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공산당 입당을 거부했던 소련 지식인을 떠올리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공산당 입당을 거부했던 소련 지식인을 떠올리며" [삼성을 생각한다] '핵 가방'보다 무서운 이념적 지배력
미국 행정정책의 역사에 한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1950년 9월 23일, 한국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고 냉전이 곧 세계적 규모의 열전으로 심화될 것 같은 초긴장의 분위기에서 미국 이민법에 공산당원의 이민을 불허하는 특별 조항이 신설됐다.

미국 내에서 공산활동이 '반미 활동'으로 불렸던 시절인지라 어찌 보면 그 당시로서 충분히 예상될 수 있는 조치이었다. 문제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공산당 가입이라는 것이 꼭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개인적 신념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던 데에 있었다. 직장에서 승진 기회를 더 얻기 위해,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직장 자체를 얻어 배급을 받기 위해 기회주의적으로 입당하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했으며, 이렇게 해서 입당한 사람들이 나중에 틈을 타서 미국 망명을 신청하는 일은 자주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현실 사회주의권에서 특히 고학력자로서 단순히 '살아 남기' 위해서 입당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을 파악한 미국 당국은, 결국 공산당 당원 입국 불허 조항에 "단, 배급표를 받기 위해 입당을 한 이들을 예외로 둠"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렇게 해서 당이 생활 세계 전체에서 편재(遍在)해 있는 현실 사회주의권의 특수사정을 배려해준 셈이다.

당이 직업활동과 생활세계의 모든 층위에서 늘 핵심을 차지하는 사회에서는 입당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꼭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필자의 석사과정 지도교수였던 향가와 시조의 전문가이며 <홍길동전>의 번역자인 니키티나 교수 (1930~1999)를 비롯한 필자가 알았던 일부 지식인들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평생 입당을 하지 않은 채 각종 불편을 겪으면서 살아왔다. 그렇게 해서 저항적 '말'을 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묵묵한 '무언의 저항'이라도 한 것이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어떤가?

물론 대한민국에서 삼성이란 현실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당'만큼 법제화된 중핵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으로서 삼성을 비켜가기는, 현실 사회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 그 전지전능한 당을 비켜가는 일만큼 어렵다.

기초적인 수준에서는, 국내 전체 상장사의 연례 이윤의 약 20퍼센트 이상을 거두곤 하는 국내 최대, 최강 재벌인 삼성이 하도 많은 시장들에서 매우 높은 점유율을 보이기에 그 제품을 일부러 피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휴대폰이나 컴퓨터에서 냉장고나 보험상품, 병원 치료까지 그렇다. 삼성과 유관한 타(他)기업의 상품(예컨대 <중앙일보>와 같은 일간지)까지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렇다. 과연 이 세계에서 휴대폰부터 병원까지 '우리 생활의 모든 것'에 다 파고든 이와 같은 재벌이 존재하는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보다 높은, 정책적 차원에서 본다면 개인으로서 아예 피해가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삼성경제연구소의 경향분석과 정책제안들을 한 쪽에 놓고, 역대 정부들이 실제로 채택해온 각종 정책들을 다른 쪽에 놓고 비교를 한다면 삼성의 '두뇌 집단'의 생각이 실질적 정부 정책과 얼마나 높은 흡사함을 보이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심층적인 대중적 심정의 차원에서는, 삼성이 발산하는 담론들이 결국 일종의 '통념'으로 변신해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모습까지 지켜볼 수 있다.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살린다"는 말부터 생각해보자. 따져보면 100년 전에 구한말 지식인들이 좋아했던 '영웅대망론'만큼이나 이제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는 구시대적 엘리트주의 발로로밖에 생각되어지지 않는, 거만한 우월감의 표시일 뿐이다.

한 천재가 신상품의 개발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치더라도 그 신상품을 상업화하여 생산, 판매하는 과정에서는 10만 명이나 그 이상의 인재들이 같이 열심히 땀을 흘리는 조직망이 가동되기 때문이다. 그 조직망은 노조와 같은 기본적인 민주적 장치조차 없다면 권위주의적으로 움직여지는 이와 같은 조직망의 존재 자체가 이미 민주주의적 질서에 적지 않은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따져보면 어이없는 말인데도 수많은 신문 기자, 교수, 관료, 심지어 목사나 승려의 입과 붓을 거쳐 하나의 '명언'이 되고, 결국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다수가 공감하는 듯한 '단순한 진리'가 된 셈이다. 과연 공산주의를 이미 꽤나 냉소적으로 생각하고 비웃었던 1970~80년대 동구권에서는 공산당 총비서의 말 한 마디가 이 정도의 이데올로기적 지배력을 가졌는가? 만약 30년 전의 구 소련에서 어느 정치인을 제일 존경하느냐는 익명 여론 조사했다면 과연 총비서 브레즈네프가 가장 존경 받는 정치인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그 당시 공산당의 실질적 인기 추락을 감안한다면 가망이 없는 일이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국민의 약 60%는, 유죄 판결을 받은 바 있는 이건희를 "가장 선호하는 경제인"으로 조사마다 뽑곤 한다.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 ⓒ연합뉴스

브레즈네프와 달리 이건희는 핵미사일을 날릴 수 있는 '핵 가방'을 갖고 있지 않지만, 우리들의 마음을 관리한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상당한 이념적 지배력을 자랑하고 있다. 연성의 권력이라 하지만, 이는 어찌 보면 '핵 가방'보다 훨씬 더 공고한 권력이다.

그러면, 삼성이 휴대폰과 냉장고를 넘어 대다수가 공유하는 '생각'까지도 생산, 보급시킬 수 있는 위치에 선 상황에서는 삼성 불매 운동이란 무엇인가? 이는 단순한 소비자 운동의 차원이라기보다는, 한 초거대 기업이 절대적 권력이 된 나라의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민주화 운동의 연장이요 절대 권력을 절대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시민들의 양심의 발로다.

끝내 공산당 입당을 거부했던 구 현실사회주의권의 양심적 지식인의 '무언의 저항'처럼 이는 재력이 바로 권력이 되고 권력이 쉽게 절대화되는 사회에서의 개인의 반(反)권력적 자율성, 존엄성,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운동이기도 한다. 칸트가 설파했던 양심적이며 이성적인 독립적 개인은, 그 본질상 양심이나 이성과 양립할 수 없는 절대권력을 부득불 멀리하거나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성과 양심을 부득불 포기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매 운동이란 소극적 '멀리하기'를 벗어나 적극적 '반대'로 나아가는 계기며, 소극적 '소비자형 인간'에서 적극적인 '시민형 인간'이 되기 위한 운동이다. 과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이와 같은 운동을 떠난 진보가 존재할 수 있는가?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