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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이 말한 "수제화 명장 아이콘"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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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이 말한 "수제화 명장 아이콘"을 만나다 [전순옥·권은정의 D-프로젝트]<8> 유홍식 구두 명장, 마지막 불씨를 살리다!
명장의 작업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가. 성수동 구두타운에 가면 구두를 꿰매고 있는 구두 명장을 직접 만날 수 있다. 드림 핸드메이드 유홍식 명장. 그는 최근에 '서울시 구두 명장 1호'로 지정되었다. 성동구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수제화 명장 선정 및 지원에 관한 조례'에 따라 성동구 수제화 산업현장에서 수제화 숙련 기술을 보유한 기능인 중에서 명장을 선발했다.

성동구 사람들은 구두에 승부를 걸었다. 성동구는 오래전부터 구두 제조업체가 들어선 지역의 특성을 살려 '성수동 수제화 산업 활성화'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현재 이 지역에는 성수역을 중심으로 수제화 생산업체 300여 곳과 중간가공·원부자재 유통 각각 100여 곳 등 총 500여 곳이 넘는 수제화 관련 업체가 들어서 있다. 국내 고급 수제화 산업을 선도적으로 이끌고 있다고 할만하다.

지하철 2호선 성수역 바깥에는 성동구가 수제화 특화사업으로 추진하는 수제화 성수매장 'from SS'이 있는 '성수동 수제화 타운'이 있고, 성수역 내부에는 구두 관련 전시 및 체험관과 갤러리 등이 마련돼 있다. 성수역은 그야말로 '구두 테마역'이 됐고, 성수역 근처는 이제 볼거리가 풍성한 도시 산업 지대가 된 것이다. 성수역 1번 출구를 나오면, 구두를 상징하는 조형물 '수제화를 신고 있는 고양이(고양이의 빨간 꿈)'과 유럽풍 건물인 박스 숍 역시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이제 성수역은 곧, '구두'라고 연상된다. 한국 수제화의 랜드마크로 등극한 것이다.

한국의 볼로냐(이태리 명품구두 생산도시)를 꿈꾸며 야심 차게 나선 성수동이 구두 명장을 선발하자는 계획을 세운 것은 당연한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구두장이' 중에서 장인정신이 투철하고, 수제화 제조 산업의 계승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이를 찾는 대회가 지난해 11월 열렸다. 그 첫 대회를 통해 '수제화 명장'이라는 명예를 거머쥔 이가 바로 유홍식(드림제화 대표) 씨다.

▲ 'r구두 명장' 유홍식 드림제화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유 명장이 일하고 있는 박스 숍엔 그가 만든 고급스럽고 우아한 구두가 진열돼 있었다. 벽면에는 명장 수상식 사진이 걸려 있고, 동판에 새겨진 인증패 역시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세워져 있다. 명장이 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아주 기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전부터,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기 전부터, 스스로 명장이었던 사람이다.

"내 평생 일하면서 한 번도 이 일을 선택한 것에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구두 만드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데요. 나는 이 일을 어떤 것과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서울대 졸업장하고도 절대 안 바꾸지요!"

유 명장은 세상이 아무리 좋은 자리라 하더라도 절대 '노(NO)!'하겠다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침없는 태도와 시원시원한 어투는 그가 마음에 없는 말 따위는 절대 할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을 준다. 두꺼운 손으로 구두를 만지는 모습이 매우 잘 어울린다.

ⓒ프레시안(손문상)

간간히 사람들이 들어와서 구두를 살펴보고 나가곤 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일어서서 고객에게 자신의 구두를 설명하지만, 인터뷰하는 내내 명장의 두 손은 쉬는 법이 없다. 그의 두 손은 오로지 구두 만드는 일에만 쓰여야 한다는 듯, 손에서 구두가 떠나지 않았다. 명장의 손에 놓인 연베이지색 가죽은 마치 부드러운 비단 천인 양 이리저리 몇 번의 바느질을 거치더니, 어느새 신발의 꼴을 갖춰 가고 있다. 있는 힘을 다해 찔러도 들어갈듯 말듯 보이지만, 굵은 대바늘은 명장의 손에서 그저 요술처럼 술술 가죽을 파고든다. 구두와 함께해 온 수십 년 장인의 이력이 그대로 보이는 장면이다.

올해 예순 중반인 유 명장은 오십 평생, 구두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열세 살 즈음부터 구두 만들기 시작했다. 고향이 전라도 광주인 그는 일찍이 집을 나와 서울로 향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그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면서 웃는다.

"'집안이 가난하다'는 등 뭐, 그런 사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말하긴 좀 창피하지만, 어렸을 때에는 공부에 왜 그리 취미가 없던지. 하하하…. 친구랑 서울에 가서 구두 만드는 것을 배우자, 그랬지요."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당시 수제화 분야 최고 전문 제화점이었던 서울 명동 기능제화였다. 거기서 4년간 기술을 배웠단다. 그는 집안 내력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윗대 집안 어른들을 둘러봐도 그렇고, 자신의 아이들도 그렇고, 타고난 감각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감각이 뛰어난데다 안목도 있어서였는지 남들보다 기술을 확실히, 빨리 마스터할 수 있었다. 물론 성심껏 열심히 배웠다.

ⓒ프레시안(손문상)
그리고 이 업계에서 '선생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게 열아홉 살 되던 해였다. 곧장 금의환향했다. 이후 꾸준히 구두를 만들면서 그는 광주지역 고객들에게 자신의 구두를 신겼다. 많은 이들이 그의 신을 보배처럼 즐겨 신었다. 덕분에 남부럽지 않게 재산도 불렸다. 꽤 오래 그렇게 승승장구하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것은 IMF 외환 위기의 칼바람 때문이었다. 사업을 벌였다가 운 나쁘게도, 그간 모은 재산을 다 잃고 말았다.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떠나올 때 그의 수중에는 고작 몇 만원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의 말로 하자면 "뭐, 큰집은 아니더라도 내 집을 마련했고 아이들 교육도 시키고 집사람 하고 싶은 일 하게 했고…. 그런대로 다 잘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순간, 하던 일을 멈추고 손을 보여주면서 말한다.

"바로 내가 가진 이 기술 때문이지요."

무두질한 가죽처럼 단련된 손을 내미는 유 명장, 어찌 저리 당당한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가진 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에게서 구두 만드는 기술 하나만으로 세상을 헤치며 걸어 나온 힘이 느껴진다. 유 명장은 자신의 기술로 정직하게 일해서 돈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고 한다. 그는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거짓말, 남을 속이며 자기 잇속을 차리는 사람을 많이 봐왔다고 한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두 손을 자랑스럽게 바라본단다. 정직한 손! 그는 순전히 자신의 기술로만 돈을 벌기 때문에 가장 깨끗하게 돈을 버는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프레시안(손문상)

유 명장의 작업현장은 언제나 일반에게 공개되는 셈이다. 박스 숍 유리창 너머 보이는 그의 작업 모습은 한편의 예술작품인양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인간의 고귀한 노동의 모습이다. 성동구에서도 이점을 염두에 둔 것 같다. 명장의 작업장을 공개해 사람들에게 구두타운의 명성을 높이고자, 유 명장에게 이곳을 마련해 주면서 작업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그는 아침 10시에 나와서 저녁 무렵 퇴근 때까지 이곳에서 일한다.

지난 12월 13일 성수역 1층에서 열린 성수역 구두테마역 조성 기념 및 수제화 성수매장 개장식에서 그는 '수제화 명장 1호' 인증패를 받았다. 개장 행사에서 박원순 시장과 고재득 성동구청장이 함께 그를 격려했다. 이날 박 시장은 "유 명장이 수제화 명장 아이콘이 될 것"이라며 "제2의 아테스토니(a.testoni)를 향한 꿈을 지켜달라"고 말했다.

유 명장은 명장 인증패를 받고 나서 박 시장과 고 구청장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두 분께서 지원해주지 않으셨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두 분 모두 너무 고맙다"고 했다. 그냥 말이 아니다. 진심을 담은 감사의 인사였다. 평생 처음으로 관청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것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국산 구두 만드는 쪽으로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었지요."

유 명장은 그동안의 외로운 심정을 토로한다. 수십 년 외길을 걷는 일은 늘 고달프고 힘들었다. 세상은 기술을 귀히 여기기보다 하찮은 일이라고 홀대했다. 세상의 잣대는 그의 가치를 일용 잡직의 일당으로 계산했다. 언젠가 보험회사 직원이 자신의 하루 수입을 산정할 때 구두 만드는 일을 아무나 하는 일로 취급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큰 소리를 내지 않고 그냥 조용히 타일렀단다. "그 돈은 그냥 자네가 가지게나." 자존심이 상하고 속상했지만 그럴 때마다 구두를 만들며 속을 삭혔다. 그런데 이제 서울시장이 자신을 알아봐주고, 구청 직원이 찾아와 불편한 점이 없는지 묻는다. 이제 좀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지나 세월을 돌이켜 보자면, 안타깝고 아깝다. 진작 이렇게 대우해주었다면! 일찍부터 수제화 산업을 제조업이라는 틀에서 조망하고 이 일을 눈여겨 살피고 대접해줬다면, 우리는 지금쯤 더 좋은 기술로 더 좋은 제품의 구두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프레시안(손문상)

한편, 그는 구두 제조나 판매 쪽 관행이 그리 순조롭고 합리적으로 이뤄지는 편이 못 된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물건을 가져가도 한참 뒤에야 결제를 해주니, 제조업자 입장에서는 버텨내기 참 힘들다. 게다가 일감이 일정하게 들어오는 것도 아니니, 수입을 가늠할 수 없어 가정 살림을 계획하기도 어렵다며 그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대신 전했다.

이제까지 구두 만드는 이들은 능력에 비해서 제대로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기술이 낮다는 말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유 명장이 증명하고 있다. 유 명장은 우리나라의 구두 만드는 솜씨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프레시안(손문상)
"우리나라 수제화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과거 세계기능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이 수제화 부문을 3연패 하자 다른 나라들이 참여하지 않게 되었죠. 그래서 수제화 부문이 없어졌을 정도였다니까요."


유 명장은 잠시 일손을 멈추고 소리 높여 말했다.

"이탈리아 구두가 수제화 명품으로 유명하지만, 우리나라 수제화도 그에 못지않아요! 우리도 얼마든지 명품 수제화로 세계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니까요!"

그는 진열되어 있던 구두 한 짝을 번쩍 들어 보이며 말했다. 붉은색 가죽에 가는 줄을 새겨 넣고 발목에는 호피 모양의 송치 털을 단, 발목까지 오는 부츠였다.

"이 구두를 보세요! 디자인이나 품질이 어떤지. 내가 디자인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딱 한 켤레뿐인 구두라니까요! 나는요, 남이 만들지 않은 수제화 모델을 수없이 만들었어요. 기술로는 세계 누구와 겨뤄도 지지 않는다고 자신합니다."

그의 매장에 있는 구두는 대부분 직접 디자인한 것이다. 탐이 날만큼 멋진 구두가 여기저기 보인다. 유 명장은 구두에 대한 생각은 아직도 쉼 없이 솟아오른다고 한다. 길을 가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사람을 만나서도,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아이디어가 막 떠오른다. 그는 기억력이 별로라서 가족 전화번호니 뭐니, 외우고 있는 게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번 지나가면서 슬쩍 쳐다보기만 한 구두 디자인은 기가 막히게 생생하단 말이에요!"

그는 자신의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번 성동구 수제화 명장 선정 실기평가대회에서도 7명의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그가 단연 '명장'으로 뽑혔다. 서류 심사와 현장실기, 면접을 거치는 동안 그는 자신이 가진 기술의 힘을 믿었다. 수제화 저부(밑바닥) 부문 심사에서 유 씨가 내놓은 작품을 보고 심사위원들이 말했단다.

"마지막 불씨가 남아 있었구나."

ⓒ프레시안(손문상)
그 불씨란 바로 유 명장이 자랑하는 '특 가보식 기법'이다. 옛날 사람들이 짚신을 만들 때 쓰던 기법을 그가 구두 만드는 방식에 적용한 것이다. 통가죽을 조각내어 작업하는 이 기법은 그가 구두 제작을 배우던 시절에는 다들 사용했던 기술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 기술을 가진 이를 찾기 어렵다. 기술을 가진 세대가 어느새 거의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내가 이 일을 그만두고 가버리면, 이제 누가 이 기법을 이어갈지 모르겠어요. 이대로 사라져 버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 우리만의 기술을 전수받을 사람이 없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다. 제자를 키운 후, 언젠가 물러났으면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이 기법을 제대로 배울 젊은 세대를 기다리고 있다. 옛날 도제 방식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이제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기술 전수는 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특히 귀중한 기술 전수가 제대로 이어지도록 공적인 차원에서 시스템이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요즘 들어 부쩍 유 명장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젊은 구두장이들이 많아 그는 행복하다. 새해부터 이들 중 인재를 골라 제대로 한번 가르쳐 보고 싶다고 한다. 그의 수제자가 되려면 제법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실 명장이 되기 전에는 이제 그만 고향으로 내려가 친구들과 술잔도 기울이고, 아내와 함께 여행도 다니며 세상 구경을 하고 싶었는데, 제자 키우는 일이 남아 있으니 명장의 은퇴는 아직 이른 일인 것 같다. 유 명장은 젊은 시절에는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 가서 기술도 배우고 구두를 잘 만든다는 그쪽 사람들과 솜씨도 겨뤄보고 싶었단다. 그러나 이제 그 꿈은 접었다. 어디에 있든, 가장 멋진 구두를 만드는 일은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언젠가 외국 잡지에 실린 수제화 특집 기사를 얘기해 줬다.

"영국 구두 잡지였는데, 거기 실려 있던 구두 만드는 연장이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구두 만드는 순서도 내 작업 순서와 똑같더라고요!"

유 명장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 어디에 숨어 있어도 최고의 솜씨는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말로 들렸다.

ⓒ프레시안(손문상)
중간 중간 고객 몇 명이 매장에 들어왔다. 남자 구두만을 전문으로 하다 보니, 남성 고객들이 주를 이룬다. 멋쟁이 청년 두 명이 들어와 한참을 둘러보며 가격을 묻더니, 머뭇거린다. 생각한 것보다 비싸다는 눈치다. 그의 매장에는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구두가 있다. 디자인이나 품질로 보자면 합당한 가격이지만 고객들은 비싸게 보이는 모양이다. 유 명장은 금방 들어온 고객들이 가격을 물어보고 갸우뚱하며 나가는 모습을 보고 말한다.

"일부러 가격을 낮게 불러서 팔 생각은 없습니다. 백화점에서 파는 외제 구두는 당연히 비싸다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만드는 구두는 비싸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현실이지요."

원료비나 공임을 생각하면 가격을 더 낮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더구나 명장, '마에스터(Meister)'가 만드는 구두가 아닌가!

이어 한 노(老) 신사가 매장에 들어섰다. 이런저런 구두를 살펴보던 노 신사는 그래도 구두보다 유 명장의 솜씨에 더 눈이 가는 모양이다. 수제화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구두 만드는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던 노 신사가 유 명장에게 물었다.

"이렇게 하면 하루에 몇 켤레나 지을 수 있소?"

유 명장은 '구두 짓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간단하게 대답한다.

"두세 켤레 정도 됩니다."

그는 매일 아침 5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일을 시작한다. 성수동에는 그의 구두공장과 매장이 각각 따로 있다. 구두타운 숍에 나오기 전에 그쪽 일을 미리 해놓으려면, 하루가 바쁘다. 무엇보다 건강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다. 열정적으로 구두를 만들며 살아서인지 예순 중반의 나이지만, 그는 모습도 생각도 아주 젊어 보인다.

"하하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니 그런 모양이지요."

ⓒ프레시안(손문상)

유 명장은 오랜 세월 손때가 묻어 윤이 나는 박달나무 망치를 들어 구두 밑창을 두드린다. 이내 그는 만족스러운 듯 혼자 미소를 짓는다. 후회 없이 바친 반세기 구두 인생이다. 손에 박힌 굳은살, 하늘을 찌르는 자부심, 그리고 쉼 없고 정직한 노력이 유홍식 명장의 오늘을 만들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대한민국 성수동 한복판에 불씨를 품은 한 장인이 구두를 만들고 있다. 뜨거운 불씨는 멀지 않아 분명히 아름다운 불꽃으로 세상을 향해 크게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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