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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김예슬, 그리고 <무진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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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삼성, 김예슬, 그리고 <무진기행> [삼성을 생각한다] "사육당할 것인가, 방황할 것인가"
S야, 지금 막 김예슬 씨의 책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오늘날의 대학생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너와 네 친구들에게 몇 마디 이야기를 주억거리고 싶어 이렇게 편지를 쓴다.

벌써 한 달이 지났구나. 김예슬 씨가 쓴 자퇴선언문을 읽고나서 속절없는 기분이 되어 있을 때, 네가 문자메시지를 보내왔었지. 나도 김예슬 씨가 다니던 대학 학생들의 반응이 궁금하던 차였으니, 이심전심이었다. 학교가 시끌시끌하다면서 너는 이렇게 덧붙였지. "저 또한 (김예슬씨가) 글 속에서 비판하던 그 사람들 중에 하나인지도 모르겠어요. 안일하게, 그러면서도 쫓긴다는 핑계를 대며 남들 따라가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으니까요"라고.

시골 일반계 고등학교 출신으로 특목고 출신이 절반이라는 그 학교에서 느끼는 위화감을 너는 자주 이야기하곤 했었지. 그러면서도 사회과학 세미나를 다니고, 쌍용자동차 파업 현장이며 어디며 부지런히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참 기뻤다. 그리고 결국엔 너도 '남들 따라가는' 자리에 서게 되리라는 걱정도 하고 있었다. 지금은 다른 삶을 꿈꾸고는 있지만, 넉넉지 않은 형편에 온 집안의 기대를 짊어지고 있는 네가 취업 이외의 다른 선택을 결행하는 것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다시 읽는 <무진기행>

▲ <무진기행>.
이런저런 생각을 굴려갈 때에 문득 <무진기행>이라는 소설이 떠오르더구나. 내가 워낙 좋아해서 수업 들어가는 반마다 빼먹지 않고 가르치는 작품이었고, 그래서 너도 내게서 배웠던 기억이 날 거야. 사실, 나는 <무진기행>의 감각적인 문장이 너무나 좋았고, 아이들에게도 선뵈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열심히 가르쳐온 거란다. 그런데, 요사이 김예슬 씨와 김용철 변호사와 삼성 문제를 생각하다보니 <무진기행>이 전혀 새롭게도 읽히더구나.

나는 우리의 사회적 인식을 구성하는 세 층위, 논리와 도덕, 그리고 욕망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한다. 이 셋은 각각의 고유한 영역이 있을 거야.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논리와 도덕은 고유한 자리를 거의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 이 둘은 그저 욕망의 꼭두각시일 뿐이라는 생각이 드네. 4대강 사업을 두고, '커다란 어항에 가두어야 물이 더 깨끗'해지네 어쩌네 하는 이를 보면서, 천안함 사건을 두고 기어코 북 측과 연계지으며 '한판 붙어야 한다'는 바람을 숨기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리고 삼성 수뇌부의 범죄 행각을 두고서도 삼성한테서 단돈 10원도 얻어낼 게 없는 필부들까지 국가 경제와 글로벌 경쟁력 어쩌고 하면서 온갖 해괴한 논리를 구사하는 것을 보면서 결국 문제는 논리도 도덕도 아니고 욕망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야. 논리가 문제라면 그들 논리의 허약함을 논변하면 되는 것이고, 도덕이 문제라면 삶으로써 우리의 옳음을 증명하면 되겠지.

그러나 문제는 '욕망'이기 때문에 논리와 도덕으로 판판이 깨져도 저들은 절대로 이것을 인정하려 들지를 않는 거야. 그래서 이 모든 문제가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 되어가는게 아닐까 생각해.

<무진기행>의 주인공 윤희중이 고향인 무진에 오게 된 것은 자신을 전무이사로 발령낼 주주총회를 앞두고 잠시 쉬고 오라는 장인과 아내의 권유 때문이야. 그는 과부가 된 어느 큰 제약회사 대표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모양이지. 지금 그에게 서울에서의 삶이란 '잡지 한 권 읽을 여유가 없'고, '오직 책임뿐'인 팍팍한 나날들이지만, 그는 이런 삶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는 중이야.

그런 그가 무진에 와 있으면서 서울에서의 사회적 가면을 벗고, 본래의 자신을 만나게 되지. 그는 십여 년 전 이곳에서 군대 징집을 피하며 골방에서 수음을 하던 청년이었고, 어느 때는 폐병으로, 또 어느 때는 실연으로 지독하게 외롭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야.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서울에서 거둔 성공이란 결국 '돈 많고 빽좋은 과부 하나 물어서' 얻은 요행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고,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풀을 뜯으며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만큼 치욕을 느끼기도 하지. 물론 그는 이런 식으로라도 성공하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지금 이 성취를 포기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야. 다만, 그는 이곳에서 느끼는 이 우울한 자신의 모습이 '본래의 나'에 가깝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확인하게 돼. 그러다가 절반의 속물이며 절반의 아웃사이더인, 이 답답한 무진을 떠나고 싶어하는 '하 선생'과 짧은 연애도 나누는데, 그건 아마도 그에게서 그 옛날 무진에서의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을 거야.

그런데 윤희중은 갑작스런 아내의 전보를 받고 서둘러 무진을 떠나면서 잠시 번민에 빠지게 되지. 그렇지만 선택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몰라. 그는 무진에서의 방황과 일탈을 끌어다 묻으며 서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책임'의 세계에 합류하고 말아. 그러면서 그가 던지는 마지막 말은 이런 것이지.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렇게 <무진기행>은 막을 내린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라리 '우울'

그러니까 나는 지금 너와 네 친구들에게 윤희중이 그러했듯 '무진으로의 기행'을 권유하고 있는 거야.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하나씩 '무진'들을 키우고 있으니깐.

이런 일이 있었지. 김예슬 씨의 책을 읽다가 문득 내가 지금 이 학교에서 하는 일들의 무의미함을 생각하며 좀 우울한 마음이 되어 수업에 들어갔을 때였어. 바깥 날씨는 간만에 아주 화창해져서 환장할 것처럼 따스하고 좋았지. 교정 저편에는 벚꽃이 활짝 피었고, 먼산에는 개나리, 진달래가 점점이 흩뿌려져 꽃천지가 되어 있는데, 오후 쉬는 시간 10분잠에서 부스스하게 깨어나는 고3 아이들을 보니 먹먹한 기분이 되더라구. 그래서 내가 제안을 했지. 책상을 창쪽으로 돌리고, 오늘 한 시간은 '째자'고 말야. 잠시간의 환호성이 지나간 뒤에 고요한 음악을 틀어놓고 시 몇 편 읽고선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던 중에, 어느 한 여학생의 눈에 눈물이 흐른 자국을 보게 된 거야. 고3 시절이 그런 거겠지. 너도 거쳐왔던 시간이지만, 밤11시까지 야자를 하고, 집에서 몇시간 자지도 못하고, 하루 열 몇 시간 내내 재미없는 공부를 '당해야' 하는 시절을 지나면서 아이들은 몹시 센치해져있었던 거겠지.

그때서야 나는 <무진기행>과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연결지을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논리로도 도덕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이 '집요한 욕망'의 체제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 '정직한 에로스'의 힘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학벌, 취업, 사회적 삶, 이런 따위 가면을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만났을 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우울 혹은 슬픔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환기하는 어떤 인간적인 삶의 가능성을 나는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예슬 선언'은 한국 사회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던 것이 틀림없어. 그러나, 그 반응들은 천차만별이었지. 김예슬 씨를 향해 되지도 않을 도덕적 훈계를 늘어놓는 자도 있었지. 사실 그들은 대단히 많은 말들을 했지만 결국 자신들의 예의 그 '집요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었을 따름이야.

이 집요한 욕망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든 논리와 도덕을 압도하고 있다는 얘기는 앞에서도 한번 했었지. 삼성 수뇌부가 사실상 범죄조직과 다름없는 집단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어.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 집요한 욕망을 드러내는 자들은 누구든 '논리 따위, 도덕 따위, 귀찮은 것들로부터 해방되어도 아무 탈 없이 번영을 구가하는 삼성 같은' 절대 강자의 자리를 선망하고 있음에 틀림없어.

S야, 너는 어떤 삶을 살고 싶으냐. 이제 이 질문은 이렇게 환원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정글 같은 경쟁을 뚫고, 삼성 따위 기업집단의 일원이 되어 풍요와 안락 속에서 사육당하는 삶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가치의 한 자락이라도 부여잡을 수 있을 방황하는 삶인가'로 말야.

김용철 변호사의 회고록 <삼성을 생각한다>를 너도 보았겠지. 내가 그 책에서 가장 인상깊게 느꼈던 장면은 이런 것이었다. 그가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으로 일할 당시, 그들의 범죄 행위에 공모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수백만 원짜리 옷을 사서 한번 걸치고는 내팽겨치고, 사용한도가 무한대인 법인 카드를 들고 다니며 돈을 펑펑 쓰던 어느 날, 이상하게 하루 종일 코피가 흐르기 시작했다는 대목이 있었지.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는 입에 약을 한주먹씩 털어넣을 때마다, 나는 휴지처럼 구겨진 내 삶을 확인했"다는 그 대목을 생각한다.

나는 이 대목이 참으로 귀하게 다가왔다. 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리고 풍요와 안락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저당잡히기를 강요당하는 너와 네 친구들의 삶 속에서도 이미 줄줄 코피가 흐르고 있지 않으냐. <무진기행>의 윤희중이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풀을 뜯으며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만치 괴로워하던 그 치욕을 우리들 또한 마음의 무진에서 확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우리 입가에 묻어 있는 피비린내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그리하여 '다른 삶'을 충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물론 우리는 <무진기행>의 윤희중처럼 일탈을 꿈꾸되 현실에 투항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윤희중이 그러했듯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라리 '우울'이 아니겠느냐. 김예슬 씨가 썼듯이 '스무살이 넘어서도 꿈을 갖는 것이 꿈이어야 하는' 이 현실 앞에서 어떻게 우울해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말이다.

S야. 언젠가 만났을 때, 특목고 출신이 절반이라는 학교 분위기를 말할 때의 네 표정이 생각난다. 거기에는 그런 현실에 주눅 든 시골 일반계 출신의 열등감도 서려 있었지만, 우리 사회의 주류인 그들과 대학에서 동류로 섞이게 된 네 자신에 대한 일말의 안도감도 서려 있음을 나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너를 책망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네가 느끼고 있을 그 일말의 안도감이 실은 너를 삶의 진실로 다가가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대적(大賊)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명문대 재학생이라는 타이틀이 오늘날 얼마나 알량하고 오죽잖은 것인지를 너도 적잖게 느꼈을 것이다. 너는 '네 마음 속의 카스트'와 불화해야 할 책무까지 떠맡은 셈이다. 같은 불화를 겪고 있을 친구들과의 동아리에서 나누게 될 공감과 우정이 그 불화를 견딜만한 것으로 유쾌한 것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S야. 이재용 씨는 <무진기행>을 읽었을까. 결혼으로 졸지에 한 기업의 후계자가 되어 버린 소설 속 윤희중과 아버지로 인해 한국 최대의 기업집단의 승계자가 되어 버린 자신이 결국 같은 사람임을 그는 알고 있을까. 물론 나는 이재용 씨가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건 없어. 그건 그이의 선택의 문제니까. 다만, 나는 이재용 씨도 <무진기행>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만은 가져본다. 너도, 네 친구들도 말야. 이재용 씨도, 너도, 네 친구들도, 지금 달리고 있는 인생의 레일에서 한번쯤은 멈춰서서 우울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왜냐고? 아무리 봐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 '정직한 우울'이 꽤 귀한 감정이 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야. 이 장황한 글은 결국 우울이, 슬픔이 찾아올 때 한번 그 옷을 입고 지내보자는 얘기였어. 객쩍은 소리가 길었네. 부디, 건투를 빈다.

(이 글은 기독교 미디어 <크리스찬인사이트>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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