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박정희 한 사람 덕에 경제 발전? 저열하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박정희 한 사람 덕에 경제 발전? 저열하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7> 친일파, 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친일파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공산군 물리친 이승만의 공? 잘한 게 없다"

[한국전쟁, 두 번째 마당] "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한국전쟁 공포 때문"
[한국전쟁, 세 번째 마당] 박정희 살린 6.25? "전쟁 덕 톡톡히 봤다"
[친일파, 첫 번째 마당] "뉴라이트·이승만, '용서받지 못할 자' 비호"
[친일파, 두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는 어떻게 비밀이 됐나
[친일파, 세 번째 마당] "일본군 박정희, 반성은 없었다…유신은 필연"

프레시안 : 친일 청산에 소극적인 이들에겐 '친일을 했든 독재를 했든 결과적으로 한국의 공산화를 막고 경제 발전을 이뤄냈다는 점이 중요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

서중석 : 도덕적 잣대로 친일파 문제를 재지 말고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걸 중심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이야기를 친일파, 극우 반공 세력이 하는 걸 볼 수 있다. 그 논리가 정말 맞는 건가? 친일파가 오히려 경제에도 많은 해악을 끼치지 않았나.

모리배 이야기도 했지만, 친일파가 좌지우지하던 시대인 미군정기, 이승만 정권 하에서 경제 상황이 아주 안 좋았다. 박정희 정권 초기에도 경제 상황이 나빴다. 또 정권 말기에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결국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유신의 심장'을 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된 건 1978년부터 경제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된 것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1980년까지 경제 상황이 심각했다. 이런 것에 대해선 충분한 설명을 안 한다. 친일파(와 그 후예)의 세력이 강력한데도 경제 상황이 참 나빴던 시기에 대해선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비슷한 모습이다. 일제 말, 특히 1944∼1945년에 경제를 벼랑에 밀어 넣은 것, 일제 지배가 없었어도 분단이 됐겠느냐 하는 문제, 한국 정부가 있었을 경우 1910년부터 35년 동안 경제 발전이 없었겠느냐 하는 문제 등을 고려하지 않고 일제의 지배를 옹호하는 논리를 펴는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의 한 단면 아닌가.

프레시안 : 경제 사안을 이야기할 때 부정부패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서중석 :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부정부패가 심했던 것에 대해선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는 면도 있다. 뭐냐 하면 '부정부패가 있었으니까 경제 발전이 된 것 아니냐. 유신 때 부정부패가 심했다고 하지만 아 그때 경제 발전이 된 것 아니냐', 이런 논리다.

이 말이 맞나? 그렇지 않다. 유럽까지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예컨대 대만, 싱가포르 같은 데는 당시 한국에 비하면 부정부패가 매우 적었다. 싱가포르는 부정부패를 단절시켰다고 할 정도이고, 대만도 부정부패한 자들을 극형에 처하지 않았나. 그러면서도 경제 발전 정도는 한국에 못지않았다. 하여튼 '부정부패는 (경제 발전 과정에서) 당연한 거다'라는 식의 논리는 자기들 생리에 비춰보면 맞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일반적인 잣대가 될 수는 없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박정희 한 사람 때문에 경제 발전? 저열한 역사 인식"

프레시안 : 경제 발전 문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 역시 친일 행적이 뚜렷한 인물이다.

서중석 : 친일파, 극우 반공 세력은 경제를 박정희 한 사람이 다 발전시킨 것처럼 주장한다. 박정희란 한 인물을 절대시하는 거다. 그런데 이건 너무나도 후진, 옛날식 역사 인식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하지 않나. 도대체 경제가 그 한 사람 때문에 발전하고 잘됐다, 이런 식의 논리가 어떻게 횡행할 수 있나. 그런 게 횡행하는 사회가 참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경제 상황이 이승만 시기엔 왜 그렇게 나빴는가. 1960년대 중반부터 1976-1977년까지는 왜 상당히 좋았는가. 또 1980년대 중반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왜 그렇게 좋았는가. (이런 문제들은) 그 당시 국내외적인 여건, 경제적인 여러 조건과 함께 정치 담당자, 테크노크라트 등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한 사람한테 귀결시키는 것, 그런 역사 인식처럼 저열한 것이 없다.

프레시안 : 이야기한 대목 중 아시안게임이 열린 1986년부터 올림픽이 열린 1988년까지 상당한 호황이었던 게 기억난다.

서중석 : 그 3년 동안 그야말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맞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만큼 고기를 잘 먹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전엔 고기를 잘 못 먹었다. 자가용이 부쩍 늘어난 것도 그 무렵이다. 그전엔 눈 씻고 봐도 자가용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 (박정희 사례와 달리) 1986~1988년(의 성과)에 대해선 '전두환의 공로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이상하게도 별로 없다. 친일파(와 그 후예들) 사이에서도 그런 것 같다.

(물론)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 안 한다. 내 지인이 노무현 정권 초기에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을 했는데, 그 친구가 대통령을 대신해 전직 대통령들에게 세배를 다녔다. 최규하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 같은 사람들의 경우 인사를 짤막하게 하고 바로 나와서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전두환한테 가니까,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장시간 동안 '내가 얼마나 경제를 발전시켰는지 아느냐'고 이렇게 얘기하고 저렇게 얘기하는데 그거 참느라고 상당히 힘들었다고 하더라.

내가 말하려는 건 (대체로 사람들이) 1986~1988년 경제 호황에 대해선 객관적인 요인을 두루 얘기하지, 전두환 한 사람의 공이라고는 안 한다는 거다. 전두환이 집권한 첫해라고도 볼 수 있는 1980년엔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1952년 이후 한 번도 없었던 현상이다. 4월혁명 때도 없었던 현상이다. 5.16쿠데타가 일어난 해에도 마이너스 성장은 안 했다. 1952년부터 계속 플러스 성장만 했다. 그런데 1980년에 급전직하한 건 유신 정권 말기에 경제 상황이 얼마나 나빴는가를 단적으로 이야기해주는 거다. 그런데 (박정희의 업적을 힘주어 말하는 이들이) 그런 건 (충분히) 설명을 안 한다.

▲ 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전두환의 자기 자랑 '내가 경제를…'"

프레시안 :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유별난 것 같다.

서중석 : 독일 같은 데선 '한 사람의 지도자 덕분에 경제가 발전했다', 이런 얘기는 안 하는 걸로 안다. 다만 '에르하르트가 아데나워 수상 밑에서 (1949년부터 1963년까지) 14년간 경제 장관을 맡으며 상당히 일을 잘했다'는 정도는 얘기한다.

대만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기를 비교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긴 하는데, 대만 쪽에서 '우리가 한국보다 더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예컨대 '1961년부터 1983년 사이에 대만은 연평균 9.3퍼센트 성장했는데 이건 세계 최고다', 이렇게 쓰기도 한다. 그만큼 대만도, 박정희가 있던 시기에 경제를 많이 발전시켰다. 그런데 '(총통) 장개석(장제스)이나 (그 아들이자 후계자인) 장경국(장징궈) 때문에 대만 경제가 발전했다' 같은 얘기는 거의 없다. 장개석 본인은 전두환처럼 '내 덕분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다른 나라 학자들이나 대만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박정희에 대한 태도와는 매우 다르다.

일본도 그렇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만큼은 아니지만 공습을 많이 당했다. 그런 폐허에서 (전후)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뤄냈다. 사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전엔 미국이나 서유럽의 강대국에 경제력으로는 비교가 안 됐다. 그런데 1970년대에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이 된다.

이렇게 놀라운 경제 발전을 한 건 여러 국내외 요인이 작용한 결과다.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이 여러 측면에서 디딤돌이 됐다. (패전 후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 경제는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급속히 되살아났다. 군수 물자와 각종 서비스를 미군에 공급하는 기지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조선 특수'다. <편집자>) 또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월남 특수'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나. 그것에 더해 여러 국내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여기지, 경제 발전을 어느 한 정권의 공이라는 식으로 설명하지는 않다. 기시 노부스케(아베 신조 총리의 외할아버지로 A급 전범이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총리를 맡았다. <편집자>) 정권 때 경제가 특히 많이 발전했지만, '기시 정권 덕분'이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박정희 정권은 왜 중화학 공업화를 택했나

프레시안 : 한국 경제 발전의 국내외 요인으로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

서중석 : 경제 발전엔 교육 같은 것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해방 이후 쌓인 한글세대가 경제 발전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엄청난 산업예비군으로 쌓여 있던 이 세대는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다. 아주 근면했다. 또 교육 수준도 높았다.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이었다. 통계를 보면 대만보다도 높았다.

여기에다가 국가 능력도 1960년대 중반 이후 상당히 좋아진다. 테크노크라트가 우리 경제 발전의 주축이라고들 많이 이야기하는데, 그 테크노크라트가 언제부터 형성되나. (주로)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온 세대들에 의해 1950년대 중후반부터 조금씩 형성되고 1958년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커졌다. 그런 게 쌓이면서 1960년대 중반 이후 국가 능력이 좋아졌다.

이것들과 함께 국제적인 요인도 작용했다. (무엇보다) 1960∼1970년대가 자본주의 흥륭기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하는 시기 아닌가.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도 그렇고, 유럽도 이 시기에 자본주의 경제가 크게 팽창했다. 영화 <자전거 도둑>(1948년 작)이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처럼 이탈리아는 패전 후 경제 상황이 매우 나빴다. 그랬던 이탈리아가 빠르게 발전해 (1970년대에) G7 중 하나가 됐다. 스페인도 빠르게 발전했다. 프랑스도 1945~1975년 사이에 공전의 경제 발전을 한다. 독일엔 약간 못 미쳤지만, 빠르게 경제가 성장했다. (지배자 한 사람의 공으로 돌리기보다는) 이런 식의 경제 발전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따지는 게 중요하다.

프레시안 : 중화학 공업에 주목한 박정희 정권의 선택이 탁월했다는 시각도 있다.

서중석 : 중화학 공업이 왜 1970년대 들어 발전하느냐. 박정희 정권이 적극적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이 해석하는데, 그것만은 아니다. (물론) 박정희 정권도 1960년대적인 경제 정책, 그러니까 노동 집약적인 경제 정책으로는 수출이 쉽지 않아 다른 혈로를 뚫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에서 당시 일부 중화학 공업이 사양 산업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걸 다른 나라에 떠넘겼다(는 거다). 예컨대 포항제철이 그렇게 커질 수 있던 데에는 일본의 협력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아주 심한 경쟁 관계처럼 보이지만 일본이 포항제철에 협력해줬다. 이런 여러 가지가 한국이 중화학 공업화로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만도 한국과 마찬가지다. 대만도 한국처럼 1960년대에 (경공업 제품) 수출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19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을 육성했다. 그러나 거듭 얘기하지만 '장경국 덕분에 이렇게 발전한 거다', 그렇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 ⓒKBS 새노조 제공

일본 정계 거물 "박정희와는 부자지간"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 시기 경제 발전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 자금과 베트남 파병 자금이다.

서중석 : 1965년경부터 1970년대 초까지 경제 발전을 하는 데에는 한일협정 자금하고 월남(베트남) 파병에서 들어온 여러 자금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난 196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정권을 잡았더라도 한일 회담은 타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월남 파병도 하게 돼 있던 거였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도 그렇고 군인들의 욕구를 봐서도 그렇고, 파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심지어 1954년 이승만 정권도 (베트남에) 파병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예컨대 한일협정만 보더라도 박정희 정권이 왜 그렇게 비난을 많이 받느냐. 한일협정에 대해선 '내용이 잘못됐다', '잘못 체결한 면이 많다'는 비판이 지금도 각계에서 나오고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박정희 정권의 행태가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프레시안 : 어떤 행태가 그런 반발을 불렀나.

서중석 : 이승만 정권이나 장면 정권은 한일 회담을 해도 그렇게 강한 반발을 사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그렇지 않았다. 쿠데타로 이뤄진 정권이고 박정희 자신이 일제 때 군인이었다는 점 때문에라도 상당히 신중했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권 안보 때문에도 그랬고, 장면 정권과 마찬가지로 경제를 빨리 발전시키는 게 중요하기도 했고, 미국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도 빨리 한일협정을 맺어야 했다. 그런 건 이해할 수가 있는 거다.

그렇지만 1962년도 하반기에 (일본에) 보인 굴욕적인 자세가 과연 정상적인 것이었나. 1963년은 선거의 해였기 때문에 한일 회담이 없었지만, 1964년 들어 이전과 마찬가지 태도를 보였다. 하여튼 아주 저자세라고 혹독하게 비판을 받았다. 학생과 야당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

프레시안 : 그 무렵 박 대통령과 일본 정계 거물들 간의 일화도 인상적이다.

서중석 :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미국에 갔다. 군사 정권을 승인받기 위해 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때 일본에 들러 만주 신경군관학교 시절 교장(나구모 신이치로 예비역 중장. <편집자>)을 모셔 깍듯하게 인사한다. 기시 노부스케를 포함한 자민당 주요 간부들에게도 '앞으로 일본의 유신을 본받아 정치를 하려고 한다. 많이 도와주십시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며 (일본식으로) 아주 깍듯이 인사했다. 이걸 한국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행위로 볼 수 있는 거냐.

거기 있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다 옛날 일본의 침략자들이다. 1950년대 이후에도 일본의 대륙 경영 야심을 어떤 식으로 구현할 것이냐를 가지고 여러 가지로 활동하고 구상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 앞에서 그런 식의 태도를 보였다. 그뿐인가. 나중에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자민당 부총재는 특사로 오면서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지간을 자인할 만큼 친한 사이"라고 말했다. (오노 반보쿠 자민당 부총재는 이때 "대통령 취임식에 가는 건 아들의 경사를 보러 가는 것 같아 무엇보다도 기쁘다"는 말도 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그런 태도가 한일 회담에도 반영됐다는 지적이 많다.

서중석 : 그러면서 박정희 정권은 한일 회담을 할 때 평화선 같은 걸 너무 빨리 포기해버린다. (평화선은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연안 수역을 보호하기 위해 선포한 해양 주권선이다. '이승만 라인'으로도 불렸다. 일본은 평화선에 지속적으로 반발했다. <편집자>) 한일협정 반대 운동의 초점 중 하나가 평화선 문제였다. 또 독도에 대해서도 참 애매한 상태로 놔뒀다. 독도에 대해 김종필은 폭파해버리자고, 박정희는 폭파해 없애버리고 싶다고까지 말하지 않았나. 한일기본조약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을사조약(1905년)과 한일병합조약(1910년)은 무효다', 이런 것에 대해서도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그건 지금 거론할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는 식으로 언급했다.

정부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저건 어떻게 된 정부냐', 그러면서 강한 저항과 반발이 있었던 거다. 그게 얼마만큼 많은 어려움을 던져줬나. (이렇게) 한일협정 자금이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한일협정 문제로 너무 많은 어려움을 안긴 것 아니냐. 박정희가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으면 그렇게까지 됐겠는가 하는 문제도 경제 발전 문제랑 결부해서 생각해야 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2-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