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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총·수류탄으로 주민 학살 후 시신 소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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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총·수류탄으로 주민 학살 후 시신 소각"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0> 학살, 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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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두 번째 마당] "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한국전쟁 공포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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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첫 번째 마당] "뉴라이트·이승만, '용서받지 못할 자' 비호"
[친일파, 두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는 어떻게 비밀이 됐나
[친일파, 세 번째 마당] "일본군 박정희, 반성은 없었다…유신은 필연"
[친일파, 네 번째 마당] "박정희 한 사람 덕에 경제 발전? 저열하다"
[친일파, 다섯 번째 마당] '반역자 미화' 뉴라이트, 힘 싣는 여당…"두렵다"
[학살, 첫 번째 마당] "수십만 죽이고 30년 넘게 침묵…참 무서운 한국"

프레시안 : 학살이 워낙 많아 이를 유형화하기도 쉽지 않다. 여러 세력이 다양한 방식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서중석 : 해방 후 학살을 몇 가지로 뭉뚱그려서 유형화하기는 굉장히 힘들다. 지금까지 조사 및 연구된 것만 가지고 유형화하는 것도 좀 무리한 경우가 있다. 더 많은 조사와 연구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

우선 학살이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가 하는 걸로 따질 때 대부분의 규모가 큰 학살은 군과 경찰에 의해 이뤄졌다. 그래서 군경에 의한 학살이라고 부른다. 우익 단체에 의한 학살도 꽤 있었다. 제주 4.3의 경우 서청이라 불린 서북청년회가 대표적이다. 대동청년단도 학살에 협력하긴 했지만 서청이 특히 악명 높았다. (1950년) 9.28 수복을 전후해 우익 청년 단체들이 각지에서, 남한만이 아니라 북한 지역에서도 학살에 상당히 관여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미군에 의한 학살(이 있는데), 특히 전쟁 초기에 많이 일어난다. 노근리 학살을 포함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다. 공습, 공중 폭격에 의한 학살(인 경우가 많은데), 이 부분이 당했다는 지역 주민들과 그걸 자료로 입증할 수 있는 것하고는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입증하기 쉽지 않다는 어려움은 있다.

프레시안 : 군경과 우익, 미군에 의한 것뿐만 아니라 북한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있었다.

서중석 : 그렇다. 북한과 (인민군 점령 지역)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있다. 무엇보다 인민군이 남한 각 지역에 들어오게 될 때, (그에 앞서 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원 학살 등으로 부모를 비롯해 가까운 사람이 학살당했을 경우 그것에 대한 보복 학살을 한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자료상으로 많이 나오진 않더라. 오히려 북한 측에서 (보복 학살을) 상당히 제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초기에 보복 학살은 제한적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학살 규모가 커지는 때는 9.28 수복 전후 시기다. 9.15 인천상륙작전 이후부터인데 이 경우 인민군에 의한 학살인지, 정치보위국이나 그 산하 기구에 의한 학살인지, (지역) 좌익에 의한 학살인지, 빨치산에 의한 학살인지를 참 구별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지금까지 자료상으로는 거의 구별이 안 된다.

프레시안 : 마을 단위에서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중석 : (예컨대)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을 습격해서 죽이고, 그것에 대한 보복으로 (습격당한) 그 마을 쪽 사람들이 자기들을 학살한 마을에 가서 학살하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마을 내에서 두 패로 갈라져 학살한 경우도 있었다.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있었다.

이건 대개 역사와 관련이 된다. 그 지역 사람들 가운데 리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 때 어떤 활동을 했느냐, 해방 직후 어떤 단체에서 활동했느냐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전쟁 이전, 가까운 시기의 역사에서 마을의 좌익 혹은 우익 지도자가 급진적이라고 할까, 그런 경우에 학살이 일어나더라. 마을과 마을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싸운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이 시기에 학살이 워낙 많이 일어나는데 대개는 사건 이름에 따라 부른다. 그러면서 유형별로 구분할 수 있는 건 구분하는 식이다. 제주 4.3 학살, 여순사건 학살, 보도연맹원 학살, 형무소 재소자 학살, 노근리 학살, (국군) 11사단에 의한 민간인 학살, 공중 폭격에 의한 학살, 빨치산이나 좌익에 의한 학살 같은 식으로 큰 사건들을 호칭하는 속에서 유형별로 다시 정리하는 방식이 필요해 보인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학살이 난무하던 시대…죽이는 방식도 끔찍했다

프레시안 : 조사 보고서 등을 살펴보면, 떠올리기도 무서운 일이 많았다. 예컨대 11사단은 남원의 한 마을에서 주민들을 줄 세운 후 쏘아 죽이고, 여성들을 따로 끌어내 대검으로 목, 유방, 복부, 심지어 음부를 난자해 죽인 것으로 나온다. 이런 식으로 한나절도 안 돼 100명 가까운 민간인이 죽었다. 더 끔찍한 건 이런 일이 어느 한 지역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선 주민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기관총을 난사한 후 수류탄으로 확인 사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참 무서운 일이 많이 일어났다.

서중석 : 유형별 학살 중 대살(代殺)이란 게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맞선 레지스탕스(의 활약이)나 일본군의 잔혹한 행위를 다룬 영화나 소설 속에 자주 나오는 거다. 레지스탕스 활동이 있었던 지역에서 그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잡히지 않으면 그 사람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을 세워놓고 쏴 죽여 버리는 거다.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에게조차 그런 경우도 있었다. 그걸 통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약화시키려는 건데, 나치가 이런 일을 많이 했다. 일본군도 중국 땅에서 참 많이 저질렀다. 어느 학살이든 잔혹하지 않은 게 없지만, 우리 경우도 이 대살이 상당히 많았던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1사단이 거창 등에서 벌인 주민 집단 학살을 보면, 상당수가 대살 비슷한 성격을 보인다. 거창 지역에 들어가는 (11사단) 9연대 병력이 산청 지방의 여덟 마을에서 학살을 하는데, 정작 청년들은 사전에 귀띔을 받거나 '이거 위험하겠다' 하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대개 피신했다. 산청이건 거창이건 다른 지방에서건 11사단이 한 주민 학살에서는 (그랬다). 그러니까 거창 양민 학살 때 잡혀온 이들 중 대다수가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였다. (이 점 때문에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되기도 하는데, 어쨌건 이건 일종의 대살이다. 젊은 사람들을 죽이려고 한 거였는데, 젊은 사람들이 없어졌으니 그 대신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를) 붙잡아다 죽인 거였다. (국군 제11사단은 1950년 11월부터 1951년 2월까지 전북 남원·임실·순창·고창·정읍, 전남 함평, 경남 산청·거창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대살은 한국전쟁 이전에 벌어진 학살에서도 나타났다.

서중석 : 4.3 학살이나 여순사건 학살처럼 전쟁 전에 일어났던 규모가 큰 학살에서도 이런 대살이 많이 나타난다. 제주도의 경우 대살에 관한 수많은 증언이 있다. 부모가 자식한테 '너 여기 있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일단 산에 피신해 있어라. 설마하니 우리야 죽이겠느냐', 이러면서 산에 보낸다. 그런데 (토벌대가) 동네 사람을 모아놓고 집단으로 죽이는 거다. 산에 갔다고 추정되면 제일 먼저 죽는 게 산에 간 그 사람의 부모나 처자였다.

한 남자의 사연에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뭐냐 하면 한 남자가 산속으로 피신해 있었는데, 그 사이 군경이 동네를 습격해 그 부인을 죽였다. 그러자 이 남자는 '아내가 나 때문에 죽었다'고 하면서 평생 홀아비 생활을 했다. 참 가슴 아픈 일이다. 이런 일이 정말 비일비재했다. (그만큼) 대살이 많이 일어났다.

▲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 ⓒ<지슬> 공식 페이스북

법적 근거? 학살 자체가 불법이다

프레시안 :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고 민간인을 죽였다는 지적도 있다. 보도연맹 사례처럼, 정부 말을 믿고 가입했다가 학살된 경우도 있다.

서중석 : 보도연맹(保導聯盟)의 '보'는 보호한다, '도'는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보호해서 이끌어주겠다, 국가가 당신들을 보호해줄 테니 국가의 품 안으로 들어와라, 뜻 자체가 그렇다. 일제 때도 비슷한 게 있었다. (보도연맹은 1938년 일제가 이른바 '전향자'들을 모아 조직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본떠 만들어졌다. <편집자>) 그랬는데 그 사람들이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대규모로 집단 학살을 당한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 이런 지적을 받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학살 자체가 불법이(라는 것이)다. 합법적인 학살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나. 제노사이드는 다 불법이다. 정당한 절차 없이 그러니까 유죄, 무죄를 따지는 것도 없이 자의적 판단에 의해 죽이는 거다. (그 때문에 벌어진) 주민 집단 학살로 50명 이상 학살당한 마을도 제주도에는 많다.

보도연맹원은 방방곡곡에서 죽었다. 경찰서장이 정말 큰 결심을 한 두세 지역을 제외하면 다른 지역에서는 참 많이 죽었다. 그런데 (대부분) 죽인 명단을 알 수가 없다. 군경은 공무원이지 않나. 법적 절차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군경이 죽였으면 (최소한) 언제, 어디서 죽였다는 게 있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그런 기록이 남아 있는 게 몇 건 안 된다. 보도연맹원 학살이건 제주 4.3 학살이건 다른 지역의 주민 집단 학살이건 (다 그렇다). 죽인 사람들, 그러니까 군경 간부 자체가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자행했단 걸 인정했던 거다.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방식으로 죽인 거다. 주민 집단 학살은 거의 다 그런 식이다.

제주도 학살이나 여순사건 학살 같은 경우에 군법회의란 게 있었다. 그런데 이 군법회의도 과연 법적 절차를 제대로 밟았느냐.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에서 그렇지 않다고 결론을 냈다. 군법회의가 1948년 12월과 그다음 해에 걸쳐 있었는데, 판결문도 없고 법적 절차를 밟고 군법회의를 했다고 볼 근거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법을 벗어난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법회의에서 재판받은 사람들도 지금 다 희생자로 인정하고 있다.

(정리하면) 주민 집단 학살은 다 불법으로 이루어진 거다. 어느 하나 일종의 법적인 근거를 가지고 일어난 게 없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쏘아 죽이고 태워 죽이고 굶겨 죽이고

프레시안 : 학살 사례를 보면, 일본군이 중국에서 보인 모습과 비슷한 경우가 많다. 그건 국군이나 경찰 지휘부 상당수가 일본군 출신이거나 친일 경찰이었던 것과 관련이 없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어째서 이런 대규모의 주민 집단 학살이 해방 직후에 일어났느냐. 이건 학살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본군 경험이 있었다는 점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전에 어떤 군인과 함께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 군인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 "원용덕, 김창룡, 김종원, 이 세 사람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정확하고 명쾌하게 지적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셋은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며 악명을 떨쳤다. 헌병 총사령관, 군 특무부대장, 경찰 총수인 치안국장을 지낸 사람들로 정말 많은 악행을 저지른 걸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이 세 사람만 책임이 있는 거냐. 그렇지 않다. 4.3사건을 보더라도, 학살에 관련된 군 지휘관들이 (과거에) 일본군에 있었던 경우가 많다. 여순사건도 마찬가지고, 다른 (학살) 사례에서도 그런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일본군 중에서도 특히 만주군 출신들이 학살과 더 관련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주에 있던 여러 일본군 부대는 이른바 '토벌' 작전이라는 것을 펴면서 여러 잔혹 행위를 자행했다. 그런 경험이 (해방 후 한국에서 벌어진) 주민 집단 학살과 관련이 있다. 그런 예로 많이 드는 것이 11사단 작전 명령이다. '작전 지역 내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가옥은 전부 소각하라', '식량은 안전 지역으로 운반하여 확보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일본이 펼친 삼광(三光) 작전과 너무나 흡사하다. 삼광 작전은 삼진(三盡) 작전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쏘아 죽이고 다 태워 죽이고 다 굶겨 죽인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연구 논문에서 '이걸 봐라. 양자가 너무 비슷한 거 아니냐'란 지적을 하고 있는 거다. 도쿄 전범 재판이나 중국에서 있었던 전쟁 관련 여러 재판에서는 삼광 작전을 비인간적 전쟁 범죄로 규정하고 단죄했다.

프레시안 : 해방 후 친일 청산을 제대로 못한 것이 학살 문제를 더 키운 셈이다.

서중석 : 특히 경찰 같은 경우 일제 때부터 고문이 상습화된 것도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4.3도 그렇고 다른 경우에도 경찰이 (학살에) 많이 관여돼 있다. 인명 경시와 고문을 심하게 한다는 건 거의 동의어다. 그런 고문 상습범들이 해방 후 학살에 가담한 걸로 볼 수 있다.

아까 민간 우익 단체도 (학살과) 관련이 있다고 했는데, 해방 직후 좌우 싸움에서 테러가 관행이었다. 당시는 테러가 굉장히 심했다. 경찰의 지원과 협조를 받으면서 칼을 쓰고 총을 쏘고 하는 테러였는데, 특히 서청 테러가 악명 높았다. 이런 테러 관행이 결국 공권력의 테러화 현상을 가져온 것 아니겠는가.

이처럼 일제 때 전쟁 경험, 고문 경험 같은 것들이 해방 후 좌우 싸움에서 잦았던 테러 경험과 결합하면서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인명 경시 사상을 갖게 된 것이 결국 참혹한 사태를 초래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볼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열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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