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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합의, 한국의 주권국가 포기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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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합의, 한국의 주권국가 포기 선언" [분석] "박근혜 정부, 수십만 여성의 인권과 존엄 저버려"
다음은 지난 12월 28일 위안부 문제 관련 한일 합의에 대한 미국의 활동가이자 작가, 교사인 K. J. Noh의 비판이다.

그는 위안부 문제란 1932-1945년 일본 제국의 체계적 계획과 조직에 의해 실행된 전쟁범죄로서 그 피해자는 수십만명에 이른다고 지적한다. 역사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 중 40%는 자살을 택했으며 생존자의 비율은 25%에 불과하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비견될만한 잔혹한 성착취의 전쟁범죄였던 것이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당사자들의 침목 속에 1991년까지도 그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해 한국의 김학순 할머니가 고통과 수치를 무릎 쓰고, 용기 있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음으로써 비로소 위안부 문제는 세계의 공론장에 등장했다.

그러므로 위안부 문제는 한국 정부가 강변하듯 한국의 생존 46명 위안부 할머니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수십만 여성들의 생명과 인권, 존엄과 명예가 달린 문제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이번 합의를 통해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함으로써 일본의 전쟁 범죄를 추궁할 수 있는 길을 원천 봉쇄해 버렸다. 한국의 희생자가 제기한 세계의 중대한 인도적 문제를 한국 정부가 덮어버린 것이다.

필자는 "인류 역사상 가해국 정부가 공식 사과를 하면서 향후 피해자들의 문제 제기 및 비판을 금지시킨 적은 없었다. 전쟁범죄와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에는 어떠한 제약도 조건도 있을 수 없다. 이들 범죄에 대해 침묵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바로 이런 전제조건에 합의를 해주었다. 이처럼 전면적인 항복, 이보다 더한 도덕 및 주권의 포기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게 사과라면-그리고 한국이 더 이상의 비판을 제기할 수 없다면-한국은 스스로 주권국가이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필자는 한국 정부가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정책을 편 이유를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정책에서 찾는다. 미국은 떠오르는 중국을 봉쇄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군사-정치 동맹이 필요했고, 이 동맹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 위안부 문제였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세계 패권 유지, 일본은 군사화에 의한 과거 제국의 영광 재현, 한국은 미국에의 맹종이라는 광기에 이끌려 수십만 여성들의 생명과 인권, 존엄과 명예가 달린 중차대한 인도적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이번 위안부 합의는 한마디로 말해 '광기(狂氣)로의 회귀'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이 글은 미국의 진보적 매체 <카운터 펀치> 12월 31일자에 실렸으며 원문은 아래에서 볼 수 있다. ()

위안부 희생자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신

외교적 유착


2015년 12월 28일, 한국과 일본의 외무장관은 갑자기, 그리고 성급하게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선언했다. 일본 총리 개인의 사과와 함께 배상을 위한 기금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일본 외상은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부의 개입 아래 수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심각한 손상을 입힌 사건"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46명의 생존 위안부 할머니들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10억엔 출연을 약속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과 운동단체들은 이번 합의가 '배신'이자 '사기'라며 강력 반발했다. 어떤 할머니는 드러내놓고 울었다. 야당 정치인들은 외교부 장관의 사임을 요구했다.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일본의 활동가 단체인 '종군 위안부를 위한 한국 협의회'는 이번 합의는 "충격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합의는 한국에게는 굴욕적 외교다...위안부 할머니 및 한국 국민들의 염원을 철저하게 배신한 외교적 유착에 지나지 않는다..이로써 (위안부 문제에 관한) 지난 25년의 진전이 모두 허사가 됐다"

위안부이자 적극적 활동가인 이용수 할머니 역시 이번 합의를 비난했다. 이 할머니는 "도대체 희생자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합의다. 나는 전적으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외교부 장관에 대해 '배신자'라고 규탄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왜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세계 언론들은 (이번 합의를) 칭송하고 있고, 미 국무부는 즉각 환영하면서 널리 알리기에 나섰는데 말이다. 겉으로만 보면 이번 합의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일본이) 사과의 서한과 함께 위로금, 또는 배상금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70년이나 됐고, 아무런 합의가 없는 것보다 뒤늦게나마 합의하는 게 나은 게 아닌가. 위안부 할머니들은 무엇을 더 원하는 것일까?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역사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다

이른바 '위안부 시스템'이란 것은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 군대가 아시아 전역에서-주로 조선, 대만 등 일본의 식민지였던 11개 지역에서-수십만 명의 젊은 여성들을 납치 및 성노예로 전락시킨 계획적이고도 조직적인 범죄행위였다. 이 시스템이 시작되고 확대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일부 직업적 매춘부가 동원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곧 여성에 대한 성착취를 위한 일종의 산업시스템이 돼 엄청난 규모로 커졌고, 현대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의 성착취로 발전했다. '위안부 시스템'이란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의한 대량 학살에 비견되는 전시의 성착취 및 학대이다. 산업적 규모의 강간 공장, 즉 전면적이고 조직적이며 합리적으로 계산된 (여성의) 조달, 감금, 고문, 학대, 성노예화, 그리고 테러가 자행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이러한 야만의 역사는 정책, 정치, 편견의 기록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역사의 기억 상실을 유도하기 위한 음모였다. 고문과 매질, (팔, 다리의) 절단과 매일 이어지는 강간-하루에 최고 50회까지-에서 살아남은 위안부 여성들 중 일부는 후퇴하는 일본군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전쟁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조치였다. 성노예로 전락한 위안부 여성 중 약 40%는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학자들은 일본군 위안부 여성 중 살아남은 비율이 25% 정도일 것으로 추산한다. 전장에 투입된 병사, 대서양 노예무역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끌려갔던 흑인노예들의 사망률보다도 높다. 이는 '위안부' 문제가 20세기 사상 최대의, 인정되지 않은, 나아가 해결되지 않은 학살 행위임을 말해준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납치, 징발되거나 또는 속임수에 의해, 아니면 그냥 팔려갔는지 그 숫자를 알 길은 없다. 보복을 두려워 한 집행 당국자들이 거의 모든 기록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숫자는 수십만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위안부 시스템이 일본 정부에 의해 체계적으로 계획, 조직되고 집행됐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일본군이 점령한 머나먼 식민지 지역까지 여행하기 위해 위안부 여성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여권과 비자를 발급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위안부 여성들은 일본 군용 함정에 태워져 일본군 병사의 감시를 받으며 이동했다. 이른바 '위안소'는 일본군 기지 내, 또는 인근 지역에 설치됐고 대체로 일본 군 당국이 관리했다(일부는 군 당국이 민간업자에게 하청을 주었다). 또한 군의관이 여성들을 '점검'했다. 어떤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생체 실험에 이용되기도 했다. 한 여성이 하루에 얼마나 많이 강간당할 수 있는가? 또는 성병은 어떻게 전파되며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가?

(2차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회계 지침에 따르면 위안부 여성은 군수품의 일종으로, 한 번 쓰고 버리는 '소모품'으로 취급되었다. 여기에는 또한 (위안부 여성에 대한) 임금 지급일, 일반 병사와 장교들의 위안부 사용 일정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일부 사람들은 위안부 시스템이 민간 브로커 및 사업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자발적이고 자유시장적인 '환락 사업'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전쟁 당시 일본 군부의 조달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간과하고 있다. 또한 당시 일본 정부가 파시스트 군부 독재정권이었으며, 물품의 조달, 분배, 공급 등 사회의 모든 부문을 정부가 직접 통제, 관리했던 통제경제였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쌀을 비롯한 모든 생활필수품, 노동자, 여성에 이르기까지 일정량을 할당하는 정부의 조칙이 발표되면 식민지 지역들은 이를 따라야만 했다.

지난 70년간 일본 정부는 (미국의 지원과 사주를 받아) 이러한 위안부 시스템의 존재 자체를 부인해 왔다. 간신히 살아남은 소수의 위안부 여성들은 (사회의) 그늘 속에 숨어 질병과 악몽,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수치를 견뎌내야만 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극심한 성적 폭력에 의해 불임이 됐고, 대부분은 자신의 육체가 왜 망가져야 했는지 그 비밀을 무덤까지 갖고 갔다. 그리고 1991년, 단 한 명의 한국의 위안부 여성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와 침묵을 깨뜨렸다.

"한 여성이 자신의 삶의 비밀을 얘기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세계의 감춰진 진실이 드러난다."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는 이렇게 말한다. 김학순 할머니가 바로 그 여성이었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 자신의 삶을 얘기했을 때, 한일간 역사의 숨겨진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김학순 할머니는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서서히 이들 위안부 할머니들은 앞으로 나와 일본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반세기 동안 억눌러야 했던 수치스러운 침묵과 분노 때문에 떨리고 있었다.

"천황에게 내게 와 무릎 꿇고 용서를 빌라고 전하시오. 나는 사죄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한 위안부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범죄의 증거들도 쌓여갔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책임을 피하기 위해 미적거리기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부인(否認)에 따른 부담이 인정에 의한 당혹스러움보다 더 커져갔다. 한국의 친일 부역배들이 방관하는 사이 한국 정부가 적극 나섰고 마침내 1993년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했다. 이른바 고노 담화가 그것이다. 애매하고, 형식적이며, 뜨뜻미지근한 사과였다. 그것도 국가수반이 아닌 관방장관 명의였다.

가짜 사죄, 진짜 사죄

고노 담화는 일본 의회가 발표한 것도, 일본 의회의 비준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법적 효력을 갖는 공식적 사과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일본의) 책임 인정을 향한 중요한 첫 걸음이라는 점에서 이를 환영했다. 어쨌거나 고노 담화는 위안부 문제를 전향적으로 계속 논의할 수 있는 적절한 계기이기는 했다. (현 아베 정부는 고노 담화의 법적 지위에 관한 일말의 모호함도 제거하기 위해 노심초사 해왔다. 이에 따라 최근 일본 의회에서 고노 담화는 공식적 사과가 아니라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해 이러한 입장을 매우 명백하고 단호하게 밝혔다.) 당시 일본 정부는 민간 배상 기금(아시아 여성 기금)의 창설을 도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전달할 기부금을 모았다.

당연히 위안부 할머니 대부분은 이러한 (비공식적이며 법적 효력이 없는) 사죄와 위로금을 거부했다. 그들은 여전히 진정한 사과를 원하고 있다. 특히 위안부 할머니들은, 상식과 이성에 기초해, 다음과 같은 조치들을 요구했다.

- 1932-45년 일본 제국 군대에 의해 성노예화가 계획, 조직, 집행됐다는 점을 전면 인정할 것
- 이러한 전쟁범죄의 전모를 밝히기 위한 전면적이고 철저한 조사를 시행할 것
- 일본 의회가 공식적이고 법적 효력을 갖는 사과를 할 것
- 모든 희생자들에 대해 법적이고 전면적인 배상을 할 것
- 위안부 여성들의 희생을 기리며 일본 군 성노예화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한 기념비를 설립할 것
- 전쟁범죄에 대해 책임 있는 범죄자들을 기소, 처벌할 것

이들 요구 중 어느 것도 (이전의 사죄들을 포함해) 이번 합의에서 충족되지 않았다. 우선 위안부 시스템이 일본 정부의 공식 정책이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군부가 '개입'했다는 막연한 언급만이 있었을 뿐이다. (위안부 여성들의) '고통과 수난'에 대한 포괄적인 유감의 표시가 있었을 뿐, 그 고통의 원인은 특정하지 않았다. 반면 고노 담화에 있었던 '강압'이란 단어는 사라졌다. 다시 말해 아베 정부가 줄기차게 주장해왔듯이 위안부 여성들은 자발적 창녀였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나아가 아베 정부는 쥐꼬리만한 금액을(10억 엔) 기부함으로써 직접적이고 법적인 배상 의무를 회피했다. 앞으로 일본의 공식 사과(의회에서 비준되는)는 없을 것 같다.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 범죄 행위자에 대한 처벌, 전쟁범죄에 대한 교육은 물 건너갔다. 특히 일본은 이번 '사죄'와 함께 (이번 합의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이유로) 한국이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영원히 한국은 이 문제에 관해 일본을 비판할 수 없게 됐다. 아마도 (주한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은 철거될 것이다. 이제 위안부문제는 아베 총리와 기시다 외상이 지겹도록 외쳐온 것처럼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

인류 역사상 가해국 정부가 공식 사과를 하면서 향후 피해자들의 문제 제기 및 비판을 금지시킨 적은 없었다. 전쟁범죄와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에는 어떠한 제약도 조건도 있을 수 없다. 이들 범죄에 대해 침묵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바로 이런 전제조건에 합의를 해주었다. 이처럼 전면적인 항복, 이보다 더한 도덕 및 주권의 포기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게 사과라면-그리고 한국이 더 이상의 비판을 제기할 수 없다면-한국은 스스로 주권국가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도대체 한국 정부는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과를 받아들여야만 했을까?

광기(狂氣)로의 회귀

천동설을 믿는 한 지구 등 행성의 궤적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지구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미국이라는 태양'의 중력을 인정해야 한국 정치의 불합리하고 퇴행적인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다음과 같은 한국 정부의 불합리하고 자기패배적인 행동의 원인을 이해할 수 있다. 자학적인 무역협정, 자기 파괴적인 경제정책, 그리고 환경, 시민사회, 경제의 엄청난 희생을 무릎 쓴 군사기지 건설 등. 이번 위안부 관련 한일 합의는 바로 이런 미친 정책들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지난 10년간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의 회귀를 준비해 왔다. 아니, 지난 150년간 미국은 언제나 태평양을 자신의 독점적 세력권으로(American Lake), 태평양 주변 국가들을 자신의 속국으로 간주해 왔다.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의 미국 측 서명자인 슈펠트 제독은 다음과 같은 화려하고 성차별적인 문체로 미국의 우위에 대한 확신을 분명히 드러냈다.

"미국은 신랑이요 중국, 일본, 조선은 신부라..우리 미국인은 '신랑이 태평양 건너 이들 신부들에게로 다가오매 앞으로 어떤 상업적 라이벌이나 군사적 경쟁자들도 우리의 허락 없이는 태평양을 마음대로 다닐 수 없음을 분명히 하노라...동양과 서양이 태평양에서 하나가 됨으로써 제국을 향한 (미국의) 도전은 종착역에 이르고 인류의 힘은 절정에 이르도다."

현대 지정학의 아버지인 영국의 지리학자 핼포드 매킨더(미국의 알프레드 테이어 메이한과 함께)도 이와 비슷하게 유라시아 대륙을 '중심지역(heartland)', '주축 국가(pivot state)', 또는 '세계 섬(world island)의 중심'이라고 불렀다.

매킨더와 메이한의 이론들은 세계정세를 '대륙 세력' 대 '해양 세력'의 각축으로 이해한다. 두 사람 모두 세계 지배를 위해서는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을 장악해야 한다고 믿는다.

매킨더의 표현의 빌자면 "중심지역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 섬을 지배하며, 세계 섬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 정부, 학계, 싱크탱크, 그리고 군부 내의 국제관계 및 지전략적(geo-strategic) 사상가들은 모두, 자신이 인정하든 안 하든, 매킨더의 자식들이다. 아시아에서 중국이 굴기하는 시점, 매킨더의 망령에 씌워 21세기 미국의 단일 패권 유지를 꿈꾸는 미국의 지전략 사상가들은-힐러리 클린턴은 이들의 대변인 격이다-임박한 지정학적 변화를 감지하면서 그 대책으로 '아시아로의 회귀'를 제출했다. 힐러리가 2011년 <포린 어페어즈>에 기고한 '미국의 태평양 세기'가 그것이다. 세계 섬의 주축국가(중국)로 회귀하자는 것이다. 힐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 정치의 미래는 아시아에서 결정될 것이다...미국은 그 바로 중심에 있을 것이다...따라서 다음 10년간 미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아태 지역에 대한 실질적 투자를-외교, 경제, 전략, 기타 등등-증대시켜 미국의 국익을 확보하는 것이다...이제 아태 지역은 세계 정치의 조타수가 됐다...아태 지역으로의 전략적 선회는 미국의 세계적 지도력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한 전 지구적 노력이 추구해야 할 당연한 목표이다."

아시아로의 회귀가 현실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미국 군사력의 60%를 이 지역에 배치하는 것이다. 중국의 지역적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다. 이를 위해 미국은 중국 주위에 미군 기지들을 목걸이 형태로 배치시켜 놓고 있다. 공해전 등 공격적 군사 교리를 채택했고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각국들과 양자, 또는 다자적 군사협력 및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으며, 첨단무기 반입 등 아시아 지역 전체를 재군사화 시키고 있다. 미국은 또한 '항행의 자유' '합동군사훈련' 등을 빌미로 (중국의 핵심 해상 수송로인) 남중국해에서 중국에 대해 적대적이고 호전적이며 도발적인 군사 갈등을 벌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언론매체를 동원해 중국을 끊임없이 악마화 하는 방식으로 정보 및 문화 전쟁을 벌이고 있다. (남중국해 영토분쟁과 관련) 필리핀을 앞세워 중국을 유엔 해양법협약(UNCLOS)에 제소토록 한 법률 전쟁, 중국에 대한 봉쇄와 고립, 나아가 TPP라는 통상협정을 통한 중국과의 경제전쟁도 벌이고 있다.

예속의 소용돌이

아시아 회귀의 핵심은 한국과 일본의 군사/정치 동맹을 통해 중국에 도전하고 중국을 봉쇄하거나 위협하며 필요하다면 타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작전이 성공을 거두려면 일본은 '불침 항모(결코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 한국은 '교두보' 또는 '전진 루트'가 돼야 한다. 만일 중국과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한국의 모든 병사와 장비, 군사기지들은 미군 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될 것이다. 한편 일본은 최근 평화헌법을 무력화 시켰고 세계 어디에서나 미국을 도와 공격적 군사작전을 벌일 수 있도록 미일 군사협정을 개정했다. 한국과 일본 간의 정보공유협정, 그리고 양국 미사일 방어시스템의 상호 운용성 확보 역시 (중국에 대한) 공격적 전진 전략의 일부이다. 그런데 최근까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이 양국의 효율적 군사협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미국의 두 핵심 파트너가 서로 대화도 하지 않는 사이라면 아시아로의 효과적 회귀는 기대할 수 없다. 이제 그 장애물이 사라졌으므로 '아시아 회귀'는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취임 이후 대화를 거부해온) 한일 두 나라 지도자가 처음 대화를 나눈 것은 2014년 3월이었다. 바로 오바마 대통령이 주선한 자리였다. 가장(家長)인 미국이 사이 나쁜 두 형제들에게 화해하라고 훈계한 것이다. 이번 위안부 합의는 그 훈계의 최종적 결과였다. 두 형제는 가장의 말을 들었고 경제, 정치,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의 협력을 가로막았던 장애물을 제거한 것이다. 그동안 미 국무부는 한일 화해를 위해 공개, 비공개적으로 숱한 노력을 해왔다. 때론 양국을 꾸짖기도 하고 때론 실수를 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미국은 그 소망을 달성했다. 그러나 어쩌면 이번 성공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국의 편의와 지정학적 국익만 추구한다면 결코 문명화된 정책을 세울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기억 상실과 도덕적 파탄, 그리고 강대국에 대한 일방적 예속은 재앙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이번 합의가 50년 전 대미 예속적인 박정희 정권이 밀어붙인 한일 기본 협정의 연장임을 말해준다.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킨 1965년의 협정은 불평등하고 비민주적이며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합의였다. 이 협정은 유혈과 테러 속에 간신히 성사되고 유지될 수 있었다.

군사독재자 박정희는 일본 관동군에 복무했던 친일 부역자였다. 1965년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미국의 아시아 정책을 지배했다. 미 국무부 정책기획위원회의 월트 로스토는 한국에 압력을 가해 일본과 국교를 회복하도록 했다. 근대화론의 신봉자였던 그는 자신의 저서 <경제발전단계론: 비공산주의자 선언>에 나온 대로 한국과 일본, 그리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강력하고 협력적이며 상호 결합된 자본주의 블록을 만들어냄으로써 아시아 지역에 떠오르는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성채로 삼으려 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산에 저항하는 권위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은 누구든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이들 나라들은 로스토의 이론에 따라 수출지향적 산업화에 주력함으로써 '경제의 도약(take off)'을 이루어 자본주의의 우월함을 증명하려 했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 수입대체 산업화, 자주적 경제를 지향했던 (제3세계) 독립운동의 도전을 물리치려 했다.

아베 현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는 일제 당시 상공부 장관을 지냈으며 박정희의 멘토이기도 했다. 한일 기본 협정의 체결을 돕기 위해 동원된 기시는 자신의 과거 부하였던 박정희를 설득해 1965년 6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성사시켰다. 그 협정은 한국 측의 모든 배상 요구를 부정했다. 한국 국민들의 항의와 분노가 폭발했고, 박정희는 계엄령으로 대응했다. 한일 기본 협정을 통과시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고문당했다. 이제 그의 딸 역시 똑같이 암울한 역사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한편 아베 정부는 영악스럽게 위안부 문제를 우회한 후 군사주의를 향해 치닫고 있다. 약간의 허울뿐인 변화를 빼놓고 일본이 포기한 것은 거의 없다. 사죄하지도 않았으며 체면을 구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노 담화에 담긴 사죄의 표현을 약간 후퇴시켰다. 그 대가로 일본은 마침내 한국 정부를 침묵시켰고, 이에 따라 앞으로 한국 국민들도 침묵시킬 것이다. 이제 일본은 파시즘의 부활과 일본의 군사화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지난 반세기 일본을 지배해온 평화헌법도 무력화 시켰다. 아베는 과거 일본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극우적, 민족주의적, 군사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신봉한다. 5억 달러의 예산을 들여 일본 역사의 오점을 제거하려 한다. 또한 일본의 정치가와 외교관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 일본 제국의 영광이라는 꿈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든 위협하고 두드려 팬다.

아시아 회귀의 성패와 관계없이, 미국이 일본 군사주의라는 마귀를 지니의 병에서 끄집어낸 것은 통탄해 마지않을 일이다. 중국과의 전쟁 위기 고조는 어떤 사죄로도 감당되지 않을 광기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 해도 결코 놀라지 말라고 말해준다. 위안부 문제가 바로 그러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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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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