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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판'은 궁중 음식이 아니라 '기생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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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판'은 궁중 음식이 아니라 '기생 음식'? [판다곰의 음식 여행·21] 지역 음식 : 중부 지방
서울에 이름난 한정식 집은 대체로 두 가지 가운데 하나다. 하나는 개성식 한정식이고, 다른 하나는 남도 한정식이다.

예전에는 둘 다 한 상 그득하게 차려 나왔지만 이제는 보통 서양식처럼 코스 요리로 나온다. 이 둘의 공통점은 가짓수가 무척 많다는 것이지만 그 세부 항목에서는 차이가 난다. 이를테면 남도 한정식에서는 홍어니 낙지가 빠질 수 없는 메뉴겠지만, 개성식에서는 편수나 우메기 같은 아기자기한 음식이 꼭 올라온다.

음식을 그릇에 담는 것부터가 다르다. 개성식은 고명으로 계란 지단 하나를 올려도 꼭 흰자 노른자를 따로 부쳐 모양을 내어 깔끔함을 자랑으로 한다. 하지만 남도 한정식은 그런 깔끔함보다는 맛 위주다. 간도 개성식은 심심하고 남도식은 대체로 세다. 그렇지만 요즘 한정식 집들은 서로 비슷해져간다. 서양식 코스 서빙과 퓨전 음식이 대세를 이루기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개성 음식에 가린 서울 음식

호남 지방은 너른 평야에다 해산물이 풍부한 서해·남해를 끼고 있기에 워낙 물산이 풍부하고 농산물과 해산물이 조화되었으며 양반 대지주도 많았다. 그러니 남도 한정식도 발달했을 것이다. 개성은 고려의 오랜 수도로, 무역이 발달한 예성강을 통해 받아들인 진귀한 재료나 많은 진상품이 음식으로 빛을 발했을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있다. 고려 500년 동안 발달한 음식 문화는 조선 500년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았는데, 왜 조선의 500년 도읍지였던 서울은 몇몇 서민 음식과 궁중 음식을 빼면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는가? 왜 서울 음식은 번듯한 한정식으로 자리 잡지 못했을까? 물론 개성과 서울의 거리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까닭에, 선대에 발전한 음식에 기를 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원인인 것 같지는 않다.

첫 번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가 고려와 조선의 문화 차이다. 고려나 조선이 둘 다 왕권 사회이기는 했지만 고려는 주로 호족 중심의 귀족들이, 조선은 사대부들이 대세를 장악했다. 호족의 경우는 대대로 향리에 기반을 잡고 대대로 벼슬을 했기에 워낙 호의호식에 젖어 있었다.

사대부들이라 해서 그렇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자신들의 호의호식을 밖으로 드러낼 형편은 아니었다. 백성이 우선이라고 입이 닳도록 이야기했거니와 근검절약을 좌우명으로 삼았기에 호의호식은 뒤로 감추어야 했다. 고려의 호족은 사치에 관해서는 왕이 부럽지 않을 만큼 누렸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흉년이 들면 금주령을 내렸을 정도로 사대부들의 기본적인 입맛에도 제약을 가했다.

두 번째로 '음식의 전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어느 사회나 상류 계층의 유행은 그보다 아래 계급으로 급속하게 확산된다. 옷과 풍습이 그러하듯 음식도 마찬가지다. 유럽에서도 귀족의 음식이 부르주아의 음식이 되고 다시 서민층까지 급격히 확산되었다. 여유가 없으면 모르지만 여유가 생기면 잘사는 사람들이 먹는 것을 먹고픈 게 인지상정이다.

고려 시대의 호족은 대부분 지방에 근거지가 있었으나 벼슬 생활을 위해 개경에도 살림집을 두었다. 왕궁의 연회도 참석하고 진상품도 하사받고 친한 호족 사이에서도 진귀한 것들이 오갔을 테니, 자연스레 호사스러운 음식상이 유행했을 것이다. 이런 호족 벼슬아치들의 행태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그 가운데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상차림도 차츰 개성 음식이라는 특징을 만들어갔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에 궁궐이 있었고, 많은 벼슬아치가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성안에 들어와 살았다. 사대부의 집은 대부분 시골에 있었는데, 고려 시대의 호족이 누리던 물질적 풍요하고는 아직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연회를 제외하면 심지어 임금의 평소 식단만 하더라도 구첩반상을 넘기지 않았으니 기본인 국과 밥, 간장과 찌개를 더하더라도 요즘 한정식 상보다 더 화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시골에서 재정적 기반이 넉넉하지 않던 사대부들은 고려 시대 호족들이 누리던 성찬과는 거리가 있었다. 임금이 먹던 수라상이야 재료도 풍부하고 정성을 다하기는 했겠지만 고려 시대보다는 격이 한참 떨어진 것 같다. 어쨌거나 그 궁중 음식도 밑바탕은 개성 음식이었다.

그나마 궁중 음식이 사대부의 집까지 퍼진 것은 대부분 왕가와의 혼례를 통해서였다. 왕족의 사위가 되거나 딸을 왕족에게 시집을 보낼 때 예를 차려야 했으니 왕가에 준하는 음식들을 마련한 것이 반가에 궁중 음식이 퍼진 유래라는 것이다. 아무튼 서울의 음식은 그보다 먼저 발달한 개성 음식에 가리고 말았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개성 음식

개성 음식으로 특이한 것은 보쌈김치일 것이다. 절인 넓은 배춧잎에 새우, 낙지 같은 해산물과 밤, 잣, 배, 미나리, 파, 마늘, 생강, 실고추를 넣고 새우젓으로 간을 하여 담근 김치다. 김치보다는 오히려 요리에 가까울 정도로 안에 넣는 내용물이 풍부하고 맛이 있다. 어떤 때는 내용물로 북어를 쓰기도 하며 집에 따라, 만드는 사람에 따라 재료에 가감이 있다.

남도에도 이런 김치가 있다. 보김치라는 것인데, 넓고 푸른 배춧잎을 절여 그 안에 청각이라는 바닷말과 전복, 소라, 사과, 배, 석류, 마늘, 생강을 넣고 싸서 담근 김치다. 내용물에 약간 차이가 나고 간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비슷한 음식이다. 물론 배추가 대중화되고 난 뒤의 음식일 테지만, 그전에도 배춧잎은 아니더라도 무슨 넓은 잎으로 만든 이 같은 음식이 있었을 것 같다. 그냥 생긴 음식이라 보기에는 너무 정교하기 때문이다.

개성 음식이라 해서 고기구이나 생선 반찬까지 다르지는 않다. 그래도 개성 음식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음식으로는 편수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편수는 채소로 만든 소를 넣은, 여름에 먹는 만두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만두가 김치와 두부, 돼지고기와 숙주가 주재료고 크기가 무척 크며 주로 고기 국물에 만둣국으로 먹는다면, 개성의 편수는 쇠고기, 오이, 호박, 버섯, 달걀지단, 실고추를 섞어 담백한 소를 만들고 크기도 작고 네모로 예쁘게 빚는다.

삶아서 국물 없이 초간장에 찍어 먹기도 하고, 국에 넣어 먹는다고 해도 양지머리를 삶은 맑은 국을 차게 식혀 띄워 먹는다. 쪄서 먹을 때에는 참기름을 바르고 잣가루를 뿌려서 모양도 내고 감칠맛을 추구한다. 이렇게, 작은 데에도 정성을 기울이고 모양도 예쁘게 하는 것이 개성 음식의 큰 특징이다.

우메기는 찹쌀가루에 막걸리를 넣고 반죽하여 기름에 지진 떡이다. 지진 떡을 조청이나 꿀에 재워 먹는다. 지질 때 개성 음식답게 말린 대추를 썰어 예쁘게 꽃무늬를 놓는다. 경단이야 우리나라 어디나 해 먹는 떡이지만 개성의 경단은 또 특별하다. 경단을 굴리는 고물이 팥소인 것은 다름이 없지만 팥소의 앙금을 참기름에 비벼서 말리는데 이렇게 서너 번을 말린 고운 가루에 경단을 굴린다. 조랭이떡국에서 보듯 개성 음식은 한입에 먹을 만큼 아주 적당한 크기와 담백한 맛, 그리고 아기자기한 장식과 모양새가 입에 넣기 아까워질 만큼 특별하다.

개성 음식이라 할 수는 없지만 예전에 개성식 한정식 집에서 내오던 열구자탕이라는 신선로 음식도 있다. 열구자탕은 일종의 전골인데, 쇠고기와 무를 삶아 육수를 내고 쇠고기, 간과 처녑, 돼지고기, 꿩고기, 닭고기, 생선전, 전복, 해삼, 미나리, 파, 표고버섯, 은행, 호두, 잣 등을 넣어, 가운데 화덕에 백탄을 놓고 식지 않게 끓여 먹던, 아주 손이 많이 가며 호사스러운 음식이다. 아마도 조선 궁중 연회 음식의 일종이 아닌가 싶다.

이 열구자탕은 한때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꼽힌 적이 있지만, 이 음식을 담던 그릇이 중국식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로는 이를 삭제해버렸다. 그러나 호사스러운 전골이라 할 수 있는 이 음식의 요리 방식이 중국식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전골은 우리가 즐겨 먹던 요리법이었거니와 대만에서는 아예 이 전골 방식을 '한국 훠꿔'라 하여 한국식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준다. 그릇의 유래만으로 신선로를 한국 음식에서 제외하는 것은 심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프레시안(손문상)

대표적인 서울 음식

서울 음식에는 소만두라 해서 채소로만 소를 넣은 만두를 해 먹기도 하는데 이도 개성 음식의 편수와 비슷하다. 이는 아마도 불교가 성행하던 시기에 육식을 하지 않는 채식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한다. 꿩고기를 다져 소로 만들어 꿩만두를 먹기도 하는데 이도 크기가 작고 예쁘게 만든다.

구절판이라는 음식은 요즘에는 남도식이나 개성식이나 할 것 없이 한정식 집에서 내놓는 단골 메뉴다. 팔각형의 칠기 위에 오이채, 애호박, 표고, 석이, 쇠고기나 닭고기 등 여덟 가지 재료를 곱게 놓고 가운데에는 얇게 부친 밀전병을 두어 거기에 내용물을 싸서 겨자나 초장에 찍어 먹는 음식이다. 언뜻 보면 편수와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음식이다.

하지만 이 구절판이 등장한 것은 1930년대의 이야기다. 그 이전의 책에는 구절판이라는 음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구절판은 아마도 기생집의 메뉴였던 것 같다. 주안상을 차리면서 개성 음식을 흉내 낸 것이 구절판이 되지 않았나 싶다. 주안상으로 호두, 은행, 대추, 땅콩, 잣, 곶감, 육포와 같은 마른안주를 담은 것을 마른 구절판이라 부르니 요정의 메뉴였던 것 같다.

서울의 서민 음식으로 무엇보다도 이름난 것은 설렁탕이다. 설렁탕의 유래는 선농단에서 나왔다고 한다. 조선은 농업 국가였으므로 농사를 챙기는 것이 국왕의 임무였다. 국왕이 농사가 잘되라고 비는 의식이 바로 선농제다. 이 제사의 희생물이 바로 소였기에, 제사가 끝나고 소를 도축하여 큰 가마솥을 걸고 끓인 것이 설렁탕의 유래다.

설렁탕은 소의 고기와 뼈, 내장을 발라 물에 담그고 하루 동안 피를 우려내어 푹 곤 것이다. 설렁탕과 비슷한 것으로는 곰탕을 들 수 있다. 곰탕의 '곰'은 '고다'에서 나온 것으로, 물에 넣고 푹 삶아서 우러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설렁탕의 재료는 소여야 하지만 곰탕의 재료는 상관이 없다. 닭으로 곰국을 끓이면 닭곰탕이 되고 돼지를 고면 돼지곰탕이 되는 것이다. 흔히 설렁탕과 곰탕의 구분이 뼈를 넣고 끓이는 것과 넣지 않고 끓이는 것의 차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곰탕이 전국적인 음식이라면 설렁탕은 곰탕의 서울식 버전이다.

서울 음식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떡볶이다. 요즘에 떡볶이라 하면 벌겋게 고추장과 함께 어묵이 들어간 것을 연상하게 되지만 원래 서울의 떡볶이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쇠고기와 표고, 호박오가리, 데친 숙주 같은 채소와 가래떡이 어우러진 고급 음식이었다. 아마도 궁중 음식인 떡산적을 비교적 간편한 방식으로 해 먹은 음식이 아니었을까 한다.

벌겋게 고추장을 넣은 요즘 떡볶이는 어묵과 함께 먹는 것으로 봐, 아마도 어묵이 대중화된 해방 이후에 생긴 음식이 아닐까 싶다. 신당동에는 떡볶이집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 있는데 여기는 1970년대에 생기기 시작했다. 떡볶이에 춘장도 넣고 여러 채소도 넣어, 달고 매운 새로운 맛으로 젊은 사람의 입맛에 맞춘 것이다. 이렇듯 음식도 시간과 환경에 따라 변해간다.

강원도에는 메밀, 감자, 옥수수가

강원도는 험준한 산악 지방으로, 농사를 짓기 어려웠던 땅이다. 예전부터 먹고살기가 힘겨운 화전민들의 땅이었으니 풍족한 음식 재료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쌀농사를 짓는 지역은 강릉을 중심으로 한 좁은 땅이었고, 동해는 바다도 깊고 조수간만의 차이도 크지 않아 어량 어업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요 농산물이 감자와 메밀과 옥수수였으니 거기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강원도의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막국수를 꼽을 수 있다. 음식 이름 앞에 '막' 자가 들어간 것은 메밀을 겉껍질만 벗기고 거칠게 갈았다는 뜻이니 요즘 식으로 하자면 웰빙 음식인 셈이다. 주로 동치미나 열무김치의 국물에 양념간장을 보태 말아 먹는다. 예전에는 메밀 집산지인 홍천이 원조라 하기도 했는데 춘천이 관광지로 더 이름이 있는지라 춘천 막국수로 굳어져버렸다.

강원도의 또 다른 음식으로는 감자를 주재료로 한 감자전과 감자떡을 들 수 있다. 감자떡은 감자를 갈아 앙금을 낸 전분으로 만든 거무튀튀한 떡인데 모양이 좋지는 않아도 떡에서 감자 향기가 난다. 감자전은 강판에 감자를 갈아 바로 고추를 썰어 넣고 번철에 지진 것으로, 간단하지만 이제는 전국적으로 아주 대중적인 음식이 되어버렸다.

옥수수로 만든 것으로는 올챙이묵을 들 수 있다. 옥수수를 갈아 앙금으로 쑨 묵으로, 생김새가 올챙이 같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양념장과 함께 먹으면 여름 음식으로 썩 괜찮은 음식이다.

남부와 북부의 특징이 뒤섞인 충청도 음식

충청도는 경기도와 남도 사이에 낀 지방으로, 평야도 넓고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의 개펄지역이 있어 해산물도 풍부하다. 하지만 음식에서는 황해도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특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남도식과 서울식의 애매한 경계 현상이 나타나는 곳이 충청도다.

충청북도는 산지가 많아 강원도나 경상도 산간 지방의 유형이 언뜻 나타나기도 하고 충청남도의 남쪽은 전라도의 특징이 나타나기도 한다. 원래 북부 지방은 주로 녹두를 싹 틔운 숙주를 즐겨 먹고 남부 지방은 숙주보다는 콩나물을 즐겨 먹는데, 충청도는 콩나물과 숙주의 비중이 거의 비슷하다.

녹두 앙금을 내려 쌀과 함께 끓이는 녹두죽은 충청도나 개성에서 나타나는 음식이다. 이런 녹두죽은 개성을 중심으로 한 북쪽 음식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하지만 콩나물과 함께 밥을 지어 양념간장에 비벼먹는 콩나물밥도 있다. 콩나물밥은 충청도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다.

콩나물을 밑에 깔고 쌀을 얹어 솥 밥을 짓는데 때로는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콩나물과 함께 넣기도 한다. 양념장과 콩나물의 싱그러운 맛이 가히 여름철 별미라 할 수 있겠다. 박으로 담근 박김치는 남부 지방에도 있긴 하지만 충청도의 향토 음식이다. 김치의 색깔을 낼 때 맨드라미꽃을 넣는 방법도 이채롭다.

충청도의 대표적인 해물 음식으로는 간월도 어리굴젓과 광천 새우젓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어리굴젓은 자잘한 자연산 굴을 채취하여 소금에 절이고 두 주일 정도 지나 양념으로 버무려 숙성한 것이다. 요즘은 자연산 굴이 흔치 않아 양식 굴을 쓴 것이 많지만 양식 굴로는 어리굴젓의 제 맛이 나지 않는다.

광천의 새우젓은 광천 지방의 토굴이 15도 정도의 상온을 유지하기 때문에 새우젓을 저장하고 숙성시키기에 알맞아 이름을 얻은 경우다. 전국에서 소비되는 새우젓의 거의 절반이 이곳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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