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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덧신을 신기리라! 한국산 덧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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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덧신을 신기리라! 한국산 덧신을! [전순옥·권은정의 D-프로젝트]<4> 제이패션 고미화 대표
한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딱히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정말 성실한 사람'의 인상?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고미화 대표. 덧신 제조업체 제이패션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전북 익산에 기반을 두고 현재 베트남까지 공장을 확장해 운영 중이다. 일본 중국 베트남이 그의 주요무대이다.

커피를 주문하고 진동 벨을 받아서 기다리고 다시 가져가고 하는 일이 이날처럼 거추장스럽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얼른 고 대표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그는 가져온 덧신을 테이블에 한가득 펼쳐놓은 채 이야기를 시작할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아무튼 차를 가져왔지만, 옆으로 밀쳐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잔의 페퍼민트와 한 잔의 아메리카노는 그로부터 적어도 한 시간 동안 그냥 식어가야 했다. 우리 중 누구도 상관하지 않았다.

▲ 제이패션 고미화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제이패션은 덧신, 양말류 및 스타킹 전문 생산업체로 국내 '패션 덧신' 생산 1위를 점유하고 있다. 또 실용 디자인을 다수 보유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디자인을 연구 개발해 이 분야 선두를 지키고 있는 업체이다. 자체 브랜드로 '베르누베', 'soksj', '엔젤 제이'가 있다.

이렇듯 굴지의 덧신 제조업체의 시작은 어떠했을까? 장대했을까? 고 대표는 20여 년 전 자신이 이 업계에 첫 발을 들인 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태창 메리야스'에 처음 입사하던 때가 제 나이 열아홉 나던 해, 12월 27일이예요. 날짜를 잊을 수 없지요. 그때는 회사 들어가는 게 참 어려웠거든요. 지금 베트남도 그래요. 누가 소개해주고 그래야 하거든요. 입사 1년 만에 연수생으로 뽑혀 일본에 가게 됐어요. 한 1년 연수 다녀와서 15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그리고는 회사를 나와 독립해서 미싱 세 대 놓고 일을 시작했지요. 처음엔 타이즈를 만들었어요. 물건을 한 트럭 가져와도 하루 이틀이면 작업이 끝났어요. 그래서 그다음엔 그물 스타킹을 받아서 작업했죠. 임가공업인데요. 스타킹에 레이스 달아서 내놓으면, 그게 엄청 잘 팔렸어요. 이걸로 한 5년은 먹고 살겠다 싶었는데, 중국에서 가져가 버렸어요. 중국에서 우리 걸 본떠 만들었다는 말이죠. 그물 스타킹이 한창 팔릴 때는 한 달에 3000만 원 씩 벌었다니까요."

고 대표가 일사천리로 자신의 사업이력을 재빨리 정리해주는 사이, 입이 저절로 벌어지면서 엉뚱한 질문이 나왔다.

"엄청나게 부자시겠네요?"
"아니, 아니요. 별로 아니에요. 다 나눠 먹고 사니까요. 엄청 부자 아니에요. 하하하…"


중요한 것은 부자니, 돈을 많이 벌었다느니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대답은 해주었지만, 그의 눈길과 손길은 오로지 덧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앞에 수북하게 놓인 덧신 더미를 내보이면서 말했다.

"이게 전부 현재 우리가 납품하고 있는 제품들인데 한번 보세요. 지금 전국의 마트나 백화점에 나가는 덧신은 전부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고 보면 맞아요."

ⓒ프레시안(손문상)
우리가 알고 있는 '아주 아주' 유명한 스타킹 회사의 덧신 제품도 전부 제이패션에서 생산한 것들이었다. 각양각색의 덧신은 색상이나 종류가 너무나 다양했다.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이었다. 고 대표가 얼른 하나를 집어 들고 가장자리를 손으로 가리킨다.

"요즘 제일 뜨는 것이 바로 이 제품인데요. 이 부분이 실리콘으로 처리돼서 절대 안 벗겨집니다. 이런 것은 처음일 거예요. 한번 신어보세요."

난 구두도 벗고, 양말도 벗어 던지고 덧신을 얼른 신어 봤다. 카페에서 맨발을 드러내 보이면서 말이다! 발에 착 감기는 느낌이 좋았다. 색상이나 디자인도 세련됐다. 지난 여름, 사서 신었던 제품이 제이패션 덧신이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것 보세요. 봉제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지요. 실리콘 처리되어 있어요. 절대 벗겨지지 않고 아프지도 않아요. 이거 맨 처음엔 아팠지요? 이제 그런 거 없어요."

그는 덧신 더미에서 하나 더 골라내서 보여준다.

"이것도 처음일 거예요. 맨 처음에 이거 만들어 놓고 평생 이것만 해도 먹고 살겠다 했는데, 그게 또 의장등록만 해놨다가 중국에서 따라 하니 경쟁력이 떨어지는 거예요. 특허등록을 해야 하는데…. 모양만 다르게 해서는 아무나 따라 하는 것을 막을 수 없거든요. 10년 동안 이걸 만들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 싶어서 2년간 디자인 개발을 했죠. 요즘은 특허 등록을 꼭 합니다. 이번에 개발한 건 전체가 실리콘이에요. 얼마나 편한지 한번 신으면 절대 못 벗어요. 스니커즈를 신을 때 꼭 신어야 하는 거니까요. 올해 50만 켤레를 만들었는데, 나가는 족족 동이 났어요. 이번에 일본 매장에 한번 진출해 봤는데, 하나도 안 남았더라고요. 일본에서 내년 3월까지 100만 켤레를 주문했어요."

고 대표가 덧신을 어루만지며 자랑스럽게 제품을 설명한다. 그의 표정이 더없이 밝다.

"이건 아직 일본에서 안 나온 건데요. 제가 디자인 한 것이에요. 처음 일본 제품은 발바닥 부분이 나뉘어서 아프다고들 했는데, 우리 것은 바닥을 전체 한 장으로 해서 내놓았지요. 우리 시장에서 첫해에 2000켤레가 나가고, 1년이 지난 후에는 한 달에 2000켤레 씩 나갔어요. 그렇게 1년이 지나니 1만 켤레, 5년이 지나니 한 달에 30만 켤레가 나가더라고요. 그렇게 죽 15년간 이어오고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이든 성공담을 듣는 일은 신이 난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성공과 실패가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시련의 시기 없이 어떻게 성공의 열매가 열리랴. 고 대표의 일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는 말이다. 처음 발목 스타킹에 레이스를 달던 임가공업을 성공적으로 한 후, 고 대표와 남편(정진열 사장)은 함께 수영복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년 정도 하다가 손해만 봤다. 그때 종업원 인건비는 어떻게든 줬지만, 집 전기세 낼 형편도 안 됐다고 한다. 크리스마스에도 아이들에게 통닭 한 마리 시켜줄 돈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덧신 주문을 받아 일하던 중 아이디어가 떠올라 만든 제품이 소위 '대박'을 쳤다. 덧신의 성공 스토리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일이 늘어나면서 전북익산 지역 주변에 일감을 나눠주면서 생산했다.

그렇게 많은 생산력이면, 좀 부풀려 말하자면, 익산을 먹여 살린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고 대표가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처음에는 익산에서 했지요. 그런데 소규모로 하다가 도저히 생산능력을 맞출 수가 없어서 개성공단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개성공단이 막히는 바람에 베트남으로 나갔지요. 그쪽 간지는 1년 되었는데, 그 사이 공장 인력이 500명으로 늘어났어요. 이제 우리 회사 한 달 생산능력, 케파('capacity(용량)'를 줄여서 'capa'라고 말한다)가 150만 켤레까지 가요."

한 달에 덧신 150만 켤레를 생산해내면 단위당 순이익이 얼마 정도냐고 묻자, 그는 100원이라고 대답한다. 고작 100원? 고 대표가 재빨리 대답한다.

"100원이 150만개 모이면 얼마예요? 1억 5000만 이예요!"

제이패션 베트남 공장은 호치민 시에서 한 시간 반 들어간 곳에 있다. 기술학교를 임대받아 하다가 얼마 전에 건물을 새로 지었다. 공장매매와 소유를 위한 까다로운 서류작업이 진행 중이지만, 고 대표는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베트남 공장운영은 덧신 제조에 관한 시설투자와 기술이전을 제이패션이 전적으로 지원해주고, 현지 생산 단가에서 얼마씩 받는 것으로 하고 있다. 베트남 확장은 일본과 납품계약이 성사되면서 이뤄진 것이다.

"덧신은 4월이 성수기거든요. 그때 못 팔면 장사 망치는 거죠. 7월이면 물건이 안 팔려요. 2월 달부터 물건이 나가는데 겨울기간 동안 계속 물건은 만들어야 하니 자금이 엄청 많이 들어가지요. 다행히 올해는 일본에서 1월부터 물건이 나가기로 되어 있어 숨통이 트인 거죠."

디자인 개발, 제품 개발에 많은 신경을 쓴다. 소재며, 원단이며, 부자재 디자인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원단이 좋지 않으면, 소비자들은 바로 알아차린단다. 최근에는 한지에 스판덱스를 넣어 만든 제품도 개발했다. 덧신의 원단과 레이스를 좋은 제품으로 가격도 좋은 것으로 하자면,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 원단은 국내시장에서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부자재는 중국 것과 접목해야하기 때문에 중국 시장에도 자주 나간다.

"우리 가격이 중국시장 가격을 맞출 수 있어야하거든요. 아직은 우리가 가격 경쟁력이 있어요. 그러니 일본에서도 우리 쪽으로 오는 것이죠. 그것 말고도 할 수 있는 노하우 많아요. 무엇보다 우리 제품이 아니면 안 되게끔 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일본 시장을 뚫었지만 자주 나가서 시장의 흐름이나 제품 반응을 본다. 그러니 중국, 일본, 베트남을 오가는 그의 발길이 늘 바쁘다. 해외를 내 집 드나들듯이 하자면 몸이 힘들 텐데, 빈말이라도 피곤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계 최고라고 가만 앉아 있으면 안 되잖아요."

고 대표는 '뭐, 당연한 일이다'라는 듯 반응한다.

ⓒ제이패션

국내 익산 공장에서는 견본만 만든다. 15명의 직원이 매달려 거의 매일 견본을 만들어 거래처로 보내고 주문을 받는 시스템이다. 다행이 견본을 보내는 대로, 주문이 곧장 들어온다. 디자인이나 품질이 그만큼 알차다는 말이다. 나날이 주문 물량이 기하급수적 늘고 있다고 한다. 고 대표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덧신은 틈새시장이에요!"

덧신을 만지는 고 대표의 눈길은 틈이 없어 보인다. 제품을 향한 시선에 한 치도 허투루 보이는 구석이 없다.

"네, 제게는 꿈이 있었어요. 처음 일본을 갔을 때 '일본은 나쁜 나라다'라는, 한국 사람으로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죠. '어떻게든 성공해서 이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주자' 그런 마음을 먹었었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주던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서 배운 게 많았어요. 지금 우리 물건이 일본 백화점에 '떡' 하니 진열되니까 기분이 좋지요."

'태창'에 근무할 때 그는 원래 기계수리 전문이었다. 스타킹 만드는 기계는 일반 미싱과 다르다. 큰 기계 위에 여러 개의 미싱이 달려 초고속으로 돌아가며 박음질한다. 고 대표가 만진 기계는 미싱이 스물네 개가 달린 것인데, 하루에 한 대씩 분리해 나사를 모두 분해한 뒤 다시 조였다. 그 전까지는 기계가 워낙 무거워 남자들이 해야 하는 일로 여겼다.

"회사 다닐 때는 지금보다 더 열심히 했어요. 제가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는데요. 그때 회사 일이 하고 싶어서 저녁 9시에 학교가 끝나면 다시 공장으로 들어가 밤 12시까지 기계를 고치고 그랬다니까요. 미싱이 고장 나면, 한국 기사들이 못 고쳤어요. 저는 일본에서 배웠으니 기계를 좀 볼 줄 알았지요. 그렇게 고치다 보니, 전문으로 기계 고치는 일을 하게 된 거죠. 미싱 칼날을 점검하는 일 같은 건 그 전날 밤에 다 끝내 놨죠. 그렇게 관리하니 고장이 안 나고 생산성이 올라가고 그랬죠. 참, 그때 남의 일은 그렇게 했는데, 지금 우리 일은 그렇게 열심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하하…."

이제는 베트남에서 덧신을 만들지만, 한때 익산이 제이패션의 본산지였던 때가 있었다. 고 대표는 덧신 제조인력이 모두 동네주민이었던 그 시절이 무척 좋았던 모양이다. 그때를 기억하는 그의 표정에 미소가 떠오른다.

"아파트 단지를 잡아서 한 동에 사는 주민들에게 일거리를 맡겼어요. 층마다 일의 종류를 나눠서 분배하는 분업 시스템으로 서른 명 정도의 인원이 동원되었는데, 생산성이 아주 높았어요. 스타킹 만드는 일을 주면, 한 층에서 오바(자른 원단의 올이 풀리지 않게 끝부분을 바느질하는 작업. 'overlock'을 '오바'라고 줄여 부른다)하는 사람, 실밥 뜯는 사람이 정해졌어요. 집에서 하니 따로 장소가 필요 없었어요."

하루에 몇 천개의 제품이 나왔다. 보통 한 사람당 하루에 7~8만 원, 많은 경우 10만 원 벌이가 되었다. 고 대표의 친구 중에는 덧신 한 장에 25원 씩 받고 3000장에서 4000장을 박음질하며, 10년간 일한 이도 있다. 그래서 딸을 교사로 키웠다고 한다. 그 당시 덧신 제조에 동원된 인력이 200명이 넘었고, 고 대표가 한 달에 지출한 인건비는 1억 5000만 원을 넘을 정도였다. 하지만 층간 소음 때문에 더 이상 집안에서 일하는 게 힘들어지면서 아파트 분업 시스템을 유지하는 게 어려워져 개성공단으로 이전했다.

그런데 개성공단 가동이 멈추면서 외국으로 나갈 수밖에 없게 됐다. 베트남으로 나갔지만, 마음은 여전히 국내 생산이 되었으면 고 대표의 바람이 간절하다. 비슷한 규모의 사업장들이 대부분 인건비를 이유로 해외로 이전하고 있지만, 고 대표는 비용에서 별 차이가 안 난다고 말한다. 그래서 조건만 된다면, 그는 국내에서 버선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이 부분에서 귀가 번쩍 뜨인다.

"정부가 해주었으면 하는 게 큰 것이 아니라,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주부들에게 아파트 주변에 일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지요. 집세와 전기세를 지원해주면 우리가 일감은 얼마든지 안정적으로 댈 수가 있거든요. 주부들이 가정에서 아이들 돌보면서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사실 직장 출퇴근은 저희도 어렵죠. '4대 보험' 하면 단가가 올라가 가격을 못 맞추니까요. 그런데 주부들에게는 4대 보험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일이 중요한 것이죠."

고 대표는 주부뿐 아니라, 정부에서 지원하는 자활단체에도 무상 지원보다는 일할 수 있는 여건 마련에 힘쓰는 게 훨씬 효과적인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더구나 지방 일자리 창출에 얼마나 효과적인가 말이다. 우리나라 봉제기업을 살리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게 고 대표의 주장이다.

"제가 앞으로 해나가고 싶은 일이예요. 봉제기반산업이 잘되어야 나라가 발전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여러 사람이 일을 해야 돈도 분배되고 살게 되는 것이고, 그래야 나라가 잘되는 거죠. 봉제산업이 사람을 제일 많이 필요로 하니까 일자리가 많이 늘어날 수 있는 좋은 산업이잖아요. 우리 같은 경우는 규모가 작아요. 정부가 일터를 제공해주면, 일거리는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한 달 벌이가 가능하게끔 생산단가를 맞출 수 있어요."

일하고 싶어 하는 일반 주부들은 아이들 돌보면서 일할 수 있어 좋고, 익산은 지역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으니 좋고, 제이패션은 메이드인 코리아(made in korea) 제품을 만들 수 있으니 좋은 일 아닌가. 이런 일석삼조('일거양득(一擧兩得)'의 일본식 표현)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방법이 활성화 되면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인력은 충분히 있다'는 게 고 대표의 생각이다.

그는 지금까지 편안히 먹고 지낸 적이 없다. 주변에서는 적당히 그냥 있었으면 빌딩이 몇 채였을 것이라고 말한단다. 개성공단이 막히고 나서 빚이 많이 늘었지만, 3년이면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라며 경기가 어려워져 약간 걱정이긴 해도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있단다. 언제가 제일 편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묻자 고 대표가 바로 대답한다.

"일할 때죠! 힘들게 일할 때도 저는 늘 행복했어요. 어려운 시기가 있어도 한 번도 불행하다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요. 일하는 게 재미있잖아요!"

고 대표는 웃으며 자신의 손을 내밀어 보여준다. 제품 개발하느라, 그의 손에는 늘 공(굳은 살)이 박혀 있었다. 벗겨지지 않는 덧신을 만들기 위해 실리콘 제품을 개발할 때는 하루 종일 다리미로 접착제를 다려보고 또다시 해보고 하느라, 손을 데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겐 별스럽지 않은 일이다.

▲ 제이패션이 그동안 만든 덧신들. 진열대 위에는 특허등록증이 수두룩하다. ⓒ제이패션

제이패션의 기업운영 방식은 지극히 단순하다. '최선을 다하자!'이다. 고 대표는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주로 새로운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 개발이 그의 주된 일이다. 신제품에 신경 쓸 때는 6시에는 출근해서 밤 12시까지 일할 때가 많다. 이렇게 저렇게 새로운 디자인에 도전하고 있는 그를 직원들이 많이 응원해준다. 직원들도 저마다 아이디어를 들고 오기도 한다.

제이패션은 휴먼 경영에 뛰어난 기업이기도 하다. '태창'에서 같이 일했던 연수 동기들 4명이 제이패션의 창업동기이자 지금도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이다. 그중 한 친구는 고 대표와 베트남을 번갈아 오가며 기술과 관리 일을 맡아 한다. 친구들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단다.

"친구들이 '미화야!' 하고 부르면 너무너무 행복하죠. 우리 회사는 사람들이 안 나가요. 일 못한다고 내보내지도 않아요. 회사에서 먼저 나가라고 한 적도 없어요. 누군가 잘 되어서 나간다면 말리지 않지만요. 그리고 다시 돌아올 때도 받아줘요, 하하하…."

익산 공장 직원은 다 합해서 40명 정도 된다. 이맘때쯤 김장철이 되면, 돼지고기를 삶아서 다 같이 보쌈을 해먹는다. 그 일은 해마다 고 대표의 남편이 맡아서 한다. '태창'에서 동료로 만나 일본 연수도 함께 다녀왔다. 남편은 '태창'에서 공장장으로 일했었다. 고 대표는 웃으면서 '남편이 원래 대표이사였는데, 아내를 여성 기업인으로 키우기 위해 대표직을 넘겨줬다'고 설명한다. 고 대표는 베트남으로 사업을 확장하느라 당분간 회사 사정이 긴장되지만, 다시 안정이 되면 사원 자녀들의 대학 입학금을 지원해주고 싶다고 한다. 집안 사정으로 고등학교도 어렵게 다닌 자신을 떠올리면, 입학금 지원은 참 중요하고도 큰 도움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는 사업만 잘하는 게 아니다. 가정 생활도 가히 모범이 될 만하다. 성실한 남편과 결혼해 딸 둘, 아들 하나를 낳아 잘 기르고 있고 올해 아흔 두 살인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엄격한 시어머니는 집안의 버팀목이자 사업 운영의 조력자라며, 충고를 아끼지 않는 '회장님'이시란다. 큰딸은 시집가서 첫 아이를 낳았는데, 그는 딸들이 디자인 개발에 참여해주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이 디자인을 배워야 제품 감각이 늘어나거든요. 제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봐야, 생각이 구닥다리죠. 그것을 탈피하려면 젊은이들이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얼마 전 일본 바이어들과 상담하던 중에 '제이패션의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종업원 1만 명이 될 때까지 회사를 키우겠다! 그랬죠. 그래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우리 덧신을 신기는 거예요. 지금은 여성들이 주로 덧신을 신지만, 남자들이 신었다 하면 수요가 말도 못하게 늘어날 거라는 거죠. 전 세계 남자 여자들에게 우리 덧신을 신기는 것! 거기에 '메이드 인 코리아' 상표 달아서요. 덧신에 집중할 거예요. 최고가 되기 위해서…. 다른 것에는 눈 돌리지 않고요!"

▲ 권은정 인터뷰어(오른쪽)와 고미화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익산 지역 기업설명회에서 고 대표를 만났다는 전순옥 민주당 의원은 고미화 씨 같은 이들이야말로 '제조업계의 보석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보석이 제대로 빛을 발휘하도록 하는 일은 또 다른 사람의 몫이기도 하다. 가령 정부 정책을 시행하는 이들이나 정치하는 이들이 아니겠는가. 덤으로 얻고자 하는 마음 하나 없이 정직하게 노력한 만큼만 얻기를 바라는 성실한 사람들, 이들을 위한 정책이 하루라도 빨리 시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날처럼 간절한 적도 없었다. 어느새 커피는 식었지만, 그보다 더한 뜨거운 기운이 가슴 속에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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