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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과 청중, <해방일기> 김기협에게 묻다 "그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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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과 청중, <해방일기> 김기협에게 묻다 "그건 왜?"

[프레시안 books] <해방일기> 완간 기념 김기협-김동춘 북 토크

<해방일기> 완간 기념 북 토크가 25일 오후 7시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서울 정동)에서 열렸다. 저자 김기협과 사회학자 김동춘의 대담에 이어 청중이 질문하는 형식으로 2시간 동안 이어졌다. 사회는 박인규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 이사장이 맡았다. 대담 및 질의응답의 주요 내용을 정리했다. '편집자'

[저자 발제] 한반도 남반부에 국가가 존재하는가

▲ <해방일기> 저자 김기협. ⓒ프레시안(최형락)
3년간 <해방일기> 작업을 하고 나서 국가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을 강하게 느끼며 자랐고 민족을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국가와 민족이 갈등을 일으키는 장면을 많이 접하면서 '국가는 죽이고 민족을 살렸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국가주의에 큰 반감이 있었다. 그러나 3년 작업을 하면서 '내가 잘못 짚었다. 민족과 국가를 따로 생각할 게 아니구나' 싶었다. 훌륭한 민족의식을 갖는 것 못지않게 훌륭한 국가 의식을 갖는 것도 중요하며, 좋은 국가를 만드는 데 더 많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반도 남반부에 국가가 존재하는가, 이 질문을 생각해보자. 국가가 제대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데는 다들 문제의식이 일치하리라고 본다. 국가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현실에서는 국가는 어떤 것인가 하는 존재 차원에서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국가의 부재, 국가의 실패가 심각함을 생각하면 당위론적 접근이 필요한 상황이다. 역사학자가 국가론에 있어 당위론적 접근을 하는 것은 상상 차원에서 유토피아를 찾자는 게 아니다. 역사 속에서 국가가 존재했던 형태를 검토하고 거기서 현재 문제 극복의 실마리를 찾자는 것이다.

거기서 난 권위주의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보통 나쁜 뜻으로 쓰이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예를 들어 한반도에 존재했던 유교 국가는 한마디로 권위주의 국가였다. 국가와 같은 거대한 조직체를 어떤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가를 생각해보면 권위를 도구로 움직이는 경우, 권력을 도구로 쓰는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권력은 객관적 계량화가 가능한 개념이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의 국가라 하더라도 권력을 도구로 삼아 운영할 경우 일률적인 운영 방식을 설정할 수 있다. 물리적인 방식으로 사람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 권력과 달리, 권위는 도덕적인 감화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국가를 움직이는 데 괜찮은 도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근대 세계에서는 권위를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권력만으로 그 체제를 운영했다. 그것이 서양 근대 국가 체제의 기본 원리인데, 이것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근대 국가의 목적을 요약하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명을 앞세운 건 누구나 납득할 수 있지만 재산이 생명과 나란히 서야 하는 것인가? 또 생명도 객관적 계량화가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돼 뽑힌 것이고 그것 때문에 실제로 많은 문제가 생긴다. 생명, 재산 이외의 가치는 묵살하고 부정한다. 예를 들어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무상 급식을 중단시킨다고 할 때 그걸 지지하는 쪽에서는 명예라는 걸 생각하지 않는다. 가난을 입증해서 타 먹으라는 건데, 거기서 명예는 아주 부수적인 요소가 되거나 없어진다. 그리고 재산을 위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게 하는 일을 계속 겪고 있지 않나.

이러한 근대 국가의 성격이 과연 적합한 것인지에 대해, 통념이 된 기준을 넘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런 지나친 계량화의 문제는 우리 사회만의 것이 아니다. 근대 국가 체제가 운영되는 곳은 어디든 그렇다. 그런데 그 체제의 문제점을 극복하지는 못하더라도 완화하기 위한 여러 전환이 발생한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권력을 기준으로 한 권리와 책임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닌 요소에도 개입한다. 예컨대 도덕성 같은 것이 그렇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인간으로서 할 짓, 못할 짓을 가리는 어느 정도의 자연스러운 저항이 있어서 아주 막장으로 빠지지는 않는다. 제도 운영 기준은 우리와 같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아주 참혹한 것은 피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가. 그건 어디서나 도덕적 권위라는 게 어떤 형태로든 작용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도덕성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도덕성을 전복시키는 통치를 겪어왔기 때문이다. 그게 가장 적나라했던 것이 식민지 시대였다. 식민 통치를 위해, 도덕적으로 엘리트 역할을 해온 집단을 배제하고 도덕성 같은 건 등진 사람들이 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 운용했다. 친일파라 부르는 집단이 거기서 나온 것이다. 망국의 피해에서 물질적인 수탈보다도 그런 전통의 파괴와 단절, 여기에 더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해방이 되고도 회복하지 못했다.

<해방일기>를 작업하는 동안, 왜 참혹한 망국을 겪고도 거기서 벗어나는 기회를 해방되고도 찾지 못했나에 주목했다. 망국 당시에도, 해방 공간에서도 좋은 장래를 만들기 위한 노력과 뜻은 분명 있었는데 왜 좋은 결과를 못 봤을까. 외세가 너무 압도적인 힘을 갖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해방일기>에서 중간파를 부각하기 위해 애썼는데, 중간파가 무능한 이상주의자들이어서 그런 결과가 생긴 게 아니었다. 당시 외세를 등에 업고 휘두른 너무나 막강한 힘 앞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원래 중국사 전공자이지만 한국 현대사 작업을 몇 년 했는데, 현대사 전공자들하고 의견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 그분들은 내인론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난 철저히 외인론을 제기한다. 남이 뭐라고 안 하는 상황이 이제 오니까 우리가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기 위해서도 외인론, '남 탓 주의'로 나아갔다. <해방일기> 작업을 마치고 작년에 '냉전 이후' 작업을 했고 요즘엔 '자본주의 이후'라는 주제로 <프레시안>에 연재하고 있다. 한국사가 개항 이후 고통과 치욕의 역사로 지금까지 내려온 근본 원인을 '남 탓'으로 하는 작업이다. 산업혁명 등을 거치며 서세동점 현상이 있었는데, 자본주의 체제가 한계에 이름으로써 서세동점도 끝나가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너무나 극심했던 외세의 입김에서 벗어나 우리 진로를 잘 찾아갈 수 있는 기회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망국 단계에서든 해방 공간에서든 당시 외세를 등에 업은 권력자들보다도, 비록 좌절됐더라도 이 사회가 살아나는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선인들의 뜻을 제대로 배워 표출해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한다.

[토론자] 김동춘이 꼽은 <해방일기>의 9가지 덕목

▲ 김동춘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해방일기> 10권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취지는 이해했다. 문제의식의 많은 부분에 동의한다. 저자 시각에 50퍼센트 혹은 70퍼센트 정도 동의한다.

작년 12월, 어떤 자리에서 세월호 문제에 대해 발표했다. 그때 난 세월호 문제에 대해 국가 문제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반국가로 표현했다. 국가성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에서 반국가로 썼다. 그리고 주권은 4분의 1 주권 체제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회학자인 내가 보기에 저자 입장은 베버와 뒤르켐 생각에 반반쯤 가까이 간 것 같다. 그리고 전형적인 보수주의자로서 베트남전이나 미국 사회의 타락을 비판한 미국의 한 사회학자의 이야기와 문제의식이 유사하다. 그러나 한국 보수가 워낙 엉터리여서 저자 이야기가 진보로 비치는 상황이다. 여기 오신 분들이 저자를 진보로 착각할까봐 미리 이야기한다(웃음).

<해방일기>의 9가지 덕목을 적어왔다. (1)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해석을 하지 않고 진보학자들도 대개 실증 사학 입장인데, 그걸 비판한 건 아주 적절하다. 저자는 자신의 시각을 계속 드러냈는데, 그게 좋았다. (2)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비교 연구를 안 한다. 한국사 연구자는 한국사만, 동양사 연구자는 동양사만, 서양사 연구자는 서양사만 하는 식이다. 그와 달리 저자는 원래 중국사 전공자이기에 왔다 갔다 하면서 입체적으로 접근했다. 개인적으로 폴란드 사례가 가장 흥미로웠다. (3) 냉전의 기본 조건으로 원폭을 많이 강조했다. 원폭 사용이 냉전의 시작이자 전후 세계 질서의 일환이라는 것인데, 그간 많이 나온 이야기이긴 하지만 중요한 지적이다. (4) 친일 문제를 민족주의 시각에서만 보는 건 곤란하지 않느냐는 언급을 몇 번 했는데,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본다. (5) 조선 시대와 식민지 시대, 해방 후를 교차하면서 경제사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게 간간이 나오는데 흥미로웠다. (6) 저자는 미국과 소련이 냉전에서 대칭적인 1 대 1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이것도 여러 사람이 많이 강조했던 것이긴 하지만, 기존의 냉전적인 시각을 확실히 비판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7) 조선총독부가 우익들에게 돈을 줘서 물적 기반을 만든 부분을 이야기했는데, 중요한 지적이다. (8) 저자는 임정 역할을 굉장히 강조했다. 그동안 진보 학자들이 이야기한 것과 충돌하는 요소가 있지만 난 그렇게 볼 수 있다고 본다. (9) 반탁 운동에 대한 평가 문제다. 저자는 독립이라는 것이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고 사실상 한국 독립 운동가들의 기여가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는데도 그게 과대 평가돼서 곧바로 독립이 올 것처럼 분위기를 만든 건 굉장히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요하다고 본다. 이 9가지, 계속 음미할 만한 쟁점이라고 생각한다.


[대담] 김동춘이 묻고 김기협이 답하다

김동춘 : 나와 생각이 다른 부분들에 대해 말하겠다. 우선 저자는 미국과 소련이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했다. 미국은 적극 개입했고 소련은 그렇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저자도 일정 부분 지적하긴 했지만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데서 오는 국제 정치적인 차이를 더 강조했으면 어땠을까. 당시 미국은 일본에 대해서는 확실한 이해관계가 있었지만 조선에 대해서는 그게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엔 군정을 실시하고 일본의 경우 헌법을 만드는 데 개입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의도를 너무 강조하는 건 적절하지 않은 접근법이 맞다. 그 점에선 저자에 동의한다. 그러나 미국은 국내 정치의 연장으로서 조선을 본 것이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것이 미국식 독특한 제국주의인 건데, 이 점을 소련의 정책과 구체적으로 대비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또 소련은 발전 도상 국가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미국과 비교할 수 없는 나라였다. 이런 체제 차이와 거기서 오는 국제 정치의 차이를 더 부각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기협 : 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 가변성이 있었던 건 중국 사정 때문이다. 원래 미국은 중국까지도 자국의 영향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7년쯤부터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조선에 대한 태도가 바뀐다. 그러니까 군정을 시작할 때는 '한국이 어디냐?', 이런 식이었다. 중국에도, 일본에도 거점을 만드는데 조선을 크게 신경 쓸 것 있나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중국이 공산화 쪽으로 기울면서, 군정을 처음 실시한 때와 다르게 조선을 대하게 된다. 그 변수가 중요하다.

김동춘 : 다음 쟁점이다. 저자의 일관된 입장인데, 중도파 특히 안재홍을 중심으로 상황을 보고 극좌와 극우에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런데 이런 시각은 극좌, 극우를 같은 지평에서 비판할 위험성이 있다. 극우는 기본적으로 이해관계로 뭉친 집단으로서, 도덕적으로 비판할 대상은 아니라고 본다.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쨌건 극우는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존재다. 이와 달리 좌파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만든 측면이 강하다. 양자를 비판할 때는 다른 각도에서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둘 다 문제가 있으니까 중간으로 가자',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김기협 : 중간파 안에 사회주의를 표방한 사람도 있었고 우익을 표방한 사람도 있었다. 거기서 그들이 이념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1차적 과제가 만만치 않다고 판단하고, 오스트리아에서 한 것처럼 좌우 합작을 해서 민족국가를 확보하는 데 집중하자는 입장이었다. 그것에 동의하지 않고 나선 사람들은 외세 의존 경향이 컸다. 난 당시 건국 과제를 중시해 1차적으로 합작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은 범위를 극좌, 극우로 봤다. 그리고 좌익 중에서도 김일성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박헌영은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렇게 한 데는 그의 좌파 이념보다는 외세에 의존한 점이 더 크게 작용했다.

김동춘 : 다음은 우익 문제다. 이승만, 한민당, 임정 등이 있었는데 내 생각에 한국의 우익들 중엔 국내 기반이 있었던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다 결핍감, 열등감을 갖고 있었고 그 때문에 모두 오버했던 것 아닌가 생각한다. 이승만이 (일제 강점기에) 국내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친일파가 됐을 것이라고 본다. 한민당은 친일 행위를 했기 때문에, 김구는 국내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이런 콤플렉스 때문에 이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다 오버했다. 이러한 콤플렉스를 만든 근원적 원인은 일제 식민 통치에 있는 것 아닌가, 식민지 체제의 폭압성이 국내 세력들의 기반을 다 뺏은 데서 비롯된 결과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한국 우익들의 문제에 대해 개별 집단들의 전략적 선택보다는 이런 구조적인 측면을 더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김기협 : 이견이나 질문이라기보다도 내게 보태주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겠다.

김동춘 : 1945년 8.15 직후는 혁명과 정치가 교차하는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결국 승리한 건 폴리티션(politician)으로서 가장 강한 멘털리티를 가진 이승만이었다. 조봉암 같은 경우도 이승만 편에 들어가 정치가로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역사적 기여를 한 측면도 있다고 본다면, 혁명가로서 보이는 모습을 이상적으로 보는 게 타당한가. 외세가 개입하는 상황에서는 혁명보다는 정치가 필요한데, 세력 기반이 없는 중도주의보다는 현실적으로 외세와 결합된 어느 쪽이든 들어가서 그걸 바꾸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았는가 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김기협 : 조봉암이 이승만 정부에 농림부 장관으로 들어가서 어느 정도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 이승만 정부 역량의 최대한이었다고 본다. 토지 개혁이 너무나 절실한 문제였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라 하더라도 안 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봉암이 정부에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정도 이외에는 이승만 밑에서 정치가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었다고 본다.

김동춘 : 다음은 민족주의 문제다. 저자는 민족주의를 강조하지만, 민족주의는 현실적으로 대중적인 조직화를 하는 데는 굉장히 무기력한 측면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대중은 일반 생산 대중이다. 그렇게 본다면 안재홍 등의 입장이 당시 객관적으로 바람직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외세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현실적인 힘을 발휘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김기협 : 유럽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민족주의의 의미에 회의적으로 기울 것 같다. 폴란드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민족 운동이라는 게 귀족 계급의 무대였다. 조선의 경우 그 기반 요건이 크게 달랐다. 민족국가를 1000년간 유지하면서 그 정체성의 근거로서 민족의 의미가 유럽에 비해 더 든든했고, 그것이 계층에 관계없이 상당히 넓게 퍼져 있었다. '불평등 사회였는데 그런 사회를 민족국가라고 할 수 있느냐', 뉴라이트 쪽에서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던데 그건 유럽의 표준을 한국에 적용하려고 억지를 부리는 것 같아 난 못마땅하다.

김동춘 : 10여 년 전 임지현 교수와 이 문제로 논쟁했는데 그때 내가 저자 입장이었다(웃음). 그런데 현실적으로 한국을 보면 민족주의가 진보보다는 보수 반동 쪽으로 동원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김기협 : 민족주의엔 그런 위험이 늘 있다. 그래서 유럽에서 배워온 민족주의 말고 우리 체제에 맞는 민족주의를 새롭게 함양할 필요가 있다. <해방일기>에서도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를 이야기했는데, 안재홍이 그에 관한 논설에서 사실 그 의미를 그렇게 잘 풀어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지향성은 분명히 나타냈다. 그 이야기가 그 시점보다 지금 시점에 더 적절하다고 본다.

김동춘 : 다음은 공산주의 문제다. 좌파가 1945년 말 반탁을 하다가 며칠 사이에 돌아섰고 이것이 그 입지를 결정적으로 약화시킨 계기가 됐다. 그런데 당시 한국 좌파가 왜 그런 모습을 보였을까 하는 질문이 계속 떠오른다. 저자는 김일성이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측면이 있었던 데 비해 박헌영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본다. 그러나 당시 소련은 세계 사회주의 운동에서 거의 거역할 수 없는 중심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좌파가 독자 노선을 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박헌영을 약간 옹호하자면, 해방 전 국내에 있었던 사람들은 좌파건 우파건 극악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이 사람들의 노선을 비판하는 것과는 별도로 조금은 동정적 이해가 필요한 측면은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기협 : 인자한 심성, 배우겠다(웃음).

김동춘 : <해방일기>를 보면 신문 등을 주로 활용하고 서울의 지식인들, 운동가들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농민 대중의 문제를 살펴보자. 물론 일본 식민 지배를 좋아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고 해방을 반겼으리라 생각하지만, 당시 농민들이 실제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민족주의 시각에서 보면 일제 식민지가 되면서 조선 사람은 다 큰 억압을 느꼈다고 하는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고 본다. 조선 시대에 신분 차별 등을 심하게 겪은 층에는 그렇지 않았을 사람이 많았으리라고 본다. 해방됐을 때는 어땠을까. 물론 환영은 했겠지만 그걸 지금의 민족주의 시각으로 투사해서 보는 게 맞나?

그리고 한국은 소(小)소유자 의식이 굉장히 강한 나라다. 남로당 배가 운동을 할 때 상당히 많이 가입하는데 그게 사회주의 의식 때문에 그런 것이었을까? 당시 사회주의를 지지한 사람이 70퍼센트였다고들 하지만 난 별로 그렇게 보고 싶지 않다. 오히려 농민들은 자기 땅뙈기 하나 얻기를 원하는 소소유자 의식을 갖고 있었고, 그런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 시기든 일제 시기든 그리 단절적으로 보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김기협 : 미군정청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어떤 체제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사회주의가 70퍼센트 나왔다. 난 이걸 중시한다. 그것이 사회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뒷받침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토론자 견해에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의미가 없다고 보진 않는다. 그 당시 사람들은 '소유권을 부정하는 공산주의, 소유권을 절대시하는 자본주의 다 극단적이다', 이런 식으로 인식했다. 극단은 싫고 국가가 적절한 정도의 권력을 갖길 바란 뜻으로 난 이해한다.

김동춘 : 진실화해위에서 일할 때 이런 걸 봤다. 1946년 남로당 배가 운동을 할 때 동네에서 남로당에 가입하게 한 것하고 1949년 보도연맹에 비슷한 식으로 가입시킨 걸 헷갈릴 뿐 아니라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꽤 있었다. 농민을 비롯한 당시 사람들의 정서로 보면 그것들이 각자의 적극적인 선택이었다기보다는 권력에 따라 우왕좌왕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다음은 친일파 문제다. 저자는 한국이 전쟁 범죄를 처벌하지 않은 나라라고 했다. 난 친일이라는 말이 누구로부터, 어디로부터 시작됐는지 우선 궁금했다. 그리고 왜 당시 이것을 전쟁 범죄로 규정하지 않고 친일로만 규정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물론 이건 지금 시각이고 당시로서는 전쟁 범죄로 규정하기 어려웠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왜 친일의 범주를 세분화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김기협 : 친일이라는 말은 일제 시대부터 쓰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친일파의 존재가 명확하지 않지만, 일제 시대에는 어느 동네 사는 누구라는 식으로 뚜렷했다. 전쟁 범죄에 대해 말하면, 우리 조상들이 일본의 정책에 묶인 상태로 쭉 살아오지 않았나. 일본의 교육과 선전에 전면적으로 노출돼 있었고, 다른 관점은 도입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전쟁 범죄라는 개념을 명확히 떠올리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미군이 들어와서도 '센 놈이 등을 친다'는 걸 변함없이 보여줬고, 거기서 '아무리 힘이 있어도 못할 짓이 있다'는 식으로 전쟁 범죄를 규정하는 인식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본다.

김동춘 : 군사 독재에 부역한 부분을 오늘날 평가할 때 범죄자로서 처벌해야 할 경우와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보고 화합해야 하는 경우를 구분하는 것이 절실하다. 그런데 민족주의 담론으로는 이게 애매하다.

김기협 : 안재홍 논설 중 친일파를 너무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걸 반대하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중간파에 일반적이었던 시각으로 보인다. 범죄성의 등급을 나눠서 심한 건 처벌할 수밖에 없지만, 그 정도가 덜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반성하고 양보하는 자세를 보이면서 민족국가 건설에 종사하게 하자는 주장이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김동춘 : 다음은 통일 문제다. 역사는 바꿀 수 있어도 지리는 못 바꾼다는 말이 있다. 정치 지리는 우리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택할 수도 없다. 한반도 통일 문제는 오스트리아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외세를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시나리오였나 하는 의문이 든다.

김기협 : 내 생각은 '남 탓 주의', 외인론이다. 서세동점 현상 안에서는 대책이 없었다고 본다. 일어났던 일들을 큰 차이 없이 어차피 겪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비교해 합작 문제를 이야기했는데, 사실 오스트리아와 달리 선택할 수 있는 조건에도 결함이 있었고 오스트리아 수준으로 좌우 합작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미국과 소련이 존중해줬을까?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국공 내전이 한창이었고, 좌우 합작을 한반도에서 하기가 오스트리아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이었다. 즉 큰 틀은 서세동점 상황이 규정하는 부분이 강했다.

김동춘 : 내인론 측면을 이야기하겠다. 저자는 발제할 때 좋은 국가의 이상을 말했다. 나도 좋은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를 밑으로부터 본다면, 완전히 충분한 주권을 행사하는 근대 국가는 제국밖에 없다고 본다. 제국이 아닌 모든 국가는 주권이 제약된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국가는 OX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 문제라고 본다. 정도의 차이를 좌우하는 내적인 요인은 결국 민중의 힘이다. 민중의 힘만큼 국가가 국민의 국가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현존하는 국가 중 좋은 국가에 가까이 간 건 복지국가다. 복지국가로 갈 수 있었던 건 조직된 노동 세력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조직된 노동 세력의 뒷받침을 말하지 않고 좋은 국가를 이야기하는 건 이상론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

김기협 : 현실에서 바람직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의 노력을 합쳐야 한다. 국가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그것 없이 '서세동점 끝났으니까 좋은 세상 왔어', 이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내부적, 미시적인 측면만 보면서 거시적인 변화에 대한 이해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결과에 빠질 위험이 있다.

박인규 : 김동춘 교수에게 한 가지만 묻겠다. 절반의 국가, 4분의 1 주권이라고 했다. 어떤 의미인가.

김동춘 : 한국의 분단은 서로 합쳐 화학적 결합을 하려는 힘이 작용하는 분단이다. 이걸 억지로 떼어놓으면, 한쪽은 붙이려고 하는 힘과 동시에 그 밖에 있는 힘을 어떤 형태로든 활용하려 한다. 그렇게 되면 군사적, 정치적으로 충분한 주권을 누릴 수 없다. 그게 내가 이야기한 반국가다. 그리고 미국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가 쓴 <절반의 인민 주권>이라는 책이 있다. 샤츠슈나이더가 절반이라고 한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떤 정당도 민중의 요구를 100퍼센트 대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난 대한민국 탄생 과정에서 국가보안법 등의 문제 때문에 진보 정당이 등장하기가 대단히 어렵게 된 정치 지형이 만들어진 것 등을 고려해 반의반이라고 봤다.

ⓒ프레시안(최형락)


[질의응답] 청중, 김기협에게 묻다

청중 A : 요즘 한국이 중국 쪽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미국 쪽으로 갈 것인가 하는 이야기가 많다. 어떻게 보나.

김기협 : 안 물어봐도 짐작할 텐데, 중국 쪽으로 가야 한다. 조선 시대에 민족의식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때 그게 배타적인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 사대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그렇게 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만민 평등을 이야기하면서 명목상의 평등으로 현실의 불평등을 가리지 않나. 만국 평등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큰 나라, 작은 나라를 가려서 각자 구실을 하자는 것이다.

청중 B : 해방 공간에서 주요 지도자 네 명이 암살당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역사의 진로가 바뀌지 않았을까.

김기협 : 다른 인물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게 여운형이었다. 좌익의 향배가 불안정한 게 많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운형이 계속 활동했다면 적지 않은 차이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중 C : 서세동점이 끝나간다고 했다. 한반도에서 어떻게, 무슨 이유로 끝나간다고 보나.

김기협 : 서세동점이 끝나간다는 것보다도 근대 문명이 한계에 접근해간다고 보는데, 그건 문명사를 공부로 한 판단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화 측면에서 근대 문명의 한계점을 이야기하고 세계 체제론은 경제 측면에서 그렇다. 나하고는 다른 각도에서 본 건데, 여러 각도에서 비슷하게 보인다고 하면 그건 허상이 아니라 실체일 개연성이 큰 것 아니겠나. '자본주의 이후' 작업을 통해 서양 근대 체제의 한계를 정리, 종합하면 세계 체제의 변화, 문명 전환을 더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하고 있다.

청중 D : '자본주의 이후'와 관련, 민족사를 희망적으로 보나 부정적으로 보나.

김기협 : 진행되고 있는 변화의 기본 방향에서 중요하게 보는 것이 원자론적 세계관에서 유기론적 세계관으로, 이것이다. 문명 발생 이후 두 관점이 병행해왔는데, 서양에서 시작된 근대 문명은 아주 기계적으로 원자론적 관점에 쏠렸다. 그건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본다. 유기론적 세계관과 질서 원리의 회복은 조선 망국으로 끊긴 문명 전통을 회복하는 것이다. 중국의 성장에 대해 세계 체제론에서도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헤게모니가 넘어간 것과는 다른 차원이라고 이야기한다. 칼자루를 누구에게 넘기느냐가 아니라 게임의 룰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변화는 민족사가 입은 큰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의 변화라고 본다.

청중 D : 중국이 성장하고 있지만 그건 서양을 따라가는 것 아닌가.

김기협 : 그런 관점도 있는데, 아리기의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같은 데서는 중국의 변화가 평면적인 위치 변화가 아니라 구조적인 변화를 몰고 올 가능성을 크게 본다. 진행 중인 변화이니 여러 관점이 엇갈릴 수 있는데, 그걸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깊은 의미를 가진 변화로 보는 관점이 점점 득세하는 상황이다.

청중 E : 어제(24일) <한겨레>에서 박종철 열사 형을 인터뷰한 기사를 봤다. 내가 대학 1학년일 때 박종철 열사가 세상을 떠났는데, 둘째 애가 이번에 대학에 들어갔다. 박상옥 후보자가 대법관이 되면, 그걸 애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세동점이 저물고 외부 요인이 변화하니 긍정적인 게 올 것이라고 했는데, 난 요즘 희망이라는 게 있긴 한 건가 하는 생각을 한다.

김기협 : 사회를 바꿔갈 방향에 대해 좋은 비전이 없을 때 사람들이 소소한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그런데 비전이 주어진다면, 똑같은 사람도 목전의 이해득실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비전을 갖고 건강한 자세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마련하는 게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눈에 보이는 잘못된 것을 고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의미가 있는 것을 드러내는 일도 필요하고 난 그런 쪽으로 작업하고자 한다.

청중 F : <해방일기> 인물 중 한 명에게 한 가지만 묻는다면 누구에게 무엇을 묻고 싶나.

김기협 : 김구 선생에게 가서 반탁 운동과 관련해 "진짜 왜 그러셨어요?"라고 묻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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