약속한 100억 달러의 절반을 받아냈을 뿐이다. 나치 격퇴의 최대 유공자인 소련은 왜 고작 4퍼센트의 피해 보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국제적으로 고립돼야 했을까?
1차 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를 기해 모든 전투 행위가 종료됐고,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강화조약이 조인됨으로써 법적으로도 마무리됐다. 반면 2차 대전의 전투 행위는 1945년 5월 8일(유럽)과 8월 15일(아시아)에 종료됐지만, 법적인 마무리는 훨씬 뒤에야 이루어졌다. 태평양전쟁은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소련과 중공이 불참한 미일 단독 강화였다), 유럽 전쟁은 1990년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이른바 '2+4 회담(동·서독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의해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미국과 소련은 전쟁 이후 독일의 운명에 관해 합의를 이루지 못했으며 동독이 무너진 이후 사후적으로 전쟁의 공식 종료에 합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독일의 운명과 유럽의 평화는 소련 사회주의 체제의 패배가 확실해진 이후에야 결정됐다. 그런 의미에서 냉전은 2차 대전의 연장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독일의 분단과 냉전의 시작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번 주에는 자크 파월의 책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에 서술된 2차 대전의 전개 과정을 따라가면서 위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한다. 영국과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대해 유화정책을 편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과 영국은 왜 스탈린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유럽 대륙을 통한 대나치 공격(제2전선)을 1942년이 아닌 1944년 6월에야 시작했는가, 미국과 영국이 해방한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서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 세력이 철저히 배제된 이유는 무엇인가, 나치의 패배가 확실시되던 1945년 2월 군사적 중요성이 거의 없는 드레스덴을 무차별 공습한 이유는 무엇이며 얄타 회담의 진실은 무엇인가, 1945년 3월 이후 미국과 나치가 힘을 합쳐 소련을 무찌르겠다는 이른바 '독일 옵션(German Option)'의 실상, 트루먼의 소련에 대한 핵 외교, 그리고 독일 분단과 냉전의 기원 등에 대해 알아본다.
유화정책의 본질 : '히틀러여, 소련을 쳐라'
그렇다면 1930년대 후반 영국과 프랑스는 왜 히틀러의 영토 팽창에 단호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일까? 이에 대해 파월은 영불이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난 호에 얘기했던 것처럼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열강들은 히틀러의 나치 독일보다 스탈린의 공산 소련을 더 큰 위협으로 인식했고 이에 따라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할 것을 은근히 부추겼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서방권에서 자신이 반공 전선의 최대 전사로 떠오른 점을 활용하여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합병하는 등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도 서방측으로부터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영국, 프랑스, 미국의 지도자들이 반공의 선봉인 자신에게 도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로이드 조지 전 총리를 비롯해 핼리팩스 경, 몬태규 노먼 영국은행 총재, 심지어 왕족까지 영국의 엘리트들은 히틀러 집권 초기부터 그의 동방 야욕(러시아 침략)에 지지를 표했다. (한때 에드워드 8세였고 미국인 심슨 부인과 결혼해 왕위를 포기한) 윈저 공작은 1936년 독일 남부 바바리아 산속 히틀러 휴양지를 방문해 함께 차를 마시며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을 부추겼다. 1966년 윈저 공작은 이렇게 말했다.
"히틀러는 내게 공산 러시아가 유일한 적이라는 사실을, 나아가 영국 등 모든 유럽은 독일을 도와 소련 공산주의를 완전히 끝장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 나는 머지않아 나치가 대소련 전쟁에 나서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의 모든 유럽 지도자들이 나치가 소련을 박살낼 것을 기대했다. 캐나다 역사가 클레멘트 라이보비츠와 앨빈 핀켈에 따르면 유화정책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적 협력을 하자는 스탈린의 제안을 묵살했다. 오히려 온갖 외교적 술책과 엄청난 양보를 통해 히틀러로 하여금 소련을 침공하도록 만들려 했다. 1938년 9월 뮌헨협정은 이러한 유화정책의 절정이었다. 히틀러는 체코를 합병했고, 이는 모스크바로 진군하기 위한 교두보가 됐다. 히틀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영국과 프랑스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했다. 폴란드를 양보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9년 늦여름 '폴란드 위기'를 불러왔다.
대독 유화정책의 진짜 목적이 나치의 소련 침공임을 알아챈 스탈린은 히틀러와 독소 불가침조약(1939년 8월 23일)을 맺어 나치의 침공에 버텨낼 수 있는 귀중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한다(나치의 소련 침공일은 1941년 6월 22일).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양보를 거부하자 영불에 속았다고 판단한 히틀러가 스탈린과 거래를 한 것이다. 이로써 영국과 프랑스의 유화정책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간다. 우선 소련이 멸망하지 않았고,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전격 점령한(1939년 9월 1일) 직후 소련을 침공하라고 부추긴 프랑스와 영국에 대해 공격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1940년 4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시작으로 5월에는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에 대한 공격에 나서 불과 2개월 만에 유럽 대륙 전체를 석권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전격전(Blitzkrieg)의 승리였다.
그런데 폴란드가 무너진 1939년 9월 이후 독일이 서유럽 정벌에 나선 1940년 4월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왜 독일에 대한 전쟁에 나서지 않은 것일까? 파월은 이렇게 말한다.
"유화정책은 1939년 늦여름(8월) 폴란드 위기로 사실상 파탄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임벌린 총리 등 유화주의자들은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기대했다. 국민 여론에 떠밀려 대독일 선전포고를 했으나 그것은 말뿐이었다. 1940년 4월, 나치가 서유럽 정벌에 나설 때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아무런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이상한 작은 전쟁', 독일에서는 '전투 없는 전쟁(sitting war)'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가 독일에 점령당하는 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영불은 히틀러가 결국은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고 기대했고, 그 경우 히틀러를 도울 준비를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1939∼1940년 겨울 동안 분주하게 온갖 종류의 공격 계획을 세웠는데, 공격 목표는 독일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예컨대 중동을 통해 (소련의) 바쿠 유전을 장악하는 계획 등을 세웠다."
미국의 지도급 인사들도 히틀러가 조속히 영국 및 프랑스와 협정을 맺고 소련을 침공하기를 고대했다. 독일의 폴란드 점령 이후 독일 주재 미국 대사 휴 윌슨은 영국 및 프랑스가 독일과 빚은 불편한 갈등을 청산하고 히틀러가 소련의 공산주의 실험을 끝장내게 하는 것이 '서구 문명'에 도움이 된다고 언급했다.
1940년 3월 4일, GM 부회장 제임스 무니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비공식 특사 자격으로 베를린의 히틀러를 방문해 영국, 프랑스와 화해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미국은 생활공간(Lebensraum)을 확보하려는 독일의 관점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즉 독일이 동유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주영 미국 대사였던 조셉 케네디(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도 같은 의견을 표명했다.
미국과 영불 모두 소련의 멸망을 원했다. 그러나 미국은 영국, 프랑스만큼 유화정책에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영불은 소련 침공으로 나치의 보복(1차 대전 패배에 따른 연합국의 가혹한 배상 요구에 대한)이 서유럽으로 향하지 않게 될 것을 기대한 반면 미국은 그럴 걱정이 없었다. 다른 하나는 소련에 대한 수출 확대가 대공황 탈출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 세력이 미국 내에 있었다. 1933년 11월 루스벨트 대통령이 소련과 국교 정상화를 한 것도 바로 이런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무부 내의 친독일, 반소련 성향 관리들의 반대로 더 이상의 진전은 어려웠다.
한편 미국의 주류 언론은 국민들에게 독일, 이탈리아의 파시즘보다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국제 공산주의가 훨씬 더 큰 위협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파시즘이 더 큰 위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련의 선전에 놀아난 얼간이로 낙인찍힐 정도였다. 1940년 서유럽에 대한 파시스트의 침략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미국에는 새로운 반공·반소 열풍이 불었다.
유럽 전쟁과 미국의 경제적 이해관계
1940년 6월 프랑스 점령을 끝으로 유럽 대륙을 석권한 히틀러는 7월, 공습을 통한 영국 정벌에 나선다(Battle of Britain). 당시 미국은 불과 2개월 만에 서유럽을 굴복시킨 나치 전격전의 기세로 보아 영국이 독일의 공격을 견뎌낼 수 없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유럽 사태를 관망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말까지 영국이 독일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자 전쟁 참여를 고려하게 된다. 1940년 12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민주주의의 병기고(Arsenal of Democracy)'가 될 것(대독일 전쟁을 위한 전쟁 물자를 미국이 생산하겠다)을 선언했고, 1941년 1월부터 영국과 비밀리에 참전 문제를 논의한다. 영국 정벌의 성공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히틀러는 1940년 12월 18일 소련 침공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독일의 영국 공습은 1941년 5월에 종료되고 독일은 6월 22일 소련 침공에 나선다.
미국이 영국을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한 것은 1941년 3월 11일 영국과 렌드리스(무기대여법) 계약을 체결하면서부터였다. 1차 대전 때 외상으로 영국 등에 무기를 공급했다가 낭패를 볼 뻔했던 미국은 1939년 11월 '캐시 앤 캐리(Cash & Carry, 무기 대금을 현금으로 내고 무기 수송도 알아서 하라)라는 엄격한 조건으로 영국에 무기를 제공했었다. 그러나 영국의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자 훨씬 관대한 조건으로 군수물자를 공급한 것이다. 이로써 영국은 미국의 최대 고객이 된다.
미국은 2차 대전에 참전한 주된 이유로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꼽는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경제적 고려도 깔려 있었다. 1차 대전 당시 미국의 영국 및 프랑스에 대한 수출은 1914년 8.24억 달러에서 1916년 33억 달러로 4배가량으로 늘어난다. 반면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수출은 고작 100만 달러였다. 여기에는 미국이 영국, 프랑스와 같은 민주국가라는 측면도 있었지만 영국의 해상봉쇄로 독일에 대한 수출이 불가능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2차 대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호에 소개했던 것처럼 미국의 대기업은 2차 대전 기간 동안에도 나치 독일과 경제적 거래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미국은 결정적으로 영국에 기울게 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경제적 요인이 있었다.
우선 2차 대전 이전, 영국은 미국 수출의 40퍼센트를 소화하고 있었다. 즉 영국은 전쟁 이전에도 미국 경제의 최대 고객이었다. 게다가 1941년 3월 렌드리스가 시행되면서 엄청난 액수의 전쟁 물자가 영국에 공급된다. 2차 대전 기간 동안 미국은 연합국에 총 500억 달러에 이르는 전쟁 물자를 공급했는데 이 가운데 영국의 몫이 가장 컸다(영국 314억 달러, 소련 113억 달러, 프랑스 32억 달러, 중국 16억 달러). 이는 현재 가치로 6560억 달러에 이르며 미국이 지출한 2차 대전 전쟁 비용의 17퍼센트나 된다. 또한 렌드리스 외에 미국의 대영국 수출도 크게 늘어난다. 1939년 5.05억 달러에서 1940년 10억 달러, 1941년 16억 달러, 1942년 25억 달러, 1943년 45억 달러, 그리고 1944년에는 52억 달러로 전쟁 초기에 비해 10배로 늘어난다. 한마디로 영국은 미국이 도저히 내쳐버릴 수 없는 최대 고객이 된 것이다.
2차 대전을 통해 미국이 누린 경제적 혜택은 영국이라는 해외 시장을 개척한 데 그치지 않는다. 대영제국의 특혜관세를 폐지하게 함으로써 그동안 영국이 지배해온 해외 시장으로 미국이 침투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미국 역사가 저스투스 도네츠케와 존 윌즈는 이렇게 말한다.
"렌드리스는, 오랫동안 알려져 왔던 것처럼, 무상 공여에 가까운, 관대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그 대가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대가가 현금이나 같은 종류의 물건일 필요는 없었다. (미국의 요구는) 대영제국 내의 특혜관세를 폐지해, 이제까지 영국이 지배해 왔던 수많은 해외 시장에 미국 상품이 더 쉽게 진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19세기 말 이후 미국의 정치·경제 지도자들은 "해외 교역이야말로 미국 번영의 핵심"이라고 믿어왔다. 특히 20세기 초 이후 대량 생산 체제(포디즘)에 의해 엄청난 생산능력을 갖게 된 미국 경제가 대공황이라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해외 시장 진출이(즉 새로운 수요처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렌드리스는 이제까지 미국이 침투해 들어갈 수 없었던 대영제국의 경제권에 침투할 수 있는 결정적 교두보가 됐다. 한마디로 미국의 문호 개방 정책, 즉 미국 기업인들의 꿈이 현실화된 것이다.
하지만 1930년대 헨리 포드를 비롯한 미국의 대기업가들은 나치즘을 열렬히 찬양했었다. 그들은 왜 나치 편을 들지 않았던 것일까? 여기에도 경제적 이유가 있었다. 미국의 대기업들은 세계 전체가 미국의 수출 시장이 되길 원했던 반면, 나치는 폐쇄적 자급자족 경제(Autarky)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미국 수출품에 대한 문호 개방이라는 미국 경제의 절대적 명제를 나치는 거부했던 것이다.
미국의 수출에서 독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1933년 8.4퍼센트에서 1938년 3.4퍼센트로 뚝 떨어진다. 수출액 역시 1928년 10억 달러에서 1938년 4억 달러로 급감한다. 게다가 독일은 미국의 뒷마당인 브라질, 칠레, 멕시코 등 남미 시장을 집중 공략해 미국의 경쟁자로 나선다. 남미 지역의 수입 중 독일 수출의 비중은 1929년 9.5퍼센트에서 1938년 16.2퍼센트로 크게 늘어난다. 반면 미국의 대남미 수출은 같은 기간 38.5퍼센트에서 33.9퍼센트로 하락한다. 게다가 1938년에서 1940년에 걸쳐 독일이 동유럽 대부분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 서유럽을 점령해 자신의 경제권으로 편입하면서 미국의 해외 시장은 축소된다.
결국 미국 수출의 최대 시장인 영국과, 미국의 수출 시장을 잠식하는 독일 중 영국을 지원하는 편이 미국 경제의 이익에 맞았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 수출의 최대 고객인 영국의 패망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
자크 파월은 "영국과 교역 규모가 커지면서 영국보다는 독일에, 처칠보다는 히틀러에 더 호감을 가졌던 미국의 기업인들이 점차 영국에 기울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국의 대기업들이 영국의 조속한 승전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영독 간의 전쟁이 장기화돼 미국의 무한정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했다. 헨리 포드는 "언합국도 추축국도 승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국은 "둘 모두 패망할 때까지 싸우는 데 필요한" 전쟁 물자를 양측에 모두 공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의 소련 침공과 일본의 미국 공격 : 진정한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은 1941년 6월 22일 소련 침공을 단행했다(바바로사 작전). 파월은 "독일이 1년만 빨리 소련을 침공했더라면 미국의 지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미국은 소련의 멸망을 원하고 있었다. 당시 미영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은 독일의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다. 1940년 4월부터 6월에 걸쳐 덴마크, 노르웨이,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을 짧게는 몇 시간, 길어봐야 6주 안에 정복한 독일군의 위력을 높게 평가했던 것이다.
영국군 합참의장 존 딜 원수는 독일군이 소련군을 "불에 달궈진 칼이 버터를 잘라내듯" 손쉽게 제압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육군 전문가들도 4∼6주 내 소련군의 패배를 예상했다. 늦어도 8월초에 독일이 승리할 것이라는 얘기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친구 펠릭스 프랑크푸르터와 주고받은 서신에서 히틀러는 "소련을 계란 깨듯 격파할 것"이라고 했다. 루스벨트는 소련이 1941년 10월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봤다.
나치의 승리를 예상했던 미국은 시베리아 등 독일에 점령되지 않은 소련 영토에 비공산 정권의 수립을 추진했다. 소련 침공의 주요 목표는 핵심 전쟁 물자인 석유의 확보에 있는 만큼, 소련의 유럽 쪽 영토 정복에 그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하여 1917년 소련 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케렌스키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1941년 가을이 되면서 소련군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드러냈다. 나치의 전격적 승리는 물 건너갔다. 개전 이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소련군이 1941년 12월 5일 최초의 반격에 나섰다. 파월은 이 반격이야말로 2차 대전의 진정한 전환점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소련은 미국의 유용한 우군임을 입증했다. 미국의 최대 고객인 영국의 군사적, 경제적 생존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소련과 교역하는 것은 미국 기업에 도움이 될 터였다.
1941년 11월, 미국은 소련과 렌드리스 계약을 체결한다. 대나치 항쟁의 우군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소련에 대한 미국의 태도 변화는 1941년 12월 신임 주미 소련 대사로 부임한 막심 리트비노프에 대해 미국의 정치·경제 엘리트들이 전에 없는 환대를 베푼 것에서 잘 드러난다. 미국 언론인 데이비드 브링클리는 "이제 러시아는 우방으로 받아들여졌다. 적의 적은 곧 우리의 친구라는 얘기"라고 말한다.
이제 소련에 대한 나치의 승리는 바람직하지 않게 됐다. 미국의 기업 활동에 해롭기 때문이었다. 미국 엘리트들은 반공(소련)에서 반파시즘(독일)으로 태도를 바꾸었지만 소련의 승리를 바란 건 아니었다. 독일과 소련이 서로 최대한 많이 파괴하기를 바랐다. 소련 침공 이틀 후인 1941년 6월 24일 당시 해리 트루먼 상원의원은 "독일이 이길 것 같으면 소련을 돕고, 소련이 이길 것 같으면 독일을 도와서 양측에서 최대한 많은 사상자가 나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틀 전인 12월 5일 미국 신문 <시카고 트리뷴>의 만평은 "나치와 소비에트라는 두 위험한 야수가 서로 최대한 파괴하는 것이 인류 문명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여하간 유럽의 전쟁 덕택으로 미국은 대공황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이제 영국과 소련은 미국 상품의 주요한 해외 시장이 될 터였다. 미국이 2차 대전에서 겉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면서 속으로는 자국 경제의 해외 팽창을 꾀한 데 대해 미국 역사가 윌리엄 애플만 윌리엄스는 "우리는 제국의 진실을 자유라는 수사로 포장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미국과 일본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다. 중국, 동남아 등 태평양 지역은 미국 상품의 수출 시장인 동시에 고무, 석유, 주석 등 값싼 원자재와 노동력의 공급지로 미국 경제에 긴요했다. 미국은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대륙 팽창을 도왔지만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등을 일으키며 중국 대륙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려 했다. 미국은 문호 개방의 원칙에 따라 중국 진출에 대한 열강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에 대환 미국의 경제적 진출을 거부했다.
미국이 이에 대해 항의하자 일본은 미국이 중남미에 대한 일본의 경제 진출을 허용한다면 중국에 대해서도 똑같은 혜택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미국은 거부했다. 일본이 독점하고 있는 중국 시장에 대한 진출을 요구하면서 자신이 독점해온 중남미에 대한 일본의 진출은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내 것은 나 혼자 먹고, 네 것은 나와 나눠 먹자'는 심보였다. 문호 개방 원칙의 기만성을 드러낸 것이다.
1941년 여름, 미국은 동남아에 식민지를 보유한 영국, 네덜란드와 함께 석유 수출 금지 등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를 발동했다. 이어 11월 26일에는 일본군의 중국 철수 등 10개 항을 요구했다. 핵심 전쟁 물자인 석유 금수와 중국 철수 요구는 일본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전쟁을 하자는 초대장이나 다름없었다. 미국 정부와 군은 이것이 전쟁을 초래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파월은 말한다. 전쟁 기간 동안 일부 미국 대기업이 히틀러와 경제 협력을 지속했던 반면 일본과는 전쟁을 불사한 것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독점적 지배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의 경제적 진출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해군을 기습했다. 이로써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한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독일을 상대로 한 유럽 전쟁에 뛰어들 명분은 없었다. 루스벨트는 1940년 11월 '2차 대전 불참'을 공약으로 대통령 3선에 성공한 데다 미국 내 반전 여론이 거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주만 기습 나흘 후인 12월 11일, '고맙게도' 히틀러가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로써 미국은 유럽 전쟁에도 참전할 수 있게 됐다.
히틀러는 왜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을까?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패배는 전쟁 말기 미국의 참전 때문이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일본의 대소 전쟁 참여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소련에 대한 전격전이 성공하지 못했고, 진주만 기습 이틀 전인 12월 5일 소련군이 첫 반격에 나섰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히틀러의 초조함을 알 수 있다.
독일 역사가 한스 가츠케에 따르면 히틀러는 "독일이 일본의 대미 전쟁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일본이 독일의 대소 전쟁에 참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일본이 지난 3000년간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나라로 대미 전쟁에서도 이길 것으로 생각한 반면,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의 대미 선전포고 소식을 듣고 '이제 승기를 잡았다'며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세계 최강의 경제 대국 미국의 참전으로 연합국의 승리를 확신한 것이다.
'불행히도' 일본은 히틀러가 던진 미끼를 물지 않았다. 대소 전쟁에 나서지 않은 것이다. 일본의 경제·군사력으로는 미국과 소련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함으로써 미국은 아시아, 유럽의 전쟁에 모두 참여하게 된다. 진정한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 역사가 스티븐 암브로스는 "미국은 2차 대전에 참전한(enter) 것이 아니라 끌려 들어갔다(pulled in)"고 말한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전쟁 물자 공급으로 경제적 이득만을 취하려 했으나, 일본 옥죄기-진주만 기습-미일 전쟁-히틀러의 대미 선전포고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쟁에 끌려 들어갔다는 것이다.
제2전선
1942년 내내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에 대해 유럽 서부에 제2전선을 열어줄 것을 간청했다. 미국과 영국이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으로 상륙해 서쪽에서 니치와 대적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소련 단독으로 나치를 대적하기가 힘에 부쳤기 때문에 서쪽에 제2전선을 열어 동부전선의 군사적 부담을 덜려는 것이었다.
당시 히틀러는 동부전선에 260개 이상의 정예 사단을 배치했다. 서부에는 2급 수준의 59개 사단을 배치했을 뿐이다. 영국 역사가 앤드류 데이비스에 따르면 전쟁 기간 동안 소련군은 "독일 병력의 5분의 4, 최소한 4분의 3 이상을 대적했다." 그만큼 소련군의 군사적 부담이 컸다는 얘기다.
1942년 여름 미국과 영국은 상륙작전이 가능할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1942년 5월, 루스벨트는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에게 1942년 안에 제2전선을 열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실제로 연합군이 제2전선을 연 것은 2년이 지난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의해서였다. 왜 그랬을까?
처칠의 주장 때문이었다. 처칠은 제2전선을 여는 대신 북아프리카를 돌아 이탈리아로 진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소련 혼자 독일과 싸우게 놔두고 북아프리카, 중동 지역 등에서 영국의 전략적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을 상대로 한 전쟁에 관한 한 처칠이 선배라는 점에서 이 같은 처칠의 주장은 관철됐다.
미국과 영국은 대신 이른바 제3전선을 열었다. 미국과 영국 공군에 의한 독일 공습이었다. 목표는 공습을 통해 독일 산업을 마비시키고 독일 시민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것이었다. 별명이 '폭격기(Bomber) 해리스'로 전략 폭격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 아서 해리스 장군의 지휘 아래 전략 폭격의 위력을 시험했다. 그러나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이 소요된 제3전선은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1946년 미군이 발표한 <전략 폭격 조사> 보고서는 "폭격은 부정확했으며 독일의 산업 생산은 1944년 말까지 계속 증가"했고, "독일 국민의 사기를 꺾기는커녕 오히려 히틀려 아래 단결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제3전선에 의한 공습은 무고한 독일 시민 30만 명을 살해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미군 측 피해도 컸다. 4만 명이 전사하고, 비행기 6000대가 손실됐다. 유럽 전장 미군 전사자 10만 명의 40퍼센트가 공습 도중 발생한 것이다. 1943년 7월 대낮 공습 때는 단 한 번의 작전에 비행기 100대가 파괴되고 승무원 1000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전략 폭격은 기대했던 성과를 결코 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 자원으로 제2전선을 여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게다가 제3전선에서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이 낭비되면서 제2전선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 결과 미국과 영국은 소련과 벌인 독일 점령 경쟁에서 뒤처지게 된다.
1942∼1943년 겨울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마침내 소련군은 독일군에 패배를 안긴다. 이 전투로 독일의 패배는 사실상 시간문제가 됐다. 이제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에 제2전선을 열어달라고 애걸할 필요가 없어졌다. 소련 단독으로 유럽 전체를 석권할 가능성마저 보였다.
영국 역사가 클라이브 폰팅에 따르면 2차 대전에서 미군과 영국군은 독일군의 10퍼센트와 대적했을 뿐이다. 전사, 부상, 포로 등 독일군의 인명 피해 1350만 명 중 1000만 명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했다. 독일군 전사자의 90퍼센트가 소련군에 의한 것이었다. 소련군 전사자 대비 미군 전사자의 비율은 53 대 1이었다. 태평양전쟁을 포함해 미군과 영국군의 2차 대전 전사자는 60만이었던 데 비해, 소련군 전사자는 1300만이나 됐다. 레닌그라드 전투의 전사자만 해도 미군과 영국군의 2차 대전 전사자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유럽 전장에서 전사한 미군은 10만 명이었는데, 소련군은 전쟁 막바지 베를린 점령을 위해서만 10만 명의 전사자를 냈다.
연합국의 승리가 보이기 시작한 1943년 5월 22일, 스탈린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부인 코민테른을 해체한다. 1943년 말 미국 주간지 <타임>은 스탈린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다. 스탈린이 코민테른을 해체함으로써 좌파의 위협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의구심을 덜어주었다면, <타임>은 스탈린을 2차 대전의 최고 영웅으로 치켜세워 이에 화답한 것이다. 이때가 미소 관계가 가장 좋았을 때였다. 이에 앞서 1943년 1월 미국, 영국, 소련은 카사블랑카 회의를 통해 독일의 항복을 공동으로 받는다는 데 합의한다. 전후 처리를 미국, 영국, 소련 합의에 의해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각국은 이때부터 자국의 전쟁 목표를 추구하면서 물밑 경쟁을 벌였다. 경쟁의 목표는 독일 수도 베를린을 먼저 점령하는 것이었다. 또한 각국이 군사 점령한 국가의 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도 관심의 초점이었다. 카사블랑카 합의의 정신대로 미국, 영국, 소련 합의로 할 것인지, 아니면 군사 점령한 국가의 마음대로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나아가 1941년 8월 루스벨트와 처칠이 발표한 대서양헌장에 명기된 '민족 자결'의 원칙이 지켜질 것인지도 곧 드러날 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 영국, 소련 합의에 의한 전후 처리는 실현되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은 자기들대로, 소련은 소련대로 자국이 점령한 지역의 전후 처리를 단독으로 결정했다. 또한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등 피점령국 국민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대서양헌장이 약속한 '민족 자결'은 공수표였다. 그 첫 사례가 이탈리아다.
연합국의 '민족 자결' 약속은 거짓이었다
1943년 여름,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에서 시실리 섬을 거쳐 로마에 입성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탈리아를 점령한 미국과 영국의 이탈리아 처리는 피점령국 처리의 선례가 될 터였다. 그런데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참여를 배제한 것은 물론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세력을 무장 해제하고 국내 정치 참여를 철저히 막았다.
이탈리아에는 상당한 정도의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 세력이 군사·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의 활동은 외국인 침략자에 대한 항전인 동시에 국내 보수 세력에 맞선 내전이기도 했다. 전통 엘리트, 즉 왕가와 군, 대지주, 은행가, 기업가, 그리고 교황청 등은 1922년 무솔리니의 집권을 도왔고 그로부터 커다란 혜택을 입은 세력들이었다. 레지스탕스는 이들 보수 세력을 권력에서 몰아내려 했다. 레지스탕스의 활동은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전후 이탈리아의 재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반파시스트 세력과 협력하는 것을 일체 거부했다. 미국과 영국이 보기에 이들의 지향이 너무도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다. 반파시스트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들의 압도적 다수가 왕정 폐지를 비롯해 사회, 정치, 경제 분야의 급진적 개혁을 원했다. 특히 처칠은 알프스 너머 유럽 대륙에서 급진적 개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반파시스트 세력을 소련의 볼셰비즘과 동일시했다.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의 요구를 이탈리아의 공산화로 본 것이다.
결국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는 무장 해제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해졌다. 이탈리아 국민의 소망과 기대, 반파시스트 세력의 열정과 능력은 전후 이탈리아 복구에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미국과 영국은 이탈리아 왕가와 군, 대지주, 은행가, 기업가, 교황청 등과 협력했다. 이들은 무솔리니에게 협력한 대가로 커다란 혜택을 입었던 세력으로 대다수 국민들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미국과 영국은 전쟁 이전 이탈리아의 구질서를 복원했다.
미국과 영국의 점령 이후 최초의 이탈리아 지도자는 무솔리니의 부역자였던 바돌리오 원수였다. 이에 대해 이탈리아 국민은 '무솔리니 없는 파시즘'이라고 개탄했다. 무솔리니만 사라졌을 뿐, 과거의 억압적 구질서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은 시실리 등의 마피아를 '반공의 보루'로 칭찬하면서 이들과 결탁했다. 이른바 마피아 작전(Operation Mafia)이 그것이다. 뉴욕의 전설적 갱 럭키 루치아노와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이 한통속이 돼 미국에 적대적인 정권의 전복 공작 등을 추진했다. 미국 정보기관과 국제 범죄 조직이 마약 거래를 중심으로 비밀공작을 펼치는 것은 이후 현재까지 미국 대외 정책의 비밀스런 전통이 됐다. 미국은 카스트로 암살 시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전복 공작 등 의회 승인을 받을 수 없는 CIA의 불법적 반혁명 공작에 필요한 자금을 국제 범죄 조직의 마약 거래 대금으로 충당했다.
미국과 영국은 점령된 이탈리아를 자신의 독점적 영역으로 간주해 점령 정책에서 소련을 배제했다. 여기에서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었다.
'점령국 마음대로, 해방자는 피점령국에 자신이 원하는 정치, 사회, 경제 시스템을 건설할 수 있다.'
유고 작가이자 공산당 고위 관리였던 밀로반 질라스에 따르면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번 전쟁은 과거의 전쟁들과 다르다. 영토를 장악한 세력이 자신이 원하는 사회체제를 도입하는 것이다. 누구든 자신의 군대가 장악한 지역에 자신의 체제를 도입할 수 있다. 다른 길은 없다."
프랑스에서는 어땠는가? 미국과 영국은 1944년 8월 프랑스를 해방시켰다. 이탈리아는 미국과 영국의 교전 상대국이었던 반면 프랑스는 어엿한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런던으로 망명한 드골 장군이 자유 프랑스를 대표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를 이탈리아처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한편 프랑스 본국에는 나치에 부역한 페탱 원수의 비시 정권이 레지스탕스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1944년 3월 '레지스탕스 헌장'을 발표하면서 전후 프랑스의 급진적 개혁을 꿈꾸고 있었다. 페탱과 드골은 매국노와 애국자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둘 다 보수적이었다. 반면 레지스탕스는 급진적이었다. 레지스탕스는 페탱을 경멸했고, 드골은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며 보수적이라고 보았다. 레지스탕스 내에서 드골 추종자는 극소수였다.
전후 프랑스에 대해 미국과 영국은 서로 다른 구상을 갖고 있었다. 2차 대전으로 과거 대영제국의 위상을 잃고 작은 섬나라로 전락한 영국의 처칠은 전후 드골의 프랑스와 함께 미국과 소련에 맞설 수 있는 독자적 유럽 세력의 구축을 구상했다. 반면 루스벨트는 드골이나 레지스탕스보다는 페탱과 협력하는 것을 선호했다. 레지스탕스는 원천적으로 협력이 불가능한 상대였고, 드골은 처칠의 하수인(전후 프랑스가 미국보다는 영국에 기울 것을 우려)으로 보았던 것이다. 미국은 나치의 프랑스 점령 후(1940년 6월)에도 비시 정권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다. 미국과 비시 정권의 외교 관계가 단절된 것은 1941년 11월 비시 정권에 의해서였다. 미국의 전쟁 목표는 1차 대전으로 산산조각이 난 세계 경제를 다시 한 번 단일한 자본주의 체제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에 고분고분하고 보수적인 인물이 프랑스 지도자로 적격이었다. 페탱을 선호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미국은 드골의 집권을 막기 위해 드골을 마다가스카르 총독에 임명하자고 영국에 제의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상륙 후 미국은 비시 정부가 임명한 현지 총독 프랑수아 다를랑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려 했다. 드골은 격노했고, 미국 내에서도 나치 부역자와 협정을 체결하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때마침 다를랑이 알지에에서 암살되면서 이 문제는 흐지부지됐다. 드골파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결코 드골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를 지도자로 인정했다. 당시 미국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은 자신의 일기에 드골에 대해 "잘난 체하는 데다 야망만 많은 속 좁은 인물"이라고 썼다.
그러나 드골은 첫째 다를랑과 같은 비시 정권 부역자가 아니었고, 둘째 레지스탕스 세력처럼 급진적인 사회경제 개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애국자인 동시에 보수파라는 점에서 미국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전자는 프랑스 국민에게, 후자는 미국과 영국에 필요한 것이었다. 스팀슨은 "드골은 나쁘다. 하지만 그 외의 선택은 더 나쁘다"고 실토했다. 특히 프랑스 공산주의자와 좌파가 소련과 관계 강화 움직임을 보이면서 이를 차단해야만 했다. 드골 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미국 역사가 가브리엘 콜코는 "프랑스를 좌파로부터 구해낼 누군가가 필요했다", "미국은 드골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산주의자를 훨씬 더 싫어했다"고 말한다. 1944년 10월 23일, 미국은 드골을 프랑스 정부의 합법적 지도자로 인정했다.
연합국이 파리를 해방하기 수일 전, 레지스탕스는 자력으로 파리를 탈환하겠다는 목표 아래 무장 봉기했다가 나치 독일에 의해 엄청난 인명 피해를 본다. 며칠만 기다리면 이루어졌을 파리 해방을 위해 레지스탕스가 무모한 봉기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과 영국이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드골을 지도자로 내세울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힘으로 파리를 장악한다면 전후 프랑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특히 프랑스는 중앙집권적 국가라는 점에서 수도 장악은 정치적 영향력과 직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의 봉기는 허망한 실패로 끝났다.
영국 역사가 A. J. P. 테일러는 드골의 집권에 대해 "단 한 번도 전투를 하지 않은 장군, 단 한 번도 선거를 치르지 않은 정치인"인 드골이 전후 프랑스의 권력을 잡았다고 지적했다.
파월은 "드골이 레지스탕스의 정치적 영향력을 일정 부분 인정하고 상당한 정치적 개혁을 했지만, 그가 아닌 급진적 정부가 들어섰다면 레지스탕스 헌장에 제시된 더 급진적 개혁이 현실화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 "이탈리아와 프랑스 해방 후 미국과 영국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해방자는 해방된 국민들 스스로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보편적 원칙(대서양헌장의 민족 자결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프랑스의 피해는 그리스가 당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그리스 레지스탕스는 이탈리아 및 독일 파시스트에 대한 피어린 항쟁의 결과로 전후 집권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처칠과 스탈린의 밀약에 의해 처참한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1944년 10월 처칠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비밀 협상을 벌인다. 1944년 6월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그해 9월 라인강 도하를 위한 마켓 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에 실패함으로써 베를린 점령을 놓고 소련과 벌이던 경쟁에서 극히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처칠은 발칸반도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몸소 모스크바까지 날아간 것이다. 이 비밀 협상에서 양측은 헝가리, 루마니아, 폴란드 등은 소련의 세력권(소련이 90퍼센트), 그리스는 영국의 세력권(영국이 90퍼센트)으로 하고,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는 50 대 50으로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로 합의한다.
이 비밀 합의에 따라 영국은 전쟁이 끝난 이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다. 그러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으로는 더 이상 그리스 우파를 지원할 수 없게 되자, 영국은 미국에 SOS를 쳤다. 이에 따라 미국이 영국을 대신해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게 되는데, 이때 바로 냉전의 공식적 기원으로 얘기되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다. 핵심은 국제 공산주의의 음모에 의해 자유를 빼앗기게 된 그리스 국민을 위해 그리스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스탈린은 처칠과 맺은 밀약을 '충실히' 지켜 그리스 내전에 일체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스 레지스탕스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우파에게 패배했고 이후 그리스는 군부 독재 등 숱한 고난을 겪게 된다. 결국 그리스는 미국, 영국, 소련 등 강대국 간 흥정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그리스의 고난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국제 문제에 개입한다는 미국의 주장이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한편 미국과 영국이 1943년 여름부터 1944년 여름에 걸쳐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을 해방시키는(즉 자신의 영향권 안에 편입하는) 동안, 소련은 1944년 여름까지 자국 영토에서 전투를 치러야 했다. 소련은 1944년 가을에야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미국과 영국이 차지한 프랑스, 이탈리아와는 비교되지 않는, 보잘것없는 전리품이었다.
1945년이 되면서 미국·영국과 소련은 누가 먼저, 누가 더 많이 독일 영토를 점령하는가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나아가 미국은 나치 독일과 개별 평화조약을 맺고 소련을 침공하겠다는 계획까지 추진하는 등 미국과 소련 간의 갈등은 갈수록 깊어간다. 다음 호에서는 나치 패망에서 냉전의 시작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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