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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등신이 되자, 어디서든 행복할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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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등신이 되자, 어디서든 행복할수 있게" [전태일 통신] 전태일 정신, '바보'에서 '등신'으로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오래 고민하다가 몇 번의 회사 생활도 해 보고, 주 5일 일하는 고통을 주 2일 동안 소비의 즐거움으로 때운 다음 그 소비로 지갑에 난 구멍을 메우기 위해 다시 주 5일 동안 일하는 과정을 몇 번씩 거치다가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겉으로는 대학원 진학이 이유였지만 적게 일하고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삶, 미친 듯이 바쁘게 일해서 돈도 많이 벌고 많이 번 그 돈으로 좋은 차도 사고 옷도 사고 가방도 사고 집도 사는 폼 나는 삶을 살라는 자본주의의 주문에서 좀 깬 삶을 살아 보고 싶은 간절함이었다.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 하고 생계도 유지해야 하니 지난 몇 년 동안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중 가장 오래 하고 있는 것이 어느 새 1년 반이 된 녹즙 배달원 노릇이다. 18개월 채웠으니 병장을 달았건만 1월부터 사표 썼는데도 후임이 안 나타나 벌써 논문 학기인데 제대를 못 하는 중이다.

이 일을 하면서 겁도 많아지고 용기도 많아졌는데, 대부분은 '여사님'들 때문이다. 야쿠르트 배달하는 아주머님도 여사님, 청소하시는 아주머님도 여사님이다. 혹시라도 '아줌마라는 말이 실수로라도 튀어나왔다간 나는 빗자루로 죽도록 얻어맞은 다음 야쿠르트 구루마에 실려 아무도 모르는 야산 같은 데서 발견될 것이다'는 물론 농담이고 나는 참 여러 번 바보라고 불렸다.

기꺼이 바보가 되겠다. 되든 안 되든

이쪽 말로 '사무실 분들' 나오시기 전에 대걸레로 닦아 놓은 곳 밟고 지나갔다고 바보, 알아서 녹즙도 좀 공짜로 쫙 돌리고 그래야지 그런 것 모른다고 바보, 얼음팩 좀 쓰게 가져오라고 했더니 안 가져왔다고 바보. 그러나 이 바보는 전태일의 '바보회'와 질적으로 다르다. 자기 자신을 바보라 부른 것과 남에게 바보라고 불린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까.

다들 아시다시피 재단사 모임을 시작하면서 전태일이 나이든 선배 재단사들을 찾아다니면서 협조를 구할 때 한결같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위해 뛰어다닌다고, 뭘 안다고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이냐고 막으면서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설치는 놈은 '바보'라고 했다고 하여 '바보회'가 시작된다. 기꺼이 바보가 되겠다, 바보답게 되든 안 되든 들이박아나 보고 죽자, 그리고 그는 들이박았고, 죽었다.

살그머니 얼음팩 훔쳐가고, 가만히 손님도 빼 가고,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냐고 하면 '바보'라는 한 마디로 끝나는 생활을 하다 보니 전태일이 요즘 태어나서 버스값 털어 누구 풀빵 사줬다가는 큰일났겠구나 싶어 한숨이 나온다. 풀빵 한번 샀다간 저 사람이 먹고 살만 한가 보다 싶어 다들 달려들 것이다. 풀빵 낼름 삼킨 다음 국화빵도 먹고 싶다, 국화빵 먹은 다음 그런데 파리바게트라는 게 있다더라. 구질구질하게 국화빵이 뭐냐 너도 참 촌스럽긴, 목이 막히니 사이다를 사 달라 자꾸 잠이 오니 아메리카노도 한 잔 먹고 싶구나, 더 내놔, 더, 더, 더, 더, 더!

전태일이 결국 '산와머니'에서 대출을 받아 사주는 한이 있더라도 다들 더 내놓으라고 외쳤을 것이다. 남에게 호의를 보이는 인간은 먹고 살만한 모양이라면서 얻어먹고도 아니꼽지만 나 아니면 누가 또 얻어먹겠지 싶어 더 달라 더 달라 하면서도 그에게 고마워하지 않는다. 누가 먹고 살만 하다 싶을 때 우리는 그를 향해 핏대를 세운다. 전태일이 갑자기 다시 살아나 스스로 바보라 하기는커녕 남을 향해 바보라고 핏대를 세우고 그러면서 뭐 뜯어먹을 게 없나 호시탐탐 노리는 세상을 봤으면 얼마나 놀랐을까.
ⓒ박도환

잘 먹고 잘 살려고 할 때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

사실 먹고 산다는 것. 이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무얼 먹든 입에만 들어가면 되고 잘 먹고 잘 살려고 할 때에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 먹고 살기 어렵다는 사람들의 말은 절반은 거짓말이다. 잘 먹고 잘 살아지지 않기 때문에 분통이 터지고, 실은 더 잘 먹고 더 잘 살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것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냥 먹고 살려고 했을 뿐인데' 하는 식으로. 앞에 괄호 치고 '잘'이 붙어 있다는 것은 서로 알면서 넘어가준다. 말은 바로 해야지, 잘 먹고 잘 살려고 했잖아.

내가 나온 대학 시나리오과에 늘 잘 웃고 명민한 눈빛을 한 연상의 학교 후배가 있었다. 장편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몇 개나 썼는데도 형편은 어렵고 몸이 아파 그만 집에서 외롭게 죽었다. 친한 언니의 후배는 경력이 오래지 않은데도 상을 몇 개나 받을 만큼 재능 있는 신진 디자이너였다. 재능이 많으니 회사에서도 그에게 일을 많이 맡겼다. 일에 치여서 '연애해본 지가 언젠지 모르겠어요. 연애하고 싶어요' 하고 선배에게 하소연했다던 그는 불과 며칠 후 일하다 말고 급성 바이러스 감염으로 숨졌다. 돌연사였고, 고작 스물여덟이었다.

회사에서는 그의 조문하러 온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인식하면 그가 생전에 얼마나 재능 있던 사람이고 그래서 어떤 큰 상까지 탔던 사람인지 정보를 알 수 있도록 영정사진에 QR코드를 부착하라 했다고 한다. 지각 있는 지인들의 반대로 영정사진 QR코드 계획은 무산됐지만 사람이 죽었는데, QR코드가 다 뭐란 말인가. 상을 몇 개나 받으면 뭘 한단 말인가. 죽었는데.

한 사람은 일을 다 마친 후 또 들어오는 일이 없는 프리랜서였고, 한 사람은 회사에 소속되어 교대할 사람이 없는 타자처럼 들어오는 공은 모두 치다가 쓰러졌다. 몇 살 터울 지는 재능있는 젊은이라는 점도, 결국 둘 다 부려먹다 버림받았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양극단에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은 비슷한 상황이 이 사람들뿐인 건 아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녹즙 배달 일은 회사를 출입하며 직장인들을 상대로 하고 있는 일이라, 내노라 하는 대기업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지도 보게 된다.

나보다 몇 살 어리거나 많거나 한 2, 30대의 대기업 사원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회사 배지를 양복 깃에 달고 있긴 하지만 배지처럼 얼굴이 빛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자기 일에 만족 못 해서가 아니라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오전 7시쯤 녹즙을 배달하러 사무실에 가 보면 그 때 이미 대부분이 출근해 있는데, 그대로 12시간 정도는 기본이다. 물론 5시 반에 퇴근하는 것이 회사 규칙이지만 그대로 사규를 지킬 수 있는 통 큰 사람도 없고 그 때 퇴근해서는 일을 끝낼 수도 없다.

아예 등신이 되겠다는 결심으로…

'그래도 일 년에 하루는 즐거워요, 보너스가 있으니까' 하고 누구는 대답했는데 거기가 대고 차마 행복의 'ㅎ'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래도 돈은 벌지 않느냐고 물으면 야근하느라 돈 쓸 시간이 없다는 게 일제히 말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어쩌다 시간이 나면 압축적으로 행복해지려고 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단시간에 최소한의 성의를 들여 행복한 기분을 살 수 있는 보증수표가 '돈'이기 때문에 기꺼이 돈을 써서 행복을 산다.

쇼핑을 한다던가, 좋은 데 가서 뭘 먹는다던가 돈을 지불하지 않고 행복을 얻으려 할 때의 시행착오를 모두 피해 갈 수 있다. 돈을 내지 않고 즐거워지는 방법을 연구할 만한 시간이 많은 친구들은 이 시간이 싫다. 시간은 넘치는데 돈이 없다. 시간은 필요없으니 돈이 있었으면 좋겠고 돈 써서 행복을 잠깐 맛보는 사람들 틈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복달한다. 결국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됐는지, 적이 누구라고 말할 수가 없다. 적은 교묘해졌다. 재일교포 강상중 교수의 지적대로 9.11 테러 이후 '전선 없는 전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적은 희미하고 안개에 가려져 있어 누구이고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당장 앞에 보이는 당신을 물어뜯는다. 나보다 힘센 당신에게는 이빨을 보였다간 물어뜯기니까 세심하게 감추고 날을 잘 세워 놓았다가 기회를 보면 재빨리 이를 깊이 박는다. 나보다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당신을, 혹시 나를 짓밟고 나보다 위에 올라갈 것 같은 당신을, 조금 더 크면 내 밥그릇 노릴 것 같아 미리 밟아놓는 게 좋을 것 같은 당신을.

전태일이 본다면 얼마나 무섭고 놀라울 것인가. 내 지갑이 꽉 차도 당신의 풀빵을 기어코 뺏어먹겠다는 사람으로 가득한 작금의 상황을.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전태일의 뜻을 계승하려면 바보 정도로는 안 되겠고 아주 등신이 되겠다는 각오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전태일 평전을 다시 보니 눈물을 닦다가 그냥 등신처럼 열심히 살아야지 싶다.

단, 가장 신자유주의에 반(反)하는 방식으로. 안 벌고 안 쓰고 숨도 적게 쉬면서, 돈 적게 쓰고 구질구질하게 살면서도 남에게 손 내밀지 않고 어디서든 행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본주의가 차마 건드릴 수 없는 등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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