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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사회의 간디' 이광규 교수 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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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사회의 간디' 이광규 교수 영전에 [추모사] '재외동포학' 정립하고 재외동포 운동에도 뛰어들어
"대원군 시대 할아버지가 미국까지 따라와서 한국말을 배우라고 해요." 미국 뉴욕 뉴저지의 어느 고등학교에 다니는 한국 동포 학부모들이 했던 말입니다. 지난 23일 타계한 이광규 서울대 명예교수가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임기를 마치고, 2007년 미국 동포 사회를 조사 연구하러 미국에 갔었습니다. 이때 동포 학부모들을 모아 놓고 '한글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죠. 그러나 동포 학부모들은 미친 사람 취급을 했다고 합니다. "아니, 미국에 왔으면 영어를 잘 하도록 해야지. 왜 여기까지 와서 한글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외교부가 동포 문제를 담당하는 것이 맞는가. 국내 시각으로는 당연해 보이지만, 이에 대해 대해서 이광규 교수는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외교가 '천문학'이라면, 동포 문제는 '기상학'이라는 겁니다. 외교관들은 우주를 바라보는 눈을 가졌기에 구름과 비와 바람을 연구하는 동포 문제를 담당하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입니다. 시선의 길이가 다르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교수는 대통령 산하에 재외동포위원회를 만들어 동포 문제를 전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006년에는 재외동포재단 현직 이사장으로, 이런 주장을 했다가 외교부로부터 경고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외교부의 입장과 달랐기 때문이었죠.

이광규 교수는 국제 결혼한 여성이 겪는 문제에도 관심을 뒀습니다. 언젠가 프랑스인과 결혼한 한인 여성이 이혼하면서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기는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여성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하죠? 그 여성도 부부싸움을 할 때 큰 소리를 질렀는데, 프랑스 사회는 그녀를 정신이상자로 취급한 것입니다. 그래서 법원은 프랑스 국민인 아이들을 그녀의 품에서 빼앗아버렸습니다.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교수는 '한국인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겪고 있는 문제들은 결코 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깊은 울림이 남는 말입니다. 그래서 국제 결혼한 여성들의 '큰오빠'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광규 교수의 추모글을 쓰면서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재외동포문제를 연구하거나 재외동포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정체성'과 '현지화'라는 화두에 마주치게 됩니다. 재외동포들은 누구나 한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현지에서 성공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배반적인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오랫동안 외교부의 동포 정책은 일본처럼 현지화(現地化)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체성의 혼돈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자칫 국제미아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광규 교수는 이런 문제를 지적하며,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 왜 중요한지 강조하셨습니다.

이광규 교수는 일찍이 60년대에 오스트리아 유학을 마치고,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재외동포 문제에 착목하셨습니다. 수십 권의 전문서를 펴내 '재외동포학'을 정립한 장본인입니다. 1998년에는 재외한인학회를 만들어 수십 명의 학자들이 활동할 마당도 만드셨습니다. 이 교수의 활동은 서울대를 정년퇴직한 뒤인 2000년대 들어 더욱 빛이 났습니다. 당시 동북아평화연대를 창립하고, 구(舊) 소련과 중국의 동포문제 해결에 전념하셨습니다. 학자로서 이룩한 연구 성과를 직접 실천하려고 나선 것이죠. 연해주와 연변 중앙아시아 등 소외된 동포들이 있는 곳이면,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성과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몇 해 전, 동포문제는 산적해 있는데 권위 있는 목소리를 낼 원로들이 없다며 '동포사회 100인 위원회' 같은 모임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즈음 미국의 어느 동포가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이광규 교수가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했으면 됐지. 뭘, 또 한자리하려고 그래요?" 워낙 험한 말이 오가는 동포 사회였지만, 어린이 같은 순수하고 따듯한 품성을 갖고 있던 분이기에 상처가 됐나 봅니다. 그런데도 타계 직전까지 재외동포포럼 이사장, 한국문화국제교류운동본부 공동대표, 한민족원로회의 공동의장을 역임하며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셨습니다.

이광규 교수는 지난 20여 년 동안 재외동포운동의 이정표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재외동포사회의 간디'라고 불립니다. 간디는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이자 인도 건국의 아버지였지만, 이 교수는 750만 재외동포의 지도자였고 존경받는 어른이었습니다. 게다가 깡마른 얼굴과 온화한 품성이 간디와 비슷했지요. 전 세계 곳곳에서 교수님을 만났던 재외동포들이 이 교수의 갑작스러운 부음에 슬퍼하고 있습니다. 부디 하늘에서 편안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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